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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천외의 맥(脈)
온통 흰빛뿐이었다.
설원(雪原) 한가운데 환상처럼 세워진 하나의 궁전(宮殿)이 있는데,
궁전은 아름드리 얼음 기둥에 의해 세워졌는지라 멀리서 보면 완전한
흰빛이었다.
일컬어 백색마궁(白色魔宮)!
아아……, 그곳은 바로 마황군도의 심장부가 아니던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변황의 오지를 헤매며 힘을 기른 악마교단(惡魔敎
團)이 이룩한 무림세력. 그들은 마황군도에 정착하였으며, 항차 천하
를 정복할 만한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보라, 끝없이 펼쳐진 빙원을.
얼핏 보면 너무나도 너른 평원 같으되, 기실 그것은 얼어붙은 바다에
불과할 뿐이었다. 과거 일대는 무릉도원을 능가하는 신(神)의 영토
가 있었으되, 마왕의 저주로 인해 도원이 파괴되고 모든 것이 빙하(
氷河)에 뒤덮여 버렸다는 전설이 맴돌고 있었다.
― 하늘 밖에[天外] 하늘[天]이 있나니……. 그 하늘이 열리는 날,
마기(魔氣)가 사라지리라!
천 년 넘게 그러한 전설이 떠돌고 있었다.
무수한 강호기인들이 그 전설을 찾기 위해 북해로 왔으나 단 한 사람
도 전설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기인들의 행렬은 끊어지지 않았
으며, 하늘 밖의 하늘을 찾는다는 것은 북방무림계 인사들의 영원한
염원으로 화하고 말았다.
사실 마황군도는 그 전설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들의 힘을 욱일승천
신장시키고 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었다.
혈천마독(血天魔督)은 자신을 천외무맥(天外武脈)의 후계자라고 칭하
였으며, 어리석은 변황무림인들은 그를 살아 있는 우상으로 여기며
그에게 충성하며 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북방인들의 기질은 거칠면서도 단순한 데가 있다. 혈천마독은 천외지
비(天外之秘)를 이용하여 그들을 끌어모았으며, 마황군도는 그러한
풍운 가운데 이루어졌다.
휘리리리링―!
죽음보다도 가혹한 눈보라가 백색마궁을 휘감고 있다. 그리고 언제부
터인가 백색마궁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흰 옷 입은 무리들은 눈보라
가운데서도 보행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두우― 두두― 두두―!
건마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백색마궁을 향해 가고 있었으며, 마상(馬
上)의 무사들은 흰 피풍의(避風衣)에 흰 절풍모(切風帽)를 쓴 채 감
격에 겨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꾸역꾸역,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사들이 마황군도의 백색마궁
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가히 십만, 변황 일대의 패자(覇者)들이 대거 마황군도의 심장부를
향해 이동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동은 반년 전부터 시작이 되었으며
, 최근 들어 십여 개 변황세력의 우두머리들이 백색마궁을 친히 방문
하며 흥분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 납살(拉薩) 운중마부(雲中魔府)의 운중신마(雲中神馬).
그는 천 자루 마도(魔刀)를 지닌 채 백색마궁에 당도했다.
그는 마황군도가 대륙마검회와 구파일방을 상대로 혈전의 기치를 쳐
들고 변황우사들을 집결시키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해 왔으며, 해외무
맹(海外武盟)이 마황군도에 의해 창건이 되는 데에 운중마부의 모든
전력을 기증한 것이다.
― 낭산(狼山) 용호풍운방(龍虎風雲 ).
중원에 낭야일접이 있다면, 변황에는 풍운천추객(風雲千秋客)이 있다
. 변황에서 전해지는 사십 종 살인무예를 익힌 풍운천추객, 그는 일
생을 살인도를 연마했으며 결국 낭산의 하늘을 베어 버린다는 참풍혈
마도(斬風血魔刀)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가 오백의 살수를 이끌고 백색마궁으로 들어섰다.
― 대곤륜(大崑崙) 앙천검문(仰天劍門).
