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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익공관주 익공관주 순천진인은 왼손을 선우철에게 내뻗쳐 그로 하여금 뒤로 물러나게 한 다음 재빨리 호리호리한 몸을 앞으로 내달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불진으로 휘진한담(揮塵閑談)의 일 초를 전개하여 비류신의 왼손 맥문을 겨누어 쓸어갔다. 불진은 그의 손이 움직임에 따라 사나운 바람을 일으켰다. 불진 끝에 달린 털은 마치 예리한 철사처럼 뻣뻣하였다. 비류신의 팔이 만약 그에 휘감긴다면 즉시 잘릴 만한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비류신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으로 빙긋이 웃으며 몸을 약간 옆으로 틀어 오른손으로 장풍을 쳐냈다. 순천진인의 앞가슴을 향한 일장이었다. 순천진인은 이름도 드높은 무림칠절 중 한 사람이었다. 당금의 수많은 무림 고수들 중에서도 첫째다, 둘 째다를 논하는 절정의 고수였다. ‘내 한 번만 불진을 휘두르면 곧 저 이름도 없는 녀석을 상해할 수 있으리라.그렇게 되면 최소한 아무 것도 모르고 날뛰던 그가 쩔쩔매며 낭패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 상대를 해본 결과가 의외의 방향으로 나타나자 그는 적잖이 놀랐다. 비류신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순천진인의 강맹한 불진의 일초를 피함과 동시에 일장을 반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순천진인의 얼굴에 노기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사태가 돌아가지 않자 놀라움을 얼굴에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비류신의 일장을 피하면서 곧 질풍 같은 동작으로 비류신의 왼쪽으로 몸을 날려갔다. 곧이어 왼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한 줄기 강력한 잠력이 비류신에게 밀려갔다. 그 일장은 얼른 보기에 가뿐하여 대단치 않은 듯하였으나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순천진인은 일대의 고수임을 자타가 공인하는지라 이름도 없는 비류신과 맞붙어 싸우기보다도 진력을 다한 일장으로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비류신은 그의 속셈을 모르고 다만 순천진인의 손놀림이 느리고 밀려오는 장력의 기세가 가벼운 것 같아 속으로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익공관주와 나의 스승은 무림칠절 속에 이름이 나열되는 처지다. 그런데 익공관주의 공력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이러한 생각을 가졌던 비류신은 익공관주가 밀어내는 장력이 대단한 것 같지 않자 빙긋이 웃으며 즉시 진기를 모아 쌍장을 밀어 냈다. 그런데 여유롭게 쌍장을 밀어내던 비류신은 쌍방의 장력이 접하는 찰나 바싹 긴장하였다. 익공관주가 밀어낸 장력의 기세는 비록 느리기는 했으나 경도(勁道)가 위맹하다는 것을 느꼈던 탓이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비류신의 판단은 옳았다. 그가 만약 끝까지 버티었다면 익공관주의 살수(殺手)에 큰 내상을 입었을 것이 분명하였다. 익공관주 순천진인의 일격에는 남몰래 강기가 깃든 무서운 살수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때 선우철이 느닷없이 몸을 날려 익공관주 순천진인 앞에 가서 손길을 모으고 절을 하며 말했다. “순천 노 선배님께서는 무공이 절세십니다. 어찌하여 후배들과 같은 소견으로 상대하십니까? 그러시다 만약 실수하신다면 노 선배의 명성은 손상 입을 것이 뻔합니다.” 그의 말은 조리가 닿는 듯 들렸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순천진인의 마음을 자극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선우철은 사람의 골상을 볼 줄 알았고 사태판단에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순천진인의 마음을 자극하는 데는 사악하고 깊은 음모가 있는 것이다. 그는 순천진인이 그의 장력으로 비류신을 요절내려는 의도인 것을 간파하고 속으로 계략을 꾸며낸 것이다. ‘저 늙은 괴물은 무공이 심후하기가 현세에서 으뜸가는 처지다. 때문에 그와 대적할 사람은 극히 드물다. 만약 그가 지금 손을 쓴다면 비류신이 죽음을 면하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가 원하던 바를 얻으면… …’ 익공관주 순천진인의 성격이 변덕이 심하고 충동적인 점을 이용하여 비류신을 죽여 없애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익공관주 순천진인의 변덕이 심한 성격은 전혀 종잡을 수 없어 그도 역시 계략으로써 없애자는 속셈이었다. 