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이라도 어떤 사람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본 적이 있는가? 옆에 있는 식칼이나 과도, 혹은 야구방망이나 쇠파이프 때로는 벽돌이나 망치같은,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집어들고 상대를 후려치고 싶은 생각에 부르르 몸을 떨어본 적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지금부터 당신을 존경하기로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충동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 도덕이 있고 실정법이 있으며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발달된 이성은 그런 본능적 충동을 억제하라고 학습되었다. 대부분의 살인은 이렇게 인과관계가 있는 면식범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를 노리는, 살인 그 자체의 쾌감에 탐닉하는 살인도 있다. 그런 살인이 여러 번 일어나면 우리는 그것을 연쇄살인이라고 부른다. 대부분 연쇄살인 희생자들은 아이나 소녀, 부랑자, 매춘부 등 무력한 위치의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연쇄적 살인사건이 처음 일어난 것은 1986년 9월 중순이다. 첫 피해자의 사체가 죽은 지 한참 후에 발견되었으므로 정확한 사망날짜를 알 수가 없다. 이후 4년 7개월 동안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반경 2Km 이내에서 71세 노파부터 13세 여중생까지 모두 10명의 여성이 비슷한 수법으로 희생당했다. 피해자는 모두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으며 피해자의 옷을 살인도구로 삼았고 비가 오는 등 날씨가 궂은 날에 사건이 발생했으며 붉은 옷을 입었던 여인들이 많았다. 화성연쇄살인사건으로 기억되는 이 사건은 91년 4월, 10차 범행을 끝으로 더 이상 발생하지 않고 있으며 아직까지 범인도 붙잡히지 않은 미해결 사건이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스릴러다. 1986년 10월 23일, 논둑의 수로에서 두 번째 희생자 사체를 발견하는 씬부터 시작되는 이 영화는 한국적 스릴러의 전범을 구축한 매우 뛰어난 완성도를 갖고 있다. 희생의 순간에 시선을 집중해서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하드 고어 스타일도 아니고, 차갑고 냉정하게 살인행위 자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하드보일드 스타일도 아니다.
도심 아파트 밀집지역을 배경으로 한 데뷔작 [플란더스의 개]와는 비교될 수 없는 정교한 플롯으로, 봉준호 감독은 미해결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실화의 장르적 핸디캡을 극복하면서, 도시 뒷골목이 무대였던 지금까지의 스릴러들과는 다르게 농촌을 무대로 한 독특한 한국적 스릴러를 탄생시켰다. 이상하지 않은가, [살인의 추억]이라니? 살인을 추억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물론 범인이다. 그러나 이 제목에는 주체가 생략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를 보는 우리들 자신, 관객들 스스로가 주체적 입장에 놓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우리는 공범인 것이다!
[살인의 추억]이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과 공포 속에서 유머가 넘치는 것은, 사건을 추적하는 한국적 형사 캐릭터를 새롭게 구축했기 때문이다. 두 형사, 박두만(송강호 분)과 서태윤(김상경 분)의 캐릭터도 가령 연쇄살인을 소재로 한 다른 한국 스릴러 영화들, [텔미썸딩]의 한석규나 [H]의 지진희, [하얀 방]의 형사들과도 다르다. 특히 송강호가 맡은 박두만 형사는 육감에 의존하여 수사를 펼쳐나가는 농촌 지역 형사의 정감 있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과학적이고 합리적 수사를 주장하는 서울 출신의 서태윤 형사가 범인을 추적하는 집념으로 서서히 미쳐가는 것과 대비를 이룬다. 여기에 단순무식형의 주먹과 발길질이 최우선인 조용구(김뢰하 분) 형사가 합류한다.
관음증적이고 새도마조히즘적 관계에 기초한 스릴러의 공포는, 희생자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허점을 노린 뒤 정교하게 살인을 계획하는 살인자의 광기에서 발생한다. 대부분 사건의 해결점을 향해 극적 구조가 전개되면서 동시에 살인자의 이상심리 이면에 숨겨진 어린시절의 학대나 근원적 공포가 드러난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에서 이런 일반적 공식을 기대할 수 없다.
긴장과 이완이라는 스릴러 영화 최대의 화음을 절묘하게 연주하며, 장르적 공식 안에서 비범한 작가주의적 장인의식을 펼쳐 보이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연출은, 소년이 누렇게 익은 벼 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첫 씬부터, 2003년 다시 현장을 찾은 박두만이 또 다른 시골 소녀와 조우하는 마지막 씬까지 한 치의 틈도 없이 치밀하게 연출된다. 교차편집과 클로즈업으로 공포와 긴장감을 증가시키면서 어느 순간 전지적 시점으로 화면을 열어젖히며 관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라디오에서는 [비속의 여인]이 흘러나오고, 어둠이 깔린 시골 농촌 마을의 논이나 오롯한 산길, 초소에 사선으로 줄기차게 내려오는 빗줄기들을 보여주면서, 또 다른 희생자를 찾는 듯한 범인의 시점샷이 이어질 때의 연출은 특히 탁월하다.
용의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살해된 여성의 뒤를 쫒아다니며 스토킹했던 바보(박노식 분)나,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아내의 병구완을 지극정성으로 하고 있지만 여자 속옷을 입고 있고, 살해된 장소에서 여자의 속옷을 펼쳐 놓고 자위를 하는 변태 조병순(류태호 분), 부드럽고 가는 손을 갖고 있는 공장기술자 박현규(박해일 분) 등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지만 결정적 단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 형사들이 용의자들을 차례로 지하 수사실로 연행해서 자백을 받기 위해 고문하고 심문하는 과정이 영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영장 없이 용의자를 48시간 이상 구금하는 비인간적 수사를 고발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형사들의 비합리적 수사가 진행되는 데도 우리들은 그 형사들에게서 인간의 냄새를 맡는다. 그렇게 인간적 체취를 맡게 되는 것은 봉준호 감독의 솜씨 때문이다.
