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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국어운동학생회의 창립과 연합회 조직
1967년 3월 16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동숭동) 본2강의실에서 “국어운동 횃불 점화식”이라는 이름으로, 학생 17명과 서울대의 신 익성, 허 웅 교수를 비롯하여 한 갑수, 문 제안 선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어운동학생회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사회는 이 병용이 맡았고 발기인 대표는 국어운동학생회 선언문을 기초한 이 봉원(서울대 심리학과)이었다. 그것이 국어운동 대학동아리의 시발이었으며, 그 뒤를 이어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에서 국어운동학생회가 속속 창립되었다. 동아리의 이름은 대개 ‘국어운동학생회’였고, 줄여서 ‘국운회’라 하였다.
서울대 국운회는 1967년 5월 8일에 한글과 한국 토박이낱말로 지은 사람의 이름 가운데 좋은 이름을 뽑아 널리 알리는 ‘제1회 고운이름 뽑기 시상식’을 가졌는데, 그해의 금상 수상자는 ‘금 난새‒나라‒누리‒내리’(작곡가 금 수현의 아들딸) 남매 이름이었다. 대학생들의 그 행사에 여러 언론과 많은 국민이 관심을 보여 주었으며, 그 동아리에서는 해마다 그 행사를 벌였다.
그리고 1967년 한글날에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국운회가 공동으로,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글전용 건의문을 채택하고, 한글운동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서울대 국운회에서는 한글전용과 국어순화에 대한 표어 모집 시상식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고, 인쇄한 표어 57,000장을 전국에 배포하였다.
그 뒤 바로 고려대, 동국대, 서울대, 연세대의 국운회가 합동으로 강연회, 성명서, 한글전용 촉구 대회를 잇달아 열고, 거리 간판 말글 바로잡기, 한글전용 여론 조사 활동 등을 펼쳐 언론이 주목하고 크게 보도하였다. 그때부터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가 창립되기까지, 약 1년 동안 국어운동 대학동아리의 활동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967년 11월 6일, 고려대 국어운동학생회는 총학생회 후원으로 이 은상과 정 인섭 선생을 연사로 초청하여 대강당에서 대강연회를 열었다.
○1967년 11월 13일, ‘한문 약자 시안’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서울대·고려대·연세대·동국대의 국운회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1967년 11월 26일, 서울 대호다방에서, 서울대 이 봉원과 고려대 박 노용과 연세대 정 중헌이 모여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가칭) 발기 모임을 최초로 가졌다.
○1967년 11월 28일, 연세대 국어운동학생회는 총학생회와 공동으로 ‘한글운동 학생대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취지문(총학생회 회장)과 선언문(국운회 회장)을 낭독하고, 국회의장, 국무총리, 신문․잡지 편집인협회에 보내는 건의문과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967년 12월 22일, 청주시에서 연합회 창립 준비 행사로, 정 인섭 선생과 허 웅 교수를 초청하여 한글 강연회를 열었다(청주시 문화원과 공동).
○1968년 3월 18일, 정부의 단계적 한글전용 5개년 계획 시안에 대한 환영 성명서를 서울대․고려대․연세대․동국대의 국운회가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1968년 3월 31일, 연합회(준비모임) 회지 내일 제1호를 2,000부 발간․배부하였다.
○1968년 5월 5일, 국어운동 대학생회에서 작사하고 금 수현이 작곡한 “내말 내글”이라는 노래를 제정하였다.
○1968년 6월 27일, 청주시에서 청주대 국운회 주최로 이 은상과 한 갑수를 연사로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그날 밤에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가칭) 두 번째 발기 모임을 가졌다.
그렇게 활동하면서 뜻을 모아 1968년 9월 22일 오전 10시, 민족문화협회 사무실에서 다음의 15명이 모인 가운데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를 창립총회를 열었다.
△서울대: 이 봉원, 김 정근, 이 병용, 남 영신, 전 응진. △연세대: 장 국진. △고려대: 박 노용, 김 명학. △동국대: 이 택로(대로), 김 범열. △청주대: 이 인호, 최 재문, 강 윤식. △청주교대: 권 혁노. △대전대: 최 재원.