그는 본래 비류신을 살해할 생각이 있었고 죽일 기회도 있었으나 청색혈마가 두려워 거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음모를 기하기에 이르렀다. ‘저 늙은 괴물이 비류신을 일장에 죽여 없애면 첫째 목적이 달성되고, 다음엔 청색혈마에게 그 사실을 알려 그녀로 하여금 저 늙은 괴물을 없애게 하면 둘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만 된다면 천하는 자연히 내 수중에 들어올 것이다.’ 선우철은 웅지를 품고 있으면서 일면으로 그에 못지않은 음흉하고 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비류신을 죽이고 싶은 생각이 날이 갈수록 강해졌으나 청색혈마와 원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다 마침내 순천진인과 비류신이 싸우는 기회를 포착하여 사악한 계획을 펼치려고 하였다. 때문에 그는 행여 순천진인이 젊은 인재를 아낀다는 뜻으로 비류신에 대한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워 미리 충동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말도 사실 일거양득을 노리는 내용이었다. 비류신을 두둔하고 선배의 명성을 아끼는 척하면서 사태의 악화를 노리는 선우철의 간교한 꾀였다. 그런데 익공관주 순천진인은 그의 말을 듣고 정기가 넘치는 눈동자에 소름이 끼치는 살기를 나타내며 크게 웃었다. “허허허허, 선우철! 네가 그래도 쓸데없이 내 일에 참견하려 든다면 빈도는 먼저 너를 죽이고 나서 다른 사람과 싸움을 하겠다.” 그의 흉맹한 말을 듣고도 선우철은 웃으며 말했다. “노 선배님, 그만한 일에 어찌 그렇게 노하십니까?” “얼른 비켜랏!” 익공관주 순천진인은 호통을 치면서 오른손의 불진으로 선우철을 쓸어 쳐갔다. ‘옳다! 됐다! 네가 그처럼 화를 내야 내 계략이 더욱 정확히 들어맞아 가는 것이다.’ 그는 몸을 피해서 멀리 물러가며 비류신에게 큰 소리로 말하였다. “비형! 만약 저 노 선배를 이길 자신이 없다고 생각될 때 기회를 보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을 치는 것이 상책이오!” 비류신은 선우철의 깊은 마음속을 알 리 없는 터라 그저 그의 말이 고맙게 여겨져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선우형, 보살펴주는 마음에 깊이 감사하오. 이 비류신은 몇 초쯤은 능히 당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염려하지 마오!” 그의 말에 선우철은 뜻있게 고개를 끄덕였고, 익공관주 순천진인은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으허허허… 이 녀석아! 하는 수작이 우스꽝스럽구나. 어디 몇 초나 견디어 내는지 보자!” 순천진인의 말끝에 선우철이 또 끼어들었다. “노 선배! 선배께서는 이미 두 초를 연달아 뽑으셨소이다!” 선우철의 말을 듣는 순간 순천진인의 눈은 다시 사납게 빛났다. 이를 악물었다.선우철이 노린 바 그대로 적중하고 있었다. “오냐! 선우철, 네가 빈도를 위해 증인이 되어다오. 다섯 초 안에 저 녀석을 죽이겠다.” 선우철은 그 말에 내심 몹시 기뻐하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고 말했다. “만약 노 선배께서 다섯 초 안에 비류신을 죽이지 못한다면 어떡하시겠소?” 익공관주 순천진인이 빙긋이 웃음을 띠며 자신이 있는 투로 말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빈도는 익공관에 돌아가 벽을 향하고 오 년간 수도하며 일체 강호 무림의 시비를 묻지 않겠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왼손을 들어 비류신에게 일장을 내뻗었다. 그 일장은 전력을 다한 것이었다. 장세가 손에서 뻗쳐 나오자 사나운 바람이 밀려갔다. 마치 큰 물결이 파도쳐 가는 듯하였다. 이때 비류신은 속으로 몹시 분노하였다. 익공관주 순천진인이 마치 틀림없이 자기를 격파시킬 수 있다는 듯 떠드는 바람에 성을 낸 것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지기 싫어하는 성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순천진인의 다섯 초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무림에서 행세할 것이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류신은 재빨리 오른손을 휘둘러 순천진인의 일장을 마주쳐 갔다. “받아랏!” 고함과 함께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가를 듯한 순천진인의 일장을 맞받아갔다. 어디까지나 순천진인의 다섯 초를 받아 넘길 일념으로 온갖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자 순천진인은 물론 놀랐으나 그보다도 선우철이 더 놀랐다. 