― 성숙해(星宿海) 추혼마보(追魂魔堡).
일컬어 삭북십패(朔北十覇)가 해외무맹에 속속 투신하고 있었다. 해
외무맹주의 자리는 형식상 공석(空席)이었다. 하나 모든 사람은 혈천
마독이 초대 해외무맹주가 된다고 믿고 있었으며, 그의 혼례식이 끝
난 다음 천외학우림주(天外學友林主)에 의해 천하 대결전이 선포되고
해외무맹의 창건이 정식으로 선포되도록 안배되어 있었다.
나이 서른 정도, 각이 진 아래턱과 다부진 체격이 강인한 인상을 느
끼게 했다. 차가운 빛을 뿜어내는 두 눈과 구릿빛 얼굴이 그의 남성
미를 짙게 풍기게 했다.
빙주(氷柱)에 떠받쳐진 대전 한가운데 서 있는 그 자, 그의 눈빛은
백야(白夜)의 허공에 응결이 되고 있었다.
"변황인들의 염원이 현실화되다니……, 바로 나의 대(代)에!"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혈천마독 척발유성은 실로 행운아라 불릴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천하를 장악할 만한 재목은 아니었는데, 천하가 혼란스러운 가
운데 천하 무림계의 삼분지일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그는 대륙마검회를 두려워하였으며, 대륙마검회의 낭야일접이라는 인
물로 인해 중원의 모든 기반을 잃어버리고 전전긍긍해한 바 있었다.
결과, 그는 마검회에 아우의 방파로 동맹(同盟)을 자청하였으며, 그
대가로 낭야일접의 죽음을 청부한 바 있었다. 결국 낭야일접은 제거
되었으며, 그는 대륙마검회에게 짓눌릴 것을 생각하며 은근히 불안해
하던 차에 마검회의 막부가 내분에 의해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
었다.
어디 그뿐이랴. 중원천하가 흑도백도의 결전장으로 화하였으며, 해외
변황의 거두들이 중원을 치는 대업(大業)의 선봉으로 그를 선출하며
대거 휘하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걱정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서히 다가서는 천룡선단(天龍船團)이 위험스러웠으며, 대륙마검회
와 싸워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것도 상당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지극히 뿌듯해하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일
이었다.
"내게는 두 개의 날개가 있다. 훗훗! 문무쌍익(文武雙翼), 그 날개가
나를 지켜주는 한 나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될 수 있다."
혈천마독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또한 나는 천하제일화(天下第一花)를 취하게 되었다. 훗훗……, 그
것 또한 천지신명이 나를 돕는다는 길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가 비록 천외천전(天外天殿)의 전설을 얻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되 문
과 무, 두 개의 거대한 날개라 할 수 있는 천외학우림과 축융마방(祝
融魔 )의 지지를 얻었으며, 화화선랑(花花仙娘)을 얻게 되었으니…
…. 천하를 장악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푸핫핫……."
혈천마독은 앙천대소를 터뜨렸으며, 그의 웃음소리에 실린 진기로 인
해 백색마궁 천마에서 눈더미가 떨어져 내렸다.
― 천외학우림.
중원학계(中原學界)를 능가하기 위해 뭉쳐진 천하이사(天下異士)들의
단체이다.
낭인학자(浪人學者)들과 변황의 거학(巨學)들이 자연스럽게 뭉쳐서
이룩한 위대한 마학유림(魔學儒林). 그곳은 오랫동안 고독자적인 입
장을 견지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되면서 돌연 혈천마
독을 지지하게 된 것이다.
천외학우림을 이끌게 된 자는 만박서생(萬博書生).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백 년 만의 천재(天才)라 불릴 정도로 문
재가 뛰어난 자였다. 그는 기문포진학(奇門布陣學) 육합팔괘진학(六
合八卦陣學)에 달통하였으며, 천하병서(天下兵書)에 두루 능통했다.
그는 해외무맹의 군사(軍師)가 되기를 약속하였으며, 해외무맹이 창
건되는 날까지 혈천마독을 위해 기문진식을 백색마궁 일대에 포진하
기를 맹세한 바 있었다.
