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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 제3권 차례 -----
제1장 살청막(殺請幕)을 접수하다
제2장 팽후(彭珝)의 자존심 대결
제3장 혈문(血門)을 치다
제4장 전장(戰場)에도 꽃은 피는가
제5장 피맺힌 승리
제6장 지는 해와 떠오르는 태양
제7장 자연 속에서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완성하다
제8장 뜻밖의 비밀
제9장 만야평(萬野坪)으로
제10장 끝난 뒤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무극대도] 3권 제1장 살청막(殺請幕)을 접수하다
①
"허억! 누구냐?"
느닷없이 들려온 음성에 천면사신은 화들짝 놀라 마파람을 들이키
며 뒤로 물러났다.
"천하의 천면사신이 다 놀라다니."
'뒤!'
생각과 동시에 빙글 몸을 돌린 그는 벼락같이 오른손을 내갈겼다.
꽈릉!
금빛이 쭉 뻗어 나갔다. '꽝!' 하는 폭발음이 들리며 동굴 전체가
무너질 듯 웅웅거렸고, 가루가 된 종류석이 눈을 못 뜨게 하였다.
뼈와 살을 가진 인간이 맞았다면 형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어
마어마한 위력이었다.
"겁나는 위력이군."
"!"
음성은 뒤에서 들려왔다. 허나 이번에는 몸을 돌리지 못했다. 차
가운 금속성 물체가 목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툭!
천리화통이 천면사신의 발아래 굴러 떨어졌다.
습기가 가득한 바닥에 떨어지고도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면 진
짜배기인 모양이었다.
천면사신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대로 화석이 된 것
같았다. 그는 놀란 가슴을 겨우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대체 넌 누구냐?"
즉각 응답이 왔다.
"그새 내 목소리를 잊은 모양인데… 섭섭하군."
다정한 사람에게 하는 듯한 이 음성.
누구인지 깨닫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천면
사신의 눈이 점차적으로 커졌다.
"단… 호삼! 네가 살아 있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그의 짐작대로 단호삼이었다.
사실 처음 환사가 내려왔을 때 무척 놀랐지만 그는 모습을 나타내
지 않았다. 쓸데없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다행히 환사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천면사신이 오자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천면사신은 환사처럼 그냥 지나치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호삼은 흐릿하게 웃었다.
"천행(天幸)이라고 해두지. 그보다 당신, 정말로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군그래. 그렇게도 욕심이 났나?"
"!"
천면사신은 일시간 말문이 막혔다.
그가 아무리 냉혹, 침착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비겁한 놈! 암수(暗手)를 쓰다니. 그러고도 네가 영웅호걸이라
할 수가 있겠느냐?"
"난 영웅호걸이 아니라 평범한 범부(凡夫)지."
낮게 중얼거린 단호삼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물었다.
"또 격장지계(激將之計)를 쓰는 걸 보니 무척 억울한 모양이지?"
속셈을 간파당한 천면사신의 얼굴이 소리 없이 일그러졌다. 허나
이내 뻔뻔하게 입을 놀렸다.
"알면 됐다! 정정당당하게 한번 겨뤄 보자!"
단호삼은 잠시 망설였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었으므로.
"좋다!"
승낙을 한 그는 백혼검을 거둠과 동시에 훌쩍 사 장 뒤로 물러났
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기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전 같으
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몇 번에 걸친 격전과 상대의 심리(心理)
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니나다를까.
백혼검이 어깨에서 떨어지는 순간, 번개같이 몸을 돌려 금황신수
를 쳐내려던 천면사신의 얼굴이 흉하게 구겨졌다.
'놈! 영악하군! 그러나… 흐흐, 큰 실수를 했다, 네놈은!'
내심 비릿한 살소를 흘린 그는 두 팔로 빠르게 원을 그린 후, 번
개같이 몸을 날리며 한순간에 십이장(十二掌)을 갈겼다.
꽈르르릉!
