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지와 부여박물관
2016. 3. 11.
정림사지 5층석탑(定林寺址 五層 石塔)
지정별: 국보 제9호
소재지: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이 탑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6세기 말에 세워진 석탑이다. 탑의 모서리에 세운 배흘림 기둥이나 넓은 지붕돌 등을 따로 만들어 짠 탑으로 부분 재료를 보면 목조건축의 구조를 모방 한 것으로 보인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정돈된 형태나 장중하고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백제인의 솜씨를 보여준다. 백제탑의 시원 약식으로 이를 본 뜬 탑이 충남지역에 많이 만들어 졌다. 1층 몸체 돌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그 공적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귀중한 역사적인 자료이다.
정림사지 석불좌상(定林寺址 石佛坐像)
지정별: 보물 제108호
소재지: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불게 타고 심하게 마모되어 대좌와 불상이 형체만 남아있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진리를 나타내는 비로자니불상으로 짐작된다.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대좌는 비교적 잘 날아 있는데 단정하면서도 균형있는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석불이 있던 절은 6세기 중엽에 창건된 것이다. 정림사는 이 절의 고려시대 이름인데 1028년에 만들어진 기와 명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구려 초에 절을 다시 세울 때 백제시대의 강당자리를 금당으로 삼아 이 석불을 주존불로 모셔다. 남원 만복사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림사지(定林寺址)
부여 정림사지(사적301호)는 사비도성 내에 위치하는 백제의 중심사찰이다. 백제시대의 정림사는 중문(中門), 탑(塔), 금당(金堂), 강당(講堂)이 남북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동서회랑과 동편건물지, 서편건물지, 묵편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규모는 동서 약62m, 남북 약120m이다. 발굴 조사를 통해 민무늬토기편이 출토된 청동기시대 문화층과 정림사 창건 이전의 백제시대 문화층, 고려시대 문화층 등이 확인되어 정림사지가 창건이전에도 공방시설을 조성한 공간으로 활용되어 왔으며, 고려시대에도 사찰로서 명맥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여 정림사지
지정별: 사적 제301호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부여 정림사지는 백제사찰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 중 하나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중심 사찰터이다. 이 절터는 주요 건물인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건축하고 주위에 회랑을 구획한 현태로 주요 건물을 남북 일지선상에 배치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기단은 기와를 사용하여 축조한 와적기단으로 이 역시 백제의 독특한 건물 축조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고대 일본의 사찰에도 영향을 주었다.
임천대교비(林川大橋碑)
부여 임천 대교비는 임천면 만사리 논에 묻혀 있던 것을 만사리 마을로 이전한 것으로 마을에서는 오랫동안 어떤 이유에서인지 개(犬)의 충절(忠節)을 기린 비로 인식해왔다. 비는 마을 진입로 확포장 공사 과정에서 제보되어 조사 결과 조선시대 임천에서 서천군 한산으로 이어지는 대로(大路)상의 하천을 넘는 다리와 관련된 비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화강암재의 석재를 이용하여 비문을 세긴 면만 고르게 치석하였는데 현재는 윗부분의 좌우가 떨어져 나간 형태이다. 하단에는 원위치에서 옮겨와 다시 세우면서 “주인을 구한 충절의 표상 개(犬) 비(碑)”라는 문구를 새겨 놓은 받침돌이 남아있다. 비문은 상하로 내용이 구분되는데 윗부분은 다리의 건립 경위와 과정. 그리고 건립 연대 등을 8행으로 기록하였고 아래 부분은 다리 건립에 참여한 인물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체계화된 관리와 보존을 위해 2010년 현 위치인 정림사지박물과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왔다.
명혜공주 태실비(明惠公主胎室碑)
건립연대: 조선 현종 11년(1670)
전체높이:216㎝
명혜공주(明惠公主: ?~1673)는 조선 제18대 현종(재위 1659~1674)의 둘째 딸이다. 태실비는 원래 충화면 가화리 용골 구태봉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면 사무소 앞에 이몰되어 있던 것을 2006년 현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방형의 비좌(碑座) 위에 한 몸으로 이루진 비몸과 머릿돌[離首]을 올린 형태로 비좌의 앞면과 옆면에 초화문을 새기고 윗면에는 단판의 연화문을 새겼다. 빔모의 앞면에는 “명혜공주아지씨태실(明惠公主阿只氏胎室)”이라 쓰고 뒷면에는 “강희 9년 3월 13일 립(康熙 九年三月十三日 立)” 이라고 적혀 있어 조선 현종 11년(1670)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부여석조(夫餘石槽)
보물 제 194호
현위치: 부여 관북이 추정왕 궁터
본래 석조는 장방형 또는 원형의 돌 내부를 파내어, 절 등에서 물을 저장하는 용도로 쓰던 석조물이다. 부여석조로 알려진 이 석조는 원래 있던 장소가 백제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인의 간결하면서도 소박한 미감을 살린 형태나 세부 표현 기법으로 보아 백제 왕궁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편 석조 표면에는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 오층석탑 1층 탑신에 새겨진 것과 같이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