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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칼럼
요나의 분노: 내가 분노할 때도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 (욘 4:1-11)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6 (10/6/21)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nXypiLoDKmk?t=2168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6 ✦
요나의 분노: 내가 분노할 때도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
(요나 4장 1~11절)
1.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요나
요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예언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대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지 않겠다고 반항을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반항하는 선지자인 요나는 성경에서 정말 보기 드문 인물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 하신 니느웨는 초강대국인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였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전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당시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압박하며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앗시리아가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앗시리아가 망하게 해달라는 것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제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니느웨가 망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전하라고 하시니,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요나는 순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이 가라고 명령하신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에 있는 다시스로 갑니다. 지금의 스페인에 있는 다시스는 당시 땅 끝이라고 할 만한 곳이었습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해 욥바 항구로 갔는데, 마침 다시스행 배가 막 떠나려고 하는 순간이었습니다(1:3). 사실 그 배는 자주 있는 배가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가보자고 갔는데 마침 다시스행 배가 떠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곧바고 그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때로 혼란을 줍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반대로 가고 있는데 형통하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나는 겁니다. 우리도 예배도 안 드리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안 하는데 돈이 더 잘 벌리고 일도 더 잘되고 직장에서 승진도 하고 사업도 더 잘되고 애들도 더 잘 풀리면, ‘아, 신앙생활을 해도 별 볼 일 없구나. 오히려 안 하는 게 낫구나.’ 하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유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전혀 반대로 나아가는데도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길이라면 막혀야 하는데, 오히려 길이 시원하게 뚫리니까 헷갈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이것입니다. 열려 있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길인 것이 아니고, 또 막혔다고 해서 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가더라도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길에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배에 오르기까지는 막힘이 없습니다. 순조로운 길입니다. 그러나 항해 중에 큰 풍랑을 만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1:4). 다시스행 배가 엄청난 풍랑을 만나 항해 전문가인 선장과 사공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때 사람들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를 알아보자고 하며 제비를 뽑았더니 요나가 뽑혔습니다(1:7).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욘 1:12)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로서 자신의 불순종 때문에 배 전체가 이 엄청난 폭풍을 만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 주변 사람들까지 고통스럽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 큽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그로 인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막중한 책임이 주어진 일입니다.
요나가 자기 때문에 이 큰 폭풍을 만났으니까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말했지만 처음에는 선원들이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안 되자 결국 그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1:14-15). 그때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는데(1:17), 물고기는 사흘 만에 요나를 육지에 토해 냈습니다(2:10).
왜 하나님은 요나를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요나가 아니면 니느웨에 그 말씀을 전할 사람이 없어서 그러셨겠습니까? 솔직히 요나 같이 말을 안 듣는 사람은 그냥 버리고 다른 사람을 쓰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요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어떤 나쁜 짓을 해도 자녀를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바른길로 이끌기 위해 애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어떡하든 우리를 고치시고 빚으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2. 역지사지로 생각하라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나온 요나는 마침내 니느웨로 갑니다. 그런데 그가 거기서 어떻게 합니까?
“요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읍이다. 요나는 그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욘 3:3-4, 새번역)
니느웨는 둘러보려면 사흘 동안이나 걸어야 할 만큼 큰 성읍인데, 요나는 겨우 하루만 다니면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것도 혹시 누가 듣고 진짜로 회개할까 봐 아주 작은 소리로 전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가 싫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외침을 알아듣고 온 백성이 회개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욘 3:5-6)
왕을 비롯하여 모든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3:10). 그러자 그 순간 요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1절)
요나는 크게 분노할 뿐 아니라, 심판 받아 마땅한 니느웨 백성을 벌하지 않으신 하나님께 따지고 듭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2절)
우리는 요나의 이러한 분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분노는 일상에서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무엇 때문에 요나의 분노가 일어난 것입니까?
1) 마음속에 증오심이 있으면 분노하게 된다
내면에 증오심이 있으면 쉽게 분노하게 됩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일본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내면에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있어서, 일본이 조금만 잘못해도 불같이 분노합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이 잘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픕니다. 스포츠에서도 일본과 붙으면 어떻게든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다 일본에게 이기면 대대적으로 뉴스에 나오고, 지면 다른 나라에 진 것보다 더 분노하며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요나는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핍박한 니느웨(앗시리아)가 심판을 받지 않게 되자 속이 상하다 못해 분노하게 된 겁니다.
우리도 자신의 마음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별것도 아닌데 분노한다면 내 안에 증오심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혹시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 게 아닌지, 누군가를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게 아닌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사실 요나에게는 자신의 분노를 합리화할 좋은 명분이 있습니다. 인정사정없이 잔인하게 침략한 앗시리아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이스라엘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동안 그들에게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데 그들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명분과 상관없이 그의 분노를 정당하다고 여기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명분을 가지고 자신의 분노를 합리화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하며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라고 말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증오심을 서슴없이 드러냈습니다. 그의 분노는 증오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2) 분노하면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3절)
성을 내던 요나는 하나님께 니느웨 백성을 살리시려면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니느웨를 살리든지 자기를 살리든지, 양자택일하시라는 겁니다.
