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일본의 야쿠자는 한국의 조폭과 비교해 깡패 조직, 갱, 의리, 보복, 검은 돈... 등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직까지는 다른 점도 많이 발견된다. 이는 한일 양국의 역사와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조폭들이 일본 야쿠자를 더더욱 모방하게 될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나타난 그 기저에 있는 나름대로의 다른 요소들은 쉽사리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같은 듯 하지만 어딘가 다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오랜 세월 이어져 온 ‘문화’ 라고 하는 것의 힘인 탓이다.
‘야쿠자‘하면,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던 말이다. 쉽게말해 일본의 조직폭력배를 이름이다. 하지만 한국의 그것과는 다른것이 일본의 ‘야쿠자‘이다 오락실에 가보면 ‘더 킹오브 파이터즈’란 대전격투형식의 게임이 있는데 거기에는 야쿠자 캐릭인 ‘야마자키’가 나온다. 이렇게 야쿠자 캐릭터까지 존재할정도로 야쿠자란 일본에서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조용히 두목의 얼굴을 응시하는 여자의 단호한 눈빛, 뭔가를 결심한 듯한 결연한 표정, 이내 칼을 집어들고 약지 손가락을…」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조성모의 뮤직비디오 「가시나무」에 등장하는 야쿠자의 모습이다. 언뜻 우리나라의 ‘조직폭력배’(이하 ‘조폭’)들의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냉혹한 조직의 모습이라든지 그 조직을 배반할 때 따르는 잔혹한 형벌등이 그렇다. 얼마전 한국 영화계에는 이른바 ‘조폭’바람이 불었다. 조폭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공전의 히트를 치기 시작했고 덩달아서 나온 영화들도 조폭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즐비차게 나왔다. 나름대로 일본과 한국에서 주가를 높이고 있는 조직폭력배. 일본의 ‘야쿠자’와 한국의 ‘조폭’. 일면 비슷해 보이는 그들은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그 차이에는 분명 한일 양국의 역사와 사회문화적인 차이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규칙 어기면, 손가락 잘라 속죄 야쿠자의 어원은 8 (야)·9(쿠)·3(자)에서 유래되었다. 화투판에서 이 숫자에 해당하는 화툿장을 받으면 끗수가 0, 즉 망통이 되어 가장 쓸모가 없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에서 도박으로 생활을 하는 자를 야쿠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이 차츰 일정한 직업 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남을 등쳐먹는 건달이나 조직폭력배를 지칭하게 됐고,. 야쿠자는 일본사회의 그늘을 상징하는 존재로 인식돼 왔다. 일본에서 수세기 동안 전통적으로 이어온 범죄 집단의 구성원으로 야쿠자 조직은 20세기 들어 마피아와 같은 조직을 갖게 되었다. 야쿠자들은 흔히 사무라이와 같은 의식을 치르기도 하며 때로 몸에 문신을 새기기도 한다. 그들은 일본의 주요도시에서 강탈, 공갈, 밀수, 매춘, 마약, 도박, 고리대금 등 여러 불법활동에 관여하며 많은 식당과 주점, 슬롯머신, 트럭회사, 연예인 기구, 택시, 회사, 공장 등의 업종에 참여하기도 한다. 경찰의 추정에 따르면 20세기 후반 이들의 수는 1만 5000명을 헤아렸다. 야쿠자 조직의 우두머리는 오야붕이라고 부르며, 그 밑에 있는 추종자들은 꼬붕이라 부른다. 야쿠자 조직은 엄격한 위계질서를 따르며, 그들의 규율은 종종 우익이나 군국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었다. 꼬붕은 피로써 충성을 맹세하며 야쿠자의 규칙을 어긴 자는 자신의 손가락을 칼로 잘라 그것을 비단 보자기에 싼 뒤 오야붕에게 바치는 속죄를 해야 한다. 