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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겁(狂風劫) 3권 ≪차 례≫ 제22장 몰려드는 악인(惡人)들 제23장 연속되는 위기(危機) 제24장 제 꾀에 넘어간 여우 제25장 정체를 드러내는 악인(惡人)들 제26장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제27장 물고 물리는 관계(關係) 제28장 드러난 단서(端緖) 제29장 과연 마인(魔人)은 누구? 제30장 세상을 우롱하는 자들 제31장 영생(永生)의 끝 제22장 몰려드는 악인(惡人)들 [1] 유청풍은 서쪽 봉우리를 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앗! 위험하다." 위강과 노방, 엄희채 등이 정체불명의 마인(魔人)으로부터 일방적 으로 몰리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다급히 신형을 날려갔다. 위강과 노방은 막 마인의 장력을 얻어맞고 옆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켈!" 마인은 빙글 돌아서며 이번에는 엄희채에게 일격을 가하려고 했다. "멈춰라!" 유청풍은 주머니에서 사금을 꺼내 입에 넣은 후 진기를 담아 힘차 게 뿜었다. 그러자 허공 가득 금광이 확산되며 마인을 향해 날아갔다 . "아악!" 엄희채는 이미 마인의 장력을 맞고 실이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유청풍은 신형을 날려 그녀를 받아 안았다. "켈......! 네놈이 빠져 나올 줄이야." 마인은 괴소를 터뜨리며 이번에는 그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콰우웅! 파공음이 울리는 순간 유청풍은 허공에서 자세를 틀며 맞받아쳤다. "우욱!" 장력이 부딪치는 순간 그는 우수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발했다. 한편 엄희채는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귀에 익은 비명소리를 들었 다. '아... 청풍!’ 그녀는 이내 의식을 잃고 말았다. 유청풍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지 면으로 추락했다. 그들이 떨어진 지점은 풀보다 작은 돌들이 많이 깔려 있는 비탈이 었다. 그 바람에 경사 아래쪽으로 떼굴떼굴 굴러 내려가고 말았다. 마인은 그들을 추격하려다 멈칫했다. '빛을 쪼이면 안되는데.......' 비록 아직 사위는 어두웠으나 잠시 후면 날이 밝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건너편 산등성이로 붉은 빛이 잔잔하게 번지고 있었다. 주춤하던 마인은 두 눈에 사악한 안광을 번뜩이더니 이내 신형을 날려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2] 유청풍은 전신에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정신을 차렸다. "으으... 온몸이 쑤시는군." 그는 욱신거리는 고통을 참으며 엄희채를 찾아보았다. 바로 옆에 그녀가 의식을 잃은 채 마치 풍증환자처럼 전신을 떨고 있었다. 그는 흠칫 놀라 재빨리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아연 긴장하고 말았다. "이런... 요혈이 두 곳이나 파괴되었구나. 더구나 골수 속에 깊이 침투한 마기가 계속 번지고 있어......." 엄희채는 어깻죽지와 맞닿은 곳에 있는 격관혈(膈關穴)과 허리에 있는 포황혈(胞 穴)에 치명상을 입어 신경이 마비된 상태였다. 비록 출혈은 멈추었으나 갈라진 근육 사이로 뼈가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그 뼈 속에 배인 마기가 계속 한기를 확산시키는 중이었다. 문득 그의 뇌리에 방시굉이 들려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섭령마인공에 당한 사람은 오한에 떨며 미친 듯이 헛소리를 지르 네. 이는 유형마인강의 마기가 뇌에 침투하여 이지를 상실했기 때문 이지. 치료약은 오직 복명환령단(復命還靈丹) 뿐일세.’ 복명환령단은 유황을 주재료로 하여 독혈 방시굉이 만든 영약이었 다. 유청풍은 엄희채의 허리춤과 품속을 더듬은 후 당황을 금치 못했 다. "큰일이다. 약낭을 분실했구나." 십 년 전 방시굉은 엄희채와 노방에게 그 약을 각각 두 알씩 주었 다. 하지만 엄희채는 마인과 대결하는 와중에 그만 약을 잊어버린 것 이었다. 이를 모르는 유청풍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사진 계곡에는 잔돌과 잡초만 있을 뿐 약낭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다고 위급한 상황에서 그녀를 방치한 채 약낭을 찾아 나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설령 운 좋게 노방을 만나더라도 그가 복명환령단을 지니고 있으리 라는 자신이 없었다. '할 수 없지. 일단.......' 유청풍은 우선 엄희채의 혈도를 짚은 후 그녀를 안고 몸을 움직였 다. '우선 안전한 곳으로 장소를 옮겨야겠다.’ 