연쇄살인이란 용어는 1970년대 FBI 수사관이었던 로버트 레슬러Robert Ressler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 개인이 최소한 두 명 이상의 희생자를, 한 달이나 그 이상의 기간을 두고 살해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 연쇄살인은, 처음에는 [이방인 살인]으로 불렸으며 갈수록 증가추세에 있고 뚜렷한 이유 없이 목격자 없는 곳에서 일어난다. 연쇄살인범들은 자신의 살인행위를 일종의 연극으로 보는데, 로버트 레슬러의 자극이론에 따르면 살인행위가 결코 그의 환상에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그는 또 다시 살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범인도 잡히지 않았는데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가? 그 해답을 봉준호 감독은 2003년 현재의 시점에서 에필로그로 보여준다. 미해결 실제 사건에 대한 영화적 상상력 대신, 살인행위가 갖는 본질적 의미를 환기하며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1888년 8월 31일 런던의 빈민가 화이트차펠 거리에서 잔혹하게 난자된 채 죽은 창녀가 발견된 이후. 이후 네 명의 창녀가 비슷한 방법으로 살해되면서 영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잭 더 리퍼] 사건은 연쇄살인 사건의 효시로 꼽힌다. 자니 뎁 주연의 영화 [프롬 헬]은 바로 이 사건에 정치적 상상력을 불어 넣어 만든 것이다.
명백하게 연쇄살인범들은 반사회적 정신병자(psychopath)들이다. 반사회적 정신병자들의 공격성향은 그들 나름대로 공포와 불안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이다. 연쇄살인범들의 행동패턴은 이러한 반사회적 정신병자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인간과 어떤 애정관계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아무 생각 없이 괴롭히며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죄책감도 없다. 증오도 없고 즐거움도 없이 살인한다. 결국 그들도 삶의 또 다른 희생자들이다. 일반적으로 살인하는 마음은 [지식이나 정서의 손상, 이기주의, 환상, 우울, 정체성의 혼란, 반사회적인 이상성격, 정신병적 특징] 때문에 발생한다. 동물행동학자 로렌츠에 의하면 인간만이 서로 간의 살인을 일반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이다.
[살인에 관한 연구는 비정상적인 인간의 본능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세한 조각 속에서 그것을 보여주는 행동에 얼룩진 인간의 본능을 연구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긍정한다면, [살인의 추억]이 범인을 밝히는 장르적 공식을 따라가지 않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살인자가 전면으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초보 FBI 수사관과의 심리대결을 펼치는 한니발 렉터 박사의 [양들의 침묵]이나, 자신을 수사하는 형사에게 임신한 아내의 잘려진 머리가 들어 있는 상자를 선물하고 의도한대로 형사가 쏜 총에 의해 죽어가는 [세븐]의 연쇄살인범처럼, 팽팽한 수평적 대립에 의한 반영웅-안티 히어로가 등장하지는 못한다.
국내 번역된 연쇄살인범 관련 저서는 밥 레슬러가 쓴 [FBI 심리분석관]과 존 더글러스의 [마음의 사냥꾼] 등이다. 이들에 의하면 연쇄살인범은 보통 두 종류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대상을 무작위적으로 골라 충동적으로 범행하는 비조직적(비체계적) 살인범이며, 하나는 치밀하게 범죄 준비를 하며 증거인멸의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고 일정한 행동의 패턴을 갖고 있는 조직적(체계적) 살인범이다.
세계적으로는 [죽음의 의사]로 알려진 영국인 의사 해럴드 시프먼이 환자 15명을 살해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실제로는 희생자가 235명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피아니스트]로 올해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였던 샤론 데이트 등을 집단 살해한 찰스 맨슨도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에 속한다. 지난해 미국 전역을 공포로 몰아 넣은 공기총 연쇄살인사건은 결국 부자가 함께 벌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더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살인의 추억]은 제목 자체가 갖고 있는 기묘한 환기력으로 우리를 생각에 잠기게 한다. 주체적 입장에서 보면, 관객들 우리 자신이 각각 범인의 입장에 놓이게 되는 이 제목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비이성적 행위인 살인의 무모함과 부당함을 고발하고 있다. 김형구 촬영 이강산 조명의 황금콤비가 빚은 최고의 화면, 감정의 낭비나 사치를 찾아볼 수 없는 절제된 영상언어,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탁월하게 구사하며 장르적 법칙 안에서 삶의 본질을 예리하게 파고 드는 연출, 배역을 쥐었다 풀고 풀었다 쥐면서 완벽하게 호홉의 일치를 보여주는 주요 연기자들의 화음. 등장인물의 심리적 흐름을 섬세하게 쫒아가는 한국 스릴러 영화 최고의 완성작, 그것이 [살인의 추억]이다.
**영화를 두 번 봤는데, 궁금한 것은, 형사들이 지하 취조실에서 용의자를 고문할 때, 얼굴없는 기술직 노동자가 등장해서 보일러를 고친다. 손과 다리만 등장하는데, 왜 그럴까? 이상하게 그 부분이 크게 다가왔다.
**한 작가의 추리에 의하면, 화성 일대의 모든 남자들이 샅샅이 조사를 받았지만 유일하게 용의자 목록에 올라가지 않은 부근 거주 남자들은, 근처에 있던 미군부대 장병들이라고 한다. 따라서 연쇄살인의 속성상 살인이 갑자기 멈출 수는 없고, 살인자가 미군이었으며 그는 5년여동안 10명을 죽이고 복무가 끝나 유유히 한국을 떠났다는 추리도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