손가락을 칼로 긁어 서로 맞닿게 해 피를 섞는 이른바 유비기리 등에서 엿보이는 동료의식과 내부의 의리 등도 과거 봉건시절 제후국인 ‘한 단위 무사사회의 기본이념을 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 형태의 야쿠자는 마피아의 패밀리와 같은 조직형태였으나 그것이 후대에는 무슨무슨 구미(組)나 가이(會)로서 오늘날 일본의 폭력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야마구치구미,이나카와가이,스미요시가이등으로 산하조직을 포함 3천여단체로 10만명에 가까운 조직원을 거느린 집회결사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행상인·도박꾼이 야쿠자 시초 초기의 야쿠자는 쇼군의 봉건적 법률에 의하여 통치되는 사회에서 반즈이인 조베이가 죽은 지 100년이 넘어서야 나타나게 된다. 이들은 중세 지하 세계의 전문적인 구성원들로서 오늘날 이들이야말로 현대 야쿠자의 전신으로 널리 인정을 받는다. 이들은 전통적 도박꾼인 바쿠토와 행상인들인 데키야들이었다. 이 두 집단의 습관들은 너무나 특이하여 오늘날에도 경찰은 이들을 바쿠토 혹은 데키야들로 분류한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제 3의 집단인 구렌타이, 즉 불량배들이 여기에 추가되었다.) 이 두 집단 구성원들의 출신은 대체로 가난한 자들, 농토가 없는 자들, 범죄자들 및 사회 어디에서나 소외받고 있는 탈락자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각 집단은 제각기 특정한 분야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아주 같은 활동지역 내에서도 서로 충돌없이 지낼 수 있었다. 바쿠토는 내왕이 잦은 대로변과 옛 일본의 읍에서 활동하였으며 데키야는 점점 늘어나는 시장터에서 움직였다. 후지타 고로는 그의 ‘백년사’에서 이 거친 행상인들과 대로변의 도박꾼들로부터 야쿠자의 기원을 찾고 있다. 후지타는 야쿠자 원로들과의 대화와 일본 내 도서관 소장 자료 및 심지어 옛 야쿠자의 묘소 방문을 통한 연구 속에서 오늘날 두목들의 범죄계보가 1700년 대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후지타의 저서에서 주장되는 계보는 각종 야쿠자 분파들간의 선입견들을 윤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이 분파들 사무실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위대한 두목들의 사진 옆에는 그 집단을 옛날의 고귀한 무법자들과 어떻게든 연결하여 만든 족보가 걸려 있다. 특이한 것은 이러한 세습적 연결이 혈연이 아닌 입양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야쿠자들은 1867년 메이지 유신과 함께 ‘근대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건설현장과 하역장으로부터 회원들을 모집했다. 그들은 심지어 인력거 사업에까지 관여했다. 그러나 경찰이 바쿠토갱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 있었기 때문에 도박사업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바쿠토와는 다르게 데키야는 번영하고 점점 더 확대되어 나갔다. 왜냐하면 그들의 활동은 적어도 겉으로는 불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쿠자는 몇몇 정치가들과 관료들의 편을 들면서 정치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부와 협력했고 그래서 공식적인 허가를 얻거나 적어도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정부는 야쿠자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민주주의로의 일본의 전환에 있어서 군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국수주의자를 위한 도움 등 여러 비밀단체들이 생겨났고 언어와 암살 그리고 협박편지에 대해서 훈련받았고, 군사적으로도 훈련받았다. 두번의 쿠테타, 두 총리와 두 재무장관의 암살, 그리고 계속되었던 정치인들과 사업가들에 대한 공격 등 국수주의자들의 테러에 대한 영향력은 1930년까지 계속됐다. 야쿠자는 그 명분에 대한 물리력과 사람들을 동원했고 점령된 만주와 중국에서의 “토지개발계획”에 참여했다. 그러나, 진주만에 폭탄이 떨어졌을 때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정부는 더 이상 국수주의자와 야쿠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정부와 같이 일했던 야쿠자의 소속원들은 군에 편입되거나 감옥으로 보내졌다. 2차대전후, 미점령군은 야쿠자를 자신들이 하는 일에 반하는 주요 위험대상으로 보았다. 그들은 야쿠자의 활동을 철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1948년, 미군정이 그들의 조사는 끝이 났고 위험집단이 사라졌다고, 아니면 적어도 줄어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작업을 멈추었다. 