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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二十二 章 연해월의 위기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천공의 중앙에 떠 있었다. 연해월이 묵고 있는 처소는 오직 그녀의 방만 불이 켜 있을 뿐 나머지 공간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달빛이 드리워진 뜨락, 담 너머에서 소리 없이 솟아오르는 세 줄기 인영이 있었다. 담 근처의 나뭇가지에 내려선 그들은 모두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 명 중 두 사람이 등에 커다란 항아리를 짊어지고 있었다. 항아리의 주둥이는 밀봉되어 있었다. 그들은 어둠에 잠겨 있는 연해월의 처소와 그 주위를 면밀히 살폈다. 잠시 후, 그들은 연해월의 처소를 향해 소리 없이 날아갔다. 흑의복면인들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가에 기척도 없이 내려섰다. 그들 중 항아리를 짊어지지 않은 자가 벽에 바짝 붙어서 창문틀 사이로 실내를 살폈다. 실내에는 연해월과 애향이 커다란 천에다 수를 놓고 있었다. 실내를 살피던 흑의복면인은 뒤로 고개를 돌려 두 사람에게 무언(無言)의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두 복면인은 등에 짊어지고 있던 항아리를 앞으로 안아들었다. 항아리 입구에 붙여진 밀봉종이에는 유(油)라는 글자가 써져 있었다. 두 사람은 밀봉종이를 뜯어낸 뒤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이동하면서 항아리 속의 기름을 연해월의 처소 주변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행동은 아주 은밀해서 기름을 붓는 소리도, 발걸음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삽시간에 연해월의 처소 주변은 기름투성이로 변해버렸다. "아야!" 수를 놓던 바늘에 찔려 애향은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조심하지 않고!" 손가락에 피가 맺히건만 애향은 갑자기 코를 킁킁거렸다. 연해월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냄새지?" "기름 냄새 같은데요? 어디 부침개라도 부치는 모양이에요."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지 않느냐?" 애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바람소리겠죠 뭐, 아니면 간 큰 쥐새끼이거나." "쥐새끼면 그냥 쥐새끼지 간 큰 쥐새끼는 또 무슨 말이냐?" 애향은 피를 닦고 다시 수를 놓으며 다부진 음성으로 말했다. "마도수, 그분이 그러셨어요. 마님께서 계신 이 비봉당(飛鳳堂) 근처에 함부로 얼씬거리는 자는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애향의 말이 뜻밖으로 들렸는지 연해월의 눈이 한층 커졌다. "그분이 그런 말을?" "예! 그런 명령이 내려졌는데 겁 없이 이 근처를 얼씬거리는 작자가 있다면 간이 커도 보통 큰 게 아닌가요?" 연해월의 눈빛이 야릇한 감회에 젖어들었다. "그랬었구나." 애향이 문득 눈빛을 빛내며 연해월에게 물었다. "한가지만 여쭤봐도 돼요?" "뭘?" "마도수, 그분과 마님은 어떤 사이세요?" 연해월은 갑작스런 애향의 질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어, 어떤 사이라니……?' 애향은 얼굴 가득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 생각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래요. 모르긴 해도 두 분은 보통 사이가 아닐 거라고요. 어때요? 제 말이 맞죠?" 연해월은 곱게 눈을 흘겼다. "이젠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애향은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면 얼굴은 왜 빨개지시는 거죠?" 연해월은 더욱 당황해져서 붉어진 얼굴을 매만졌다. "얘가… 내 얼굴이 언제 빨개졌다고……." 애향은 연해월을 가리키며 깔깔댔다. "거울이나 좀 보고 말씀하세요. 시치미를 떼시니까 점점 더 빨개 지시잖아요!" 연해월은 어쩔 줄 몰라 눈만 흘겼다. "못된 것 같으니……." 이때였다. 시커먼 연기가 실내로 스며들었다. "이게 웬 연기냐?" 놀란 애향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밖을 본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시뻘건 불길이 처소를 휘감은 걸 발견한 것이다. "저, 저것 좀 보세요 마님! 불이 났어요!" 불길은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다. 격자창이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인다 싶더니 불이 붙은 채 방문으로 넘어져 침상에 옮겨 붙었다. "마님! 빨리 밖으로 피하세요." 애향이 몸을 날렸다. 