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헤미아 남부 후시네츠 출생. 프라하대학교에서 신학과 문학을 배우고, 1398년 프라하대학교 교수로 신학을 강의하였으며, 1409년 총장직 등을 지냈다. 한편, 1400년 가톨릭 사제가 되었는데, 프라하대학장 시절 그곳의 베들레헴 성당 주임신부를 겸해 일반 시민들에게도 좋은 강연을 많이 하였다.
종교개혁자로서는 옥스퍼드대학교 교수인 J.위클리프의 설을 받아들여, 친구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예정설을 강조하며,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의 이른바 성직매매등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또한 체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저항하였고, 프라하대주교 즈비녜크의 후원을 얻어 프라하대학교 내에서의 체코인의 권리를 신장시켰으며, 1406년 체코어의 정자법을 확립(1406), 성서와 위클리프의 저작을 체코어로 번역하였다.
로마 교회는 분열의 혼란 중에 있어서 한동안 후스의 움직임을 묵인하고 있었으나, 1410년 피사 종교회의에서 선출된 교황 알렉산더 5세는 후스에게 그 동안의 주장들을 철회하도록 명령하였고, 후임 교황인 요하네스 23세도 1411년에 후스를 파문하였다. 후스는 여전히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로마교회는 이것을 철저히 단속할 필요를 느끼고 1414년에 콘스탄츠공의회에 후스를 소환, 그의 저서에 있는 이단사상으로 지목되는 부분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기 때문에, 지기스문트 황제의 안전통행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415년 콘스탄츠 교외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처사는 커다란 의분을 불러일으켜 1419∼1434년의 후스전쟁을 유발시켰다.
당시 카톨릭의 타락한면을 지적하며 마틴루터보다 100여년 먼저 종교개혁을 일으킨 분이셨다.
결국 독일에서 화형당하지만 그는 핍박가운데 꿋꿋하게 서 있다.
그는 외쳤다. "죽기까지 진리를 지키라.
죽기까지 진리를 사랑하라.
죽기까지 진리를 말하라."
자료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다음카페- 유럽배낭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