그는 비류신이 순천진인의 일장을 받아낼 줄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비류신의 공력이 어찌하여 갑자기 정진하였을까? 만약 저런 식으로 시일이 지난다면 그 성취는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정진할 것이다. 어서 순전천인에게 저놈을 제거하도록 해야 할 텐데… 그래야 후환이 없을 것이다.’ 선우철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 빙긋이 웃음을 보이고 비류신을 향해 소리쳤다. “비형, 정말 웅혼한 장력이오. 나머지 네 초도 거침없이 받아낼 수 있을 것으로 믿소.” 익공관주 순천진인은 자신의 일 =장을 받아 내는 비류신을 보고 움찔 놀라 잠시 눈을 크게 뜬 채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선우철의 말을 듣자 더욱 눈을 부릅뜨고 비류신을 공격하였다. 왼손을 들어 진력을 충분히 운행하고 가슴 앞에서 수평으로 밀어 냈다.비류신은 순천진인의 두 번째 장을 피하지 않고 맞이하였다. 온 내장이 뒤집히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지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이 억지로 맞았다. 그는 진기를 운행하여 내장의 진동을 억제하며 상대방의 공격을 기다리는 자세를 취했다. 익공관주 순천진인의 장세가 밀려오는 것을 보자 즉시 쌍장을 들어 내쳤다. 이 일 장은 얼른 보기에 평범한 것 같았으나 숨은 경력이 극히 강한 것이었다. 첫 번째 장보다 훨씬 위력이 강했다. 다음 순간 쌍방의 장력이 부딪쳤다. 그러자 비류신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그러나 몸만 물러났을 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익공관주 순천진인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는 이번만은 절대로 견뎌내지 못하리라 생각하여 쳐낸 일장을 여전히 받아넘기는 비류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의 칠 성 내공 진력을 맞고도 겨우 두 걸음밖에 물러나지 않다니… …’ 이때 선우철의 얼굴빛이 변하며 비류신을 향해 소리쳤다. “비형, 아직 세 초 남았소.” 그의 말뜻은 비류신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직도 세 초 남아 있으니 그다지 걱정될 것은 없다는 뜻이었다. 익공관주 순천진인은 갑자기 눈썹을 치켜세우고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세 번째 공격을 가했다. “으음! 나의 일 장을 받아라!” 그는 구성의 진력을 끌어 모아 왼손을 내뻗쳤다. 그 위세는 굉장하였다. 장세가 손에서 뻗쳐 나가자 장력은 파도가 치듯 했다. 휙! 휙! 하는 소리를 내며 땅의 모래는 흩날리고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그러나 비류신은 상대방의 장력에 위압당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피하지 않고 쌍장을 수평으로 밀어냈다. 다음 순간 천둥을 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여기저기서 선풍이 일었다. 굉음의 울림이 커서 땅도 흔들리는 듯했다. 이렇게 회오리바람 속에 먼지가 일고 있을 때 익공관주 순천진인은 돌연 한 줄기 거대한 장력이 밀어닥치는 것을 느꼈다. 쌍방의 장력이 맞부딪쳐서 튕겨오는 장력이었다. 그는 뜻밖에 반격을 받자 양 어깨를 흔들다가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두 걸음을 물러서서야 겨우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절정의 무림 고수인 순천진인도 비류신의 반격에 몸을 진퇴당하고 만 것이다. 한편 비류신은 상대방이 내뻗치는 강맹한 일장이 위압을 주던 순간 보이지 않는 강한 진력에 몸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그의 몸은 칠팔 자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온전하게 몸을 가누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으며 눈을 크게 뜨고 순천진인을 노려보았다. 선우철의 안색도 비류신에 못지않게 창백해졌다. 이제 자신의 계략 보다 비류신의 강인한 공력에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밤 내가 눈을 멀뚱히 뜨고도 귀신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 비류신의 공력이 순천진인과 백중할 수 있을까?’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순천진인과 비류신을 번갈아 보았다. 그런데 이때 비류신은 선우철이 생각하는 것과 좀 달랐다. 그는 온통 내장이 뒤집히는 듯했고, 전신의 피가 용솟음치는 듯했다. 