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복씨 엄마 삶
최원혜
엄마는 참으로 굴곡진 인생 살다가 돌아간 지도 어느덧 수십 년 세월이 흘렀다. 요즘같이 좋은 시대 살아계셨다면 올해로 구순이 넘었을 것이다. 백세시대인 요즘 엄마 나이대 친구도 살아계시는 분이 있다. 엄마는 성주 월항면 대산리에서 면천복씨의 맏딸로 태어나 살았다. 외가는 천석꾼, 만석꾼 하는 부자이어도 “여자는 공부하면 너무 똑똑하여 못쓴다.”고 하던 시절이다. 외할아버지의 어깨너머로 글 깨쳤기에 받침 없는 글자만 쓰고 읽었다. 너덜너덜한 수첩에 자녀들의 전화번호를 보면 그렇게 알 수 있다.
어머니는 그 시절 열여섯 나이에 일본군 정신대라는 “위안부”에 끌려갈 위기가 왔다. 정신대는 일본군 성욕 해결을 위하여 일본 정부가 중일전쟁 및 아시아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주둔지, 위안소에 배치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는 정신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외가 어른은 마을 바깥 동네 미혼 총각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어머니는 젓가락 꽂을 땅덩어리조차 하나 없는 총각의 아버지와 야반도주하듯 밤에 물 한 사발 떠 놓고 혼인하였다. 해가 뜨면 정신대에 차출되어 가야 한다. 임자 있는 몸은 명단에서 빼준다고 하는 정보를 받았기에 그렇게라도 서두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시절 누구나 힘들게 살았다. 그러나 우리 집안에서는 우환까지 겹쳐 어머니를 더욱더 힘들게 하였다. 내 위로 언니, 오빠 등 네 남매는 세 살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저세상으로 보내었다. 무척 힘든 그런 일들을 겪은 어머니의 굴곡진 인생에서 얼마나 힘들게 힘들게 만들었던 것인가?
나도 어머니처럼 가슴 찢어지는 삶을 살았다면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말로도, 글로도 표현하지 못할 집안의 우환을 모두 견뎌내고도 나를 이 세상에 빛 보게 하였다. 어머니에게 이보다 더 큰 은혜가 또 있을까?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이 세상에 오직 한 분인 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내가 결혼 나이 때이다. 어느 날 회사 생활하는 나에게 이모 중매로 요즘 말하는 “소개팅으로 선을 보라.”고 연락이 왔다. 그 시절 “시부모가 양반이고, 밥은 먹고 살겠더라.”고 하는 아버지 처제인 이모의 얘기에 아버지가 직접 사주단자 써서 보내었다. 나는 사주단자를 보내고 나면 당연히 결혼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부랴부랴 회사에 사직서 내고, 그해 1월 2일 첫 만남, 8일에 상견례 등 번갯불에 콩 굽듯 일사분란 하였다. 아버지는 22일 혼인할 날을 받아왔다. 여동생은 지금도 나를 놀린다. “언니 형편이 조선시대 여인이 따로 없다.”고 하였다
내 나이 스물네 살 서문시장 부근 대성예식장에서 결혼식 하는 날이다. 겨우 삶을 붙들어 키운 딸의 혼인이어서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였다. 그날 혼인식 마치고 나온 어머니에게 즐거움의 기쁨도 잠시 갑자기 먹구름이 끼었다. 예식장 앞 횡단보도 건널 때이었다. 어디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었다. 뒤돌아보는 순간 자색 빛깔의 두루마기 입은 여인이 쓰러져 있는 형체가 사람들의 사이에 보이었다. 어머니가 버스에 부딪혀 교통사고가 났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호사다마인가? 청천벽력이다. 마른하늘에 웬 날벼락인가? 너무나 놀라 그 충격으로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여인숙에 머물러 직장 동료 간호사인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깨어났다.
그날의 하객들은 혼비백산하여 난리가 났다. 결혼식이 초상집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고를 발견하였던 여고 동창이 119 도착할 겨를도 없이 지나가던 택시 붙들어 차 안에서 응급치료하여 동산병원에 바로 입원시키었다. 어머니는 한동안 의식불명 상태이었다. 어머니가 입원하는 바람에 나는 동산병원 부근 동산호텔에 신혼여행지로 정하여 잠시 머물렀다. 22일 만에 결혼식 올린 새신랑은 어색하던 모양이다. 서울에서 와있던 내 친구 불러 나를 위로하게 하였다.
어머니는 두 주 정도 지나서야 의식이 돌아왔다. 참으로 다행이다. 그때 만약 시댁 쪽에서 누군가 사고가 났다면 며느리 잘못 들여서 그럴 수 있다고 수군거릴 일이다. 모두 친정엄마가 대신에 액땜해 주었다고 하는 말도 들리었다. 나는 그 말뜻이 이해되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던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데 할 말인가 말이다.
딸은 엄마의 팔자를 닮을 수도 있는 것일까? 어머니 삶은 굴곡지며, 뼈저린 고통 속의 모진 인생을 보내었다. 우리 속담에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고 하듯 어려운 일이나 고된 일을 겪은 뒤에는 반드시 즐겁고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였다. 나의 고생 끝에 좋은 일이 오리라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다.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하면 새 발의 피이지만 말이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고 하는 문득 어느 시인의 글이 생각났다. 그렇다. 배곯아 가며 젓가락 수천 개, 수만 개 꽂을 땅덩어리 마련하여 우리 오 남매 키우고 공부시키던 엄마는 당연히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우리 생각에는 왜 그렇게 생각이 닫히어 있었을까? 조금만 생각하면 엄마도 잘 먹어야 하고, 좋은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데 우리는 그때 그 시절 그런 것을 몰랐다. 정말 숙맥이 따로 없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던 어머니 살아생전에 딸로서 잘살고 있는 모습 보이려고 무척 애를 써보았다. 최선 다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정말 열심히 살았다. 어머니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굴곡진 삶을 살아서인지 암으로 인하여 기어코 운명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여성으로서는 힘없고, 약 하지만 엄마로서는 세상에도 가장 강한 분이다. 어머니의 일생에서 굴곡진 인생을 돌아보면 참으로 슬프고, 슬프다. 지금 나의 삶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마냥 넋두리하는 삶이다. 엄마는 하염없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조금만 더 사셨으면 하였지만 이미 떠나버린 기차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면천복씨 나의 엄마로서는 영원하다.
(20250719.)(20250727. 7.8월호 신작수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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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천복씨(沔川卜氏) : 시조는 고려의 개국 공신 복지겸(卜智謙)이다. 호남계 정(丁)씨와 같은 2획 으로 전 세계 모든 성씨 중 두 번째로 획수가 적다. 면천은 오늘날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이다. 면천복씨 인구의 수는 “9,538명”(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이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