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덕 -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으십시오”(필립 4,8)
덕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체질화한 확고한 마음가짐이다. 덕은 인간이 선한 일을 하게 할 뿐 아니라 최선을 다하도록 한다. 덕성스러운 사람은 자신의 감각적, 영적인 모든 능력을 다해서 선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구체적인 행동들 안에서 선을 추구하고 선택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저서 신학대전에서 덕을 구분 짓기를 ‘신앙의 덕’‘희망의 덕’‘애덕’‘현명의 덕’‘정의의 덕’‘경신덕’‘용덕’‘절제의 덕’‘은사’와 같이 나누고 있다. 가톨릭 신학정립에 있어서 큰 역할을 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단순히 ‘덕’이란 개념을 정립하는데 이렇듯 많은 구분과 기준을 두었다. 그것은 그만큼 가톨릭 신앙안에서 ‘덕’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면서도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부터 그가 심도있게 다루었던 덕들을 구체적으로 짚어볼까 한다.
1. 신앙의 덕
신앙의 대상 우리 신앙의 대상은 첫째 진리, 즉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우리 신앙의 대상이며 동시에 원인이다. 따라서 그분은 신앙에 있어서 질료 및 형상적 대상이다. 신앙은 드러나지 않는 그 무엇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대상은 지성 그 자체로 의도하는 그 무엇이 아니며, 의지의 명령에 따르는 그 무엇도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안에서 신앙의 세부 조항들을 명확하게 체계화 하였다. 그리고 신경(信經)안에 그 세부 조항들을 끌어들이면서 적절하게 연결하였다.
전체 교회에 관계되는 일을 관장하면서 신경에 관해 권한을 갖는 유일한 사람은 전체 교회에 대한 수위권을 갖는 교황이다.
신앙행위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육화에 관한 의심없는 신앙은 육화의 신비로부터 분명하게 추정되는 신앙이다. 또한 삼위일체에 관한 신앙은 육화의 신비로부터 분명하게 추정되는 신앙이기에 똑같이 믿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신앙행위, 믿는 다는 것은 확고한 동의를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며 여기에 추호도 의심, 추측과 같은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신앙고백 외적 신앙고백은 신앙의 방법이다. 신앙고백은 구원을 받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신덕 형상을 갖춘 신앙이어야만 참된 덕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오로지 완전한 행위를 위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그 자체로 제 1덕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영성 생활의 원리이며,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면 최후 목적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께 희망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인이란 신앙 안에 광신 같은 것은 끼어서는 안되며 신경의 한 부분을 거부해서도 안된다.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교회의 권위를 부정해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믿을 교리에 관해 세부적인 것까지 마음을 다해 믿는 다면 견고한 신앙을 갖게 된다.
신앙의 원인신앙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또한 불완전한 신앙도 하느님의 선물이다. 왜냐면 불완전 하더라도 결국 그 역시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효과 신앙의 효과는 두려움과 마음의 정화이다.
지성의 선물 지성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이러한 지성은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지성은 신앙과 관련되는 모든 것들 안에서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시각을 따르는 지성과 마음의 정결이다.
지식의 선물 지식역시 성령의 선물으로 지식은 우리에게 신앙을 위해 무엇을 보존해야 하는 가를 알려준다. 또한 지식은 세상 사물들이 영적 영역 안에서 얼마나 큰 장애물이 되는지를 알려준다. 미신자 만일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 상태에 있다면 그는 죄의 상태에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선포된 신앙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한다. 혹 미신자의 자녀가 세례를 받기 원한다면 그가 이성을 사용할 수 있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열교 자신의 거짓된 망상을 제안하고나 열교를 따르는 사람은 열교도이다. 개종하는 열교인은 보속을 받아야 한다. 배교 배교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하느님을 버리는 것이다. 불경은 그 자체 안에 불신앙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중대한 죄이다. 또한 지식과 지혜의 선물에 반대되는 악습 예를 들어 탐식, 탐색등은 멀리해야 한다.