산기슭을 따라 오 리쯤 갔을 때였다. 관목이 우거진 사이로 폐허가 된 사당(祠堂) 한 채가 눈에 띄었다. 벽과 지붕이 허물어진 사당은 거미줄과 넝쿨로 온통 뒤덮였으며 문 짝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낡은 사당 안으로 날아들었다. 허물어진 벽에는 삼청(三淸)과 천존음진귀제(天尊陰眞鬼帝)의 그림 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아마 이 사당은 탄광촌 시절에 재(齊)나 초 (醮)를 지내던 곳이 분명했다. 사당의 정면에 먼지가 가득 쌓인 제대가 눈에 띄었다. 그는 야행복을 벗어 제대 위에 깔아놓은 다음 엄희채를 엎드린 자 세로 눕혀놓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끊어진 신경을 이어 놓은 후 대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 만일 치료가 지연될 경우 설령 고친다해도 그녀는 이지를 잃은 채 어두운 밤에만 활동하는 괴물로 변할지도 몰랐다. 그는 서둘러 그녀의 경장 상의를 벗겨냈다. 삽시간에 스물 세 살 무르익은 처녀의 상체가 아낌없이 드러났다. 하지만 지금 유청풍의 뇌리에는 별다른 감정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 그는 오직 복잡한 인체의 해부도와 혈맥만이 그림처럼 떠오를 뿐이 었다. 그는 그녀의 대추혈(大椎血)과 명문혈에 장심을 붙인 후 진기를 주 입하기 시작했다. 진기로써 그녀의 끊어진 신경을 연결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많 은 양의 진기가 일시에 주입됨으로써 이때 환자의 뇌는 큰 압박을 받 게 된다. 게다가 엄희채의 혈압이 매우 불규칙하여 스스로 진기를 받아들여 조절할 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시술자는 극히 조심스럽게 진기의 양을 조절해야만 했다. 유청풍은 의독만해에 있는 시술법 대로 치료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엄희채의 손과 발이 꼼지락거리며 안면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신경이 통한다는 증거였다. 더불어 목에서는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유청풍의 안색 은 밝아졌다. '옳지! 이제 각혈을 시키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군.’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안았다. 탁! 손바닥으로 등 한복판에 있는 지양혈(至陽穴)을 치자 그녀는 상체 를 부르르 떨며 입을 벌려 시커먼 피를 토해냈다. "우웩......!" 역겨운 냄새가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그녀는 무려 한 사발이 넘는 어혈(瘀血)을 토하고 나서야 각혈을 멈추었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어혈이야말로 진기소통을 방해하는 응혈(凝血)이었던 것이다. 유청풍은 다시 명문혈을 통해 진기를 계속 보내주었다. 아직 그녀의 혈압이 불규칙할 뿐만 아니라 기력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오한으로 인해 여전히 전신을 떨고 있었 다. 그러한 증세는 마기가 골수로 확산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 다. 이는 오직 복명환령단으로만 치료할 수 있는데 당장은 제조할 수 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진기를 보내주는 일방 다른 한 손으로 그녀에게 옷을 입혀 주 었다. 옷을 다 입힌 후 그녀를 반듯하게 눕혀놓는 순간 아연 긴장하 고 말았다. '살기! 하필 이 중요한 시기에.......’ 사당 밖에서 장검을 든 인영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지면에서 두 발이 허공에 한 푼쯤 떠있는 인영은 바로 고일두였다. 지금 그의 눈에서는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었다. '청풍아, 이번에는 목을 잘라 확실히 죽여주마.’ 그는 만약을 대비해 이 장쯤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이 정도면 검기만 발출해도 충분히 상대를 즉사시킬 수 있는 거리 였다. 그는 사당 입구에서 검 끝으로 유청풍의 목을 겨냥했다. 막 진기를 발출하려던 그는 멈칫했다. '음? 엄희채로구나! 누구에게 당했을까? 금궤를 매설하고 오는 동 안 변수가 발생했구나.’ 그는 다소 느긋한 시선으로 엄희채를 바라보았다. 사당 벽이 무너진 틈새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가 그녀의 옥용이 확 연히 드러났다. 갸름한 얼굴과 긴 속눈썹이 어우러져 무척이나 아름 답게 보였다. 여자 경험이 많은 고일두는 은근히 마음이 동했다. '저런 미인은 죽일 게 아니라 첩으로 삼아야겠어!’ 