그 자리에서 회칙을 확정하고, 다음과 같은 창립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 조국 현대화를 완수하기 위해서
2) 민족문화 발전과 국가의 주체성을 살리기 위해서
3) 극심한 국제적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첫째, 한글전용에 대한 바른 인식과 그 생활화에 앞장서자.
둘째, 글자 생활의 기계화로 조국 현대화를 촉진하자.
셋째, 국어정화와 우리말 애호로 배달겨레의 얼을 간직하자.
그리고 다음과 같이 임원진을 구성하였으며, 지도교수로는 서울대 허 웅 교수를 모셨다.
△회장: 이 봉원(서울대 심리학과 3). △부회장: 김 명학(고려대 상학과 3)․강 윤식(청주대 행정학과 3). △감사: 이 대로(동국대 농경학과 3)․최 재원(대전대 영문학과 2). △총무: 김 범열(동국대 국문학과 3). △경리: 김 정근(서울대 사학과 2). △조직: 최 정호(연세대 국문학과 3)․전 창환(고려대 임학과 3). △섭외: 마 정임(고려대 농경학과 3)․양 영희(연세대 국문학과 3). △편집장: 최 노석(연세대 국문학과 2).
그렇게 연합회를 창립함으로써 횡적으로 연대하여 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한말글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3. 연합회 창립 이후의 발자취 (1)
연합회 창립 직후인 10월에는 다음과 같이 제1차 여론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1968년 10월, 1968년 8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전국 주요 도시의 학생․일반인․공무원 1,66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글전용 찬반에 관한 기초 여론조사(설문 3개) 결과를 발표하였다(책임 회원: 박 노용).
10월 9일, 한글날에는, 그 해 봄에 서울 덕수궁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처음으로 꽃바치기 행사를 가졌다. 참가한 대학은 경희대, 대전대, 동국대, 부산대, 서울대, 숙명여대, 연세대, 이화여대, 인천교대, 청주대, 청주교대였으며, 세종대왕 앞에 꽃을 바치고, 다음과 같은 3개 항의 결의를 하였다.
1. 저희 국어운동학생회 회원들은 풍요하고도 내일이 있는 복지국가 건설을 이상으로 합니다.
2. 그러기 위해서 저희들은 한글운동을 완성한 뒤에도 나라말을 깨끗이 하고, 쉽게, 바르게, 풍부하게, 그리고 너르게 하는 국어운동을 영원한 배달겨레의 첫째 과제로 삼고 이를 펴 나가겠습니다.
3. 민족문화 선양과 그 발전에도 이바지하겠습니다.
그로부터 꽃 바치기 행사는 한글날마다 했으며, 대개 한글학회 등과 함께 하였다.
그 이후 1970년대 초엽까지의 활동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968년 11월 1일, 회보 제1호를 펴내었다(편집장: 최 노석).
○1969년 3월, 1968년 10월 9일부터 1969년 1월 31일까지 전국적인 규모로(각계각층 813명을 대상으로) 제2차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한글과 호적법상의 여러 문제에 대한 설문 10개, 한글전용 일반에 관한 설문 3개, 이름을 표기할 때의 한글전용 실태 등, 모두 열네 문제를 조사하였다(책임 회원: 이 봉원).
○1969년 4월 5일, 제2차 정기회를 한글학회 회의실에서 열었다. 앞 회기의 결산 보고, 회칙 개정, 임원 선출, 미래의 사업 계획 토의 등을 하였다. (제2대: 회장 김 명학, 부회장 박 연백)
○1969년 4월 5일, 회보 제2호를 펴내었다(편집장: 최 노석).
○1969년 9월 20일, 연합회(전국 17개 대학동아리) 회지 내일 제2호를 2,000부 발간하였다(4×6배판, 42쪽).
○1969년 9월 22일, 제3차 정기회를 한글전용국민실천회 회의실에서 열었다. 회칙에 따라 새 임원 선출, 앞 회기의 결산 보고, 회칙 개정, 미래의 사업 계획 논의 등을 하였다. (제3대: 회장 최 노석, 부회장: 신 현숙 외 2인)
○1969년 10월 8일, 한글날 행사 최종 점검 모임을 가졌다.
○1969년 10월 9일, 523돌 한글날을 기념하여 덕수궁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두번째 꽃바치기 행사를 가졌다.
