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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1019년 2월) - 강감찬, 고려를 지키다
그리고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를 쳐야만 했던 거란, 양대 세력의 전쟁은 무려 20년이 넘게 진행되었다.
영웅은 언제나 탄생하였다. 그러나 서희는 그들의 목적이 전쟁이 아닌 봉건관계 체결이라는 것을 간파하였다.
또한 거란의 군사가 80만이라고는 하지만 정예부대는 8만 정도에 불과하였고, 이 정예부대는 안융진 싸움에서 대패하여 기세가 꺽인 상태였다.
거란의 동경이었던 요양은 고구려의 땅임으로 고려에 복속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로 인하여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까지 북진하게 되었다. 1010년에는 강조의 목종 폐립과 현종 옹립을 구실로 총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다. 숫적으로는 1차 침입보다 적었지만 40만모두가 전투병력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병력은 오히려 더 많았다.
이때 대신들은 현종에게 항복을 권유하기도 하였지만 강감찬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양규등이 후방에서 적의 보급을 끊고 유격전을 실시하여 적의 정예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얻었다. 1013년에는 여진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오기도 하였으며, 고려왕이 직접 내방하여 예를 갖추라는 요구까지 하였다.
그리고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삼고 20만명의 병력을 양성하였다.
소배압은 소손녕의 형으로써, 당시까지 단 한번도 패전을 기록하지 않은 무적의 장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강감찬은 우선 기병 1만 2천명을 선발하여, 요나라의 선발부대를 기습하였다. 이 전쟁에서 선발부대가 거의 전멸하자, 소배압은 작전을 바꾸어 직접 개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강감찬은 개경일대에 이미 방어라인을 철저하게 구축시켜 놓았고, 소배압은 이 방어라인을 뚫지 못하였다. 그러는 사이 강감찬은 요군의 보급을 끊고 후방을 교란시켰다. 요의 군사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는 사이 이탈자도 속출하여 남은 병사는 정예병 10만여명이 전부였다.
결국 소배압은 남은 병사를 보존하여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퇴각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소배압에게 뜻밖에 좋은 첩보가 들어왔다.
만약 이대로 아무성과 없이 요국으로 돌아간다면, 문책은 물론이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귀주성으로 총 병력을 집중시켜 밀고 들어갔다. 이날은 1019년 2월 1일, 고려사에 있어 최대의 승전이 기록된 날이다.
그들의 전략중 가장 큰 부분이라고 할수 있는 기마대의 공간장악능력을 상실하였다. 더구나 좁은 장소에 10여만명이 움집함으로 인해서 군대의 대오가 크게 훼손되어 버렸다. 소배압은 결사적으로 퇴로를 뚫고 후퇴하였지만, 고려군은 귀주 동쪽방면에서 추격에 추격을 거듭하였다.
더구나 바람역시 고려군에게 유리하게 불어, 요군은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할 수조차 없었다. 이 하루밤의 전투에서 소배압은 수만여명을 잃고 말았다. 살아 돌아간 요군은 수천에 지나지 않았으며, 소배압 역시 본국에서 징계를 받았다. 그리하여 강동 6성을 정비하고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등, 내외에 국방력을 과시하였다. 동여진 역시 추장 나사불이 직접 입조하여 화의를 약속하였다.
고려의 위용을 천하에 알렸다. 종합적으로 맞아떨어진 대승이었다.
특히 적의 허위정보를 믿게끔 만드는 기만술은,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정보의 파악 능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뛰어난 전략 뒤에는 그 전략을 수행할 수 있는 정예병 양성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야후블로그 역사의 천존고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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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고 가져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