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쓰다'와 '쓰이다'의 아름다움(미학)을 찾아서
내가 나를 가장 잘 쓰고, 가장 잘 쓰이는=쓰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가장 아름답게 쓰고, 가장 아름답게 쓰임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가?
가장 아름답게 쓰고 쓰인다는 것은 바로 하늘과 따앙, 사람 앞에서 거리낌없는, 탈 없는, 탓 없는, 그리하여 한 점 부끄럼 없는 씀, 쓰임일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씀, 쓰임은 다름 아닌 내가 가장 아름다운 몸으로 피어나는 것입니다. "아름답다는 깨끗하다, 맑다, 밝다, 환하다, 티 묻지 않다, 때 묻지 않다, 부끄럼 없다(불의 그을음 없다, 불이 꺼진 상태 없다)"입니다.
나를 가장 아름답게 쓰고, 내가 가장 아름답게 쓰이려면, 쓰고 쓰이는 주체인 '낙'가 가장 아름다워야 합니다. 상품으로 전락한 나는 피할 수 없이 거래되고 흥정되게 마련입니다. 나의 무게=값어치=가칯를 다른 사람이 반드시 값어치=가치 매김을 하게 됩니다.
상품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가치 평가를 받기 때문에 티=때가 묻게 마련입니다. '쓰다'와 '쓰이다'의 미학=아름다움은 바로 아무도 무엇으로도 가치=값어치 매김=평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나= 우주=한울로 살아가는 그 기뿐입니다. 내가 스스로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 도령, 그리스도, 부처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급자족'의 주체인 도령의 미학입니다. 부처, 그리스도,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미학이며,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사람)인 독생자(아들이나 딸 모두)의 미학입니다.
이내 몸=나를 쓰고 내가 쓰여짐에 있어서 상품으로 떨어지는 흥정 따위가 끼어들어 올 수 없는 독존=독생자의 몸으로 자기 자신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우주=한울로 아름답게 피어나게 해야 합니다. 열매 맺게 해야 합니다. '쓰다'와 '쓰이다'의 미학을 찾아서 나를 텅 빈 넉넉함으로 엮어갈 때만 나는 우주=한울로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참빛인 나'가 되는 것이 '빈(바다)'입니다. 넉넉함은 '비어있는 데가 없다. 빈자리가 없다. 빈곳이 없다. 빈 몸이 없다'입니다. '넉넉함'의 '넉'은 'ㄴ+ㅓ+ㄱ'입니다. ''ㄴ(니는)'은 '나'가 '어(어)'=얻다, 'ㄱ(기역)'=하늘이 내려주신 바 그대로 살림살이하다(살다+살리다)'를 뜻합니다.
'넉넉함'은 '나(내=ㄴ)'가 하늘이 내려주신 바 그대로 살다=살리다를 뜻합니다.
'텅 빈 넉넉함'은 하늘로, 따앙으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나로서, 하늘이 내려주신 바 그대로 살아가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제물(자연)살림살이를 뜻합니다.
텅 빈 넉넉함은 하늘모심입니다. 따앙 모심입니다. 사람다운 사람 모심입니다. '모심'은 '참과 목숨이 참목숨이 되어 참을 다 이루고, 그 참에 다다르다, 그 참을 이어나가고, 그 참이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드디어는 참이다=참되다'를 뜻합니다. 텅비움으로써 참으로 차고 넘침이야말로 텅 빈 넉넉함입니다. 텅 빈 넉넉함은 우리네 살아있음의 값이고 몫입니다. 살아있음의 값이고 몫이란 바로 내가 하늘이 되는 일입니다. 하늘이 되는 삶입니다. 살림살이입니다.
'한울이 된다'는 말은 하늘 나, 땅 나, 사람 나로 열리고 언제나 한울=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으로 쓰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이 된다'함은 텅 빈 하늘로 넉넉한 하늘로 살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땅이 된다'함은 텅 빈 따앙으로 넉넉한 따앙으로 살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바로 텅 빈 사람으로 넉넉한 사람이 되는것, 그러한 사람으로 쓰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 모심자리가 바로 이 몸입니다. 따앙 모심자리가 바로 이 몸입니다. 사람다운 사람모심 자리가 다름 아닌 이 몸입니다.
하늘은 나입니다. 나로 통 비게 하고 하늘로 넉넉하게 함이 바로 텅 빈 넉넉함입니다. 따앙은 나입니다. 나로 텅 비게 하고 따앙으로 넉넉하게 함이 다름 아닌 텅 빈 넉넉함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나입니다. 나로 텅 비게 하고 사람다운 사람으로 넉넉하게 함이 바로 텅 빈 넉넉함입니다.
텅 빈 넉넉함은 하늘의 뜻이고 따앙의 꼴이며 사람의 사랑입니다. 뜻(ㅇ),꼴(ㅁ),숨=사랑(△)이 사람이 될 때,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텅 빈 넉넉함은 한몸짓기살림살이로 되고 열매 맺게 됩니다. 하늘, 따앙, 사람으로 모든 몸들은 꽃이어야 하고 열매여야 함을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텅 빈 넉넉함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온자리=하늘이 주신 그 자리(ㄱ)에서 나의 삶을 한울 삶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온자리=하늘이 내려주신 그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바로 자기가 난 그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텅 빈 넉넉함으로 살아가겠다는 마음 다짐은 제 자리로 돌아가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겠다는 새 창조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고가 제자리이고, 도령이 제자리리고, 부처(빛의 나라)가 제자리이며, 마리아가 제자리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리라는 것은 원점을 가르쳐주는 상징의 말입니다.