그러나, 점령군이 실시했던 식량배급제는 결과적으로 갱들이 부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암 시장을 형성했다. 시민경찰들은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갱은 방해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고, 몇몇 점령군의 관리들은 야쿠자를 돕기까지 했다. 점령군은 야쿠자가 강력한 조직체이고 익명의 정부고급관리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두 오야붕 아래에서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미군정은 그들이 야쿠자로부터 일본일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1950년 그들의 패배를 인정하게 됐다. 전후시대에 야쿠자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더욱 폭력화되었다. 칼은 과거의 유산이 되었고, 총이 새로운 무기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강도질과 갈취의 대상은 다른 행상이나 노름꾼 그리고 특별한 집단만이 아니었다. 점점 보통시민들도 그들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영화 갱단들(a la Guys and Dolls)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으며 그들의 모습 또한 달라졌다. 그들은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했고 검은 양복과 검은 넥타이 그리고 하얀 셔츠를 입었으며 머리를 짧게 자르기 시작했다. 1958년에서 1963년 사이, 야쿠자의 조직원들은 150%이상 늘어나서 일본의 정규군보다 많은 184,000명이 됐다. 일본전역에서 활동하는 갱조직은 약 5000개나 됐다. 야쿠자는 자신들만의 영역 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들간의 세력다툼으로 인해 폭력을 동반한 혈전이 시작되었다.
일본’야쿠자’의 존재, 경찰 통제불능 상태 세계적으로 봐도 가장 치안이 안정된 나라인 일본에서 야쿠자의 존재와 영향력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자전거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자전거에도 고유 번호를 붙이고, 의심되는 자전거는 언제든지 불러세워 번호를 조회하는 경찰. 이처럼 철저한 치안국가에서 ‘야쿠자’에 대해서만은 말도 안되는 비합법적인 일들이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의 안좋은 큰 사건이나 스캔들의 배후에는 거의 항상 야쿠자가 관련되어 있다. ‘노무라 증권 스캔들’ 같은 커다란 사건 뒤에는 물론, 일본 전체 주주총회의 뒤에도 야쿠자는 깊이 관련되어 있다. 증권 투자의 경우에도 야쿠자는 주가가 오르면 당연히 돈을 버는 것이고 만약 그 주가가 떨어져 망하게 될 경우에도 증권회사측으로부터 몰래 보상을 받는다. 일본의 내로라하는 커다란 주식회사들은 야쿠자에게 늘상 당하면서 그냥 그대로 방치하며 넘어간다. 주식 몇 주나 소량을 산 야쿠자들은 주주총회에 나온다. 공개적인 장소에 나와 경영진에게 개망신 줄 추잡한 정보들을 캐내갖고 등장하는 것이다. 회사는 난장판이 될 주주총회를 잘 무마하기 위해서 미리 돈을 준비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대단한 치안력을 자랑하는 일본경찰들은 과연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경찰은 전국 야쿠자 조직의 신상까지 소상히 다 알고 있지만, 손을 대지 않는 것일 뿐이다. 가끔 형식적인 수사나 연행이 일어나지만 근본적으로는 손을 대지 못한다. 더더욱 황당한 것은 야쿠자들은 아예 자신들 조직의 간판을 걸고 사무실을 내고 있다. 우리로 말하면 무슨 파, 무슨 파라는 이름을 공개적으로 내놓고 활동하는 것이다. 이런 조직이 일본엔 10만 명 정도가 존재하는데도 경찰은 손을 대지 못한다. 손을 대기는 고사하고 어떤 때에는 보호해 주는 게 아닐까 싶은 한심한 광경들도 보인다고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야쿠자 사무실에 갑자기 회의가 있다고 할 때, 갑자기 삐가번쩍한 벤츠, 링컨 콘티넨탈, 캐딜락들이 들이닥친다. 잠시 불법주차해도 견인차가 끌어가는 게 일본이지만 이 때에는 예외라고 한다. 오히려 줄줄이 불법주차된 야쿠자 차들을 정리해 주기 위해서 경찰이 나와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도 보인다. 