꽈리를 튼 금황신수가 금룡(金龍)이 승천하듯 꿈틀거리며 짓쳐들
자 단호삼은 백혼검을 마구 휘저었다. 마치 어린애가 잠자리를 잡
듯 무질서한 손놀림이었다.
허나 그것을 본 천면사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햇살보다 더
강렬한 검광이 수천 갈래로 쭉 뻗으며 금황신수를 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악!"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천면사신의 귓속으로 단호삼의 음
성이 파고들었다.
"만천검결의 제일식인 만천수류(滿天水流)라는 것이오."
②
위이잉!
바람이 허리까지 늘어뜨린 머리칼을 말갈기처럼 흔들고도 모자라
산도둑이 흉악하게 보이기 위해서 마구잡이로 기른 턱수염마저 휘
젓고 있었다.
걸레쪽처럼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시뻘건 흉터들.
깊은 산중에서 만났다면 영락없이 흑곰으로 오인 받아도 좋을 거
구(巨軀) 사내의 눈에서 흘러 나오는 눈빛은 예상외로 밤하늘의
별을 따다 붙인 듯 영롱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이는 그 눈가에 문득 가는 주름이 잡혔다.
"많이도 몰려왔군. 살객들이 전부 온 것이오?"
이런 밝은 대낮에 하늘 보기가 부끄러운지 검은 옷에 검은 복면으
로 얼굴을 가린 자들만 해도 어림잡아도 백오십 명은 됨직 싶었
다.
"!"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긴가민가하고 쳐다보던 네 사람의 눈빛이 크
게 흔들렸다.
"단호삼! 진정 네놈이란 말이냐?"
왼쪽 팔의 헐렁한 소매 끝을 질끈 묶은 날카롭게 생긴 사십 중반
의 사내였다.
그가 바로 담사임을 알아본 단호삼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바로 맞추었소."
이제 확실해졌다. 놈은 천면사신을 죽이고 대신 올라온 것이다.
담사는 주춤 한걸음 물러나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이런 일이……."
단호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지금 이렇게 빨리 당신들을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소. 특히……."
말끝을 흐린 그의 눈이 뒤에 처져 잔뜩 굳어 있는 한 얼굴에 화살
처럼 날아가 박혔다.
"장훈을 만나다니. 진정 꿈만 같소이다."
음성은 극히 부드러웠다. 그러나 혈우 장훈은 눈동자가 파열되는
것 같은 아픔에 눈을 감으며 진저리쳤다.
그때,
"동굴에 있었소?"
환사였다.
그를 보는 순간 단호삼은 문득 일전(日前)의 일이 기억났다. 원래
담사, 환사와 동귀어진할 각오로 추혼검을 펼칠 때 추영화가 끼여
들어 환사의 검을 막았다. 하지만 추영화로서는 환사의 신검합일
된 검식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데 결정적인 순간에 웬일인지 환사가 검을 거두었다. 만일 그렇
지 않았다면 추영화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는 봄바람 같은 훈훈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환사."
순간 환사의 눈이 폭풍을 만난 듯 흔들렸다. 그는 무엇을 확인을
하고 싶은 듯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날 죽이지 않았소?"
"그러고 싶지 않았으니까."
간단한 대답이었다.
허나 의미심장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기도 했다. 싶지 않았
다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는 뜻이다.
'알고 있었다는 건가?'
환사가 잘끈 입술을 깨물 때였다.
"지금 놈에게서 무얼 알고 싶어 쓸데없는 말을 하느냐!"
버럭 고함을 지른 담사는 뒤를 돌아보며 사자후를 터뜨렸다.
"놈은 막주님을 해쳤다. 죽여라!"
일단 죽여놓고 보자는 고약한 심사였다.
"복명!"
살청막의 살객들은 우렁차게 복창하고 단호삼을 향해 벌떼처럼 달
려들었다.