2. 희망의 덕
희망은 곧 덕이다. 이것은 하느님께 의지하며 그로부터 하나의 영원한 선을 희망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희망의 대상은 영원한 행복이다. 또한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그 대상으로 하기에 대신덕인 덕이다. 희망의 덕은 의지 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이성적이 열망이다. 단죄된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지 못한다. 인간은 하느님을 두려워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세속적 두려움은 항상 옳지 못하다. 그러자 주종관계의 두려움은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그릇된 관념에서 나오는 절망은 희망의 덕과 상반된다. 또한 자만은 희망과는 전적으로 반대된다. 이는 고유한 힘에 너무 심한 예측을 하는 것으로서 헛된 영광에서 나온다.
3. 애덕
애덕이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우정이며 동시에 서로를 위해 선을 원함으로써 서로를 위하는 사랑이다. 애덕은 영혼 안에 창조된 그 어떤 것이다. 또한 애덕은 올바른 이성의 최고 규범이며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덕이다. 특수한 덕에 속한다. 애덕과 그 주체란 우선 애덕은 영원한 행복에 대한 친교 안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초자연적이며 무상으로 주어진 하나의 선이다. 또한 애덕은 우리 안에서 자라날 수 있으며 다른 애덕이 첨가됨으로써 애덕 자체가 단계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다.
애덕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할 때 완전하다. 하지만 우리의 애덕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하느님께 몰두하는 것이 필요하다. 애덕의 대상은 하느님께 속해 있는 모든 존재이다. 그러기에 이웃은 애덕에 의해서 사랑받는다. 적들 역시 애덕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애덕의 질서란 애덕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행복의 기본 원리이기에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 역시 지켜야할 질서가 있다.우선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며, 우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보다 멀리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랑- 애덕의 기본행위 덕이며 행동의 기본원리인 애덕이란 사랑받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애덕의 행위로서의 사랑은 또한 자비심을 포함한다. 하느님은 모든 사물의 최후 목적이시며 그 자체로 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통해서 모든 사물을 사랑해야 한다. 애덕의 효과는 기쁨이다 이 영적 기쁨은 우리 내부에 주어지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애덕에서부터 나오는 덕은 아니고 단지 애덕의 한 효과일 뿐이다. 평화는 애덕의 행위이며 효과이다. 그러나 애덕과 확실히 구별되는 덕은 아니며, 이는 특수한 계명에 예속된다. 자비의 고유한 동기는 악이다. 자비심은 사실 이웃의 불행에 대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연민이다. 그리고 선을 행하면서 동시에 악을 수용하는 것보다 더 큰 자비는 없다. 선행은 공적으로 애덕의 행위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의 특수덕이 된다. 자선의 동기는 자비이다. 또한 자선은 애덕의 효과이자 애덕의 행위이다. 자선을 행하는 것은 이웃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올바른 이성이 명령하는 덕의 행위이다. 그러나 부당하게 취득된 것은 자선으로 내놓을 수 없으며 본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죄짓는 사람을 위한 형제적 충고는 애덕의 행위이다. 이는 덕 있는 행동을 하도록 권고하는 긍정적 규율이다.
4. 애덕을 거스르는 죄
증오나 게으름 질투는 명백히 애덕을 거스르는 죄이다. 특히 하느님께 대한 증오는 하느님께 대한 명백한 반역이며 가장 큰 죄이다. 증오는 곧 악이다. 게으름 역시 애덕이 기쁘게 추구하는 신적, 영적 선에 대한 슬픔이며 따라서 죄이다.
질투는 다른 사람의 선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이다. 이것은 치명적인 죄이다. 왜냐면 이는 불평이나 증오 같은 다른 죄들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불화는 일치의 저해를 가져오며 논쟁은 대화 안에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교 역시 마음의 분열이며 성령 안에서 일치의 덕인 애덕과 반대된다.
정당한 전쟁이 되기 위해선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국가를 보호할 의무와도 같은 근거.2) 공격받음과 같은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 3) 전쟁을 하는 사람이 악을 피하고 선을 지향하는 것과 같은 올바른 지향을 가졌을 때 이다.