좋게 해석해 준다면 일반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리 통제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이다. 그러면 야쿠자는 무얼 먹고 사는가? 당연히 민간인이 피땀 흘려 버는 돈을 착취해서 산다. 일본인들이 대중적으로 이용하는 ‘고리대금업`이라 하는 것은 야쿠자 사업이다. 빌리는 것은 쉬우나 공갈, 협박, 폭력이 뒤따른다. 수많은 일본인들의 이런 돈을 쓰고 있는 건 신문 광고나 엄청난 광고 인쇄물의 정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돈을 못 갚는 사람들은 야쿠자들의 잔혹하고 비열한 협박·폭력으로 다리가 부러지고 자살에 이른다. 매춘부 인구 3분의 1이 바로 이런 야쿠자 빚을 못 갚아 이 세계에 들어가고, 이는. 일본의 높은 자살률과도 무관하지 않다. 연예계는 물론 스포츠 흥행도 야쿠자의 사업이다. 합법적인 도박은 물론이고 비합법적인 모든 도박에 야쿠자는 관여한다. 세계 어느 나라나 도박이란 그들의 점유 사업이지만 일본처럼 일반인들에게 법을 따지는 나라에서 그걸 바라보고 가만히 있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야쿠자의 조직력과 뿌리를 캐보면 이들을 쉽사리 대할 수 없는 경찰의 실정도 짐작이 된다. 그 유명한 록히드 사건도 야쿠자의 대부 고다마 요시오가 당시의 다나카(田中角榮) 수상과 미국을 연결한 것이다. 또한 90년대 전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최고 정치 스캔들인 가네마루 부수상과 사가와(佐川) 재벌 스캔들도 그 중심엔 야쿠자의 존재가 버티고 있었다. 가네마루 신(金丸信)이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수상의 선거를 지휘할 당시 사가와 회사의 사장을 통해 일본 3대 야쿠자 조직의 하나인 이나가와카이(稻川會)의 이시이 회장을 만났던 것이다. 가네마루의 부탁은 이나가와카이가 선거기간 동안 다케시다 수상을 극우파의 테러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일본 수상이 야쿠자에게 경호를 바란다는 자체가 우습지만, 어쨌든 이것이 일본의 현실인 것이다. 이 정도 되면 야쿠자를 경찰이 마음대로 해체시키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야쿠자의 아내들이 ‘야쿠자와 폭력단은 틀리다!` 라며 경찰에 데모를 벌인 일도 있었다. 90년대 들어 경찰이 ‘폭력단 신법`을 만들어 그들을 죄려 하자, 야쿠자는 그들의 아내들을 내세웠다. ‘야쿠자와 폭력단은 틀리다!` 이들이 이런 슬로건을 내세우는 데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다. 일본의 공산당을 막은 것이 누구냐는 것이다. 1960년대 안보투쟁 시대의 좌익 운동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일본 전국의 대학생, 노동자, 당원들의 거센 시위를 경찰 혼자 봉쇄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발급된 티켓은 야쿠자들을 동원한다는 아이디어였고, 이미 야쿠자의 정치적 동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민비 시해 사건’ 역시 일본 우익 야쿠자들의 소행이었던 바, 원래부터 야쿠자란 일본의 국수 우익주의자들의 오른팔격인 행동대로서 규모가 방대해져 있었던 것. 안보투쟁 때의 야쿠자 행동대는 그 맡은 임무를 충실하게 해냈다. 그들은 애국을 내세워 이 나라를 폭력혁명 공산당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정신으로 거침없는 폭력을 휘둘렀다. 시간이 지나고 그러한 정치적 과도기가 지났을 때, 야쿠자들은 이미 경찰 통제력을 무시해 버릴 정도로 커져 있었던 것이다. 과도기의 시대에 정부 특히 우익 정치인들은 그들에게 어마어마한 특혜를 베풀었다. 야쿠자는 이미 밤의 세계를 지배하고 검은 경제의 극대화 작업에 돌입해 있었던 거다. 경찰의 통치만으로는 안 되니까 너희들이 어느 지역을 관할 통제하라는 것이다. ‘긴자(銀座)의 대통령`으로 불렀던 한국계 보스 마치이 같은 이들이 그 시대의 기린아들이었다. ‘긴자의 밤은 내가 다스린다. 대신 여기서 무슨 사고가 나면 내가 책임진다’ 이런 식의 논리가 일본 전국각지에 적용되면서 경찰과 야쿠자의 공존논리도 성립되었다. 물론 세인들이나 매스컴의 눈이 있으니깐 가끔씩 단속을 한다. 단속을 하는 날은 당연히 야쿠자들 사무실에 연락을 해준다. 야쿠자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기류, 마약류, 불법 물건, 장부들을 숨긴다. 막상 경찰이 왔을 땐 그들의 체면도 세워주기 위해 한두 자루 정도의 총이나 일본도 등을 남겨둔다. 