메뚜기처럼 팔딱 뛰면서 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땅바닥에 넙죽
엎드리다시피 해서 달려오고, 경공술에 자신이 있는지 허공으로
날아드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금방 멈춰야만 했다.
"갈!!"
벽력대작(霹靂大作)이 이러한가.
단호삼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음성은 살객들을 기겁시키기에 족했
다.
내공이 약한 자들은 울컥! 피를 토하며 가슴을 움켜잡았고, 그 순
간에 단호삼은 오 장 앞의 지면을 향해 쌍장(雙掌)을 뻗었다.
꽈꽈꽈꽝―!
그는 눈 깜짝할 사이 염수권을 열 번이나 쳐냈고, 땅은 지진을 만
난 듯 천둥소리와 같은 굉음과 함께 움푹움푹 패였다.
"피해!"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살객들은 놀란 기러기처럼 이리저리 흩어졌
다.
경고를 하기 위해 땅만 때린 것도 모르고.
잠시 후 하늘을 가린 흙먼지가 가라앉자 천지번복(天地飜覆)이 일
어난 듯 사방 이 장 가량의 깊은 웅덩이가 무려 열 개나 생겨 있
었다.
그것을 본 살청막의 살객들은 몸을 오싹 떨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기등등했던 눈빛이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복면 속의 얼굴도 메주처럼 누렇게 떠 있을 것이 분명했다.
③
단호삼은 어깨를 쭉 펴고 형형한 안광(眼光)이 서린 눈으로 그들
의 눈을 쏘아보며 한 자 한 자 끊듯이 말했다.
"쓸데없는 피를 보고 싶지 않다. 모두 돌아가라. 막지 않겠다!"
그의 눈이 장훈에게로 옮겨졌다.
"하지만 넌 갈 수 없다."
부르르!
장훈뿐만 아니라 살객들의 몸이 눈에 띄게 떨렸다.
거악(巨嶽)!
그들의 눈은 일개 인간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만악(萬嶽)을 오시
하는 거악을 보고 있는 눈이었다.
'전보다 더 강해졌어!'
은근히 마음이 진탕되는 것을 느낀 담사는 이를 악물었다.
'지깟 게 그래봤자 혼자뿐이다. 흐흐흐, 막주도 죽었으니 이제 저
놈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내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담사의 간덩이를 부어오르게 하기에 족했다.
그는 남은 한 손을 번쩍 쳐들며 목청껏 소리쳤다.
"놈은 허장허세를 부리고 있다! 죽는 것은 놈이지, 우리가 아니
다! 그리고 지금 죽이지 않으면 나중에 놈이 복수의 칼을 휘두를
지도 모른다! 이에는 이, 피에는 피라는 강호무림의 철칙이 변하
지 않는 한!!"
말을 자른 담사는 장훈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다면 왜 혈우만 남으라고 했겠느냐?"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단호삼이 죽
은 후―그렇게 믿고 있었을 때―혈우와 단호삼의 관계에 대해 이
야기를 들었다.
찰나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땅으로 처져 있던 병장기들이 서서
히 위로 올라왔다.
단호삼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어코!'
단호삼은 한줌의 바람이 되었다.
파파팟!
가볍게 휘두르는 손짓에 공기가 찢어지고 불똥이 튀었다. 그렇다
고 무슨 기기묘묘한 절세의 권장법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육합권과 염수권, 그리고 가끔씩 이기선풍각을 쓸 뿐이었다. 하지
만 누가 뿌연 손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육합권을 보고 육합권이라
여기겠는가.
그 위력 또한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완벽한 기초에서 완벽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쉭!
뒤에서 칼바람이 일었다.
사람을 죽여주는 대가로 먹고사는 살객들은 이래서 골치가 아픈
존재인가 보다. 고함이나 욕설도 없이 조용한 움직임으로 급소를
노리고 드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시간이 지날수록 단호삼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있
었다.
상대가 아무리 많아도 자신은 혼자라는 것!