문을 부셔서 연해월을 피신토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크크크! 기다리고 있었다." 출입문의 중앙에서 검날 하나가 삐죽이 튀어나왔다. 애향은 연해월을 보고 있기에 검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삐죽이 튀어나온 검을 향해 몸을 날린 격이 된 것이다. "애향! 뒤로 물러서!" 연해월이 경고를 주었지만 검날은 이미 애향의 복부를 관통한 뒤였다.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울컥 피가 쏟아졌다. "누, 누가 감히 마님을……." 와지끈! 문짝이 부서졌다. 시커먼 연기와 붉은 화염이 출입문 저쪽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불빛을 배경으로 받은 흑의복면인들은 그래서 지옥의 악귀와도 같이 보였다. "누구냐?" 연해월은 허리에 찬 채대를 검처럼 꼿꼿이 세우며 외쳤다. 위기가 목전에 닥쳤어도 그녀는 무사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휘돌았다. 츄릿!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듯한 파공음이 울렸다. 비록 채대로 펼쳤다 하나 사마가의 검법의 위력은 여전했다. 그녀의 반격에 놀란 세 흑의복면인은 화급히 몸을 날려 피했다. 연해월은 촌각의 시간도 허락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바람처럼 공간을 이동했다. 허나, 상황은 그녀 편이 아니었다. 이미 천장까지 타오른 불길이다.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대들보가 그녀를 향해 넘어진 것이다. 그녀는 급히 방위를 이동했다. "크크! 하늘이 우릴 돕는군!" 쾅! 척추가 그대로 부러지는 것 같았다. 흑의복면인의 장력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기공이 실린 그 일격에 연해월은 울컥 피를 토하며 주춤하는데, 그녀의 그 등으로 불에 타오른 거대한 대들보가 덮쳤다. "아악!" 비명을 지르는 연해월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대들보에 받은 충격에 때마침 공격을 가한 두 사람의 장력이 재차 가해진 것이다. 피가…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동공이 풀리며 그녀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이렇게 가는 것인가? 이게 저승길인 모양이다. '아직 그에게 못 다한 말이 많은데…….' 죽음에 처해서도 그의 얼굴이 떠오름은. 그 얼마나 모진 인연인가? 해갈할 수 없는 갈증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그의 얼굴이 떠오르다니!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내세에는 부디 우리 두 사람이 부부의 연으로 이어지기를!'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흑의복면인의 우두머리는 의식을 잃은 연해월을 잔인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매사는 뒤끝이 깨끗해야 잡음이 없는 법!" 연해월의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는 검을 뽑았다. 하나, 그 순간 불길에 휩싸인 대들보들이 마구 무너져 내렸다. "이러다가는 우리도 불고기 신세가 되겠습니다. 어서 피하죠!" "그렇습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어서 피합시다." 두 사람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우두머리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바쁜 건 바쁜 거고 일은 일이다." 우두머리의 말에 잠시 멈칫거리던 두 사람은 불길이 자신들을 향해 밀려들자 더 참지 못하고 몸을 날려 사라졌다. "겁쟁이 놈들. 이까짓 불이 뭐가 무섭다고!" 그는 연해월의 등을 향해 검을 내리꽂혔다. 그때였다. "멈춰!" 번쩍! 시뻘건 검광을 가는 차디찬 검기가 있었다. 벼락이 치듯 뻗은 검기는 연해월을 죽이려던 복면인의 가슴을 관통해 지났다. "이렇게 빠른 검은……." 흑의복면인은 말을 맺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천추의 한을 남길 뻔했군!" 등장한 사람은 사마군이었다. 그는 혼절한 연해월을 옆구리에 끼고는 까마득한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사라졌다. 염서시는 자신의 처소에서 연해월의 숙소인 비봉당이 타오르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연해월의 처소에 불을 지른 두 사내가 복면을 벗고 서 있었다. 이십 중반 정도, 눈가에 음탕한 빛이 감도는 사내들이었다. "고생했다." 염서시가 술을 부어 권하자 두 사람은 황송한 표정으로 잔을 받았다.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저… 표웅은 그 계집을 확실히 죽인다고 남았었는데 아무래도 변을 당한 것 같습니다." 