일 년 전 그는 귀답령에서 그녀와 한 번 겨룬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만 알았을 뿐 생사를 다투는 상황이어서 그런 감정을 느낄 새가 없었다. 이때 유청풍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고일두!" 그는 고일두가 살기를 띠고 접근했다는 것을 알았으나 지금으로써 는 속수무책이었다. 만일 그가 몸을 일으켜 고일두와 싸울 경우 엄희채는 충격을 받아 즉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녀는 운기조 식을 하는 상태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고일두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내가 대신 진기를 넣어 주마." 그는 장검을 유청풍의 목에 올려놓았다. '헉!’ 차디찬 검날의 감촉을 느낀 유청풍의 안색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 [3] '이게 무슨 소릴까?' 몰혼산의 서쪽 계곡을 달리던 고혜원은 이상한 음성을 들은 순간 발길을 멈췄다. 어디선가 미친 사람이 지르는 듯한 고함소리가 간간 이 들려 오고 있었다. 청력을 집중한 결과 그녀는 음성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삼십 장 떨어진 송림 속이야.’ 그녀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소나무 가지가 늘어진 전면을 바라본 순간 그녀는 발길을 멈추었다 . "아니, 노방과 도절이......." 위강이 누워 있었는데 노방은 그의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위강은 연신 헛소리를 내지르며 발작증세를 보이는 한편 전신을 학질 환자처럼 떨고 있었다. "으아아! 마인아. 덤벼라! 한철파류로 네놈을 죽여버릴 테다.....! " 그가 팔을 내저을 때마다 마치 도를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한 번씩 소리를 지르면 입에서는 허연 거품이 부글거리며 뿜어져 나왔으며 눈에서는 새파란 광기가 번뜩였다. 그와 같은 절정고수가 이지를 상실한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조차 으 스스함을 느낄 정도였다. 지금 노방은 위강을 치료하는 중이었다. 그는 품속에서 콩알만한 황색 환약 한 알을 꺼내들었다. '복명환령단도 마지막이군.’ 그는 혈도를 누른 다음 위강의 입에 약을 넣어 주었다. 혈도를 제 압하지 않으면 약이 도로 튀어나오기 때문이었다. 노방이 인후를 툭 치는 순간 위강은 무의식중에 약을 삼켰다. 고혜원은 전신이 오그라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만 저 증상은? 설마... 섭령마인공에 당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청풍도......?" 말로만 듣던 섭령마인공이 현실로 나타나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또 한 마공을 익힌 자는 누구이며 왜 은하자비소에 나타난 것일까? 그는 천적인 유청풍이 이곳에 올 줄 미리 알았단 말인가? 과연 유청풍은 그 마인과 대결을 했을까? 만일 싸웠다면 그도 위험에 빠졌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또한 노방은 그의 소재를 알고 있을까? 그리고 어찌하여 엄희채는 보이지 않고 엉뚱하게 위강과 함께 있는 것일까? 의문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고혜원은 노방이 치료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청풍이 다쳤다면 치료할 사람은 노방 뿐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 분간은 노방과 협조해야겠구나.’ 그녀는 식은땀이 솟아난 손바닥을 문지르며 나름대로 대책을 구상 했다. 얼마 후 위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더니 노방의 어깨를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야혼승, 자네 덕분에 염라전의 문턱에서 돌아왔네." 하지만 얼마나 극심한 공포를 겪었는지 그의 안색은 아직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노방은 오히려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다행입니다. 선배께서 저를 막아주셔서. 이제 안심하십시오. 이곳 은 마인과 겨루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계곡입니다." 만일 그가 정통으로 마인에게 일격을 당했다면 아무리 해약을 지녔 어도 위강과 함께 벌써 죽었을 것이다. 고혜원은 인기척을 내며 재빨리 그들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청풍을 보셨나요?" 그녀의 음성 속에는 염려하는 기색이 가득 서려 있었다. 