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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인문학 특강] 니체 4강 <초인, 네 자신을 넘어서라>, 2014년 7월 28일 방영
[출처 : http://metalenigma.blog.me/220077302294 ]
<PROLOGUE: 21세기 인간의 자화상, '마지막 인간'>
지난 2천년 동안 신을 향했던 우리의 시선을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이에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며 그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저 멀리 아득한 천상이 아니라 우리가 두 발을 붙이며 살아가는 지상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는 말이다. 니체는 우리 자신 안에 꿈틀대는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권력에의 의지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바로 여기서 초인(Ubermensch, 위버멘쉬)이 등장한다. 이 초인은 마지막 인간(최후의 인간, The Last man)과 대비되는 개념인데 우리 대부분은 마지막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하며 초인이라는 새로운 인간의 유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초인 사상의 근간이다. 그냥 지금 하는 것처럼 일상적이고 안락한, 편안한 삶을 영위하다가 멸망을 맞이하는 인간상을 최후의 인간이라고 본 것이다. 오늘날에도 초인보다는 최후의 인간상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초인과 마지막 인간을 결정짓는 것은 '권력에의 의지'다. 마지막 인간이란 우리의 실존양식(라이프스타일)으로 최후에 존재하는 생활양식을 말한다.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니체의 '초인'이란 대체 무엇일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내가 너희들(마지막 인간)에게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하는데 이에 대중들은 '그런 것은 너나 해라. 우리는 그냥 우리의 방식 그대로 살겠다'라고 대응한다. 어떤 호응이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것이다. 동양사상에서는 공자의 '소인'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우리에게 그 최후의 인간을 달라.
우리들로 하여금 그 최후의 인간이 되도록 하라!
그러면 우리가 그대에게 위버멘쉬를 선사하겠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85 -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고자 해야 할 것인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1. 어떻게 자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
우선 군중이라는 개념에 대해 고찰해보자. 개인일 때와 군중일 때의 우리의 행동양식, 사고방식은 차이가 난다. 군중상태에서는 개인의 개성이 사라지고 군중심리에 쉽게 빠진다. 이는 메뚜기 떼에 비유할 수 있는데 메뚜기 떼의 가장 큰 특성은 여기저기 무리지어 날아다니며 닥치는 것은 가차없이 휩쓸고 지나간다는 것이다. 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본능과 파괴의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2008년에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 역시 이러한 인간의 메뚜기 떼 본성이 유감없이 드러난 사례다. 인간의 무차별적인 탐욕으로 인해 세계 경제가 큰 위기를 맞이하였고 이에 대해 전세계적으로 인간의 탐욕스러운 행위를 규탄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이윽고 공동의 가치와 공유의 가치를 존중하는 '공유경제'의 개념이 대두하고 있다. 최근 에어비앤비(Airbnb) 같은 공유경제에 기반한 스타트업들이 전세계에서 등장하고 있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허무주의 시대의 인간 유형에는 초인과 마지막 인간 두 가지가 존재한다. 니체의 사상에서 어중간한 입장은 없는 이분법적 사고론이다. 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인간은 천상의 가치가 아니라 개인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라는 지상의 가치를 구추하게 된다. 여기에 '사랑 -> 창조 -> 동경 -> 별'이라는 과정을 거쳐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언급하는데, 마지막 인간이란 눈앞의 이익만 좇는 메뚜기 떼와 같이 "자신 위로 동경의 화살을 쏘아 올리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랑타령만 하는 사람일수록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가능성이 높다. 근시안적이고 피상적인 연인관계만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득이 된다기 보다는 실이 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속적인 기준에서의 성공과 우리가 동경하는 꿈(이상)에 대해 말해보자. 니체는 이에 대해 "현대인은 별을 품지도 않을 뿐더러 새로운 별을 잉태할 수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미 별이 우리 가슴속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자신을 한번 돌이켜보자. 내가 품고 있던 이상과 꿈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나는 어떠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고 꿈꿔왔던 것일까?
이에 초인은 '지긋이 웃는다'. 일종의 비웃음인데 눈앞의 이익만 좇는 사람들에 대한 조롱이다. 마지막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 교육, 행복, 노동, 건강 등 지상의 세속적인 가치들이다. 이러한 세속적 가치만을 추구하고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는 삶이 이들이 견지하는 삶의 태도다. 그리고 이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2. 초인은 누구인가?
초인, 위버멘쉬는 영어로 말하면 Overmen이라는 말로 이는 미래의 진화된 인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초인에 대한 해석은 크게 3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는 진화론적 해석이다. 어떤 구체적인 '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Next Generation)을 말한다. 우리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인원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왠지 웃음거리 같고 견디기 힘든 수치심이 들지는 않는가? 사람에게 있어서 원숭이(유인원)는 무엇인가? 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진화론적 해석이다.
둘째, 기술적인 해석이다. 여기에는 익히 알고 있는 Cyborg(Cybernetics + Organism)나 트랜스 휴머니즘(TransHumanism)의 개념이 등장한다. 과학기술의 힘으로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인지적, 물리적, 정서적 능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의학의 혜택을 살펴보면 이해하기 쉽다. 유전자공학, 인공장기, 줄기세포, 치매예방, 암정복 연구 등이 진행되고 있고 조만간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약물(메모리 부스터)도 등장할 예정이다. 이는 인간의 감정이 지닌 예측불가능성을 과학기술로 극복하자는 관점이다. 하지만 니체가 꿈꾼 인간상은 트랜스휴먼(차세대 인간)이 아니다.