그는 해외무맹의 위대한 날개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또 하나의 인물.
그는 축융마방의 수뇌였으며, 사검마제(死劍魔帝)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는 축융뢰(祝融雷)였다. 그는 혈천마독을 위해 태상호법(太上護法
)이 되었으며, 마황군도에 오천 무사를 이끌고 투신한 지 반년 만에
혈천마독의 위명을 오해에 널리 알린 위대한 승부사였다.
그는 해외무맹의 무상(武相) 지위를 제수받도록 안배되어 있으며, 혈
천마독이 연공하는 동안에는 그가 혈천마독을 대신해 변황무림계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입장이었다.
천하제일화 화화선랑.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다.
무수한 미녀들을 어렸을 때부터 보아 온 혈천마독을 눈길 한 번에 사
로잡아 버린 천하의 가인(佳人). 그녀가 마황군도를 제 발로 찾았다
는 것만 하더라도 혈천마독은 행운아라 불릴 만했다.
"푸핫핫……, 누가 나를 가로막겠는가?"
혈천마독은 앙천대소를 다시 한번 터뜨렸다.
* * *
하늘은 짙은 구름에 가려 있다. 폭설로 인해 모든 게 가려졌기에 한
치 앞을 내다보기도 힘들 지경이다.
좌옥린의 편주는 눈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선
단의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천 개의 기치를 휘날리고 있는 거대한 선단.
무려 사십여 척의 범선이 거대한 진세를 이루며 바다 한가운데 정박
해 있다. 선단은 하나의 대형을 유지하고 있다.
철익마형진(鐵翼魔形陣).
절세의 검호들이 이룩하는 검세를 선단이 만든 것은 하나의 경이라
할 수 있다. 천룡번을 휘날리는 거대한 선단. 바로 천하에 풍운을 몰
고 온 천룡선단이다.
선단은 거대한 원형을 이루고 있다. 배 위에는 일백 명씩 십 조를 이
루는 무사들이 십방을 감시하고 있기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
웠다.
'후후……, 그 어르신네의 절학이다.'
좌옥린은 눈발에 몸을 숨긴 채 선단 가까이 접근해 들었다.
십방무적금쇄(十方無敵禁鎖).
대륙마황 육공부가 창안한 가공할 절진인 바, 그 변화는 좌옥린의 뇌
리에 들어 있다. 좌옥린은 은형술로 몸을 숨긴 채 날리는 눈발과 더
불어 선단을 이루는 한 척의 배 위로 떨어져 내렸다.
눈발에 몸을 숨기는 설화둔신영(雪花遁身影). 희뿌연 강무로 몸을 감
추었기에 눈발인지,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다. 더욱이 폐맥법으로 호
흡마저 감추었기에 천이통을 시전한다 해도 그가 접근한다는 것을 알
아차릴 수 없다.
스읏― 스으읏―!
좌옥린은 빠르게 선단을 오가며 하나의 깃발을 찾았다.
금사로 수놓아진 깃발, 그 깃발을 달고 있는 배가 바로 대륙마황의
첫 번째 제자 천룡산이 머무는 곳이다.
패검십팔무반이 만들어진 이래 최초로 돌파한 천재무사. 그의 이름
앞에 붙은 별호는 무려 열 개가 넘을 정도였다.
'대부나 대사형이나 모두 지독하신 분들이다. 나 같으면 이렇게 오랜
세월을 기다리지 못했을 텐데…….'
스으읏―!
좌옥린은 황금색 깃발을 매달고 있는 거대한 범선 위로 유령처럼 스
며들었다.
* * *
"그 자는 실로 어리석은 자이네. 그 자는 철무옥이라는 애송이에게
철저히 조롱당하고 있는 셈이네. 그 자의 휘하에 모인 자는 태반이
철무옥의 사주를 받은 죽련의 도배들로서, 해외무맹을 암중에 정복하
고자 하는 자들이네. 그들은 해외무맹이 일어나는 것을 이용해 천하
를 어지럽힐 것이며, 혈천마독은 그 후 감쪽같이 암살당하기로 예정
되었네! 그러한 일이 벌어져서는 아니 되네."