일순 경계심을 잔뜩 품었던 노방이 먼저 나섰다. "냉영괴화,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문득 그는 그녀가 싸울 의사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을 뿐더러 어떤 살의도 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혜원은 차분한 음성으로 응대했다. "오해하지마. 발목이 절단된 공절을 만나......." 그녀는 노방과 설전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목격한 바를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위강과 노방은 그녀가 진실로 유청풍을 염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 었다. 위강은 간략하게 대결 상황을 설명했다. "청풍과 헤어져 나오던 참에 마인을 만났는데......." 그가 얘기를 마치자 노방은 목에 힘줄을 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교동악이 어린 소녀들을 학대한 증거가 확실해. 금궤와 시체는 와 호장의 명성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 냉영괴화, 내가 왜 너희를 혐 오하는지 알겠느냐?" 고혜원은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나도 의문을 느끼는 터에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테지. 그런 자 들을 고용하다니.......’ 그녀는 위강을 바라보며 침중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차후에 알아보겠어요. 우선 청풍을 찾아 보도록 하죠." 위강도 우려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오다가 만나지 않았다면 마인과 먼저 겨루었는지도......." 그는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인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가? 그런 마인과 대결했다면 불을 보 듯 뻔한 일이었다. 고혜원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함정에 걸려든 것이 아닐까요?" 그녀의 옥용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오지나 다름없는 이곳에 어째서 마인이 갑자기 나타났겠는가? 보나 마나 천적인 유청풍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노방 역시 긴장된 표정으로 위강을 바라보았다. "어서 가보시지요. 제 사매도 틀림없이 그 곳에 있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네." 세 사람은 마인과 겨루었던 장소로 다시 달려갔다. 장검에서 반사된 빛이 엄희채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는 무의식 속에서도 무서운 환상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감내 하기 어려운 공포 속을 헤매는지 심하게 일그러진 그녀의 옥용은 수 시로 부르르 떨렸다. 이는 마기가 이미 옥침혈로 접어들었다는 증거였다. 고일두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럴 수가? 섭령마인공에 당했단 말인가?’ 그는 수리마제의 후예인 유청풍만 제거하면 된다고 여겼다가 충격 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림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섭령마인공이 갑자기 나타나다니..... .. 무적이나 다름없는 마인의 출현은 장차 무림 동향과 그 자신에게 엄청난 변수로 작용할 것 같았다. 더구나 금기로 선포된 마공을 수련 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대체 누가 그런 무공을 익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만한 인물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상념에 잠겨 있을 여유가 없었다. 마인이 등장한 이상 하나라도 속히 없애는 편이 자신에게 유리하므 로 우선은 난적인 유청풍을 빨리 처치해야만 되었다. 아울러 엄희채를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급했다. 그녀가 의식을 차 려야 마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청풍은 수시로 변하는 고일두의 표정을 보고 그의 내심을 눈치챘 다. 일단은 시간을 지연시켜야 했다. "비겁한 놈......." 고일두 역시 눈치가 빠른지라 이미 유청풍이 무슨 속셈으로 말을 꺼냈는지 간파한 터였다. 그는 냉정히 잘랐다. "시끄러워. 너는 경쟁에서 낙오한 패배자야." 그는 한 손을 엄희채의 명치에 갖다 대면서 검으로 유청풍의 마혈 을 찍어 버렸다. 혈도가 짚힌 유청풍은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고일두는 장검 을 번쩍 치켜들더니 사정없이 그었다. "이제 그만 저승으로 가거라." 