염서시는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예?" "표웅은 그 계집을 겁탈하러 들어갔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홧김에 불을 질러 연해월을 죽여버린 거야. 불길이 워낙 거세고, 또한 마도수의 보복이 두려워 그자도 그 자리에서 스스로 불에 타 죽은 것이고! 그렇지 않나?" 지독한 여심이다. "헤헤, 그렇습니다." 간사하게 웃으며 답하는 두 사내의 눈길은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염서시의 풍만한 몸을 훑고 있었다. 그런 사내들의 눈길이 싫지 않은지 염서시는 야릇하게 웃었다. "잔을 비우고 내게도 한잔 받치도록!" 빠르다. 삽시간에 잔을 비운 두 사내는 앞다퉈 염서시에게 잔을 권했다. "여, 여기." 두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던 염서시의 손길이 왼쪽의 청년이 받치는 술잔으로 향했다. 염서시에 선택받은 그 사내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그의 눈길은 요염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드러난 염서시의 허연 허벅지와 그 안쪽을 향해 화살처럼 꽂혔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염서시가 손에 든 술잔을 탁자에 놓았다. "왜 잔을 내려놓으시는 겁니까?" 염서시는 미묘하게 웃었다. "마시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어."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니! 그게 아냐. 단지 아무리 향기가 좋은 술이라도 독(毒)이 든 걸 뻔히 알면서도 마실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 "도, 독이라뇨?"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 갑자기 두 사내가 목을 움켜쥐었다. 두 사람의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명백한 중독현상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리고 전신은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이제 보니… 우리를 죽여 살인멸구를……!" "이 사갈보다 더 독한 계집……!" 원독의 눈길로 염서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지면에 닿기 무섭게 그들의 몸은 한 줄기 연기를 뿜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녕 지독한 독이었다. "어리석은 인간들!" 염서시는 시선을 비봉당으로 돌렸다. 많은 사람들이 불길을 잡기 위해 동원된 결과 불길은 다 잡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남은 건 없었다.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라, 연해월!" 그런 여인이었다. 한번 가지고자 마음먹으면 반드시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여인이 염서시였다. 통쾌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거각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풍광이 수려한 산의 중턱에는 그 경치에 걸맞은 고색창연한 장원이 서 있었다. 때는 석양 무렵, 고루거각이 즐비한 고풍스러운 장원의 정문 지붕 위에는 화려한 편액이 걸려 있었다. 대서천검원(大西天劍院). 저 멀리 높다란 고봉 위에서 대서천검원을 굽어보는 수많은 인마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잠송 등 칠 인의 형제였으며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위지강의 뒤에는 수십 개의 각종 깃발을 든 남극벌의 무사들과 일급고수들이 늘어서 있었다. 잠송은 위지강과 함께 대서천검원을 굽어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곳이 바로 요즘 강호최대의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대서천검원입니다. 천하사세의 끈질긴 회유를 뿌리치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오직 검도증진(劍道增進)만을 추구해온 것으로 알려졌던 명문검가(名門劍家)죠." 위지강은 잠송의 장황한 설명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무적검맹의 떠오르는 별로 불렸던 도검쌍패가 대서천검원 소속이라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사대검파(四大劍派)의 명성을 압도하여 일약 중원제일의 검문(劍門)으로 급부상한 곳입니다." 위지강은 예전에 한번 마주친 적이 있는 좌수경과 수홍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도검쌍패라면 예전에 한번 마주친 적이 있다. 꽤 괜찮아 보이는 친구들이었지." "그중에서도 무형도 좌수경은 천상마종제(天上魔宗帝)의 일신절학을 모두 전수 받아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하고 있다더군요." 