이처럼 분노하는 사람의 특징은 걸핏하면 생각이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는다는 것입니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나아갑니다. 요즘 그런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모와 도 사이에는 수많은 선택사항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요나도 살리시고 니느웨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에 빠진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숨겨서 살리셨습니다. 그렇게 요나의 생명을 귀히 여기신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백성이라도 니느웨 사람들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시며 그들도 살리고 싶어 하십니다.
하지만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나에게 복을 주시려면 저 인간을 저주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극단적 선택으로 치우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분노 때문입니다. 과격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잘 보십시오. 그 마음속에 분노가 있습니다.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서 그런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극단적인 선택을 피해야 합니다. 모와 도 사이에는 무수한 선택지가 있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분노 때문에 결정하면 자신에게도 해가 되고 주변에도 해를 끼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4절)
화가 나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지금 네 안에 있는 분노를 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분노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분노로 인해 지금 요나가 자신을 어떤 상황으로 몰고 가는지 잘 보라는 겁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분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됩니다. 역지사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쉽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내 입장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하면 요나처럼 극단적인 분노를 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분노는 일종의 습관입니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은 언제든지 폭발할 준비를 마친 폭탄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분노가 습관이 되지 않으려면 역지사지를 훈련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삶의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를 가르치시기 위해 한 가지를 준비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박입니다. 요나가 지은 초막에 박넝쿨을 주셔서 햇빛을 가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6절)
요나는 박넝쿨 때문에 너무 기뻐합니다. 하지만 다음 날 박넝쿨에 벌레가 생겨서 시들어버리자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7-8절)
박넝쿨이 시드니까 요나는 다시 분노하면서 ‘나를 죽여 달라’고 떼를 씁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자살 충동에 자주 시달립니다. 분노의 출구를 찾지 못하면 남을 공격하던 화살을 돌려 자기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또 보십시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9절)
감히 하나님에게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씩씩거리며 분노하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10-11절)
하나님은 화를 내는 요나에게 ‘네가 박넝쿨 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 하나에도 살겠다 죽겠다 할 만큼 그것을 아끼면서, 내가 12만 명의 니느웨 사람들을 아끼는 것을 가지고 왜 화를 내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박넝쿨로 역지사지의 교훈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앓는 감기가 남이 앓는 암보다 더 아프고 중요합니다. 남이 앓고 있는 암보다는 나를 괴롭게 하는 감기에 더 마음을 쏟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서를 통해 우리에게 이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이기심, 증오심, 시기심이 자기중심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는 박넝쿨 하나가 12만 명의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처구니없는 계산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의 분노는 바로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산법으로 살아가는 한 분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너의 분노가 옳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요나의 분노를 다루기 위해 박넝쿨로 교훈하셨듯이, 오늘 우리의 분노를 다루기 위해 요나서를 지금까지 남겨주신 것입니다.
3. 십자가로 분노의 악순환을 끊으라
사도 바울도 우리의 분노를 잘 처리함으로써 이웃과 화목하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롬 12:14, 17-21, 새번역)
분명히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분노해도 원수를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다만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원수라도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거든 물을 마시게 해주라는 겁니다. 그러면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셈이 된다고 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화덕의 불을 꺼뜨리면 큰일이었습니다. 아침에 빵을 구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이 꺼지면 빨리 이웃에게 달려가 불을 빌려야 했는데, 그래서 숯불을 가져다 옮겼고 그것을 머리에 이고 갔습니다. 그렇게 하면 불을 꺼뜨린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빠진 원수를 도우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되고, 그 사람은 부끄럼을 당하며, 불을 빌려준 나는 칭찬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으로 대해주면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세상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분노에 사로잡혀 있고, 분노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 십자가를 놓아야 합니다. 도무지 끊을 수 없을 것 같은 악순환의 고리는 십자가로만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원수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 특히 미운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당하는 것이고,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그럴 때 증오심과 이기심과 들끓는 분노를 끊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를 붙잡아서 니느웨로 보내셨습니다. 걸핏하면 투덜대며 분노하는 요나를 사용하셔서 니느웨를 구원하셨습니다. 사실은 우리의 신앙이 대단해서 분노의 악순환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생명을 살리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결단과 의지 때문에 분노의 악순환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일에 요나를 사용하셨고, 또한 우리도 사용하셔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붙들린 요나와도 같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속히 순종할 수 있기 바랍니다. 요나처럼 반항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순종하며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길을 걸어감으로 놀라운 복을 받고 누리며 또 나누어주는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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