○1969년 11월 13일, 덕성여자대학교 국어운동학생회 창립총회를, 오후 4시에 연합회 지도교수 허 웅 교수와 연합회 임원, 각 대학 대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개최하고(회장: 이 미자, 부회장: 구 명자), 이튿날 기념 강연회를 열었다. 최 노석: 한글전용의 생활화.
○1969년 11월 20일, 숙명여자대학교 국어운동학생회 창립총회(회장: 고 영숙, 부회장: 이 순임. 지도교수: 이 을환)와 기념 강연회를 가졌다. 이 봉원, 김 명학 등이 강연하였다.
○1969년 11월 29일, 상명여자사범대학 국어운동학생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회장: 신 현숙, 부회장: 국 인숙. 지도교수: 윤 재천). 이어서 창립 기념 강연회를 열었다. 윤 경혁: 건축상의 외래어 조사.
○1969년 12월 3일 오후 5시, 연세대 학생회관 제1회의실에서 회원들이 모여 연합회 창립 첫돌 잔치를 열었다. 연세대 전 규태 교수와 문 제안 선생도 참석하였다.
○1970년 2월 12~14일, 청주 충북여성회관에서 첫번째 ‘전국 순회 계몽 강연회’를 가졌다. 연사는 문 제안 선생, 김 계곤 교수, 최 노석 회장이었다. 그리고 간판 말글을 조사하고, 한글전용과 국어정화에 대한 전반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1970년 2월 16~17일, 대전 호수돈여자고등학교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연사는 허 웅 교수와 한 갑수 선생이었다.
○1970년 2월 18~19일, 전주에서 간판 조사와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전주시 문화원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연사는 정 인섭 교수와 허 웅 교수였다. 그리고 전주문화방송에 출연하여 국운회 전반에 대한 좌담회를 가졌다.
○1970년 2월 27~28일, 춘천에서 간판 조사와 여론 조사를 실시하고, 강원도 여성회관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연사는 한 갑수 선생과 연세대 박 영준 교수였다.
○1970년 3월 27일, 외솔 최 현배 선생의 사회장에 참석하였다. 회원 전원이 장례 당일 손님맞이와 그 밖에 여러 가지 일을 거들며 가신 임의 명복을 빌었다.
○1970년 3월 28일, 새 회원 맞이 큰잔치를 열었다. 연합회에 딸린 대학 국운회의 새 회원을 연세대 학생회관 제1회의실에서 모아 환영 잔치를 베풀었다.
○1970년 3월 29일, 제4차 연합회 정기총회를 열었다.
○1972년 10월 9일 오전 11시, 대학 국운회 출신들이 외솔회 회의실에 모여 ‘국어운동학생회 동문회’(약칭 ‘국운동문회’)를 결성하였다. 회장: 이 대로. 총무: 강 상구․정 태연. 참석한 동문은 박 노용, 연 경탁, 윤 경혁, 김 정수, 강 상구, 이 근면, 이 환성, 김 정환, 정 지훈, 이 호원, 이 대로, 이 봉원, 유 상길, 장 영숙이었다(모두 14명). 소식지 소리를 내고, 후배들을 지도하고, 한글학회 등 한글 단체와 협조하면서 한글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그 후 소리 제1호와 제2호는 연세대 출신 윤 경혁, 제3호는 서울대 출신 강 상구, 제4호는 서울대 출신 김 정수가 편집하여 펴내었다. 후배들의 활동 소식, 동문 소식, 말글정책 동향 등을 실었는데, 군사 독재 하의 까다로운 검열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1972년 10월 9일 9시 30분에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꽃바치기 모임을 갖고, “대통령께드리는 건의문”과 세 번째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1972년 10월 14일, 오후 5시에 연세대 학생회관 제1회의실에서 연합회 창립 네돌 잔치를 치렀다.
그러나 사흘 후인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유신’이라는 비상조치가 발표되면서 모든 학생 활동도 얼어붙고 말았다. 그런 상황은 1980년 10·26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말글운동 동아리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한글날 행사 중심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대학 단위의 동아리가 그러한 상태였으니 연합회도 한동안 멈추어 있었다. 다만 그 동안 국운동문회에서는 1977년 10월 27일에 한글보람 달기 운동을 시작하여 1978년 3월까지 모두 1,250개를 팔았다.