두 사람은 도열해 있는 무사들 사이를 지나쳐 갔다. "눈여겨봐 두어야 할 친구입니다." 그들이 가는 곳은 멀찌감치 보이는 막사였다. 잠송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계속 설명을 이었다. "의심이 많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천상마종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다는 건 이미 차기 후계서열 일위에 올라섰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니까요." 위지강은 잠송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런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대서천검원치곤 너무 쉽게 무적검맹의 손아귀에 넘어간 게 아닌가?" 잠송은 고소를 지었다. "상대가 남궁사였습니다." 위지강이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잠송과 주청산, 그리고 남극벌의 고수들이 뒤를 따랐다. "한마디로 말해서 고도로 계산된 남궁사의 치밀한 수 읽기에 고스란히 당했다고 보면 틀림없을 겁니다." "계산된 수 읽기라니?" 위지강은 중앙에 마련된 탁자에 앉았다. 잠송 등도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달 전 남궁사는 단신으로 불쑥 나타나서 대서천검원의 원주인 천라검선(天羅劍仙) 사마천효를 상대로 정중하게 비무를 요청했고 사마천효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볼 만한 대결이 되었겠군!" "그러잖아도 중원제일의 검문이란 명성에 한껏 고무되어 있던 사마천효로서는 차제에 우내쌍절검의 하나로 손꼽히는 천의무상검결마저 꺾고 명실상부한 천하제일검의 자리를 꿰어차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거죠." "대결은 치열했겠군!" 잠송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남궁사가 파놓은 함정이니 오죽했겠습니까? 사마천효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싱거웠다 이건가?" "끝은 그런 대로 괜찮았습니다. 사마천효를 꺾은 남궁사가 그를 살려두었던 거죠. 수하들을 거느리고 쓸쓸히 돌아서는 사마천효의 등뒤로 부서지는 석양, 콧잔등이 찡 하더군요!" "그 노웅이 은퇴한 것인가? 도검쌍패를 두고 암중밀월을 즐기던 그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군!" "완전히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는 격이죠." 위지강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겨운 싸움과 지겨운 세력 전쟁.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기 전에는 절대로 그 끝은 없을 것이다. "앞으론 이곳도 시끄러워지겠어." 잠송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정당한 비무의 결과에 대해선 불간섭주의가 강호의 불문율이긴 하지만 사마천효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서천검원을 재탈환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을 테니까요." 잠송의 단언하듯 말하자 남극벌의 고수들이 흠칫했다. "무적검맹이 유령노조(幽靈老租)와 같은 거물을 대서천검원의 책임자로 박아둔 것도 그런 사태에 대비하겠다는 의도로 보면 틀림없습니다." 남극벌의 고수 중 하나가 기겁을 하며 반문했다. "유령노조라면 무적검맹 서열 오위를 차지하고 있는 초거물급인데 그자가 지금 대서천검원을 지키고 있단 말이오?" 잠송은 일부러 더 큰소리로 능청을 떨었다. "참, 하마터면 유령백팔귀(幽靈百八鬼)를 모조리 끌고 왔다는 말을 빠트릴 뻔했군." 남극벌의 고수들이 기겁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맙소사……!" "유령백팔귀는 죽은 자의 몸에 혼을 불어넣어서 만든 강시( 屍)들이라 도검불침(刀劍不侵)의 살아 있는 악마들이라고 들었거늘……!" 남극벌의 고수 중 분광쾌검(分光快劍) 추낙평(秋落平)이 불안한 얼굴로 위지강을 쳐다보았다. "재고하는 게 어떻겠소? 아무래도 이번엔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소이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백룡도(百龍刀) 곤강(昆 )도 동조를 했다. "그렇소! 굳이 희생을 무릎 쓰고 대서천검원을 공략하느니 차라리 다른 곳부터 칩시다.!" 위지강은 이들의 말을 무시한 채 잠송을 불렀다. "잠송!" "예, 형님!" "인원을 점검해라." "알겠습니다." 잠송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그 찰나 추낙평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무모하오! 이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오." "그래서?" 