황금색 깃발을 달고 있는 거대한 범선, 장중한 목소리는 그 배의 선
실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대부는 변황인들의 사기(士氣)가 최고에 도달하였을 때 그들
을 허물어뜨려 그들이 두 번 다시 중원을 넘보지 못하게 하실 작정이
시네."
"……."
"나는 혈천마독을 쳐죽인 다음, 그로 위장하여, 중원으로 들어가라는
하명을 받았네. 철무옥은 득의만만해 하다가 천룡번에 격파당할 것
이네. 그것이 바로 대부가 나를 통해 하고자 하는 계획의 전부였네.
대부가 자네를 여기 보내신 이유는, 혈천마독을 제거하는 일이 돌연
난조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지. 본시 나는 초절정 고수 하나를 바랐
는데, 대부는 자네를 내게 보내 주신 것이네."
선실 안, 달콤한 주향(酒香)이 번지고 있었다.
술은 열기를 일으키게 하기에 설원에 오랫동안 머무는 사람은 남방
사람들에 비해 많은 술을 들게 된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팔짱을
끼고 있었으며, 또 한 사람은 술잔을 든 채 심각하게 말하고 있었다.
말하고 있는 사람은 아래턱에 구레나룻이 무성한 중년대한. 그는 여
우털 조끼를 걸치고 있었으며, 옷가슴에는 천룡문장(天龍紋章)이 선
명히 찍혀 있었다.
"곤란한 점은 혈천마독의 거처 둘레에 기문대진이 펼쳐져 있어 돌파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네, 사제(師弟)."
"기문대진이오?"
"훗훗……, 놀라운 진세이네. 천외학우림을 이끌게 된 만박서생이라
는 자가 펼친 것이지. 나는 패검십팔무관(覇劍十八武關)에서 기문진
식을 파훼시키는 방법을 배웠으나, 만박서생이 펼친 진세만은 돌파할
수 없었네. 그래서 전전긍긍해하는 형편이네."
"흠……."
"일을 조속히 처리해야만 하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혈천마독이
이룩한 세력은 고스란히 죽련에 접수되네."
"……."
"대다수 변황인들은 상부의 사정을 알지 못하네. 그들은 중원에 대한
막연한 분노로 인해 무조건적으로 해외무맹의 창건에 동조하고 있다
고 할 수 있네. 해외무맹은 한시 빨리 와해되어야 하네. 그들이 중원
으로 쳐내려간다면 변황인들은 무수히 죽을 것이며, 중원인들 또한
무수히 죽을 것이네. 그리고 그 와중에 죽련은 천하를 피로 씻을 때
를 잡게 될 것이네."
끼이이익― 끼이이익―!
거대한 배였으나 파랑이 심한 탓에 좌우로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묵묵히 말을 듣던 청년은 오랜만에 입술을 떼었다.
"제가 할 일은……."
"혈천마독을 암살하는 일이네. 그 일만 하면 나머지 일은 내가 십 년
에 걸쳐 준비한 데에 따라 진행이 어김없이 될 것이네, 사제."
"좋습니다. 그를 베겠습니다."
"훗훗……, 역시 통이 크군. 오랫동안 만나 뵙지 못한 대부를 판에
박은 듯 닮았군, 자네는."
"과찬이십니다."
"천만에. 자네를 만난 지 세 시진도 아니 되나, 자네는 정말 무서운
사람임을 알겠네. 자네의 기도는 대단하네. 나는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네."
그는 웃었으며, 앞에 있는 자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잔이 나누어졌
다.
얼마 후, 중년대한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수하들을 얼마 정도 딸려 주시면 되겠는가?"
"하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필요하지 않다고?"
"예."
"흠, 나의 휘하 무사들을 무시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다만 그곳에 가서 수급 하나를 떼는 일에는 철저히 숙달
된 무사 하나면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오며 근처
의 정황을 세세히 살펴보았는데, 다수의 무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저 하나면 됩니다."