말로써 하는 싸움역시 사적인 전쟁이며 정당하지 못하다. 반란은 공동선에 저해됨으로 죄가 되며, 불명예는 영적 여정 안에서 “파멸을 가져오는 옳지 못한 사건이나 말”로 정의된다. 이러한 애덕에는 두 가지 규범이 있다. 첫째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지혜는 하느님을 인식하고 신적 진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을 말하며 어리석음은 지혜와 반대되는 것이다.
5. 현명의 덕
현명의 덕은 미래에 대한 예견이기 때문에 인식 덕이다. 이것은 실천적 도리이며 지덕이자 윤리덕이다. 현명의 덕의 필수적 분야가 있다. 즉 경험을 가져다주는 기억과 지성, 온순함, 성실성, 합리성, 선견지명, 심사숙고, 조심성이다. 이러한 현명의 덕의 주체적 분야는 우선 통치적, 정치적, 가정적, 군사적인 분야이다. 의견의 선물은 현명함을 나누는데 있어 중요하다. 의견은 성령의 선물이다.
현명의 덕에 반대되는 악습, 즉 성급함, 무분별함, 변화, 색욕등은 피해야 한다.
태만은 이성의 특수한 행위인 당연히 있어야 할 관심의 결핍이기에 특수 죄이다.
그런데 현명의 덕과 혼동되는 악습이 있다. 즉 정욕, 교활, 사기, 기만 등이라 할 수 있다.
6. 정의의 덕
정의의 덕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해져야만 하는 것 안에서 인간을 타인을 향한 질서 안으로 인도한다. 즉 이는 평등하게 행하는 것을 설정함에 있어서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평등을 내포한다. 어떤 사물은 인간과 평등 할 수 있다. 불의는 정의와 반대되는 것으로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에 반해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불의를 저지를 수 도 있다. 그러므로 정의를 위해 재판이 필요하다. 재판은 올바른 것에 대한 결정이다. 법은 자연법을 가르치며, 또한 긍정적인 법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것에 대한 확정인 판결은 성문법에 근거해야만 한다. 정의는 다시 교환정의와 분배정의로 구분 지을 수 있다. 배상은 평등성의 원리 안에서 자기 자신의 소유물이나 소유권 안에서 어떤 것을 복구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다른 사람의 것을 부당하게 갖고 있다면 이것 역시 죄이므로 빨리 배상해 주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편애도 정의의 덕에 어긋난다. 이는 분배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살인은 결코 인정될 수 없으며 자살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며 인간은 관리자일 뿐이다. 그러나 의도를 벗어나 돌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를 경우는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 밖에도 여러 불의가 있는데 신체를 자해하거나 처벌이나 예방이라는 명분을 벗어난 구속이나 투옥은 허용되지 않는다.
재물에 대한 소유가 인간 밖에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절도나 강도는 정의를 거스르는 것이다. 절도는 비밀리에 남의 소유물을 취한 것이며, 강도는 강압적인 요소가 더해진 것이다. 이는 강도보다 중한 죄이다.