싸늘한 반문이 이어진다 싶더니 어느새 추낙평의 목에는 기다란 쇠꼬챙이가 닿아 있었다. 석옥성이 앉은자리에서 번개처럼 출수한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석옥성이 싸늘하고 웃었다. "한번만 더 이의를 제기하면 목에 바람구멍을 내버리겠다." 추낙평은 어이가 없었다. 마도수가 무서운 거지 그의 의형제들이 두려운 건 아니다. '이런 쥐방울만한 새끼. 지금은 마도수가 있어 참지만 훗날 본때를 단단히 보여주지!' 내심 이를 갈며 추낙평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 앉았다. "형님,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위지강에게 예를 취한 잠송은 막사 밖으로 나왔다. 청명한 날씨였다. 그러나 피를 머금은 하늘이었다. 잠송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급보입니다." 무사 하나가 사색이 되어 그를 향해 달려왔다. "급히 보고드릴 말씀이!" "무엇이냐?" 무사의 말을 듣는 잠송의 표정이 급변을 거듭했다. 말을 전한 무사는 멀리 사라지고 잠송은 잠시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하늘!" 막사를 향해 돌아서는 잠송의 눈가에 습막이 서렸다. "긴급 보고입니다." 위지강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수님이 변을 당했다는 보고입니다.) 잠송의 전음을 들은 위지강의 자세가 급격히 허물어졌다. (연해월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후훗! 웃음이 터졌다. 실없는 웃음이었다. 도대체 하늘은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든 후에야 만족할 것인가?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녀를 죽인 자들을 이 세상 끝까지 추적 씨를 말려버릴 것이다. "잠송, 잠시 다녀오겠다." 주청산 등은 위지강이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급히 잠송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잠송은 추낙평을 위시한 남극벌의 고수들에게 눈을 돌렸다. "당신들은 나가 있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추낙평 등은 잠송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막사 밖으로 사라졌다. 잠송은 의아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는 축악 등의 시선 속에서 낮은 음성으로 독백했다. "형수가 돌아가셨다." "뭐요?" "그거 지금 말되는 소리요?" 잠송은 우울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깨끗이 타버렸다는 거야. 비봉당이고 뭐고 모조리……." '맙소사!' 위지강은 산정에 서 있었다. 바람이 미친 듯이 그의 옷자락과 머리칼을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망연히 대서천검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떡하실 겁니까? 형님!" 잠송의 음성이 위지강의 뒷등에 닿았다. 그의 뒤에는 어느새 다가선 잠송 등 일곱 사람이 늘어서 있었다. "제 생각에는 일단 돌아가서 다시 진상을 확인하는 것이……." 위지강이 굳은 얼굴로 잠송의 말을 잘랐다. "예정대로 진행한다." 위지강의 눈에서 강렬한 신광이 뿜어져 나왔다. "선두는 내가 맡는다." 쿠두두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천지진동을 일으켰다. 위지강을 선두로 해서 잠송 등이 탄 말들이 살벌한 기세로 치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남극벌의 고수들인 추낙평과 곤강 등이 따르고 있었다. 폭풍 같은 기세를 앞세우고 인마들은 자욱한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무섭게 질주했다. *** 콰아아아아! 거대한 물기둥이 하늘에서 땅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멀찌감치 뒤쪽의 산봉우리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쿠쿠쿠쿠쿵! 자욱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육중한 기세로 웅덩이에 내려꽂히는 물기둥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폭포 아래쪽, 강처럼 넓은 물가에 여러 개의 통나무기둥에 떠받쳐 높다랗게 세워져 있는 작은 모옥이 하나 있었다. 뾰로롱! 짹짹짹! 모옥의 지붕과 창틀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앉아 있거나 더러는 날아다니며 밝아오는 아침을 노래하고 있었다. 창문에 드리워진 휘장 너머의 침상에는 연해월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풀어헤쳐진 채 얼굴은 매우 창백해 보였다. 새소리와 눈부신 아침 햇살 속에서 연해월은 천천히 실눈을 떴다. 