"자신이 있는가?"
"훗훗……."
그는 웃으며 잔을 비웠다. 그리고 중년대한 역시 따라 웃음을 터뜨렸
다.
"대부가 나 대신 자네를 후계자로 삼은 것이 이해가 되는군. 내게는
자네 같은 여유가 없네. 훗훗……, 자네 나이 이제 스물둘에 불과하
거늘, 나를 완전히 압도하는구먼. 천하의 천룡산(天龍山)이 풋내기에
게 끔뻑 죽게 될 줄이야. 푸하하……."
천룡마협 천룡산.
그는 천룡번주(天龍幡主)로서 십오번주(十五幡主)를 휘하에 거느리고
있다. 그는 대륙마황에게서 해외무맹을 분쇄하라는 명령을 받은 바
있었다.
만에 하나, 천외학우림과 축융마방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 일은
벌써 달성이 되었을 것이다.
"대사형(大師兄)께 사적으로 물을 말이 있소이다!"
잔을 든 채 말하는 청년. 옷차림은 수수하나 그에게는 지극히 비범한
면모가 있었다.
"무엇인가?"
"화(花)……,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 그 아이에 대해서는 나도 찾고 있는 상황이네. 이곳으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직 만나지 못했네. 그 아이는 사화천(死花天)의
일급 여무사 오백과 더불어 이곳으로 오는 가운데 실종되었네. 그
아이는 친아버지인 내가 여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
다네."
"으음……."
쓰디쓴 숨소리를 토하는 청년은 좌옥린이었다.
천룡산은 그에게 대사형이 된다 할 수 있었고, 그의 딸 몽유화는 좌
옥린이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여인이라 할 수 있었다.
밖은 폭설(暴雪)에 휘감겨 있었다. 천룡선단은 밤바다를 느릿느릿 헤
치며 나아가고 있었으며, 간혹 뿔나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날 밤, 좌옥린이 천룡산을 찾은 것은 두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 천룡선단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느 세력 소속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
었다.
대륙마황이 하는 일은 그 정도로 치밀하고 철저했다. 그는 죽련이 하
는 일을 역이용하여 변황세력을 일거에 도륙내고자 하는 것이다.
반면 좌옥린은 무수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 단신으로 마황군도 안으로
잠입해 들어가고자 하고 있었다.
그는 새벽에 일엽편주에 올라섰다. 눈이 어찌나 드세게 뿌려대는지
한 치 앞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밤새 내내 술을 마셨음
에도 불구하고 그의 뺨에는 취기가 나타나지 않았다.
"가겠습니다!"
"그 자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면 약속한 신호를 올리게."
"예."
"자네는 뛰어난 무사라는 것을 아네. 그러나 상대는 무수하고 도울
사람은 없으니, 조심하기 바라네. 물론 자네는 그 점에 있어 나를 능
가하는 전문가일 테니까!"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좌옥린은 초립을 앞으로 내렸다.
초립 위에는 어느 틈엔가 눈이 한 치 정도 쌓였다. 일순 그는 일엽편
주와 더불어 빙해 속으로 사라져 갔으며, 회색의 두터운 장막 같은
설막(雪幕)이 그와 천룡산 사이를 차단해 버렸다.
휘리리리링―!
설풍(雪風)이 드세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저주의 얼음 바다. 천룡간은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져 가는 좌옥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
다.
"사윗감으로는 더할 나위가 없는 녀석이다. 오만하면서도 겸손하며,
차가우면서도 다정하다. 무사이면서 또한 인간이다. 세상에 보기 드
문 영웅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오랫동안 뱃머리를 떠나지 못했다.
벌써 십오 년 넘게 마검회를 떠나 북방을 주유했던 천룡산이기에 그
러한 것일까. 그는 어느 틈엔가 좌옥린이라는 청년의 그림자에 흠뻑
빠져들고 만 것이다.
