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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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방학 동안 자녀들 혹은 연인들과 함께 갈 수 있는 곳으로서 박물관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평소 마음을 열어 놓고 대화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따뜻한 곳에서 오붓하게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 역사지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물관은 해방이후 급격하게 밀려온 서양문물의 영향으로 우리 것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많아서 우리 역사가 소홀해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1960년대 개발경제시대에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s)’가 곧 근대화로 인식되고, 또 일촉즉발 위기의 남북 대치상황과 치열한 국제경쟁에 쫓겨서 사실 그다지 가깝지 않은 공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복지사회를 맞아 물질적 충족과 함께 정신적 충족을 위한 노력으로 박물관을 찾는 발길이 크게 늘고 있다(2014.08.20. 강진 청자박물관 참조).
경천사 10층석탑. |
국립중앙박물관은 우리의 자존심이자 국가의 보물을 보여주는 공간이지만, 그런 명분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굴곡을 많이 겪었다.
한말인 1908년 창경궁에서 ‘이왕가(李王家)박물관’으로 출범하여 일제강점기 때에는 총독부박물관으로 되었다가 해방 후 국립박물관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으나, 6·25전쟁 동안에는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1953년 경복궁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4년 11월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했다가 다시 경복궁으로 옮겼지만, 문민정부는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의 잔재’라며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바람에 갈 곳을 잃고 경복궁 안의 고궁박물관에서 9년여 동안 쪽방생활을 하다가 2005년 10월 28일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미군기지가 있던 용산에 신축 이전한 국립중앙박물관은 오랫동안 외국군이 주둔했던 우리 영토를 회복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찾았다는 의미와 함께 서울의 상징인 남산과 한강 사이에서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전통사상에 따라 성벽과 같은 박물관건물을 배산으로 삼고, 박물관 앞의 인공연못은 임수를 상징했다. 연면적 13만 8135㎡(약 4만 2000평)대지에 지하 1층, 지상 6층 건물의 총 6개관 50개실에는 국보와 보물 243건을 비롯한 15만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넓은 공간과 편리한 접근성에 힘입어 전국 각지에서 국민들은 물론 주한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정부는 방문객의 60% 이상이 지하철을 이용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2013년 1월 3년여 공사 끝에 지하철 4호선 이촌역에서 박물관까지 약260m 지하보도를 ‘박물관 나들이길’로 연결해서 접근성을 한층 높였으며, 또 승용차로 찾아오는 관람객들까지 모두 지하주차장으로 안내되어 지상에는 자동차가 보이지 않는다.
입장료는 무료이고, 기획전, 특별전을 할 때에만 입장료를 받는다.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 |
남산을 지키는 성벽처럼 길게 지어진 중앙박물관은 중앙 출입구를 중심으로 왼편에 어린이박물관, 영화관, 레스토랑 등 편의시설이 있고, 오른편 건물이 주전시실이다. 특별전시실에서는 지난 12월 9일부터 4월 5일까지 베수비오 산의 화산폭발로 묻혔던 도시 폼페이 유물전을 전시하고 있는데, 2005년 10월 개관 당시 1층 중앙에는 일본에서 갓 반환된 북관대첩비를 전시하다가 이듬해 봄 북한으로 돌려보내고, 그 자리에는 월광사지 원랑선사 탑비를 세웠고(보물 제360호), 그 뒤편에는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제86호)을 전시하고 있다.