한 손바닥이 열 주먹을 당해낼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다수(多
數)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공간이 좁다는 뜻이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동작이 부자연스럽지 않겠
는가.
행여 동료를 상하게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반면에 단호삼은 공간이 넓었다. 무식하게 표현하자면 눈을 감고
휘둘러도 맞힐 수가 있을 정도로.
그래서인지 지금 그의 눈은 반개(半開)한 상태였다.
'이 다음에는 우측이겠지.'
생각이 끝나기 전, 그는 슬쩍 왼편으로 몸을 틀자 '팽' 하고 뒤에
서 덮치던 검이 귀밑을 스쳐 지나갔다. 고수라도 깜짝 놀랄 정도
로 간발의 차이였다.
허나 단호삼은 머리칼 한 올 간격으로 피해야만 반격이 용이하다
는 이론을 몸소 실천한 것이었다.
눈앞에 살객의 팔이 훤하게 드러났다.
지체없이 어깨 안쪽의 견우혈(肩 穴)을 움켜잡자마자 우측으로 홱
밀어 버렸다.
때마침 우측에서 덮쳐오던 흑의복면인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어
어' 할 사이도 없이 자신의 검이 동료의 가슴팍을 지르고 있었다.
찔렀는지, 동료가 뛰어들었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졸지에 동료를 죽인 꼴이 된 그는 이 시린 살음을 토하며 가슴팍
에 꽂힌 검을 뽑기 무섭게 좌측으로 튀어 오르는 단호삼의 허리를
쓸어갔다.
한데,
창!
뜻밖의 검명(劍鳴)과 더불어 팔뚝이 시큰거려 얼굴을 들어보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자신의 검을 중간에서 차단한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살청막의 살
객이었다. 앞에서 공격하던 동료와 부딪힌 것이다.
그 사이 단호삼은 이미 삼 장 밖에서 협공을 받고 있었다. 개떼같
이 모여든 동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자신이 없어 팔을 늘어
뜨린 그는 기어코 욕을 하고 말았다.
"저런 개자식들, 동작 한번 기똥차게 빠르네."
'들'이라는 복수(複數)를 쓰는 걸 보니 단호삼에게 하는 욕은 아
닌 듯.
④
이제 확실해졌다.
적(敵)이 아무리 많아도 한꺼번에 전후좌우(前後左右)의 네 방위
이상은 공격할 수가 없었다.
휙! 하고 솟구친 단호삼은 몸을 비스듬히 누인 채로 이기선풍각을
펼쳤다.
파파팡팡!
뻗고 거두어들임이 얼마나 빠른지 허공에는 희끗한 발 그림자와
폭죽 터지는 듯한 폭음만이 가득해 마치 공동파의 무영선풍각법
(無影旋風脚法)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큭!"
"으음!"
여지없이 손목을 격중당한 네 명의 살객이 병장기를 놓치고 짓눌
린 신음과 함께 비틀거리는 순간,
패앵!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네 명이 허공으로 따라 오르며 검기를 흩
뿌렸다. 밑에서 솟구친 둘은 발바닥의 용천혈(湧泉穴)을 노리고,
좌우에서 튀어 오른 다른 두 명은 상체를 쓸어왔다.
'이러다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
단호삼은 잘끈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육십 명 정도가 다치고, 죽어 있었다. 하지만 죽은 사람들은
다섯도 채 안되고 나머지는 관절을 꺾거나 살짝살짝 급소를 피해
부상만 입혔다. 지금 당장에 운신(運身)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정도면 분수를 알고 물러설 법도 하지 않은가. 한데 피를 안봐
서인지 살객들은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여전히 파상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결론은 났다. 바로 약발이 적게 먹힌 것이다.
단호삼은 발등을 찍어 이 장 가량 더 떠오른 다음 빙글 반 바퀴
회전시키자 머리가 아래로 향하는 자세가 되었다.