선혈이 이미 목까지 올라왔으나 완강한 그의 성품이 억지로 삼키게 하여 입 밖으로 토해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였고 가슴은 마치 예리한 칼로 에이는 듯 아팠다. 그렇지만 비류신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때 순천진인이 일장만 더 휘두른다면 당장 목숨을 잃을 위험한 지경에 있었다. 이때 선우철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형, 나머지 두 초요.두 초만 받아내면 저 노 선배는 익공관에 돌아가 오 년 동안 벽을 향해서 수도하게 되는 거요!” 그는 비류신이 제아무리 무공정진이 있었다 해도 나머지 두 초를 받는 동안 순천진인에게 격파되리라 바라며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일은 그의 뜻대로 되어가지 않았다. 익공관주 순천진인의 마음이 변하고 있었다. 그 는 비록 무림의 절세고수로서 이름 없는 젊은이에게 체면을 손상하기는 하였으나 비류신의 공력이 심후한 데 크게 탄복하였다. ‘저런 인재를 굳이 감정에만 치우쳐서 상해할 필요 없다.’ 이렇게 생각하며 순천진인은 제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선우철은 그런 눈치를 채자 다소 놀랐으나 오히려 겉으로 웃음을 띠고 순천진인에게 말을 건넸다. “노 선배님! 선배께서 십팔 년이나 강호를 돌아다니셨지만 세상일이란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장강의 물결은 뒤에서 오는 물결이 밀어냅니다. 하하하… 노 선배께서는 왕년에 진편독자 탁성군의 일장을 받고 패하셨지요. 십팔 년 후 오늘에 와서 탁성군의 제자에게 또 패할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하하… 그런 형편으로 어찌 무림칠절의 우두머리로서 의젓하게 행세하려 하시오?” 선우철의 말에 익공관주 순천진인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뭐라고? 저 녀석이 진편독자 탁성군의 후예라고?” “바로 그렇습니다. 순천 노 선배로서는 생각 밖의 일이었을 겁니다. 진편독자 탁성군은 무림에서 고절한 고수를 길러낸 것입니다.” 선우철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는 말에 익공관주 순천진인의 눈에 잔인하고 악독한 살기가 돌았다. 그리고 비류신을 향해 사납게 호통을 쳤다. “이 어린 녀석아! 나의 나머지 두 초를 받아라!” 그는 호통소리와 함께 번개처럼 몸을 날리고 왼손을 내쳐갔다. 한 줄기 비할 데 없이 싸늘하고 뼈를 에이는 듯한 한풍이 밀려갔다. 그러면서 오른손으로 괴이한 소리를 내며 불진으로 쓸어 쳐갔다. 그가 발휘한 두 살수는 아무런 상처 없는 상대라 할지라도 온전하게 피하기 어려운 초식들이었다. 더구나 비류신은 현재 경력이 거의 소모된 형편이어서 순천진인의 두 초를 받아내기란 죽기보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비류신은 눈을 부릅뜨고 순천진인을 바라보기만 할 뿐 손을 쓸 수 없었다. 눈을 뜬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끼치게 하는 비참하고도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를 따라 여러 사람의 눈이 그쪽으로 채 움직이기도 전에 호리호리한 인영이 비류신의 곁에 이르렀다. 그리고 손을 들어 한 가닥 음산하고 싸늘한 경풍을 순천진인에게 내쳤다. 눈 깜작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천진인은 돌연 한 줄기 경력이 밀려옴을 느끼고 내심 크게 놀랐다. 즉시 쳐낸 자기의 경력에 십이 성의 힘을 넣어 내밀었다. 펑! 펑! 펑! 하고 잇달아 폭음이 울렸다. 쌍방의 장풍이 허공에서 맞부딪쳐서 일어난 소리였다. “으음!” 순천진인은 신음소리를 내며 일장 밖으로 밀려나가 떨어졌다. 강렬하게 튕겨오는 장력에 밀린 것이다. 그러나 공력이 심후한 순천진인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지만 크게 놀랐다. 당금 무림에서 자기를 능히 이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선우휘(鮮于煇), 소대호, 황천선구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그들 세 사람 중 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번쩍이는 안광으로 상대를 쏘아보았다. 아니다. 그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아니었다. 비류신 곁에 있는 사람은 몸매가 날씬하고 매끈한 청의나삼(羅杉)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나삼에는 시뻘건 무늬가 있는데 흡사 얼룩진 핏자국으로 보였다.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에는 청색 비단 수건이 덮여 있었다. 다만 한 쌍의 아름답고 날카로운 눈만 반짝이고 있었다. 