4. 연합회 창립 이후의 발자취 (2)
1984년 11월, 5개 대학—건국대, 고려대, 상명여대, 서울대, 연세대—의 한말글운동 동아리들이 모여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를 창립하였다. 으뜸빛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김 슬옹이 맡았으며, 버금빛은 상명여자대학교 한 혜순이 맡았다. 지도교수는 허 웅 교수의 뒤를 이어, 상명여자대학교 최 기호 교수가 맡았다. 그 연합회는 1년 남짓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였다.
○1985년 3월 30일, 이 병혁 교수(서울시립대)를 초청하여 창립 기념 강연회를 열었다.
○1985년 5월, 각 대학 축전 때 한글 웃옷을 만들어 팔았다.
○1985년 7월, 연합회 자료 제1집을 내었다.
○1985년 8월, 경기도 여주국민학교에서 수련회를 가졌다. 의무 기록(진료 처방전 등) 한글화 움직임에 즈음하여 지지 성명서를 내었다.
○1985년 10월 3일, 연합회 정기총회를 열고 새 앞선빛을 뽑았다. 으뜸빛: 김 불꾼(건국대), 버금빛: 조 윤경(상명여대).
○1985년 10월 9일, “539돌 한글날을 맞이하여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발표하고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5년 10월, “틀리기 쉬운 말”과 “이런 말은 이렇게 씁시다”란 내용의 알림글과 작은 외침을 적은 쪽지를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5년 11월, “직업명 개선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란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5년 12월 16일,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가칭)의 결성을 알리고 동참을 바라는 공문을 전국 대학의 국어운동 동아리에 보내었다.
○1986년 1월, 서울지역 대학의 동아리들로만 꾸렸던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의 이름을 ‘서울․인천지구 우리말운동 대학생연합모임’으로 바꾸었다.
○1986년 1월 15일, 서울․인천지구 우리말운동 대학생연합모임에서 겨레입김이란 신문 해오름호(제1호)로 펴내었다.
위와 같이 활동하다가 1986년 1월 15~17일, 대구에서 서울․부산․대구․충청 지역의 15개 대학 동아리들이 ‘전국 우리말운동 대학생연합모임’을 만들어, 1972년 이후 중단되었던 전국연합 활동을 다시 잇게 되었다. 그때부터의 발자취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986년 1월 15~17일, 대구 가톨릭 문화회관에서 전국 10개 대학—건국대, 경기대, 경북대, 계명대, 고려대, 대구교대, 부산여대, 상명여대, 연세대, 영남대—의 동아리 회원이 모인 가운데 ‘전국 우리말운동 대학생연합모임’(딴이름: 한말글)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연합을 6년 만에 재창립하였다. (서울대, 인천교대, 한국외대, 우리마당, 대구대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가입 동의를 하였다.) 으뜸빛: 김 불꾼(건국대), 지도교수: 최 기호(상명여대). 1월 16일에는 ‘전국 우리말운동 대학생연합모임’의 회칙을 통과시켰고, 창립 선언문과 함께, 대통령께 드리는 건의서—대중매체와 거리 간판에서의 한자혼용, 무분별한 트기말과 신조어 사용을 막아 달라는 내용—를 만들었다.
○1986년 1월 21일, “한말글(전국연합) 창립에 즈음하여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나누어 주었다. 서명한 대학은 건국대, 경기대, 경북대, 계명대, 고려대, 대구교대, 대구대, 부산여대, 상명여대, 서울대, 연세대, 영남대, 우리마당, 인천교대, 한국외대였다(모두 15개).
○1986년 3월 15일, 전국연합 대표자 회의를 서울 한글회관에서 열어 ‘우리말 사랑의 길—전국 순회 강연회’를 열 것을 결의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1986년 4월 21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등 5개 단체에서 낸 “86 행사에 즈음한 거리 간판 등 개선에 대한 건의문”에 관하여, “우리나라의 거리를 외국말 전시장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어 반박하였다. 그 성명서를 전국연합 15개 대학—건국대, 경기대, 경북대, 계명대, 고려대, 공주사대, 대구교대, 부산여대, 상명여대, 서울대, 연세대, 영남대, 우리마당, 충남대, 충주건대—의 동아리 이름으로 정부 기관에 보내고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6년 4월 28일, “KBS 시청료 거부 운동에 대한 지지 성명”을 내었다.