정의를 판결해야할 재판관은 공적 권한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투명해야 하며 역시 그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판결 할 수 있다. 정의의 실현을 위한 방법으로 고발이 사용 될 수 있다. 고발은 공동선을 위해 요구되며 이는 서면으로 작성되어야 한다. 죄를 범한 사람은 자기의 경우가 정의에 합당하다고 믿을 때에만 상고할 수 있지만 정의의 이름을 흐리게 하는 상고는 할 수 없다. 거짓 증거는 언제나 사죄이다. 또한 변호사가 불의한 사건을 방어하는 것은 곧 불의이다. 모욕, 무례는 정의에 위배되며 이는 인내의 덕으로서 참아야 한다. 이는 분노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한 사람을 중상, 비방해서도 안된다. 이는 명백한 사죄이다. 또한 불평, 조롱, 저주와 같은 것들은 이웃관계를 해치는 것이므로 정의에 위배된다. 상거래시 사기가 없다 하더라도 보다높은 가격에 팔거나 혹은 저렴한 가격에 사들이는 것은 평등에 어긋나며 불법이다. 대부, 고리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생활의 필요성 때문에 빌리는 돈은 그 사용이 소비와 동일시되며 따라서 돈의 사용을 통한 고리는 위법이다. 그러나 대부해 주는 사람이 빌려준 것에 대한 상실을 가져오는 불행을 막기위해서 어떤 보상을 계약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를 해 줌으로써 이자를 취하는 것은 위법이다. 이것이 죄를 짓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7. 경신덕
종교, 신심, 계율 등은 정의의 잠재적 부분들이다. 치체로는 종교란 하느님을 향하는 질서를 의미한다고 했다. 종교는 오직 하나의 덕만을 유일한 대상으로 삼는다. 또한 종교의 목적이 하느님께 합당한 존경이므로 하느님이 그 목적이 된다.
신심은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 관계되는 일들을 신속하게 하려는 특수 행위이다.
우리는 기도로써 하느님 앞에 부족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을 흠숭하며, 또한 하느님을 흠숭한다. 주의 기도는 완전한 기도이며, 기도는 실천적 이성행위이다.
기도는 애덕안에서 이뤄져야 하며 죄의 원의를 가지고 기도한다면 오히려 벌을 받을 것이다. 흠숭은 하느님께 존경을 드리는 행위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는 자연법에 속한다. 또한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 맏물, 십일조등은 교회와 맺은 협약에 의해서, 교회의 필요성에 의해서 혹은 관습 때문에 봉헌하는 것이다. 서원은 하느님과 맺는 약속으로 성직 수여와 수도 서원 안에서 서원은 교계제도의 축성과 영적축복으로서 성대 서원이 된다. 경신덕을 지키는 방편으로서의 선서는 진리, 판단력, 정의에 입각해서 행해져야 한다. 선서를 소홀히 지키는 것을 불경이며, 서원을 소홀히 지키는 것은 불충이다. 미신행위는 하느님이 아닌 인간 혹은 잡신에게 경신례를 드리는 것으로 우상, 헛된 풍습임으로 멀리 해야 한다. 우상숭배 역시 종교적 남용이며, 이는 헛된 추종을 낳는다. 점술 같은 것도 미신행위에 속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시험하곤 하는데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은 죄이며 불경이다.
위증은 하느님에 대한 불경이다. 이는 선서의 목적이 진리를 확인하는 것인데 위증은 진리를 가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성, 신성모독은 그 대상이 클수록 죄역시 크며 성직매매는 하느님이 주신 것이므로 인간이 이를 주고 살수 없다.
8. 정의의 덕에 속하는 기타의 덕
정의의 덕에 속하는 여러 가지 덕이 있다. 효성(인간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를 지닌다), 순종(효성과 관련된 특수 덕), 존경(인간에게 행해지는 존경과 하느님께 바쳐져야 할 존경이 있다) 순명, 감사, 진실성, 친절, 증여, 에피케이아(형평), 등이 있으며 이에 반해 불 순명, 망은, 벌(만일 벌이 보복을 위한 것이라면 죄이지만, 잘못의 교정이나 공적인 안정을 찾으려 하는 것이라면 죄가 아니다) 거짓말, 위장, 위선, 허영(하느님께 대한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 조롱, 아부, 언쟁, 욕심(부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다른 사람의 재물까지 취하도록 하는 경우 욕심은 정의에 반대된다), 낭비와 같은 것들은 정의의 덕에 위배되므로 조심해야 한다.