바로 눈앞에 있던 단호삼이 갑자기 새처럼 둥실 떠오르자, 졸지에
목표물을 상실한 네 명이 '엇!' 하는 경악성과 함께 지면으로 떨
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단호삼의 손이 버들가지처럼 세차게 떨리며 사방으로 일
진광풍을 일으켰다.
꽈릉!
여태와는 달리 조화선공을 손바닥에 모아 염수권의 열 초식 중 가
장 위력이 강한 회풍불류(廻風拂柳)라는 초식을 펼친 것이다.
"허억!"
복면 사이의 눈을 부릅뜬 그들은 본능적으로 수중의 검을 휘둘렀
다. 본능적이라는 것은 바로 경황이 없어 창졸간에 한다는 뜻이
다. 하니 무슨 위력이 있겠는가.
더욱이 단호삼은 단단히 작심을 하고 손을 쓴 터였으니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수밖에 없었고.
꽝!
벽력음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크아악!"
"아악!"
처절한 비명이 잇달았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비명이었다. 죽음을 알리는.
과연 효과 만점이었다.
단호삼이 스르르 미끄러지듯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지만 누구
하나 덤비는 사람이 없었다.
기실 그들은 살행(殺行)에 나서도 성공률보다 실패율이 높은 이삼
급의 살객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제야 주제 파악을 한 것이다.
움찔.
몸은 움찔거리고 있었지만 마음이 말을 안 듣는 듯 멍하니 서 있
기만 했다.
"저렇게 강할 수가!"
담사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비록 일급 살객들은 여섯뿐이고, 나머지는 이삼 류들이지만 말도
안되게 강했다. 단호삼이 태풍이라면 그들은 낙엽이었다. 추풍낙
엽이라는 말이 새록새록 생각날 정도로!
잠시 장내를 노려보던 그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싶은 듯 머리를
흔든 뒤 발악하듯 고함을 질렀다.
"뭣들 하고 있어! 죽여! 죽여버리란 말이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남은 살객들은 단호
삼의 폭풍 같은 기세에 잔뜩 주눅이 든 채 얼어붙은 듯 서 있을
뿐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그들의 눈과 귀에는 땅에 쓰러져서 신음을 토하고 있는 동료
들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잔혹한 살수(殺手)를 쓴 단호삼이 이런 기
회를 놓칠 리는 만무한 법. 그는 원진(圓陣)을 이루고 있는 살객
들 너머로 담사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그보다 키가 큰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당신이 직접 나서지 그래. 뒤에서 바락바락 고함만 치지 말
고 말이야."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는 극히 공경한 어조였던 것이 이제는 바뀌
어 있었다.
어림잡아도 스무 살이나 아래인 사람에게 반말을 들어서인지 아니
면 수하들 앞에서 치부를 찔려서인지 몰라도 담사의 얼굴이 붉어
졌다.
"이……."
잠시 치를 떨던 그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알아서인지 곧 머
리를 끄덕였다.
"좋다! 네놈이 얼마나 강한지 몰라도 우리 네 사람을 당하지는 못
할 것이다!"
교활했다.
혼자서는 자신이 없으니까 환사, 흑매, 혈우를 끌어들이려는 의도
가 분명했다.
한데 그때였다. 담사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든 일이 생긴 것
은.
⑤
"나는 빠지겠소."
"!"
흠칫 놀란 담사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끔벅거렸다. 허
나 결코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않은 말을 한 환사가
몸을 뒤로 빼고 있는 게 보였으니까.
담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흐흐흐, 다시 한 번 말해 보아라, 환사."
환사는 서슴없이 말했다.
"빠지겠다고 했소."
이번에는 확실하게 들었다. 너무 또렷하게 들려서 탈일 정도로.
담사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미친… 죽음이 두려우냐?"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환사는 갑자기 배알이 없는 사람이
된 듯 고소를 머금고 미미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부정은 안하겠소. 하지만 막주께서 죽은 지금 더 이상 살청막에
몸담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오."
