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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1:1-2 신령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
☀--케이시라는 대학생이 맘입니다. 아침 일찍이 편의점에서 식사를 구입하려 하는데 편의점에 다다르는 지점에 한 노숙자가 구걸하다가 얻은 돈으로 편의점에 들어와서 자신이 먹고 싶은 도넛을 처다보면서 돈을 계산하는데 모자랍니다. 자신이 얻은 돈은 겨우 1000원입니다. 이것을 지켜보더 케이시가 자신이 돈을 내서 도넛과 커피를 건냈습니다. 그리고는 10여분 가량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본래 부유한 집의 아들이었는데 직장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다보니 마약에 손을 대면서 인생이 파멸에 다달았습니다. 자신의 어머니는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하늘에서 자신을 지켜 본다고 했습니다. 케이시 다신이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노숙자인 크리스가 게이시에게 악필로된 조그만 종이 하나를 건냈습니다. “난 오늘 자살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친절로 인해서 인생을 다시 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고마우신 분! 감사합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 나의 작은 친절이 누군가에는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오늘부터는 에베소서를 살펴 보려 합니다. 우리는 아주 긴 시간동안 사사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젠 신약으로 넘어와서 엡을 살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에베소서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가 되시며, 성령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의 역사리를 이뤄 가시는 가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그리고는 구원받은 우리가 어떻게 교회가 되었는지, 그리고 교회의 성격과 특징이 무었인지, 더 나아가 교회에 속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엡은 주전 62년경에 쓰여졌지만 2022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큰 교훈과 울림을 줍니다. :: 바울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주셨던 그 감동이 우리가 이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동일하게 전달되어질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말씀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의 백성이 되고, 온전한 교회가 되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은 신약성경 14권을 기록한 사람으로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로마에 간 바울을 감옥에 가두셔서 감옥 속에서 이 서신을 기록해서 “옥중에서 쓴 편지”라고 해서 이를 옥중서신이라 합니다. =엡,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엡의 대 주제는 교회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래서 엡을 교회론이라 합니다.
엡은 소아시아 교회의 중심이 되는 교회롷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적인 가치관과 이방인 적인 가치관이 부딪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복이라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엡 전체를 요약하는 요절이 3절입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정초, 신년에 복을 많이 빕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돈을 많이 버는 것, 땅을 많이 사는 것, 집안 창고에 황금을 쌓아 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건강을 복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무병장수, 자녀를 자녀의 자녀의 복을 누리는 것, 자녀가 3대, 4대, 5대까지 보는 것.. 자녀들이 다 대학도 잘 들어가고 직장도 잘 들어가는 것.., 이러한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세 말씀하는 복은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입니다. 그래서 3절에는 “신령한 복”이라 했습니다. :: 엡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 신령한 복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2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3절에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하나님이 내 아버지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내가 한 형제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엄청난 말씀을 합니다.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내가 예수님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왕이시면서, 동시에 주이시면서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 나의 오빠, 형님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모든 신령한 복’=‘육체의 반대로 영적인’, ‘천한 것의 반대로 귀한 것’, ‘마귀적인 반대로 신적인’
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구두쇠의 종말 -미야우찌--일본에서 67세의 나이로 숨진 미야우찌라는 거지 노인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의 다락방에는 5천만원이 예금된 통장과 1억 7천만원 가량의 주식이 숨겨 있었다. 이것은 그가 일생동안 헐벗고 굶주리며 모은 돈이었으며, 이를 모으기 위해 어쩌다가 현미쌀을 사다먹고 남이 주는 야채 부스러기나 날로 먹고 어쩌다가 끓일 것이 생기면 방안까지 들고 들어와 풍로에다가 주워온 나무 조각을 때서 끓여 먹었고 목욕은 기껏해야 일년에 한두 번 했다는 것. 결국 그 노인은 돈을 아끼기 위하여 값싼 음식을 먹은 결과 영양실조와 동맥 경화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매일 입버릇처럼 '나는 200세까지 살 것이라'고 했지만 겨우 1/3밖에 못 살고 죽었다는 것이다.