"나는 하늘이다(人乃天)"는 하늘이야말로 나이고 이제부터 나는 하늘답게 살아가겠다는 자기선언=새로운 탄생의 선포입니다. '나는 미륵이다", "나는 그리스도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라는 모든 말글은 새롭게 태어난 나를 선포하는 말글입니다. 텅 빈 넉넉함으로 살아가는 바탕은 다음과 같습니다.
텅 빈 넉넉함으로 살아가는 바탕은 첫째, 하늘바탕으로서, 빛의 바탕으로 따스함, 밝음,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한울숨의 바탕으로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따앙바탕으로서 물의 바탕이며 흙의 바탕으로 살의 바탕, 피의 바탕, 뼈의 바탕입니다. 셋째, 사람바탕으로서 사랑의 바탕이며 살림의 바탕입니다. 따스한 품의 바탕이며, 어루만짐의 바탕이며 쓰다듬음과 속삭임의 바탕입니다. 따뜻한 혁명=사랑의 바탕입니다.
한울=하나님 짓는 일함으로 살아도 좋은 살림살이입니다. 참으로 산다함은, 참으로 일한다 함은 이제 여기에서 함께 숨 쉬거 일하며 더불어 살아가면서 밥 함께 짓고, 옷 함께 짓고, 집 함께 지으며 살아가는 일이며, 그것은 우주인 내가 하나님 짓는 일인 것입니다. 함께 사시는 사람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기뻐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 울부짖고, 함께 고른 삶=살림살이 지어 가면서, 오늘을 힘겹게 일하며 살아가는 그 사람이 곧 이제 여기에서 살아 있는 한울=하나님입니다. 그 일이 다름 아닌 한울=하나님 짓는 일이겠지요. 이제 여기에서 모두 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한울=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가는 삶입니다. 한울=하나님으로 돌아가 한울=하나님이 되는 삶, 그 살림살이야말로 한울짓기= 하나님짓기=한몸짓기살림살이입니다.
부처님 짓기는 부처님됨입니다. 부처님함입니다. 부처삶입니다.
도령님 짓기는 도령님됨입니다. 도령님함입니다. 도령삶입니다.
예수님 짓기는 예수님됨입니다. 예수님함입니다. 예수삶입니다.
그리스도 짓기는 그리스도됨입니다. 그리스도함입니다. 그리스도도삶입니다.
알라, 와칸탕카됨입니다. 알라함, 와칸탕카함입니다. 알라삶, 와칸탕카 삶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한울=하나님 되려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랄 것 하나도 없는 텅 빈 넉넉함으로 한몸짓기살림살이를 해 나가고 있는 것은 한울=하나님 짓는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아나감이 바로 한울=하나님 짓는 일인 텅 빈 넉넉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참 빛으로 나를 이루면 내가 참 빛이 되면 넉넉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넉'='ㄴ+ㅓ+ㄱ' : '나(너)'는 'ㄴ'(땅의 사람들이, 땅에서 낳은 것들이 'ㄱ'(하늘이 내려 주신 바의 것, 그대로의 것, 그냥의 것, 그처럼, 그토록, 그저, 그답게, 그되게, 그렇게 된 바의 것)을 얻어서(ㅓ)를 하늘로 차고, 채우다. 따앙으로 차고 채우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차고 채우다'의 뜻입니다.
하늘은 참 얼과 참 뜻이며 참 넋이고 참 목숨입니다. 몸은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따앙은 참의 꼴이고 틀입니다. 참 꼴이고 참 틀입니다. 꼴이 무너지면 하늘이 무너집니다. 틀이 헝클어지면 하늘은 헝클어지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참의 일이고 참의 함입니다. 참 일이고 참 함입니다. '삶'은 '살다+살리다, 알다+알리다, 일하다+일하게 하다'로서, 참 삶은 하늘을 살고 살리며, 하늘을 알고 알리며, 하늘 일을 하고 하게 하는 것입니다.
참삶은 나를 채우는 만큼 다른 사람을 채워 주어야 합니다. 하늘은 참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채움이기 때문입니다.
참삶은 나의 꼴을 지음입니다. 나의 틀을 짜나감입니다. 마찬가지로 너의 꼴을 짓고, 너의 틀을 짜나가야 합니다. 참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참삶은 내가 받는 사랑만큼 다른 사람도 사랑받게 해야 합니다. 참삶은 참사람이 되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참 살림의 뜻은 바로 나와 너가 우리로 똑같은 살림살이가 되어야 하는 삶을 뜻합니다.
'나만 잘 산다'는 있을 수 없습니다. '너만 잘 산다'도 있을 수 없습니다.'우리 한나'로, '우리 한너'로 똑같이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과 따앙, 사람다운 사람은 누구에게나 더/덜 없이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높낮이 없이 평화스럽기 때문입니다.
참살림의 길은 평등, 평화한 조화와 균형잡힌 삶을 뜻합니다.
참이 없는 삶은 허깨비입니다. 우상입니다.
삶이 없는 참은 뜻 없음입니다. 무의미입니다.
뜻이 없는 삶은 끊어짐입니다. 단절입니다.
꼴이 없는, 틀이 없는 삶은 허물어짐입니다.
숨이 없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붕괴입니다, 사망입니다.
참 살림은 하늘인 나, 너, 우리를 살리는 삶입니다. 참 살림은 땅인 나, 너, 우리를 살리는 삶입니다. 참 살림은 사람다운 사람인 나, 너 , 우리를 살리는 삶입니다. 참 살림은 구원입니다. 참 살림은 희망입니다. 참으로 희망 넘치는 삶입니다.
다사함 김명식의 따뜻한 혁명, 자연수행의 길 <텅 빈 넉넉함으로 > , 제4부 '텅 빈 넉넉함으로 : 몸의 아름다움' 중에서)
첫댓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름다움을 찾기 어렵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