"환사! 막주가 널 얼마나 총애했는데… 막주가 죽자마자 그런 말
을 하느냐?"
문득 환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막주께서 날 총애한 것은 사실이오. 허나 그 이유는 바로 내게는
막주가 되고픈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지 진심에서 우
러나와 그런 것은 아니오."
살청막주가 되기 위해서는 현 막주를 죽여야만 된다. 그래야만 완
벽한 살객으로 탄생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허나 앞에서 밝혔듯
이 천면사신은 제자를 두지 않았다. 그렇지만 음흉한 담사나 혈우
의 손에 언제 죽을지도 몰라 살객답지 않게 마음이 여린 환사를
더 가까이 해 이들을 견제했던 것이다.
"그래서 배반을 하겠다는 거냐?"
환사는 어깨를 추슬렀다.
"좋도록 생각하시오."
"죽일……."
그의 태도가 단호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담사가 진득한 살기를
피어 올릴 때, 단호삼의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담사, 당신도 떠나겠다면 말리지 않겠
소!"
'저 자식이!'
얼굴이 팍 구겨진 담사는 꼴 같지 않게 호기를 부렸다.
"무인(武人)은 명예에 죽고 산다! 그런데 비겁하게 등을 보이라
고?"
그는 어깨를 쭉 펴고 주위를 훑으며 말했다.
"흥! 좋다! 갈 놈은 가라! 나 혼자라도 막주의 원수를 갚겠다!"
상황이 묘하게 변했다.
무자비하게 공격을 할 때도 말이 없던 살청막의 살객들이 웅성거
렸다. 문제는 나중에 죽을 거냐, 지금 죽을 거냐였다.
담사가 말은 저렇게 하지만 평상시 보여준 잔혹한 행위를 보면 나
중에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또 단호삼을 죽인다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우왕좌왕하는 살객들을 본 단호삼은 암암리에 염두를 굴렸다.
'담사를 쓰러뜨리지 않는 한 이 자리를 빠져 나갈 수 없겠는걸!'
결심을 굳힌 그는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단숨에 오
장 높이까지 도착한 그는 지체없이 허리를 비틀어 운룡대구식으로
수평으로 날아갔다.
일단 손을 쓰기 시작하자 단호삼의 몸은 섬전처럼 빨랐고, 일순간
의 망설임도 없었다.
쌔액!
그의 허리춤에서 서릿발같이 서늘한 검기가 빗살 같은 속도로 담
사의 양미간 사이의 미심혈을 향해 쏘아졌다.
"엇!"
순간 단호삼이 비겁하게 기습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
던 담사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게다가 삽시간에 육 장이
라는 거리를 단축시킬 재간이 있으리라고는 더더욱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일시 놀라기는 했지만 검기가 닿기도 전에 미심혈이
찢어지는 듯하자 백전노장(百戰老將)답게 번뜩 정신을 차린 담사
는 천변환영술(千變幻影術)을 펼쳤다.
순간,
스스스스…….
신형이 흐릿하게 변한다 싶은 순간 담사의 몸이 정확하게 일흔두
개로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어?"
단호삼은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했다.
꼼짝없이 육합검법의 화룡정점을 무형화시킨 백혼검으로 담사의
미심혈을 꿰뚫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순간에 똑같은 모습
의 담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목표물을 상실한 단호삼은 휘릭! 공중제비를 돌며 땅에 내려설 수
밖에 없었고, 그 사이 담사의 환영들은 둥글게 포진하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단호삼의 미간이 좁아졌다.
"분신술(分身術)인가?"
그러자,
"무식한 놈! 이것은 분신술이 아니라, 천변환영술이라는 것이다!"