잠 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부자의 말로입니다. 거지나 진배없습니다. 영양실조로 죽다니...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이것이 하나님게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복이 진짜 복이 아닙니다. :: 제가 부목사 때 우리나라 전자회사를 일으켜 세우신 분이 필리핀에 회사를 세우러 갔다가 뇌출혈로 급사했습니다. 그 회사에서 장대하게 장례를 치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입니다. 제가 장례절차를 다 주관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음성이 들립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은 하나도 받이 누리지 못하고, 그저 돈 때문에, 돈돈돈 하면서 살대가 죽는다면.., 그야말로 영적인 빈곤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은 17-19절에서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무엇이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7절을 보시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시면 “마음의 눈을 밝히사” “부르심의 소망”,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19절을 보시면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어떠한 줄을 알게 하십니다.---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모른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아직도 세상 적이고, 정욕 적이고, 마귀 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 13:44 “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하늘에 신령한 복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 신령한 보화가 감취어진 밭을 사고야 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주신 하늘의 신령한 복을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은혜와 복을 받아 누려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마세요. 이미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신령한 복이 풍성하게 임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한 자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자입니다.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사도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삶에서 원하는 하나남이 가장 기뻐하시는 삶, 가장 원하시는 소원을 뜻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잘 아는데로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큰 빛가운데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사명을 주시는데 아나니아에게 말씀을 주시기를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하십니다. 더 나아가 행 26장 15절 이하에 바울이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직접 받은 말씀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들어나 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을 하나님께로부터 짐을 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방에, 또는 이방에 섞여사는 유대인들에게로 보냄을 받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본래 사도란 기본적인 뜻이 보내다의 뜻입니다. 왕이 왕 대신에 사절을 보냅니다. 이처럼 하늘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대신에 당신의 종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란 복음의 사신, 직위상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라 합니다.
본래 사도는 왕 앞에 서있는 충성스러운 종입니다.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의 신실한 종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 된 것, 하나님의 사도 된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더 더욱이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기뻐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바울처럼 어리석은 자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세상적인 기치들을 보세요. 사도행전 22장 3절 이하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빌 3:5-6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세상적인 가치가 대단합니다.
☀-어릴때 부자면서, 서울의 회장님의 자제로 테어났더라면,,, 혹시 내가 어려서 버려진 귀한 회장님댁 외아들이었다면...,
바울은 당시 철학적인 도시 다소출신이면서, 가말리엘 문하생이고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라고 고백했었습니다. 한마디로 명문가의 자제입니다. 그러한 그가 모든 서신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령한 복을 발견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먼저 그는 그의 모든 서신 서에서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임을 증거했습니다. 또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를 바울은 똥처럼 여겼습니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는 세상적인 가치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은 것입니다. 영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나니 세상적인 가치를 두었던 것이 별것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고상이란 가장 높은, 가장 뛰어난, 이란 뜻입니다. 인품이나 학문등이 귀품이 있고 높다는 뜻입니다.
::: 여러분 오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앞에서 충성을 다하고 있는 나를 불러서 세상에 보내십니다. 요 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상 속에서 작은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면 그리스도가 말하는 것처럼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뜻을 행동으로 옮기고, 내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뭐 출새했다 더니 알고 보니까. 자신을 종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합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최상의 가치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는 높에 평가할지 모르지만 사실 종이라는 것이 노예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도, 그리스도의 종, 그리스도의 노예.., 사실 종이란 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주인의 것으로 살아갑니다.