낯선 실내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완전히 눈을 뜨며 놀라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우욱!" 그녀는 등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살짝 드러난 가슴앞섶 사이로 흰 붕대가 가슴을 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악!" 연해월은 매우 힘겨워하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한편으론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며 이곳이 어딜까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로 크진 않지만 규방처럼 아담하고 아늑하게 꾸며진 실내였다. 그리고 실내에는 지금 그녀 혼자뿐이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던 불기둥과 흑의복면인들을 떠올리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렇다면 그자들이 나를?'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조심스럽게 침상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가로 다가갔다. 밖을 내다본 연해월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목책으로 만들어진 난간에 등을 보인 채 폭포 쪽을 응시하고 있는 한 사내, 그의 뒷모습은 틀림없는 사마군이었다. "설마?" 사마군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연해월을 쳐다보았다. "더 자지 그랬어?" "오라버니!" 마침내 연해월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자식, 몇 년 못 봤다고 유부녀 티가 줄줄 흐르는군그래." 연해월은 알 수 없는 설움에 눈물을 쏟으며 사마군의 품을 향해 뛰어들었다. "흑! 오라버니!" 와락! 연해월은 사마군의 넓은 가슴에 푹 안겼다. "우우… 우우욱……!" 그녀는 얼굴을 가슴에 묻은 채 목이 메인 울음을 토해내었다. "그래. 울고 싶을 땐 실컷 울거라." 사마군은 두 손으로 연해월을 가볍게 안은 채 무거운 얼굴로 다독거려 주었다. "아무리 울고 또 울어도 네 가슴에 맺힌 피 멍울이야 지워질 리 없을 테지만……." 연해월은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 까악! 까악! 수많은 까마귀 떼가 대서천검원의 폐허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웅장하고 거대한 고루거각들은 모두 온데간데없고 부서지고 주저앉은 전각의 지붕과 기둥 위로 수많은 시체만이 음산하게 널려 있었다. 그 사이를 오가며 남극벌의 무사들이 죽은 자신들의 동료들의 시체를 커다란 구덩이로 옮기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도검불침을 자랑해온 유령백팔귀도 마도수 앞에선 별수없군그래!" "아예 통째로 부숴 버리는데 도검불침 아니라 도검불침 할애비라도 무슨 소용 있어?" "말이 났으니망정이지 아까 전장 속을 누비고 다니는 마도수를 보니 정말 소름이 끼치더구만!" "난 하마터면 심장이 내려앉아 죽을 뻔했는데 소름만 끼쳤으면 다행이지!" "유난히 붉은 노을을 등지고 그 속에서 온 천하를 집어삼킬 듯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던 악마적인 광기(狂氣)……!" 사내는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특히 무적검맹의 다섯 번째 고수인 유령노조의 몸뚱이를 사정없이 폭발시킬 때의 그 가공할 모습이란……!" "그렇네. 아직 한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만약 팔열지옥을 뛰쳐나온 악마가 있다면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네." 사내는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무림의 신흥세력으로 급부상 하던 대서천검원, 그러나 지금은 시체들만 즐비한 죽음의 사지로 변해 있었다. 화려했음직한 전각의 계단 위. 위지강이 죽음 같은 고독을 발산하며 기대앉아 있었다. 아마도 상당량의 술을 마신 듯 그의 주위에는 빈 술병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잠송이 위지강의 앞에 나타나 우려의 표정을 지었다. "들어가서 좀 쉬시는 것이……." 위지강은 아무 말 없이 술병을 통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삽시간에 한 병을 다 비운 위지강은 빈 술병을 휙 내던졌다. 위지강은 손등으로 입가를 쓰윽 문지르며 낮은 음색으로 말했다. "나 대신 아우들을 좀 맡아줘야겠다." 순간 잠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위지강은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저희들도 따라가겠습니다, 형님!" 