9. 용덕
용기는 덕이다. 이는 모든 덕의 조건이 된다. 용덕은 대담성을 조정하는 것보다는 두려움을 억제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한다. 즉 용덕에서 기본이 되는 것은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에서 멈추는 것이다. 그 가운데 순교가 대표적인 용덕이라 할 수 있다. 순교는 모든 덕 중에서 가장 위대한 행위이다. 순교는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증거이다. 또한 무질서한 두려움, 즉 선을 쫓기 위해 견디어야만 하는 것을 피하도록 하는 것은 죄(비겁)이다. 경솔함과 무례함은 두려움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용덕을 완성하는 부분, 즉 완전한 행위를 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용덕의 네가지 부분은 신뢰, 의젓함, 인내, 그리고 항구이다. 관용은 무엇보다도 명예와 관련이 된다. 또한 용덕이 생활에서의 위험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게 해 주는 것처럼 관대도 희망해야 하고 추종해야 할 최대의 선 앞에서 확고한 마음을 갖게 해 주기 때문이다. 오만은 관용과 반대되는 것으로 악습이자 죄이다. 인간이 명예를 누리도록 해주는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그것은 이웃의 선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공명심이 정도에 넘치면 역시 관용과 반대가 된다.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선에 관한 몰이해에서 영광을 갈망한다는 것은 허영이다. 이는 결핍이며 죄이다. 모든 사람 안에는 자기 자신의 능력에 걸 맞는 것을 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성향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정도에 넘치는 것이 오만이고 정도에 못 미치는 것이 소심이다. 이러한 소심 역시 악습이며 죄이다. 의연함은 위대한 일을 행하는데 가치를 더해준다. 인색은 작은 희생을 질료로 한다. 인색한 사람은 희생과 일 사이에서 정확한 분배를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인내와 항구는 슬픔의 장애를 제거하며 어려운 일을 지속적으로 이겨내며 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하지만 항구함에 반대되는 악습은 피해야 한다. 성서를 통해서 볼때 하느님께서는 용덕과 관련된 계명들을 부여하셨음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용덕과 관련되는 계명들은 여타의 계명들이 지향하는 목적, 즉 하느님과의 영혼의 일치를 지향한다.
10. 절제의 덕
절제의 덕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에 따라서 절제하고, 스스로를 조절하고, 억제하도록 이끈다. 따라서 절제는 덕이다. 또한 인간을 유혹하는 수 많은 것으로부터 욕구를 저지하기에 특수 덕에 속한다. 이에 반대되는 것이 무절제이다.
절제의 덕을 구성하는 것으로 우선 정숙을 들 수 있다. 이는 불명예로 간주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한다. 정직은 예의바른 것 아름다움과 동일하다. 이는 교활함과 대조되는 영신적 아름다움을 가져다준다. 금식이나 단식은 욕망을 억제하고 정신적 고양을 시켜주는 것으로 역시 덕에 속한다. 탐식은 일종의 무질서한 욕구이다. 취하게 만드는 음료는 헛된 망상으로서 뇌세포를 파괴시키기 때문에 이성의 선에 대해 특수한 장애를 가져다준다. 따라서 그러한 장애를 방지하게 해 주는 절주는 특수덕이다. 그러니 만취는 탐식의 죄가 된다. 정결은 욕정을 바로잡는 것을 의미하며 동정은 욕정에의 갈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젊은 세대에게 가치가 있다.
색욕은 쾌락을 통한 방탕을 말하며, 무엇보다도 영혼의 방탕을 야기 시키는 불순한 쾌락으로 악습이다. 이러한 색욕에는 사음, 간음, 근친상간, 강간, 강탈, 그리고 자연을 거스르는 죄가 그것이다. 그래서 악한 욕망들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억제하는 금욕은 넓은 의미에서도 덕이다.
관대와 온유는 효과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관대는 상급자들만의 고유한 말이고, 온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격노나 잔혹함은 인간의 마음을 비뚤어지게 함으로 올바른 이성으로 자제해야 한다. 억제하기 어려운 탐식이나 색욕들은 절제의 덕에 속하는 중용이 필요하다.