더욱이 종이란 자신을 위해서 살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만족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자신의 생명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주인에게 있는 사람이 바로 종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도 고후 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자신이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종이 평안한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종은 주인이 밥을 먹어도 밥을 굶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이 난 왜 밥 안주냐고 대들 수가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주인에게 얻어터집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으로 어떤 평편이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 합니다. 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신을 철저하게 종의 자리에 내려놓을 때..., 그 때 하나님은 나를 높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할 때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임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 복종을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높여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같은 자녀의 신분으로 높이십니다.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여기서 친구라는 단어는 보통의 친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12절에 보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기본이고, 이에 더 나아가 그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정도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 용례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친척중에서 더 사랑하는 친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를 더 자세히 푼다면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내가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의 축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성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이러한 행위는 당시 그 집에 가장 직급이 낮은 종이나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겼습니다.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여러분 어디에 있던지 섬기는 자, 즉 종의 자리에 있으십시다. 마 25:25-28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섬기는 자 중에 계셨습니다. 우리도 섬기십시다.
2.이 편지의 수신자는 엡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엡 편지를 받는 수신자가 있습니다. 1절에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당시 에베소라는 도시는 소아시아의 수도였습니다.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고 문화도 대단히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그런 반면에 그곳은 영적으로 몹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도시로서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우상숭배가 성행하던 도시. 그래서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도들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편지한 것입니다. '성도'라는 말은 굉장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장례식 때 어떤 교우의 아버지를 성도라 불렀다가 혼이 났다고 합니다. 왜 우리 아버지가 성도냐?, 우리 아버지는 장로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장로라는 말이 더 귀한 줄로 압니다. 그러나 목사, 장로, 권사, 집사는 직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모든 직분을 내려놓고 천국 가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다 성도로 불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성도만 존재합니다. 그렇게 성도가 존귀한 존재입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김을 받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세상과 구별시킨 거룩한 무리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본래 죄가 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 죄인이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모든 죄를 깨끗함을 입고 거룩하게 된 무리입니다.
베드로는 벧전 2:9에서 성도를 이렇게 표현 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오늘 에베소라는 세상에 살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저들과 동일하게 죄악 가운데 살 수 있으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고 하시면서, 세상에서 떠나서 산 속에서 죄를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학처럼 고고하게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소금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태복음 5장에 빛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 속에서 소금 된 삶을 살라, 빛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3.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안에 신실한 자들입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한국 개신교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29일 개신교 여론조사기관인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낸 '코로나19 정부 방역 조치에 대한 일반 국민평가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교회를 '매우·약간 신뢰한다'는 응답은 21%인 반면 '별로·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비율은 76%로 조사됐다.
-- 이제는 세상 사람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세상 사람들의 신뢰도가 높아진 것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것일까요?
저는 당연히 후자로 생각합니다.
노회에서 충격적인 말씀을 듣습니다. 코로나 2년에 성도가 3/1이 교회를 떠나서 목사의 전화도, 문자도, 밴드로 드리는 예배에도, 너튜브 동영상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받는 그리스도인이 엡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들"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 전에는 피도, 눈물도, 양심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젠 세상과 구별되었습니다. 이젠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별되었습니다.
요 17:16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는 있어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거짓말을 해도 우리는 참말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물질만을 위해 살아도 우리는 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살아도 우리는 모든 사람에 덕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세상 유행만을 좇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들 다른 점이 없게 사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성도인 것을 부인하는 일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성도입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다른 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신실한 자’= “확신하다”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확신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권하여 확식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젠 믿음이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로 피스토스가 된 것입니다.
본디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한마디로 믿음이 가는 분입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실한 자'란 '언행심사가 진실한 자', '그 믿음이 진실한 자'를 말합니다.
세상 기업을 하는 분들도 신실함이 기업의 성공의 좌우명 같은 것입니다.
경영관리 전문가 제임스 코제스와 베리 포스너가 수천명의 경영인을 조사한 결과 훌륭한 리더의 특징은 정직과 신실함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익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는 기업가들이 정직과 신실성을 리더의 덕목에서 최우선으로 두고 있는 것이다. 신실하지 못한 행동은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나중에 부정직이 드러날 경우 훨씬 큰 손실을 입고 만다.