삼단 같은 검은 머리가 동그스름한 그녀의 어깨를 덮고 있었다. 선우철은 청의녀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였다. ‘저 여인은 고분(古墳)의 괴녀가 아닌가? 바로 청색혈마인가?’ 순천진인은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었다. 설사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하지만 옷차림으로 보아 누구인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청의 여인의 두 줄기 쏘는 듯한 눈길에는 날카로운 빛이 어려 있었다. 이때 비류신은 갑자기 신음을 내며 몸을 바르르 떨더니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다음 순간 그는 썩은 고목이 쓰러지듯 소리를 내며 땅에 풀썩 넘어지더니 울컥울컥 선혈을 토해 냈다. 청색혈마가 급히 그의 곁으로 가자 비류신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눈을 부릅뜨고 소리 질렀다. “내 곁에 오지 마오!” 비류신은 가볍게 일장을 내밀었다. 청색혈마는 비스듬하게 몸을 옆으로 틀어 비류신의 장력을 피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당신을 상하게 하지 않을 테니.” 비류신은 가까스로 일장을 밀어내고 나서 가슴이 마치 불에 덴 것처럼 아픔을 느꼈다. 얼굴 근육이 일그러졌고 입가에 두 줄기 핏자국이 흘러서 보기에 처참했다. 청색혈마는 이런 비참한 상황을 보자 소리 없이 눈물지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없이 손을 들어 비류신의 등심에 일장을 가볍게 쳤다. 비류신은 놀란 눈을 떴다가 눈알을 한바탕 굴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으로 또 한 모금의 선혈을 내뱉었다. 청색혈마는 왼손으로 비류신의 가슴팍 기해혈(氣海穴)을 짚었다. 비류신은 웩 소리를 내며 한 모금 피를 또 토했다. 그러자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비류신의 표정이 서서히 제대로 잡혀갔다. 청색혈마가 부드러운 음성이지만 원망하는 투로 비류신에게 말을 건넸다. “어째서 그토록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덤비오? 어째서 그다지 오만하고 질기게 버티는 거요? 어서 운공 조식을 해 보오.” 그녀의 말투는 어디까지나 자애롭고 애호하는 정이 담겨 있었다. 선우철은 이런 광경을 보자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도대체 청색혈마와 비류신의 관계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청색혈마가 비류신에게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청색혈마는 비류신을 위해 복수하려 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면 나를 향해 손을 쓸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순천진인과 적대하는 태도를 취해 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녀의 독수를 피할 길이 생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색혈마의 무공이 순천진인을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만큼 내가 그녀에게 가담하면 순천진인을 격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 아닌가? 오늘밤 이 기회를 이용해서 그를 제거할 수 있다면 어찌됐든 단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셈이 아니냐.’ 그의 천성적인 간악한 성미는 재차 이런 음흉한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생각을 마치고 순천진인에게 다가가며 나직하게 말했다. “노 선배, 오늘밤 조심하시오!” 그는 말을 하면서 재빨리 순천진인의 곁으로 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몰래 공력을 모아 손쓸 기회를 엿보았다. 입언저리에 가벼운 미소까지 띠고 있어 그의 표정으로 보아서는 아무도 그의 속셈을 알 수 없었다. 한편 익공관주 순천진인은 청색혈마의 일장에 격퇴당한 후 경계를 단단히 하며 생각하고 있었다. ‘저 여자의 무공은 분명히 심후하다. 한데 그녀의 내력을 알 수 없지 않은가? 나로서는 당장 저 여자에게 이기기란 어려운 노릇일 게다. 또 저 선우철이란 녀석은 강호에서 눈치 빠르고 마음이 잔인, 악독하다는 소문이 난 녀석이다. 만약 그가 나하고 굳이 적대하려 든다면 오늘밤은 안전을 기하기 힘들게 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면서 크게 웃고 말하였다. “하하하하! 선우철, 저 여인이 누군가? 