시퍼런 검광이 유청풍의 목에 떨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막 검이 목을 자를 찰나 고일두는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아니, 색절이?' 뻥 뚫린 사당의 벽 사이로 붉은 인영이 뛰어든 것이다. 그 인영은 다름 아닌 색절 모염정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 치자 그녀는 방긋 웃었다. "동생, 내가 중매를 서 줄까? 엄희채를 소유할 수 있도록 말이야." 하지만 겉으로는 요염해 보이는 모염정의 웃음 속에는 살의가 은은 히 배어 나왔다. 그녀는 고일두와 비슷한 시점에 도착하여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고일두의 심중을 읽고 있었다. 고일두는 입맛이 썼다. '젠장, 싸울 수도 없고. 자칫 청풍을 살려주겠는걸?’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명약관화(明若觀火)했다. 바로 유청풍이 지니고 있는 뇌운진기 때문이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묘하게 돌아갔다. 한 사람을 놓고 빼앗으려는 여 인과, 그를 죽이려는 자 사이의 대치가 이어졌다. 문제는 고일두가 모염정을 당장은 어쩔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삼십대의 나이에 오절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단순히 색공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력이 높을 뿐더러 다양한 절기를 지닌 고수였던 것이다. 고일두의 무공조예도 상당하지만 그녀와 대결한다면 이긴다는 보장 이 없었다. 아니, 고작해야 양패구상(兩敗具傷) 정도일지도 몰랐다. 지금 그는 손에 약간의 힘만 주어도 유청풍을 죽일 수 있었다. 하 나 그렇게 되면 모염정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 두 사람의 눈은 서로의 내심을 읽기에 바빴다. 여차하면 살수를 전개할 태세로 사당 안의 공기는 팽팽하게 긴장으 로 당겨지고 있었다. 문득 모염정은 느긋한 표정으로 전음을 날렸다. "네가 청풍을 죽여도 좋아. 혈광마검을 포기할 각오라면 말이야." 그녀의 입가에는 뜻 모를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실은 그녀도 내심은 조바심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곳으로 올 때 고혜원이 노방 등과 얘기하는 광경을 목격 한 터였다. 따라서 그들이 당도하기 전에 유청풍을 데려가야 할 입장 이었다. 하나 경험이 풍부한 그녀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고일두가 엄희채를 좋아하는 이상 돌파구가 보였던 것이다. 이럴 경우 서로 필요한 조건만 교환한다면 의외로 일은 쉽게 풀리 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급한 내심과 달리 여유를 드러낸 것이었다 . 고일두는 말귀를 알아들었다. "합작하자는 거요?" 이제 그는 그녀가 왜 살의를 지녔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그녀는 싸움보다는 뇌운진기를 얻기를 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두 사람이 타협만 한다면 유청풍이 지닌 뇌운진기를 공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모염정이 유청풍의 진기를 갈취한 후 고일두 가 합의하여 동침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두 사람이 다 만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실상 마인이 무림에 다시 등장한 시점에서 뇌운진기는 절실히 필요 한 공력이었다. 모염정은 정염이 가득한 눈빛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고일두는 고려해 볼 수밖에 없었다. '모험해 볼만도 한데... 그러나 과연 저 여우같은 계집을 믿어도 될까?’ 그가 망설일 때 음침한 음성이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결국 자네가 해냈군!" 문득 어깨에 바랭이를 멘 홍오간이 나타났다. 그는 사당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안을 힐끔거렸다. 그의 눈에서 탐욕이 이글거렸다. 모염정의 안색이 홱 변했다. '척척 들어맞는구나. 호호호.......’ 그녀는 고혜원을 쫓아오다 장강에 정박한 구민선을 발견하고 홍오 간이 나타날 줄 미리 예견했었다. 실상 홍오간이나 고일두는 그녀의 육체를 매개체로 활용해야만 뇌운진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모염정은 선택권과 주도권을 동시에 쥔 셈이었다. 그녀는 모처럼 만나는 사이인 양 홍오간에게 반갑게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군요?" 