담사는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단호삼의 눈에는 그게 그거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분신술은 불과 서너 개의 환영밖에 만들 수 없
으며, 환영이라는 것도 실체(實體)와는 다르게 흐릿하기 때문에
심지가 굳은 내가고수에게는 별 효력이 없었다. 허나 지금 담사가
펼치는 천변환영술은, 주술(呪術)과 사법(邪法)으로 유명한 배교
(背敎)의 진산절기로서 분신술과는 천양지차의 차이가 있다. 하지
만 이를 알 리 없는 단호삼이었다.
천변환영술을 극성으로 익히면 무려 구십아홉 개의 환영을 만들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환영이 시술자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변하기도 하면서 무공을 펼칠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라. 구십팔 개의 환영과 한 개의 실체가 제각기 다른 자
세로, 다른 무공을 펼쳐 공격한다면 가히 짐작이 가고 남지 않겠
는가.
하면, 담사는 이미 강호무림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배교의 무공을
어떻게 익히고 있단 말인가?
답은 간단했다. 백두 번째의 살인 대상자는 칠성검(七星劍) 양문
요(梁文曜)란 자였는데, 당시만 해도 담사는 양문요 같은 고수를
일검에 죽일 실력이 없어 부상만 입힌 상태에서 마지막 일격을 가
하려는 순간, 양문요는 자신을 살려주면 절세 무공이 담긴 비급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손해볼 것이 없는 담사는 당연히 수락했고, 그때 받은 비급이 바
로 천변환영술이었다. 비급을 얻은 그는 서슴없이 양문요를 죽였
고 천변환영술을 익히고도 시전한 적이 없다가 오늘 마침내 펼친
것이다.
⑥
이러한 사실을 몰라 대경하고 있던 환사는 단호삼에게 전음을 보
냈다.
(저건 분신술과 다른 배교의 술법이오. 다행히 환영이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지 않는 것을 보니 칠 성 수준이오. 하니 그림자가 있
는 것이 실체외다.)
순간 단호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과연 추적술과 은신술의 대가(大家)인 환사의 말은 틀림없었다.
눈여겨보니 쉼없이 움직이는 환영 중에 희끗한 그림자를 남기는
하나가 있었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마음이 일자 검(劍) 또한 일었다.
번쩍!
한 줄기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변화라는 군더더기를 완전히 제거
한 최단거리로 가르는 쾌검식이었다.
자신을 유인하기 위한 허초인 줄도 모르고 환사의 말처럼 칠 성에
불과한 천변환영술을 펼치며 단호삼의 허점을 노리고 있던 담사에
게는 날벼락 같은 일검이었다.
그는 '앗!' 하고 놀랄 사이도 없이 연속으로 삼장(三掌)을 내갈겼
다.
소리도 없는 무성마장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자연히 천변환영술은
사라지고 담사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극심한 내공을 요하는
두 가지 절세 무공을 동시에 펼칠 재간이 담사에게는 없었기 때문
이다.
찰나지간, 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단호삼은 무성마장이 거대한 암
경으로 변하는 순간 백혼검을 잽싸게 거두며 훌쩍 허공으로 도약
했다.
높이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가장 빠르게 공격할 수 있는 높이까
지 솟구친 그는 다리를 가슴팍으로 끌어당기며 백혼검을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파앗!
섬광 같은 검기가 피어 올랐다. 지나가는 개도 웃는다는 육합검법
의 일도양단이었다.
그러나 담사는 웃을 수가 없었다.
목표를 잃고 휘청거리던 순간이었고, 자신의 머리를 두 조각으로
쪼갤 기세로 쏘아져 오는 일도양단의 검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
어 과연 저것이 지금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내려오는지도 의문스러
웠기 때문이다.
그때다.
"뒈져!"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혈우 장훈이 대갈과 함께 허공에
무수한 검화를 피워내며 옆에서 짓쳐들었다.
하늘이 온통 붉은빛으로 변했다. 검화도 핏빛이었고, 검도 핏빛이
었으며 사람의 몸도 핏빛이었다.
