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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감정을 쏟아낼 건 다 쏟아냈고 뭔가 정리를 해야 하는데 조금 전까지 엉엉 울었는데 음악이 갑자기 밝아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포인트도 없이 밋밋하게 갈 수도 없고 상황이 어중간한데 여기에 맞는 음악을 딱 찾아냈다. 여행하는 느낌도 살고 판타지에 등장하는 김지수의 얼굴도 더 슬퍼지는 기막힌 선곡을 해낸 거다. 눈 오는데 김지수가 웃고 있는 장면에서 <성모의 보석> 때문에 그 얼굴이 얼마나 슬퍼졌는지 모른다. 아까 지수씨가 와선 보고는 아주 흡족해해서 돌아갔다.”
이제야 모든 게 순조롭게 정리되는 듯 보였다. 그런데….
director's flashback “조영욱 감독은 의외성을 즐기는데 그 선곡이 기막히게 영화의 격을 높여준다. <혈의 누>라는 사극에 라흐마니노프를 넣은 것이나 <올드보이>에서 느닷없이 정경화의 경쾌한 바이올린 선율을 넣은 게 그렇다. 가령, <혈의 누>에서 소연이(윤세아)가 여러 무리에게 쫓기는 장면에서 처음 제시한 곡이 좀 느려서 이거 아니지 않아 그랬다. 그래서 빠른 곡을 제시할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곡을 하자는 거다. 그 이유를 듣다가 몰랐던 내 (영화)리듬을 알게 됐다. 소연이를 말을 타고 쫓으니까 얼마나 빠르겠나. 그런데 소연이는 아무래도 여자니까 걸음이 처지고. 이걸 어떻게 맞춰내느냐는 건데 그걸 라흐마니노프로 해내는 거다. 이 부분은 속도로 맞추고, 이 부분은 정서로 맞추고, 그러면서 여기에 호흡들, 말발굽 소리도 들어오고. 음악도 살고 화면도 좋아졌다. 이번에는 <성모의 보석>이 그렇다.”(김대승) “김대승 감독의 영화음악을 하기가 힘든 게 그 사람 고유의 리듬 때문이다. <혈의 누> 때 고생을 했는데, 컷이 많아도 화면 속 인물의 움직임은 굉장히 느리다. 카메라 워킹도. 그래서 머릿속으로 이 곡이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붙여놓으면 안 맞는 거다. 한번 고생을 하면서 그의 템포를 익혀서 <가을로>에선 좀더 수월하게 했다. 김 감독과의 일이 재밌는 건 대화하고 상의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 대해선 한 개인의 상처가 아프고 슬프다기보다 치유되는 과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하자는 데 동의했다. 그 컨셉을 음악 하나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음악의 스토리를 짜서 표현 가능하도록 프로듀싱했다.”(조영욱)
최종 믹싱 첫날이다. 마침내 후반 작업의 마지막 단계 이르렀다. 추석 전날 믹싱을 시작했으니 적어도 추석 다음날까지는 ‘꼼짝 마라’다. 후반작업 취재를 시작한 이래로 프로듀서, 음악감독, 촬영감독 등 가장 많은 스탭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감독의 표정이 어둡다. <성모의 보석> 때문이었다. 음악감독이 나서서 아시아 판권을 해결했지만 월드와이드 판권이 풀리지 않으면 이 곡을 쓸 수 없다는 게 제작자의 입장이었다. 실망감은 영화 도입부의 첫 믹싱에서부터 역력했다. <성모의 보석> 대신 넣은 음악이 화면으로 흘러나오자 곳곳에서 탄식이 배어나왔다. “저거 좀 이상한데, <실크로드> 같잖아.”
작업에 속도가 붙으면서 분위기는 정상을 되찾았다. 유지태와 김지수가 시골집에서 키스하면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이다.
“여기서 음악 넣으면 딱인데, 문제는 바로 다음 장면이 너무 튀어서.”(김대승, 다음 장면은 검사실에서 삿대질하는 피의자의 클로즈업이다) “(음악없이) 생짜로 가면 더 자극적이고 좋잖아?”(조영욱) “아니, 여기가 그러면 안 되지. 아니, 멜로영화 음악감독이….”(김대승) “‘마운틴 키스’라는 파일명이 있을 텐데, 일단 넣어보죠. 이걸 오프닝 음악으로 해보면 어떨까 싶은데.”(조영욱)
음악이 흘러나온다.
“오프닝으로는 너무 가볍지 않을까. 이건, (키스신 앞의) 전경부터 깔아도 되겠는데. 해보죠.”(김대승)
음악을 컷 전환과 동시에 시작했다가 당겨서 넣어보기도 하고 중간에 끊기도 하고, 가능한 모든 버전으로 만들어보기 시작한다. 이 한 가지 믹싱에만 1시간 가까이 걸린다. 역시 간단한 작업은 없다. 그런데 6시30분께 돌발상황이 생긴다. 필름 5권의 소리가 그림과 맞지 않는다. 디지털 색보정 작업인 DI쪽에서 레코딩하는 과정에서 뭔가 기술적인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추석연휴가 시작된 터라 다시 레코딩 뜨려면 나흘 뒤인 월요일이나 가능할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그때 5권의 믹싱을 한다는 건 부산영화제 개막에 맞추기가 곤란해진다는 걸 뜻한다. 김대승 감독이 답답한 듯 “모든 문제를 발본색원해야지. 이러다가 정말 망신당하겠다”고 하자 프로듀서와 조감독이 문제해결을 위해 바깥으로 나선다. 다시 믹싱이 시작된다. 백화점 붕괴 장면이다. “여기선 붕괴되는 소리가 압도적이어야 하는데. 더 세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여기에 음악이 들어가는 게 좋을까?” 감독은 금방 믹싱에 몰두해들어갔다.
부산영화제 개막 이틀 전 확인을 해보니, 믹싱은 추석연휴를 꼬박 일로 보내고 북한 핵실험이 기습적으로 이뤄진 9일 이른 아침에야 마무리됐다. 싱크문제로 생긴 필름 5권의 레코딩도 추석을 박차고 나와준 DI업체의 협조로 무난히 해결됐다. 무엇보다 <성모의 보석>을 쓸 수 있게 됐단다.
부산에서 스크린으로 처음 <가을로>를 만나고 있을 무렵, 이 기사는 인쇄소의 출력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 김대승 감독은 죽을 맛일까, 여유롭게 담배를 물고 국내외 첫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의 말대로라면 전자여야 한다. “이게 혹시 내 마지막 작품일지 몰라 하고 달리는 건데 최종 믹싱까지 마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너무 괴롭다.” 김대승 감독은 영화의 속도감이나 리듬감은 결국 시나리오에서 나오고, 그 내용물은 촬영에서 다 해결되는 거라고 단언했다. 그러니까 편집에서 좀더 빨리 컷을 넘긴다고 속도감이 생기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잘한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애쓰던 후반작업의 그 모습이 떠오른다. 부산영화제에서의 첫 반응이 몹시 기다려진다.
글: 이성욱 사진: 손홍주 사진부 팀장 사진: 이혜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