고일두는 슬며시 장검을 거두며 사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염병! 재수 없는 인간이 나타나 일을 망쳐 놓는구나. 도대체 저 자가 어떻게 냄새를 맡았을까?’ 홍오간은 그에게 백해무익한 존재였다. 교활한 고일두도 의술만큼이나 술수에 뛰어난 그만 보면 왠지 모르 게 혐오감을 느꼈다. 그는 떨떠름한 감정을 감춘 채 뒤늦게 인사를 했다. "선배께서 오셨군요. 바로 저 자가 유청풍입니다." 홍오간은 놀라는 척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런가? 잘했네. 제약소 사건을 확실히 조사할 수 있겠구먼." 그는 유청풍을 은밀히 조정해 왔으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었다. 유청풍이 살수가 되어 다섯 명을 처치한 것도 그가 투검 영감을 시 켜 원격조정을 해온 결과였다. 지금 홍오간은 모염정과 합세하여 오로지 뇌운진기를 빼앗을 욕심 뿐이었다. 얼마 전 제약소 사건이 터졌을 때 그가 직접 유청풍을 취 조하겠다고 선언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경우를 염두에 둔 조치였던 것이다. 모염정은 기대에 찬 얼굴로 유청풍을 바라보았다. '곤경에서 구해주면 더 이상 홀대 안 하겠지?’ 그녀는 유청풍과 직접 상대할 심산이었다. 슉!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퉁겨진 순간 유청풍은 혈도가 풀려 상체 를 벌떡 일으켰다. 일순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모염정은 뜨겁게 달아오른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동생, 빠져나가도록 도와 줄께." 단내가 물씬 번지는 전음을 듣고도 유청풍은 덤덤했다. 그는 고개 만 끄덕인 후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홍오간과 고일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뻔뻔스런 고일두가 승 냥이라면 능글맞은 홍오간은 이리처럼 보였다. 게다가 여우같은 모염 정마저 있으니 이거야말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이 아니겠는가? 유청풍은 오도가도 못할 위기를 맞이한 셈이었다. 그는 재빨리 상황을 판단했다. '여의치 않군. 간교한 인간들이 다 모였으니.......’ 의식을 잃은 엄희채와 함께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엄희채에게 진기를 주입했다. 이때 홍오간은 엄희채를 유심히 살펴보다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아니... 섭령마인공에 당했구나!" 그는 다급한 어조로 고일두에게 말했다. "저 계집을 살리려면 서둘러야 하네." 그의 말은 언뜻 제약소에 침입한 용의자를 살려놓자는 말 같지만 실은 고일두가 품고 있는 의중을 이미 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일두는 선뜻 응대할 수가 없었다. '저 자의 술수 말리면 안되지. 자칫 내가 엄희채의 후견인으로 몰 리면 안되지.' 그도 홍오간이 사람의 뒤통수를 잘 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 다. 그렇게 두 사람이 상대방을 탐색할 때였다. "키익! 지금 사람을 놓고 흥정하는 거야?" 야혼승 노방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왔다. 그의 뒤에는 고혜원과 위 강이 따라오고 있었다. 고혜원은 굳은 표정으로 재빨리 사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유청풍을 본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살아 있었구나!’ 그녀는 가만히 그의 옆에 앉았다. "내가 할께." 짧은 그 한 마디는 어서 호구(虎口)를 벗어나라는 암시였다. 유청풍은 천천히 일어나 사당 밖으로 나갔다. 한편 사매의 안전을 확인한 노방은 대뜸 고일두에게 욕설을 퍼부었 다. "내 사매를 저렇게 만들고 네놈이 성할 줄 아느냐?" 고일두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옳지, 본장을 조사 장소로 제공하여 모조리 처치해야겠군.’ 그는 오히려 싸늘한 음성을 발하며 노방을 노려보았다. "우리가 더 큰 피해를 입었다. 팽고와 팽소가 죽었으며 갈총관이 중상이다. 침입한 이유를 규명하자."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노방은 날카롭게 반박했다. "약삭빠른 놈, 뭐가 어째? 와호장은 교동악 같은 자가 득실거리는 집단이야. 은하자비소의 지하 참상과 금궤가 바로 산 증거 아니냐?" 고일두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잡아뗐다. "오갈 데가 없는 자를 고용한 것 뿐, 그런 자가 본장을 대신하지는 않아. 조사해 보겠지만 금궤는 금시초문이다. 또 환자들은 수하들이 역질을 겁낸 나머지 살리려 노력하다 그런 결과를 빚은 것이다." 와호장주는 몰혼산을 어느 몰락한 부호에게 사들였다. 