○1986년 5월 17일, “우리는, 이렇게 주장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6년 5월 23일, 서울연합 앞선빛을 새로 뽑았다. 으뜸빛: 김 해보(서울대), 버금빛: 이 미금(연세대).
○1986년 5월, 문교부에 “외래어 표기 학생용품 안 쓰기 지도 협조” 건의서를 내었다.
○1986년 6월 7일, 부산수산대에서 부산연합모임 창립총회를 열어 앞선빛을 뽑고, 초청 기념 강연회를 가졌다. 허 웅 교수: 말과 정신. 박 지홍 교수: 학생 국어운동의 방향성.
○1986년 7월 5~16일, 세 번째 ‘우리말 사랑의 길―온나라 순회 강연회’를 열었다. 그 기간 동안 여러 말글 현상에 대하여 국민 여론 조사를 실시하였다. (1970년 2월의 ‘전국 순회 계몽 강연’을 그 첫 번째로 쳤다.)
○1986년 7월 17~20일, 전북 무주 구천동에서 ‘온나라 순회 강연회’ 결과 보고 및 평가회와 전국연합 수련회를 가졌다.
○1986년 10월 4일, 서울연합 정기총회를 열어 앞선빛을 새로 뽑았다. 으뜸빛: 김 해보(서울대), 버금빛: 정 귀원(연세대)․정 민구(건국대).
○1986년 10월 7일, “남북 언어 회담 제의와 남북 언어 특별 대책위원회 설치에 관한 일”이란 제목으로 대통령께 건의서를 내었다.
○1986년 10월 9일, 덕수궁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한글학회 등 여러 단체들과 꽃바치기 행사에 참여하고, 남북 언어 회담 제의 발대식을 가졌다.
○1986년 11월 14일, “국어교육에 대한 우리의 주장” 건의서를 제5차 교육개혁심의회에 내었다.
○1987년 2월 13일, “한말글 창립 첫돌을 맞이하여”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7년 2월 13~15일, 전국연합 정기총회를 한글회관에서 열어 회칙을 일부 고치고, 새 앞선빛을 뽑았다. 으뜸빛: 김 해보(서울대). 그날 국민학교 한자교육 반대에 대한 알림글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7년 4월 3일, 한국교육개발원 간담회에 참가하고, 국민학교 한자교육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87년 4월 25~27일, 전국연합 임시총회를 한글회관에서 열었다.
○1987년 4월 27일, 서울 종로에 있는 태화기독교 사회복지관에서 국민학교 한자교육 반대 강연회를 열고, 강연회를 마친 뒤에는 종각까지 행진하는 시위를 하였다. 연사는 전 택부 선생과 문 제안 선생, 그리고 김 불꾼이었다.
○1987년 5월 21일, 전국연합 회지 한말글 해오름호(제1호)를 펴내었다.
○1987년 6월 6~7일, 대구 경북대에서 전국연합 임시총회를 열어 네 번째 ‘우리말 사랑의 길―온나라 순회 주제 발표회’와 전국연합 수련회를 열기로 결의하였다.
○1987년 7월 20일, “헌법을 한글로 씁시다”라는 제목으로 성명서를 내고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7년 8월, 독립기념관의 말글 실태 조사를 하였다.
○1987년 8월 3~10일, 네 번째 ‘우리말 사랑의 길―온나라 순회 주제 발표회’를 열었다.주제: 말글의 폭력화(서울), 남북한 말글 달라짐(대구), 말글의 얽매임(부산).
○1987년 8월 11~14일, 전북 무주 구천동에서 주제 발표회 보고 및 평가회와 전국연합 수련회를 가졌다.
○1987년 8월 28일, 이 영일 국회 문공위원장에게, ‘국어교육월보 창간호에 국회를 대표하여 한자쓰기를 옹호하며 응원을 보낸다는 식의 글을 써 공인으로서 한쪽 편을 드는 것은 옳지 않으니 사과하고, 잘못되었음을 해당 잡지에 글을 써 밝히라’는 내용의 공개 글월을 내었다. 부산연합에서 총회를 열어 앞선빛을 새로 뽑았다. 으뜸빛: 김 석태(부산수산대), 버금빛: 이은임(부산여대).