세상의 기업은 이윤을 위해서는 못할 짓도 하는 것이 기업입니다. 단 몇 백원을 위해서 탈법도하고, 변법도 하는 것이 기업인데 그 기업이 되고, 말고에 있어서 정직과 성실함이 최우선이라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더 요구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정직을 잃어 버렸다. 신실함을 잃어 버렸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큰 피해를 끼치고, 손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 그 사람 믿을만한데..., 이것이 기업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다른 사람들이 고백되어져야 하는데 아 그 사람 기독교인..., 절대 믿으면 안돼!.., 이라면 아주 곤란한 것입니다.
☀인디언의 신실한 약속---펜실베니아의 창설자인 윌리암 펜은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매우 친했다. 인디언들에 대한 호의와 친절 때문이었다. 어느 날 인디언들은 농담으로 하루동안에 도보로 통과하는 모든 지역을 다 그에게 주겠다고 말했다. 그들의 말대로 윌리암 펜은 해가 지평선에 떠오르자마자 걷기 시작하여 밤늦게까지 걸었다. 그의 여행이 끝나자 인디언들에게 찾아와 그 땅을 달라고 요청했다. 인디언들은 그 말을 진지하게 실행한 것을 알고 매우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가 통과한 땅들을 모두 주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필라델피아 시의 일부분이 된 것이다.----윌리암 펜은 단순하게 인디언들의 말대로 실행함으로서 광대한 땅을 차지하였다.--하나님을 믿지도 않은 인디언이 그 약속에 신실한데 하물며 그리스도인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서정오 목사님이 국민일보 겨자씨에 올린 일화인데 당신 중학교 때를 말씀합니다. 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지능지수(IQ) 검사를 했는데, 전교 꼴찌를 도맡아 하던 친구의 IQ가 145로 나왔습니다.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이 친구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놈아, 그 머리가 아깝다.” ‘IQ 145.’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하셨는데 우리가 말에나 일에나 신뢰성을 상실했다면 그 사람은 사람과 사람사이에나, 교회에나 죄가 되는 것입니다. 꺼리지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에나 말에나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남은 속이면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그 결과가 너무나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주 작은 일부터 신실하십시오. 아주 작은 일에도 약속을 지키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겠다... 그 약속을 반드시 이뤄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가득한 책입니다. 내 신실함의 기초는 성경뿐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진실된 사람입니다. 진실된 믿음만이 능력 있게 역사 하는 믿음입니다.
4.은혜와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시는 신령한 복 가운데 우리게 깊이 다가오는 것이 바로 은혜와 평강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향하여 특별한 축복을 기원합니다. 그는 이런 축복이 어디서 오는가를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에 아주 놀라운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십니다. :: 그러면 자동적으로 오는 축복이 있습니다. 두가지 하나가 은혜이고, 하나가 평강입니다.
1) 은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은혜의 선물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엡 2:8-9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구원은 은혜입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이 누구에게 주어진다고? 믿는 자들에게, 성도들에게 입니다.
또 평강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은혜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인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말미암는 누리는 마음의 상태.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런 화평을 누리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평강으로 세상의 근심과 두려움을 이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 4:7에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지켜야 할 것 가운데 첫째가 우리 마음과 생각인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강만 있으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최대의 축복입니다. 은혜와 평강, 이 두 가지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는 구원입니다. 또 하나는 그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절을 보면 바울의 찬송이 울려 터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도답게 살려고 애쓰는 그들에게 이 두 가지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저도 오늘 이 에베소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이 두 가지 축복을 하고 싶습니다. 은혜와 평강입니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우리도 넉넉히 이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습니다.
이 어려운 경제 여건 가운데서도 우리는 넉넉히 견뎌 나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 어떤 시험과 환난이 있다 하더라도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두 가지 축복,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