잠송이 절박한 목소리로 동행할 것을 간청했지만 위지강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만약 열흘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가서 마음대로 하도록……." 휘이이잉! 잔재가 흩날리는 폐허 저쪽으로 사라지는 위지강.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선 채 바라보는 잠송의 눈길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 남극벌. 입구의 정문 위에는 달빛 아래서도 유난히 펄럭이고 있는 깃발이 보였다. 수많은 고루거각 중 무사들의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는 가장 크고 화려한 월영각. 먹음직스런 각종 과일이 가득 담긴 과일바구니에서 포도알 하나를 툭 따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 보였다. 서너 명이 뒹굴어도 됨직한 천축산 상아로 만든 화려한 침상 위에는 내의 차림으로 기대앉아 있는 철륭. 그 옆에 앉아 시중을 들고 있는 염서시가 있었다. 염서시는 속살이 훤히 다 비치는 얇은 잠자리 날개 같은 망사의를 걸친 채 포도알을 철륭의 입 속으로 넣어주었다. 입 안에 든 포도알을 오물거린 뒤 남은 씨를 염서시의 손바닥 위에 뱉어낸 철륭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유령노조가 지키던 대서천검원이 씨가 말라버렸다는 소식이다." 철륭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내었다. "마도수, 그 친구 정말 대단해." 그는 손수건을 염서시에게 건넸다. "피는 속일 수 없다는 듯, 날뛰는 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살아 있는 제 애비를 보는 듯한 착각을 할 때가 있단 말이야." 이미 오래 전부터 위지강이 검존무적 위지백의 자식임을 눈치채고 있던 그였다. 그 또한 강호육기의 당사자가 아닌가! 그러나 철륭은 지금까지 위지강의 진면목을 모르는 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 끌게요." 염서시가 요염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륭은 침상을 내려가려는 염서시의 손을 턱 잡았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 녀석이 그렇게도 좋으냐?" 염서시는 고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반문했다. "그렇게 보여요?" 철륭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비봉당 사건, 네 짓이라는 거 알고 있어." 염서시는 한쪽 발은 바닥을 딛고 다른 한쪽 발은 침상에 올려놓은 도발적인 자세로 철륭의 옆에 앉았다. "좋아한다고 대답하면 질투하실 건가요?" 철륭은 염서시를 확 끌어당겼다. "어멋!" 염서시의 풍만한 육체가 그의 몸 위로 올라탄 모습이 되었다. 철륭은 손가락으로 염서시의 턱 끝을 치켜들었다. "내 말 잘 들어." 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즐기는 건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까지 멋대로 내둘렀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붙어 있지 못 할 거야, 알겠나?" 염서시는 가늘고 투명한 손가락으로 철륭의 앞섶을 풀어헤쳤다. "걱정 말아요, 제 마음은 오직 당신뿐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철륭은 눈을 지그시 감고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그래야지! 네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염서시는 뜨거운 혓바닥으로 철륭의 가슴을 핥듯이 애무했다. "으… 음!" 쾌감에 젖은 철륭의 입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철륭과 염서시! 언젠가 염서시는, 철륭은 의부일 뿐이라고 위지강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위지강뿐 아니라 남극벌 인물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듯한데, 그런데……. 염서시는 혓바닥을 움직이면서 비웃는 눈초리로 철륭을 흘겨보았다. '월영천혈기(月影千血氣)인지 뭔지 하는 극사마공(極邪魔功)을 익힌 뒤론 사내 구실도 못하는 주제에 질투는…….' 염서시의 얼굴이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철륭은 야릇한 쾌감에 전신을 움찔하며 숨막힌 신음을 토했다. "어… 억!" 철륭의 사타구니 사이에서 염서시의 머리가 상하로 움직일 때마다 긴 머리카락이 파도치듯 출렁거렸다. 철륭은 두 손으로 염서시의 머리카락을 콱 움켜쥐었다.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몸 구석구석으로 번지는 절정의 쾌감을 만끽하며 벅차 오르는 희열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좋아! 아주 잘하고 있어……. 넌 역시 최고야!"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