* * *
저녁부터 시작된 연회는 이틀 밤이 지나고 또다시 새벽이 지나도록
마감되지 않았다. 천하각지의 산해진미들이 요리되었으며, 각지의 명
주(銘酒)들이 마련되어 잔이 비워지기 무섭게 대령이 되었다.
― 해외무맹(海外武盟), 절대군림(絶代君臨)!
변황무사로 그러한 말을 듣고 피를 뜨겁게 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중원무도를 격파하는 것은 변황인들의 오래된 숙원이었다.
기실 변황의 무공은 중원무공보다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어
디 그뿐이랴. 이곳은 바로 무림의 성지인 천외천전(天外天殿)의 터전
이었다.
해외무맹은 천외천전의 맥(脈)을 이어받았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
다.
호화로운 장포를 걸친 채 태사의에 머물러 있는 척발유성.
그는 변황각지의 거두들을 마중하는 연회장에 머물렀으며, 특유의 자
부심에 가득 찬 미소로 사람들을 마중하고 있었다.
그에게 잔을 바치는 거두들, 멀리 성숙해(星宿海)와 난주(蘭州)에서
심지어 납살(拉薩)과 서장(西藏)에서까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개중에는 해외무맹에 와서 그들과 동조하는 것을 정중히 거절하고자
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되, 해외무맹의 방대한 규모를 보고 뜻을 바꾸
어 해외무맹에 들어서는 것을 쾌히 응낙하게 되었다.
드넓은 연회장에는 무려 천사백 명이 모여 있다. 하루에 소비되는 술
만 하더라도 마차 열 대를 가득히 채울 분량이다.
이 연회가 마무리지어지는 대로 해외무맹의 창건이 사해무림에 알려
질 것이며, 척발유성은 겸손한 표정 가운데 사양하는 척하다가 만인
의 추대를 이기지 못하고 맹주의 자리에 앉도록 안배되어 있었다.
"건배(乾杯)를……!"
척발유성은 잔을 높이 쳐들었다.
변황각지의 무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잔을 따라서 쳐들었다. 무림
거두들은 통역하는 무사들을 하나씩 대동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척발
유성이 하는 말을 즉시 통역하고 있었다.
척발유성은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취기가 약간 나타나는 뺨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긴 이날은
그의 야망이 이루어지는 날이 아니겠는가.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
워지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본인은 해외무맹의 맹주가 되어 부끄러움이 많은 자요. 변황무림의
거두들이 본인을 해외무맹의 초대맹주로 추대하고자 하는 것을 감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오."
매우 겸손한 말이다.
며칠 전, 그는 변황제일뇌(邊荒第一腦)에게서 한 장의 연설문을 건네
받았으며, 그것을 외우느라 반시진을 쓴 바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앵무새가 배운 말을 되풀이하듯이 종이 위에 적힌
글을 외웠다가는 술잔을 쳐든 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군호(群豪)들은 그의 말에 숙연한 기분을 느끼는 듯 환호성을 발하기
를 멈추고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숙연해진 분위기이다. 단 한 사람, 가슴에 고검(古劍)
을 안고 있는 흑포노인을 제외하고는.
사검마제(死劍魔帝) 축융뢰(祝融雷).
그는 마황군도를 암중에 지배하고 있는 자라 할 수 있었다.
척발유성은 그를 의숙(義叔)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는 척발유성이 곁
에서 행동하는 것과는 달리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었다.
'이제…… 변화는 없겠지.'
그는 느긋하고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일을 이룩하기 위해 너무나도 오랫동안 북해를 떠돌았다. 훗훗…
…, 중원에 들어가게 되는 대로 변황맹주로 추대받게 될 것이다.'
사검마제 축융뢰의 뇌리에는 또 하나의 각본이 머물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이다.
'척발유성, 상당히 뛰어난 녀석이나 한 가지를 모르고 있다. 누가 천
하의 주인인지를……!'
사검마제는 척발유성을 내심 비웃고 있었다.
척발유성은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있다. 사검마제는 그의 목
덜미를 바라보았으며, 언제고 자신의 검이 그의 목덜미에 꽂혀들 날
을 생각하고 있었다.
