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도림동 14.5.30 게재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 考 42 140530
도리미 새말 여무실 주적골 등 정겨운 지명 있는 도림동
주적골 당제는 지금도 이어지는 원형이 보존된 귀중한 인천의 문화유산
남동구 도림동(挑林洞)은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남촌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도림동 토박이들에게 전승된 당고사(堂告祀) 자료를 보면 인근 남촌동, 수산동과 함께 대략 400년 전 취락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정조 13년(1789)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남촌면 동리 이름이 1,2,3,4(里)로 기록됐는데 2리가 이곳이었다. 1842년과 1899년 관찬(官撰)한 『인천부읍지』들은 오늘의 도림동 지역 취락으로 도림리(挑林里), 오봉산(五峯山), 여무실리(女舞室里), 능동(陵洞)을 기록했다.
1903년 8월 인천부가 동리명을 정리할 때 오봉산리와 도림리를 합해 도림리로, 능동과 여무실을 합해 2리(二里)로 정했다. 1911년 발간한 『조선지지자료』에는 2리(二里), 신촌(新村. 우리말 표기 새말), 수곡(水谷 슈곡) 이무실(伊茂室), 능동(陵洞 능꼴) 등이 실려 있다. 여무실을 ‘이무실’로 쓴 것이 특이하다.
1914년 3월 1일 인천 일부와 부평 일부를 떼어내 부천군을 신설하면서 남촌면과 조동면을 합해 남동면으로 정하고 거기 소속시켰다. 그리고 그해 11월에는 도산리(挑山里)라는 하나의 행정리로 통합했다. 1940년 4월 1일 남동면을 다시 인천으로 편입시키면서 일본식 정명 신도산정(新挑山町)으로 바꾸었다. 인천부에 이미 도산정(현 도원동)이 있어서 ‘신’자를 붙인 것이다.
1980년대에 마을 원로들의 구술을 받아 정리한 필자 선친의 『인천지명고』(1993)에는 도림동의 오래된 취락으로 위의 『인천부읍지』들처럼 도림마을, 오봉산말, 여무실, 새말 등이 올라 있다. 그런가 하면 1982년에 발간된 『한국지명요람』에는 그 외에 덕골, 숫골, 주적골 등이 올라 있다.
필자의 교사시절 제자로서 대대로 도림동에서 살아온 이호우(50세. 연수여고 교사) 선생 말에 의하면 도리미는 수산동에서 오봉산에 이르는 구길에서 도림고개 주변에 위치해 있는 마을, 그러니까 도림주공사거리의 아이파크 아파트 뒤쪽 마을이다. 여무실은 홍익돈까스 옆 작은 고개 너머 마을이고, 덕골은 도림고교 정문에서부터 홍익돈까스 주변의 마을까지이다. 수골(쑥골이라고도 불렀다)은 도림고교에서 논현동으로 가는 구길에 있는 국궁장 남호정의 오른쪽이자 국정원 건물 뒤편이다.
주적골은 현재 남동구 야구장과 남호정 왼쪽 건너편 사곶냉면, 현대오일뱅크 주변이다. 주적골에서 논현동으로 가는 언덕(현재 정수장이 있는 곳)에 성황당이 있어서 서낭대고개라고 불렀다고 이호우 선생은 기억한다. 산봉우리가 다섯 개인 오봉산은 옛날에 태산(胎山)이라고도 불렀는데, 왕자의 태를 묻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도림리는 복숭아밭이 있어서 붙인 지명이라는 게 토박이 원로들의 구술을 존중한 필자 선친을 비롯한 1세대 향토사가들의 견해였다. 그리고 수골은 숯을 굽던 숯막이 있어서 붙인 지명이라고 해석했다. 능동은 거기 왕 또는 왕자의 무덤이 있어서, 여무실은 옛날 이곳이 무당촌이었고 여인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집이 있어서 붙인 지명이라고 했다. 주적골은 한자어가 주적곡(紬績谷)이다. 뽕나무숲이 우거져 누에로 명주실을 많이 뽑은 곳이라 붙은 지명이다.
지명 음운학을 공부한 분들은 일부 지명에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조선일보 인천본부장 최재용 선생은 둥글다는 뜻을 가진 형용사 ‘도렫하다’의 어근 ‘도렫’에 ‘뫼’가 합성하여 도려미라 했고 도리미로 바뀌었는데 그걸 도림(挑林)이라고 음차했다고 『남동구 20년사에서』(2010)에서 기술했다. 복숭아밭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능동도 ‘늘어선 마을’ 혹은 ‘늘어선 골짜기’라는 뜻으로 ‘는골’이라고 했는데 자음동화 현상으로 는골>능골로 바뀌었고 능동(陵洞)로 표기하다 보니 무덤이 있었다는 해석으로 갔다고 추측한다. 여무실도 ‘실’이 골짜기를 뜻하던 사멸된 우리말 고어 ‘실’이며 이곳에 여우들이 있어서 ‘여우실’이라고 한 것이 여무실이라는 한자로 표기됐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도림동 당고사는 음력 7월 1일 4백 년 된 엄나무를 당나무로 삼고 황소를 제물로 바치며 지내온 행사였다. 함께 마을의 안녕과 화합, 풍년을 빌고 소고기를 나누어 가졌다. 인근 남촌동과 함께 화합한 축제이자 세찬계(歲饌契)이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도 토박이들이 모인 삼육회를 중심으로 ‘도림 당제의 날’ 행사를 열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삼육회의 천정근 총무가 보내준 그동안의 기록을 보면 많은 노력을 하며 원형을 잘 보존해 온 듯하다. 근년에는 남동구의 지원이 있다 하나 인천시 차원의 지원도 있었으면 좋겠다. 길이 보존할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