하나 그 부호를 찾을 길이 막막하기 때문에 혁련달이 나타나지 않 는 한 금궤의 소유자가 와호장주라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역질 환자 처리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와호장과 같이 역질환자를 취급한 행위는 오래 전부터 관습처럼 내 려왔던 것이다. 그 만큼 전염병이 엄청난 피해를 주기 때문에 와호장 을 탓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탈명색혼대가 재로 변한 현재 고일두는 느긋한 편이었다. 더구나 그는 누나인 고혜원을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그 만큼 그는 변했으며 부친 고헌부가 그에게 권한을 위임했기 때 문이었다. 노방은 다시 꾸짖었다. "변명하지 마라! 네놈은 마인과 어떤 관계냐?" 고일두는 언성을 높였다. "나도 마인을 모른다. 무관한 자를 본장과 함부로 결부시키지 마라 ." 그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오히려 역공을 가했다. "설마 본장에 침입한 사실을 얼렁뚱땅 넘기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것은 홍오간을 떨쳐버리면서 노방을 인질로 붙들어 놓으려는 계 략이었다. 노방은 같잖다는 듯 피식 웃었다. "오냐, 내가 바라던 바다." 그러자 위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도 좋지만 중태에 빠진 환자를 두고 싸우다 니 이게 무슨 꼴인가? 일단 중지합시다." 그 말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홍오간이었다. '자칫 다 된 밥에 코 빠질라. 그렇지 않아도 세간에서 의원들이 너 무 재물만 밝힌다고 한창 성토하는 마당에.......’ 우직한 위강이 자꾸 항의조로 말하면 그로서는 위상이 흔들릴 판국 이었다. 그는 얼른 고일두를 바라보았다. "다른 의견이 있나?" 고일두는 기회를 놓칠 세라 음성에 힘을 실었다. "예, 의절 선배께서 비사금환을 구하는 동안 저는 청풍과 노방을 조사하겠습니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말이었다. 순간 홍오간의 안색이 변했다. '약은 놈, 알맹이를 혼자 차지하겠다고?’ 유청풍이 없는 한 엄희채는 그에게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절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적어도 술수에 관 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였다. 그는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손실을 입은 자네의 기분을 이해하네. 하나 섭령마인공에 당한 사 람을 내 어찌 완치를 장담하겠는가? 몇 사람이 동행하여 입증을 서야 할 걸세." 만일 치료 중 사고가 나면 자신이 일부러 죽인 것밖에 더 되겠느냐 는 뜻이었다. 실상 그 말은 조사를 빙자하여 유청풍을 빼낼 계략이었 다. 그는 자신의 말에 동조해 달라는 듯 모염정을 힐끗 쳐다보았다. 고일두는 잠시 망설였다. '제길, 완치도 못한다면서 그 놈의 의술을 잘도 써먹는군.’ 그렇다고 반박할 만한 꼬투리도 없었다. 이때 유청풍이 노방을 응시하며 물었다. "노형의 생각은 어떻소?" 사실 엄희채의 치료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 결정할 사람은 사형인 노방이었다. 노방은 무겁게 말했다. "유형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겠오." 이는 자신이 복명환령단을 다 소모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한데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었다. 노방과 엄희채, 홍오간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봐야 했다. 기실 그들 세 사람은 모두 독혈 방시굉이 가르친 제자들이었다. 물론 엄 희채가 방시굉의 외손녀였으나 사문으로 따졌을 때는 그런 관계였다. 홍오간은 엄연히 노방과 엄희채의 대사형이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노방은 대사형인 홍오간을 무시하고 있었다. 홍오간도 그것을 알았으나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노 방과의 대화 자체를 회피하고 있었다. 그들 삼 인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오직 유청풍 뿐이었다. 그는 은하자비소의 지하에서 방시굉에게 홍오간이 어떤 인물인지 익히 들었던 것이다. 의절 홍오간은 정해단과 살루문에 독극물을 제공하는 간교한 인물 이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유청풍은 고일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두, 마인이 무림에 출현한 사실을 묵과하지는 않겠지? 또한 사 곡 환자들은 너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알아서 처신해라." 