○1987년 9월 5일, ‘헌법은 한글로 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정부에 내었다.
○1987년 10월 3일, 서울연합에서 정기총회를 열고 앞선빛을 새로 뽑았다. 으뜸빛: 민 병근(고려대), 버금빛: 최 충현(서울대).
○1987년 10월 9일, 덕수궁에서 한글날 기념식을 열고 서울연합에서는 “신문은 국민을 속이고 있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전국연합에서는 “한자 섞인 헌법은 국민의 것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7년 10월 19일, ‘한자 섞인 헌법은 국민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헌법을 비롯하여 모든 공문서는 한글로만 써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정부에 내었다.
○1987년 10월 23일, 한자 헌법 반대 운동에 들어갔다. 각 대학에 붙박이, 대자보 등을 붙이고, 전국연합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선거관리위원회 진입 농성을 시도하며 “우리는 선관위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헌법은 한글로 되어야 하며, 한자 섞인 공문서는 국민을 우롱하는 정치도구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87년 12월 1일, 말글정책에 대하여 통일민주당과 간담회를 가졌다.
○1988년 2월, 전국연합 정기총회를 열어 새 앞선빛을 뽑았다. 으뜸빛: 김 재광(경희대).
○1988년 6월 1일, “국회 의원의 이름패를 한글로”라는 청원서를 국회와 정부에 내었다.
○1988년 6월 9일, “국민학교 한자교육은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성명서를 내었다.
○1988년 7월 1일, 전국연합 회지 한말글 둘째 호를 펴내었다.
○1988년 7월 6일, “우리의 연하장엔 한글만 씁시다”라는 건의서를 체신부에 내었다.
○1988년 7월 14일, “국회 의원의 이름패를 한글로”라는 청원서(6월 1일)에 대한, 국회 운영위원회의 회신—‘40여 년 동안 불문율로 정립되어 온 것이므로 신중해야 한다’는 내용—에 대하여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때 서명한 대학 동아리는 모두 22개였다. 서강대 국어운동연구회, 서울시립대 우리말사랑모임 강다리, 영남대 한글물결이 새로 가담하였다.
○1988년 8월 3~6일, 경북 구룡포에 있는 경북대 수련장에서 전국연합 수련회를 가졌다. 그 수련회에는 재창립 이후 광주․전남 지역에 새로 생겨난 동아리의 회원들이 처음으로 참석하였다.
○1988년 9월 17일, 한글회관 강당에서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동문모임’을 새로 만들었다.
○1988년 11월 28일, 국회 의원의 이름패를 한글로 바꿔줄 것을 한 번 더 강력히 요청하며 공개 질의서를 보내었다. 그때 서명한 대학 동아리는 모두 25개로 늘어났는데, 강원대 말글사랑터, 서울산업대, 전남대 우리말동아리, 충북대 우리말사랑패 등이 새로 동참였다.
○1989년 2월 17일, 전국연합 정기총회를 열어 회칙 내용을 일부 바꾸고, 전국연합의 이름도 ‘전국 우리말운동 대학생 연합모임’에서 ‘전국 한말글운동 대학동아리 연합’으로 바꾸었으며, 앞선빛을 새로 뽑았다. 으뜸빛: 문 승준(건국대).
○1989년 7월, 문 승준이 개인 사정으로 으뜸빛에서 물러남에 따라 임시총회를 열어 김 한빛나리(경기대)를 새 으뜸빛으로 뽑았다.
○1989년 8월 10일, 전국연합 회지 한말글 셋째 호를 펴내었다.
○1991년 1월 11일, 전국연합과 서울연합이 공동으로 ‘한글날 공휴일제 폐지 반대 비상 대책 위원회’를 꾸려 그때부터 3월 2일까지 활동에 들어갔다.
○1991년 3월, 서울연합 출신 90학번 동문들이 모여 열려 있는 서울연합 소식지 해오름호를 펴냈다.
사회 환경이 변하면서 1990년대에 들어서는 전반적으로 대학동아리 활동의 열기가 식어졌는데, 한말글운동 동아리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