강호에서 아무도 이름을 들먹이지 않던데… …” 선우철은 순천진인이 몸을 뒤로 물리는 바람에 속으로 놀랐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역시 그도 웃으며 대답하였다. “저 여인은 새로 강호에 나오신 천하일류 고수 청색혈마이시오.” 그의 말에 순천진인이 크게 놀라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바로 현기현청비급을 얻은 괴여인이라고?” 그가 몹시 놀라는 이유는 이레 전에 현기현청비급이 고분에서 청의녀에 의해 빼내어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청색혈마. 듣기만 하여도 마음을 조이고 충격을 주는 이름이었다. 그녀의 높은 무공과 악독한 수단에 대해 사람마다 모두 두려움을 품고 있는 이름이었다. 순천진인도 그녀의 이름을 이미 들은 바 있었다.그러던 중 뜻밖에 지금 대치하는 입장에 서게 되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얼른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고 하였다. 선우철은 순천진인의 거동을 보자 급히 포권하며 말했다. “아아니 어째서 그러시오? 선배께서는 무림을 크게 흔들어 놓은 청색혈마란 이름만 듣고도 두려운 생각이 드셨소? 그래서 삼십육계를 놓으려는 것이오? 하하하하… 이 일이 훗날 강호에 전해지면 무림칠절의 위용이 말이 아닐 것이며,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한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의 말에 순천진인은 당황하였다. 선우철이 정통을 찌르며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순천진인은 돌리려던 걸음을 멈추고 금세 크게 노하였다. 그리고 음흉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우철, 네 간담이 정말 크구나. 살기 귀찮아진 모양이로군. 생각이 있거든 빈도와 몇 초 겨루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선우철은 그 말을 들으면서 힐끗 청색혈마를 바라보았다. 청색혈마는 조용히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선우철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굴렸다. ‘저 여자는 고분 속에서 내가 여러 번 비류신을 해치려고 했던 비밀을 알고 있을 게다. 그러니 내가 순천진인과 열전을 벌이더라도 저 여자가 손을 쓰지 않으면 나는 매우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틀림없었다. 청색혈마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이유는 바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선우철은 제 나름대로 추측을 하고 나서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좋은 말씀이오만 후배가 어찌 감히 무림에 이름을 떨친 선배와 맞설 수 있겠소?” 선우철의 말을 듣자 익공관주 순천진인은 마음속으로 다행이라 여기며 응답하였다. 이때 청색혈마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순천 노 도사! 후배를 업신여기고 도망을 쳐서 만사를 끝장내려는 것이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우철이 뒤를 이었다. “순천 노 선배, 아이들은 때려도 어른은 감히 때리지 못한다는 신조란 말씀이오? 하하하하, 무림칠절이란 사람이 그렇게 허약하다면 정말 무림칠절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아니겠소이까?” 연달아 두 사람이 하는 말이 몹시 비위에 거슬렸고 특히 선우철의 비웃는 투의 말을 들으니 순천진인은 약이 올랐다. 그는 청색혈마를 두려워해서 도망치려던 것이 아니었다. 가급적이면 불리한 듯한 이 자리를 일단 벗어나려다가 여러 차례 선우철에게 그런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그는 음산하게 고함치며 왼손으로 재빠르게 선우철의 어깨를 낚아채려고 했다. 그 동작은 마치 번개처럼 빨랐다. 그러나 선우철 역시 호락호락 당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음침한 성격을 가진 위인이어서 일신에 절학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남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결코 무공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 선우철은 어깨를 한 번 으쓱 흔들고 오른손을 밀어 한 줄기 장풍을 순천진인의 가슴을 향해 쳐갔다. 그와 동시에 선우철은 몸을 틀어 순천진인의 일격을 피했다. 그의 빠른 몸놀림은 무학의 어느 정상급 고수에 못지않았다. 순천진인은 선우철의 몸놀림을 보자 섬뜩 놀라 크게 외쳤다. “나이도 젊은 녀석이 네 애비의 몇 수 절초를 익히고도 감추고 있었구나!” 