경찰에도 건수를 올려주어야 피차 공생한다는 생각이다. 야쿠자는 폭력단이 아니라는 구호는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생겨난 의식이다. 자기들이 필요했던 시기에는 경찰의 선봉대로 내세우고, 이제 와서 ‘폭력단 대책 新시행법’으로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는 것이냐며 그들은 성난 눈초리로 정부와 경찰에게 오히려 데모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생관계 탓에 일본정부의 야쿠자 타도는 이미 시기가 지났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불법적인 조무래기들은 잡을지 모르지만, 거물들은 이미 모두가 합법적 사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다. 이에는 오랫동안 내려온 정치계와의 끈이 있다. 상식적으로 수상이 야쿠자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실정이었다면 다른 수많은 정치가들은 어떠했겠는가. 실제로 수많은 의원들은 선거기간 동안 야쿠자에게 선거운동을 부탁해 왔고, 자금지원을 받아 당선된 숫자도 부지기수다. 한마디로 일본 야쿠자는 타도될 수가 없는 것이다.
영향력·규모에서 한국 조폭과 비교 안돼 이렇게 본 야쿠자는 일면 한국의 조폭과 비슷한 점이 많다. 한국의 조폭은 과거의 ‘건달’ 내지는 ‘깡패’들이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좀 더 조직화되었고, 해방 이후 극도의 정치적 혼란기에서 소위 ‘정치깡패’로 동원되었다가, 오늘에 와서 유흥가를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조직이라든지, 계보, 규칙 등이 상당히 비슷하고, 검은 돈을 주 수입원으로 하고 있는 등 어찌보면 조폭이 야쿠자의 모습을 상당부분 모방한 것 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자세히 보면 야쿠자와 조폭은 다른 면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일본의 야쿠자는 그 영향력이나 규모가 한국의 조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의 경찰통제력 밖에 있을 만큼 영향력이 막대하다. 또한 그들의 경제적 규모는 세계 웬만한 국가들의 GNP를 훨씬 넘어선다. 예전에 야쿠자 부인들 수십명이 토크쇼에 출연해서 솔직하게 그들의 경제실상을 얘기한 일이 있는데, 그들의 월소득은 2천만원 이상이고, 거의가 벤츠를 타고 있었다. 야쿠자의 부인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냐는 질문엔 사회적 눈초리 때문에 가끔씩 곤혹스럽지만 후회는 없다고 얘기했다. 또한 모두들 남편쪽에 생명보험을 걸어놓고 있는데, 남편이 생명을 잃을 경우는 20억원 이상의 보험금을 타게 돼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으면 한 달에 2천만원, 죽으면 20억원, 어쨌든 이 정도의 경제상황이니 야쿠자의 사업규모는 가히 상상이 간다. 10만명이라는 대식구와 그 위에 상부구조의 자금능력은 일본 최고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반면, 한국의 조폭은 자금력이나 그 영향력에서 야쿠자와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조폭은 어디까지나 경찰의 통제력 하에 있었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가 민심을 얻기 위한 첫 조치로 ‘국토건설단’ 이라는 미명 하에 1960년 깡패 소탕령을 내렸고, 이후 역대정권은 10년 단위로 폭력배와 전쟁을 벌여왔기 때문. 72년 유신을 전후한 사회악 처단조치’, 80년 계엄체제 아래 실시된 삼청 제5호’, 그리고 89-90년, 90-92년에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6공화국의 범죄와의 전쟁 등이 그런 예이다. 정치적으로 동원된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야쿠자의 경우는 오히려 정치와 결탁하고 ‘동업’한 결과가 되었고, 한국의 조폭은 정치세력에 ‘이용’되었을 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그들이 주요 경제원으로 삼고 있는 사업들도 ‘검은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웬만한 나라의 GNP를 능가할 정도의 경제력을 확보하고 있는 야쿠자와 조폭은 사뭇 다르다. 