신라 문성왕 18년(856) 당에 유학했다가 귀국한 원랑선사(圓朗禪師)가 충북 제천시 한수면 동창리 월광사에 머물면서 선문(禪門)을 널리 퍼뜨리다가 헌강왕 9년(883) 입적하자, 진성여왕 4년(890)에 세운 높이 3.95m(비신 높이 2.26m), 너비 97㎝, 두께 24㎝의 원랑선사 탑비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탑비로 잘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 철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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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려 말인 충목왕 4년(1348) 경상도 진주출신 관노였던 강융(姜融)의 발원으로 당시 고려의 서울 개경 부근인 경기도 개풍군 경천사에 세운 13.5m 높이의 경천사 10충 석탑은 원에 공녀로 갔던 딸이 승상 탈탈의 소실이 되자, 진녕부원군이 된 강융이 원에서 벼슬을 한 것을 과시하며 권세를 부리던 고봉용(高龍鳳), 친원파 성공(省空), 육이(六怡) 등과 함께 원나라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세운 라마식 탑으로서 1층 탑신에는 원 황제, 태자, 황후의 천수 만세를 새겼다.
이 탑은 1907년 순종의 가례 특사로 왔던 일본 궁내부대신 다나카미스야키(田中光顯)가 고종에게서 선물 받았다며 탑을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반대여론에 몰리자 1918년에 반환했다. 그러나 반환된 이후에도 40여 년 동안 경복궁 회랑에 방치되었다가 1960년에 복원되었으나 훼손을 염려하여 1995년 다시 해체했다가 복원한 것이다.
경천사 10충 탑이 세워진 120년 후인 조선 세조 11년(1465) 아름다운 경천사탑을 모방한 탑을 원각사에 세웠는데, 원각사 10층탑은 현재 종로3가 탑골공원에 있다(국보 제2호).
1층 남쪽 선사·고대관은 구석기실/신석기실/청동기실/원삼국실/고구려실/백제실/가야실/신라실/통일신라실/발해실 등 10개 전시실에서 고대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연간 300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작 부여, 옥저, 낙랑군시대를 도표로 게시하고 있고, 한사군이 한강 이북 전체에 미친 것으로 소개하고 있을 뿐 우리의 반만년 역사는 찾을 수 없다는 점이 크게 아쉽다.
1층 북쪽 중·근세관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와 유물을 대외교류실/전통사상실/사회경제실/왕과 국가실/문서실/금석문실/지도실/한글실/인쇄실 등 9개 전시실로 나눠서 왕과 국가, 전통사상 등의 역사자료를 쉽게 이해하고 흥미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백자철화포도원숭이 무늬항아리(국보 제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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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전시실을 회랑식 구조로 빙 돌아가며 관람할 수 있도록 배치했는데, 북쪽 서화관은 한국 미술사의 대표적 명품들인 서예, 회화, 불교회화, 목칠공예를 서예실/회화실/불교회화실/목칠공예실 등 4개 전시실에서 전시하고, 남쪽에는 국내외 개인소장가들이 기증한 기증품 전시관으로 꾸몄다.
또, 3층 북쪽 조각·공예관은 불교 조각과 금속 및 도자공예를 불교조각실/금속공예실/도자공예-청자/도자공예-분청사기/도자공예-백자 등으로 나누고, 3층 남쪽 아시아관은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등의 문화재를 전시하여 이웃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문화의 다양성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밖에 연못 주변의 야외전시장에는 몇 개의 석탑과 불상 등이 전시되고 있지만, 부피와 무게 등의 애로사항과 현지에서 보존 전시하는 것이 더 좋다는 판단 때문인지 전시된 유물들은 그다지 볼만한 것이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북한이나 만주 지역의 유물 수집의 한계로 멀리 중동, 남미 등지의 유물까지 전시하고 있는 것은 우리 역사와 유물과 외국의 유물들을 대비시켜서 국민들의 인식의 범위를 넓히려는 의도이겠지만, 상대적으로 우리의 유물 비중이 크게 위축된 점도 숨길 수 없다.
또, 그림이나 서예 전시물은 그렇다 해도 조각이나 불상 같은 전시물은 별다른 지장이 없을 텐데도 촬영을 금지한 구역이 너무 많아서 약간 거부반응이 생기기도 한다. 다만, 2014년 1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누구든지 모든 소장품을 검색할 수 있고, 자료사진도 상업적 활용이 가능하도록 한 것에 위안을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