겸손은 모든 덕 중에서 가장 위대한 덕이다. 이는 영혼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균형 있는 덕이다. 교만은 “요구되는 그 어떤 것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는 각자의 의도가 자신에게 적절한 것을 시도하기를 원하는 올바른 이성에 반대되며, 이는 죄이다. 성 대 그레고리오 는 교만의 네가지 종류를 1)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선을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2)하늘의 선물을 온전히 자신이 이룩한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3)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허풍을 떠는 것 4)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 즉 교만은 하느님께 대한 반역이다. 첫 인간의 죄는 과다한 어떤 영적 선에 대한 욕구, 즉 교만이 그의 첫 번째 죄였다. 여기에 대한 벌은 이미 부여받은 어떤 선물을 상실하는 것으로 아담의 경우는 타락과 반역이 뒤 따랐으므로 죽음과 고통이 뒤따랐다. 탐구나 호기심은 진리에 대해 인식하게 하며 인식력의 욕구를 조절하게 한다. 그래서 탐구는 절제의 덕에 속한다. 하지만 호기심은 위험한 사물에 관심을 갖게 될 때 오히려 죄에 속함으로 이에 유의해야 한다.
절제의 덕을 지키기 위해서는 의상을 입는 것에서도 유의해야 한다. 십계명의 목적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애덕을 가지게끔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제의 덕을 위한 계명들을 규정짓는 일은 필요했었다. 특별히 그러한 목적에 많이 위배되는 것들을 규정하는 것이 필요해 이런 이유에서 육계명과 구계명이 주어졌다.
11. 은사와 완덕의 신분
예언은 먼 일들에 대한 현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식력에 속한다. 이러한 예언은 신적 조명이며, 이는 표면의 빛이 모든 색깔에로 분산되듯이, 모든 일에로 확장된다. 예언은 신적 진리의 분유(participatio)이다. 언어는 또한 선물이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모든 언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의 선물보다 예언의 선물이 보다 상위의 선물이다. 사람은 확신시키고, 감동시키고, 회개시키는데 효과를 발휘하는 설교역시 선물이다. 기적또한 선물이다. 기이한 일은 악마들도 행할 수는 있다. 하지만 참된 기적은 오직 하느님 한분만이 하실 수 있다.
명상적 생활은 근원적으로 진리에 대한 명상으로 이루어진다. 윤리적 덕의 행위들은 전적으로 실천적 생활에 속하는 영역이다.
신분이란 확고한 조건을 의미한다. 신분은 시민 생활에서이건, 영적 생활에서이건 직접적으로 자유와 예속에 관련된다. 완덕의 신분에 이르기 위해서는 애덕의 관점에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애덕안에 자리 잡은 완덕은 기본적으로 계명의 준수를 통해 다다른다. 완덕의 신분에 도달한 사람들 중에는 서원한 수도자들도, 또 직무를 가진 주교들도 있다. 성대서원을 한 이들은 모두 완덕을 향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주교직이 명해진다면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거부한다는 것은 이웃에 대한 애덕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교로서의 완덕의 신분은 하느님 사랑을 위한 이웃의 구원에 관심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수도자의 신분은 완덕의 신분이다. 수도자들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 온전히 스스로를 봉헌한 사람들이며, 또한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애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세속적 사물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청빈 서원을 해야 하며 아울러 순명서원과 정결서원 역시 행해야 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순명서원으로 가장 내면적이고 고귀하며, 또한 모든 수도 생활의 기본 원리인, 의지가 하느님께 봉헌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도자라면 수도자에게 합당한 것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돈을 버는 일을 해서는 안되며, 값싼 의복을 입어야 하고, 노동을 등한시해서는 안된다. 교회 안에는 애덕의 실천 방법과 신심의 실천에 차이가 있기에 교회 안의 수도회도 다양하다.
수도자가 되는 것은 덕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하는 덕망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덕망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죄인에게 유익한 일이다.
하지만 수도성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14세 이상 나이가 지나야 하며, 그 이전의 나이라면 관면이 필요하다. 어떤 수도자가 더 완전한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 때문에, 혹은 완화된 규칙에 대한 부자유 때문에, 혹은 제도의 빈약함 때문에 자기 수도회에서 다른 수도회로 옮기는 것은 합법적이다. 다만 세 번씩이나 그렇다면 역시 관면이 요구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