사업내용 역시 경찰의 힘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야쿠자들은 매춘, 마약사업 등을 벌이는 것도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렸지만, 한국의 경우 아직은 드러내놓고 이러한 사업에 개입하지는 못하고, 개입하더라도 미미한 수준이며, 주로 유흥가를 중심으로 한 이권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한편, 한국 조폭들의 이권개입 방식이 전통적인 방식과는「질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일본 야쿠자식의 「기업형 운영방식」을 그대로 도입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98년 9월 검찰에 검거된 「방배동파」인데, 이들은 90년 이후 수도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흥조직 중 하나였다. 이들은 51억원 상당의 백화점을 계약금 5억원에 빼앗아 1년반 동안 백화점을 경영하면서 수십억원의 부도어음을 남발하는 수법으로 자금을 충당했다. 또 엘칸토 구두상품권 13만장을 기업 투자비조로 건네받아 횡령하는 등 합법을 가장해 불법으로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나이트클럽 등 유흥업소 운영과 건설공사 입찰개입 등 전형적인 사업 외에도 최근 사설경호업, 연예인공급 프로덕션, 주류대리점, 어음 및 신용카드할인업체 등에도 손을 대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금융회사까지 설립해 놓고 돈을 빌려간 기업이 약속된 날짜에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조직원을 동원, 회사를 빼앗는 수법까지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최근 폭력조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직장이 없거나(67.2%), 유흥업 종사(9.8%) 조직원이 다수를 차지했지만, 사채(3.6%),건설업(3.6%),운수업(1.7%) 등 합법적인 활동을 하는 사례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최근들어 조폭들이 유흥업소,사창가 등을 상대로 돈을 뜯는 수법에서 벗어나, 건설·사금융업 형태로 위장하고 있다가 필요하면, 조직원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하는 마피아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조폭들의 최근 변화는 일본 야쿠자들의 그것과 매우 닮아가고 있다는 점은 틀림없으나, 그 정도의 차이에 있어 아직은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당장 위와같은 조폭들의 움직임에 대해 대검 강력부는 곧 조폭들의 자금원으로 밝혀진 유흥업소, 건설업체, 판매업소 등에 대해 일제수사에 나서는 등 본격 ‘조폭사냥’에 나섰다. 일본의 경우와는 다른 대처방법이다. 물론 점차 기업화·국제화되고 있는 조폭들에게 이러한 법의 통제가 언제까지 통할지는 미지수지만, 아직은 이러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야쿠자와 조폭에 대한 양국 국민들의 인식 차이다. 물론 양국에서 이들은 선량한 일반시민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조폭세계와 관련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유흥업에 종사한다든지 여타 관련된 사업을 하는 경우가 아닌 일반시민이라면, 그저 ‘나쁜 깡패들’ 정도의 의미일 뿐 조폭세계를 접하고 더더구나 그에 의해 피해를 볼일은 없다. 그러나 야쿠자는 그 조직이 워낙 거대하다 보니, 시민들도 그들에 의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고,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한다. 경찰도 그들의 눈치를 보는데 하물며 일반시민들은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앞의 예처럼 수상이 야쿠자들에게 경호를 부탁한 적도 있다니 더 이상 할말이 없다. 즉, 우리나라의 경우는 두려워하되 기본적으로는 그들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일본의 경우는 심하게 말하면 ‘경외’하는 느낌이 들 정도라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가족 중 조폭이 있다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질 뿐, 일본의 야쿠자 부인들처럼, ‘내 남편이 야쿠자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