'해외무맹은 옥관을 깨뜨릴 것이고, 천하혈세(天下血洗)를 시작할 것
이다. 결과, 수많은 무사들이 죽어 갈 것이다. 나는…… 도저히 그
일을 참을 수 없다 외치며 이제까지 조카로 주인으로 섬겼던 척발유
성의 목을 베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해외무맹은 해산이 되고, 훗훗!
죽련 휘하의 변황총맹(邊荒總盟)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실로 엄청난 악마의 계략이었다, 사검마제만이 알고 있는.
그의 아내, 자식이라 하더라도 알지 못하고 있는 마지막 계략은 너무
나도 엄청난 것이었다.
히죽 웃는 사검마제.
그는 수중에 잔을 쥐고 있었으며, 천천히 잔을 들어서 설아취(雪雅醉
)라는 명주를 들이마셨다.
칠 년 전, 당시 사검마제는 자파 축융마방이 위축되는 것을 걱정하며
술로 소일하고 있었다. 그는 매일같이 두 말의 술을 들이마셨으며,
애꿎은 제자들을 연검한다는 구실하에 불구자로 만들기 일쑤였다.
한데 뜻밖의 인물이 그를 찾아왔으며, 그로 인해 사검마제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어지게 되었다. 그는 죽련의 순찰부주였으며, 그의 옷
가슴에는 죽련의 련주가 친필로 쓴 글이 기록되어 있었다.
사검마제는 며칠 숙고하다가 순찰부주와 술을 나누어 마시게 되었으
며, 바로 그날 그는 죽련의 변황단주(邊荒團主)로 변신하게 되었다.
그 일은 그의 제자와 아내라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고 자신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변황의 지
배자가 된다면 그들에게도 나쁜 일은 없을 테니까!
사검마제가 거느리고 온 세력 가운데 칠할 가량은 죽련의 무사들이었
다. 물론 그들 자신도 자신이 죽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하고 있었다. 죽련의 조직은 실로 치밀하여 거기 머물러 있는 사람들
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이 죽련 휘하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
다.
술은 향기와 더불어 목줄기를 불살랐다.
지극히 향기로운 설아취를 세 모금 마셨을 때였다. 사검마제의 뒤쪽
으로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그는 축융마방의 부방주로서, 별호가 열화마웅(熱火魔雄)이라고 불리
는 자였다.
그는 외부의 순찰을 맡고 있었으며, 연회에는 참가하지 않도록 내정
이 된 사람이었다. 열화마웅은 전포(戰袍)를 걸치고 있는데, 그의 얼
굴색은 전포의 빛깔처럼 거무튀튀하게 물들어 있었다.
"방주, 일이 생겼습니다."
열화마웅은 전음입밀을 써서 말했다.
"일이라니?"
사검마제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열화마웅이 들어와 주흥을
깨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다.
"초진(初陣)이 격파되었습니다."
"초진이?"
"백색마궁을 뒤덮고 있는 팔대진세 가운데 첫 번째 진세인 설풍화영
진(雪風化影陣) 속으로 누군가 들어섰습니다."
"그, 그럴 수가!"
"그는 진로(陣路)를 따라 걷지 않고 사로(死路)로 접어들었습니다.
무사들이 그를 가로막고자 했으나 막을 수 없었습니다."
"대체 누가 설풍화영진을 유유히 통과할 수 있단 말이냐? 설마 그가
신이라도 된단 말이냐?"
사검마제는 저도 모르게 잔을 미끄러뜨리고 말았다.
잔은 그의 무릎 위로 떨어져 내렸으며, 검은 비단으로 만든 장포 무
릎 위로 마시다 남긴 술이 엎질러지게 되었다.
"그는 어디에 있느냐?"
"알지 못합니다. 다만 천외학우림의 신임 림주이신 만박서생이 칩거
를 깨고 나섰습니다."
"빌어먹을, 이 시기에 잠입자라니! 무조건 막아야 한다. 그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첫댓글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