셋째, 초인의 대한 이상주의적 해석이다. 위의 그림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프로메테우스, 나폴레옹, 체사레 보르지아가 그 주인공들이다. 보르지아는 마키아벨리가 동경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권력지향형 인물이다. 위버멘쉬(초인)는 성자, 천재, 고급한 인간의 이상적 유형으로 허무주의자(현대인들)와는 반대되는 말이다. <이 사람을 보라>를 보면 이러한 니체의 사상이 잘 드러난다.
“위버멘쉬”라는 말은
최고로 잘 되어 있는 인간 유형에 대한 명칭이며,
현대인 선한 자, 그리스도 교인과 다른,
허무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말이다.“
- 『이 사람을 보라』, 1888 -
그렇다면 초인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초인은 형이상학적 가치와 결별한 사람이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실존양식을 가진자를 말한다. 즉, 스스로의 가치관을 초월할 수 있는(Creating Something Beyond Oneself) 실존양식을 지닌 새로운 인간상이다.
3. 어떻게 자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
우리 허무주의자들이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가치창조와 자기극복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 즉,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던 모습과는 다른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괴리감, 격차를 줄이기 위해 실제로 행동에 나서야 한다. 니체는 자기자신을 극복해야 새로운 가치의 창조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가치창조의 측면에 2가치 차원이 존재한다. 하나는 '대지의 의미(The Meaning of the Earth)'이고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존재의 의미(The Sense of Our Existence)'로서 내 삶의 중심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대지에 충실하라"고 말하는데 하늘나라의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고 너의 유한성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집중하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삶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라는 것이다. 21세기에는 다양성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우주의 중심은 바로 '자기자신'이 되어야 한다.
이에 니체는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위험하게 살라는 말은 세속적인 가치를 거부하며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하루하루를 기적적으로 살아가라는 의미다. 그냥저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하루를 완전연소시킬 만큼의 '빡센' 삶을 영위하라는 것이다.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넘어서는(Beyond) 그 무엇이 필요하다. 이는 광기와 창조로 대변되는데 광기는 '불광불급'의 개념으로 기존의 관점에서 탈피하여 '곱게 미쳐라'라는 말이고, 창조는 자기극복에 있어 새로운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니체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하나의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자신을 넘어서는 창조과정에서의 하나의 교량)'로 바라보았다. 여기에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넘어가는 과정(Over-going)'과 타인과 더불어 살며 현실을 인정하는 '내려가는 과정(Down-going)'이 있다. 창조하는 자는 능동적 허무주의자이다. 추구해야 할 목표를 제시하는 자이고,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대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이다. 미래를 약속하는 자이며 어느 것이 선이고 악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이다. 초인이라는 존재는 스스로가 변화하여 미래를 스스로 약속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목표와 그것을 이루는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삶을 추구하며 삶의 순간순간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그 순간의 기쁨과 희열을 즐기는 인간상이 바로 초인(위버멘쉬)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점이다.
사람에게 사랑 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넘어가는 과정’이요
‘내려가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85. -
우주의 중심인 내가 바뀌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신이 있던 시대가 초월적 가치(Transcendence, 우리자신과 세상, 속세를 바라보는 관점)를 중시했다면 이제 신이 없는 시대에서는 신이 없는 신성함(Going beyond oneself)을 통해 신성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는 자기극복 -> 가치창조 -> 자기긍정(Amor Mundi, 세상에 대한 긍정) -> 자유정신 -> 자기극복의 선순환구조로 나타낼 수 있다.
<EPILOGUE>
니체는 "그렇게 내려가는 자들을 나는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심장(이성)은 내려가는 자를 몰락으로 내몬다. 현대인들이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심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머리는 심장에 있는 내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군중들의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그들과 거리를 한번 두어보자. 그렇게 거리를 두고 홀로 자기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고 반성하다 보면 초인의 길로 진입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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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1. 초인이 되기 위한 실천방안은?
초인이 되는 길은 매우 어려운 길이다. 끊임없는 자기 탐구의 노력을 통해 개성을 발견하고 가꿔나가야 한다. 우선 '나의 길', 자신만의 길을 걷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길이란 무엇인가? 나만의 길도 있지만 함께 걷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내 삶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분명한 목적의식(목표와는 다르다)을 가치고 세속적 가치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또한 자기 스스로의 한계를 설정할 줄 알아야 한다.
2. 과연 우리 모두는 초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내가 과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을까?
장 자크 루소의 '자유관'을 보면 '진정한 자유는 하기 싫은 일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한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어떤 실체가 없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복잡한 감정들을 받아들이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추구하는 것도 문제고 우선 자신의 가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급선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인간의 특수한 정신적 작용의 결과로 인하여 창조성을 발현하는 것이 초인의 영역이다.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넘어야(Beyond) 한다. 따라서 세상 모든 것과의 관계를 허투루 보지 말고 진지하게 받아들여, 세계 이면의 배후의 세계를 고귀하게 여겨라. 이는 직접 경험을 해보는 것이 중요한데 연애를 하면 세상이 달라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3. 가치의 상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가치의 문제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책임의식과 고려할 사항들,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여기에는 명령하는 자와 순종하는 자의 개념이 등장하는데 순종보다 명령이 가치를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훨씬 어렵다. 타협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사용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이러한 가치의 충돌이 발생할 때마다 '가치의 위계질서(Preference)'를 만들어야 한다. 선택의 문제는 실질적으로 가치의 선호도 문제다. 더 좋아하는 것을 따르면 그만이다. 가치들을 통합할 수 있는 선호체계를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결과보다 가치체계의 형성과정이 더욱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