그의 말에 중인들은 아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특히 고일두는 흠칫 놀라며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으음! 저 자식이 아주 홀랑 씌울 작정을 했구나. 무슨 묘책이 없 을까?’ 마인은 마공을 익힌 무림의 공적이다. 따라서 그가 은하자비소에 나타난 것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었다. 그러므로 무림명가인 와호장은 그 사건부터 최우선적으로 조사 해야할 책임이 있었다. 또한 사곡 환자들 건은 어떠한가? 시체의 처리야 그렇다 쳐도 전염성이 있는 환자들을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와호장은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돕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상징적인 기구가 바로 은하자비소였다. 그런 점을 도외시한다면 와호장은 무림에서 손가락질을 받을 우려 가 있었다. 중인들은 고일두가 과연 어떻게 답변할 지 궁금해졌다. 고일두는 쓰린 마음을 억누른 채 겨우 입을 열었다. "알았다. 조사해서 밝힐 것은 밝히고, 시정할 점은 수일 내로 시정 하겠다." 그의 태도는 예상 외였다. 유청풍은 모염정에게 의향을 물었다. "여기 남아 와호장이 자체조사 하는 것을 참관해 주겠소?" 그는 홍오간을 견제하는 뜻으로 그녀를 지정했다. 위강은 등조민의 사부인지라 누가 판단해도 참관인으로 적당한 인물은 아니기 때문이 었다. 모염정은 유청풍의 진기를 혼자 차지할 속셈이라 순순히 응해 주었 다. "물론이지. 서로 오해를 풀 수만 있다면 기꺼이......." 사실 그녀가 홍오간과 동행하여 득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이곳에 남아 고일두를 이용할 속셈이었다. 유청풍은 사당 안에 있는 고혜원을 향해 말했다. "그대는 와호장을 대표한 참고인으로 동행하는 게 좋겠다." 고혜원은 얼른 대답했다. "알았어요." 실상 그녀는 내심 번민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마인의 출현도 그렇거니와 유청풍과 인연이 많은 사곡 환 자들을 짐승처럼 취급한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또한 여러 사람 앞에서 동생인 고일두와 옥신각신 하기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사안들은 그녀 스스로, 혹은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수 가 있을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그녀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존재는 엄 희채였다. 그런데 함께 갈 것을 제의 받자 얼른 대답한 것이었다. 유청풍은 묵직한 음성으로 홍오간에게 물었다. "구민선은 어디 있습니까?" 홍오간은 이게 웬 횡재냐 싶어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저 산밑에 있네." 그는 몰혼산 동쪽 산기슭을 가리켰다. 아마 그곳에 구민선을 정박시킨 모양이었다. 사실 모염정이 잔류를 수락할 때만 해도 그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 었다. 그의 눈에서는 음산한 빛이 흘러 나왔다. '흐흐흐, 보물들이 절로 굴러오다니.......’ 유청풍은 다시 노방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노형이 엄단주를 안고 가야 할 것 같소." 노방은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알았오. 그리하리다." 그는 재빨리 사당 안으로 들어가 엄희채를 안아 들었다. 유청풍은 마지막으로 위강에게 포권을 했다. "제 삼자로서 참관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위강이 선친의 친구인 점을 감안하여 최대한 예의를 갖춰 주 었다. 위강은 기꺼이 수락했다. "일리가 있구먼. 함께 가겠네." 그리하여 고일두의 계략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그를 제외한 중인들은 유청풍이 보여 준 일처리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대단해! 어느 누구도 항의할 수 없도록 깔끔하게 처리하다니..... ..’ 홍오간은 엄희채를 힐끗 본 후 서둘렀다. "너무 지체했소이다. 상태가 위중하오." 벌써 삼 장여를 앞서 간 그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중인들은 모두 그의 뒤를 따라 구민선으로 향했다. 고일두는 인상 을 구긴 채 유청풍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좋아하기는 이를걸? 천락무예단을 인질로 삼으면 엄희채를 차지하 는 것쯤이야... 청풍아, 너도 그때는 마지막인 줄 알아라.’ 그가 순순히 물러 난 이면에는 이러한 흉계가 도사리고 있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