순천진인은 말소리와 함께 몰래 왼손에 진력을 운행하여 선우철의 장세를 맞아 갔다. 그러나 선우철은 그것을 간파하였다. 순천진인이 몰래 살수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오른손을 쳐내면서 몸을 바람개비 돌리듯 해서 육칠 척 밖으로 물러났다. 순천진인은 선우철이 다시 몸을 피해서 자신의 공력을 헛되게 하는 것을 보자 이를 악물며 말했다. “선우철! 빈도는 다시 너에게 삼사 초의 절초를 가르쳐 주겠다.” 그는 오른손의 불진을 갑자기 흔들어댔다. 그러자 불진의 흰 털이 마치 사자의 목에 붙은 갈기처럼 빳빳하게 곤두섰다. 불진의 털마다 강침(綱針)처럼 빳빳해지며 수천 가닥 강풍이 일어 선우철을 향해 쏘아 갔다. 선우철은 그 기세를 보자 안색이 일변하였다. 그리고 급히 진기를 운행하며 몸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허리를 꺾고 다리를 말며 옆으로 몸을 뉘여 신속하게 한길 넘어 뛰었다. 그의 이렇게 몸을 피하는 신법은 무림에서도 드물게 보는 것이었다. 정묘하고 기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류신은 눈을 뜨고 이런 광경을 보다가 스스로도 모르게 선우철을 칭찬했다. “선우형, 아주 좋은 신법이었소.” 그의 말소리를 듣고 청색혈마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소 놀랐다. 비류신이 외모도 멀쩡할 뿐 아니라 숨도 고르게 쉬며 책상다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모습은 조금 전 장력에 중상을 입었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상세가 어떠시오? 아무렇지도 않소?” 청색혈마의 말에 비류신은 눈을 돌려 장중을 둘러보았다. 익공관주 순천진인은 불진으로 공격하던 것이 헛수고로 끝나자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선우철, 너는 정말 묘한 솜씨를 지니고 있구나. 빈도는 정말 선우휘에게 그런 기특한 기재가 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할 테지만 오늘만은… …”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우철이 노기 띤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순천 노 선배! 선배가 다시 그런 소리를 한다면 이 후배는 별 수 없이 죄를 범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오!” 그러자 그의 말을 싸늘한 여자의 음성이 받아 이었다. “순천 노 선배, 당신은 우선 나의 몇 초를 받으시오. 당신들 둘이서는 다른 기회에 싸울 수 있을 테니까… …” 청색혈마가 이렇게 말을 하면서 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순천진인 앞에 다가섰다. 익공관주 순천진인은 청색혈마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움찔하며 생각하였다. ‘오늘밤 정말 대단한 적수를 만났구나.’ 그는 반걸음 물러나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정말 현기현청비보를 얻은 청색혈마시오?” 청색혈마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순천진인을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잔소리는 집어치우시오!” 그녀는 말소리보다 빠르게 왼손을 휘둘러 쳐갔다. 한 가닥 음풍이 뻗쳐 나갔다. 이때 순천진인도 주저하지 않고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리며 오른손의 불진으로 청색혈마의 왼팔을 잡으려고 대들었다. 청색혈마가 쳐낸 일장은 빠르고도 기세가 있었고 변화하는 수법이어서 매우 기묘했다. 순천진인도 불진으로 쓸어나가며 청색혈마의 왼팔을 치려던 것을 찌르는 방식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청색혈마는 그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손가락을 칼끝처럼 세워 급히 순천진인의 견정혈을 찔러갔다. 순천진인도 섬뜩하여 몸을 젖히고 재빨리 뒤로 세 걸음 후퇴하였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림에 널리 알려진 고수로서 확실히 체면이 손상되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위맹한 아홉 초의 장력을 쳐냄으로써 열세를 만회하려고 한 것이다. 그의 아홉 초는 매 초마다 비할 데 없는 내력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순천진인의 아홉 초의 사나운 급공은 청색혈마의 두 손에 의하여 아주 간단하게 와해되어 한 가닥의 경력도 그녀의 몸에 격중되지 않았다. |
첫댓글 재미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