장훈이 사용한 검법은 마도의 칠대마공 중 하나인 혈폭참마검법
(血爆斬魔劍法)이었고, 검은 혈폭참마검법을 펼치기 위해 특수 제
작된 화혈마검(火血魔劍)이라는 마검으로 뜨거운 열기를 담고 있
었다.
이대로라면 담사를 죽이더라도 단호삼 또한 무사할 수 없는 상황
이었다.
그 순간, 단호삼의 백혼검이 담사의 머리칼을 자르면서 횡으로 쓸
어갔다. 간발의 차이로 죽음을 면한 담사의 머리칼이 우수수 흩날
리는 가운데,
차차차창!
수십 개의 불똥이 피어 올랐다. 화혈마검이 쇠를 무같이 자르는
마병이기라면, 백혼검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며 그 무게는 중병기인
파풍도와 같았다.
더욱이 단호삼은 살청막에 쫓길 때의 그가 아니었으니…….
"크……!"
기습에도 불구하고 가는 신음을 토하며 뒤로 주르르 밀려나는 장
훈을 향해 단호삼은 허공에서 허리를 비틀어 유령처럼 따라붙으며
이기선풍각을 연속으로 찼다.
파파팡!
당황한 장훈은 급히 호신강기를 운공해 팔을 들어 막았다. 허나
서너 번의 발길질은 막을 수 있었으나 수십 번에 걸친 이기선풍각
은 팔 하나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위력적이었다.
빠각!
팔이며, 가슴뼈가 그대로 박살났다.
"으악!"
장훈은 피분수를 뿜어냄과 동시에 길다란 호선(弧線)을 그리며 십
여 장 밖에 개구리처럼 내동댕이쳐졌다. 꼼짝도 않는 것을 보니
즉사한 모양이었다.
단호삼이 빙글 역회전하며 땅으로 내려서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우웅!
뒤에서 막대한 암경이 쏘아지는 것을 느꼈다. 두말할 것 없이 담
사의 무성마장이리라.
그는 철판교(鐵板橋) 신법으로 몸을 지면과 수평이 되게 누인 다
음 두 발로 힘껏 땅을 밀었다. 하늘을 보는 자세로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듯 쭈욱 밀려나며 단해일검을 펼치려던 그는 그만 신형을
멈추고 말았다.
손!
한 쌍의 섬섬옥수(纖纖玉手)가 시뻘건 피를 잔뜩 묻힌 채 담사의
가슴을 꿰뚫고 삐죽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휴지처럼 구겨진 담사의 볼이 실룩거렸다.
"네년이 왜 나를……?"
"네놈은 내 순결을 짓밟았다!"
뜻밖에도 흑매의 음성이었다.
곧 죽을 거면서도 담사는 쓸데없는 변명을 하였다.
"그건 막주가 시켜서……."
"닥쳐라! 십 년 동안 그 짓을 하라더냐? 그리고 천면사신, 그놈도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한 것이 원통할 뿐이다!"
흑매는 으드득! 이를 갈아붙이고 손을 비틀어 뽑았다.
"크악!"
담사는 뻥 뚫린 자신의 가슴에서 피가 쭉 뻗어 나오는 것을 보며
철퍼덕 쓰러졌다.
살청막주 자리를 노리고 있었던 담사로서는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
이었다.
해가 떨어지고 있다.
싸움을 하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그것도 어떤 신념에 잠겨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단호삼은 씁쓸하게 웃으며 무릎을 꿇고 있는 환사와 흑매, 그리고
살청막의 살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오."
환사는 머리를 숙인 채 대답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습니다. 그저 함께 생활하는 것이면 족합
니다."
매번 이렇다. 대답은 칼을 자른 듯 단호했다.
허나 단호삼은 이들이 녹산영웅문에 투신(投身)하는 것을 진정으
로 바라지 않았다. 이들이 세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살객이라
서가 아니라 이 좋은 기회에 차라리 검을 놓고 평범하게 살아가기
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부상자들을 치료한 뒤,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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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