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 이해-68. 북동 인도
북동인도는 아쌈, 마니뿌르, 나갈랜드, 트리뿌라, 미조람과 아루나찰 쁘라데시 지역이다.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은 브라흐마뿌트라와 수르마 계곡 평야지대인 아쌈과 트리뿌라 평원, 해발 900m 이상의 마니뿌르 고원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드라비다인, 몽골인, 아리안인 등 인종집단의 혼혈 또는 비교적 순수한 변종이다.
평야지대에서 살던 사람들은 힌두들이지만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소수부족으로 존재하고 있다.
지난 400여 년 동안 아쌈과 마니뿌르의 많은 사람들이 힌두교로 개종했다.
기독교인들은 그 평야지대에서 인구의 작은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그 평원들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들은 그 땅의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수많은 인도-몽골계통의 집단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수백 개의 부족 대부분은 작은 규모이며 그 중의 가장 큰 부족도 30만 명을 넘지 않는다.
그들의 전통문화는 원시적이다.
일부 부족들은 주로 영들을 달래기 위한 금기와 의식을 준수하는 종교적 관습을 가진다.
그들은 각각의 언어와 전통을 가진 부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주요 기독교 운동이 일어난 곳은 바로 이 산지 거주민들 가운데서였다.
19세기 초 영국이 진출하기 전, 이곳은 아홈왕국(Ahom Kingdom)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왕국의 실효적인 관할지역은 아쌈의 브라흐마뿌트라 계곡에 한정되어 있었다.
카차르, 트리뿌라와 마니뿌르에는 보다 소규모의 왕국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산악지역에는 마을의 정치구조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정치조직이 없었다.
아홈 왕조의 왕위계승에 대한 논란은 버마인들이 마니뿌르와 아쌈에 개입하게 되었다.
뱅갈국경에서 영국과의 분쟁은 1824-26년에 일어난 1차 앵글로-버마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영국의 승리 이후 체결된 안다보 조약(Treaty of Yandabo)에서 버마는 이 지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고, 동인도회사는 뱅갈에 대한 자국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해결책을 마련했다.
마니뿌르 왕은 왕권을 회복했으나 감시를 받았고 상주하는 주재관의 지시를 받았다.
남부 아쌈은 영국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1838년에 북부 아쌈도 그렇게 되었다.
점차로 산악지역들이 습격을 통제하기 위하여 합병되었다.
20세기 동안 기독교 운동은 세계대전과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에 의해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독일인 선교사들이 현장을 떠남으로 가톨릭 선교는 중단되었다.
마니뿌르와 나갈랜드에서 전투가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은 기독교 활동에 악영향을 미쳤다.
이전에 고립되었던 그 지역은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향하여 문을 열었다.
반란은 정치적 의미 뿐 아니라 종교적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훨씬 더 파괴적 영향을 끼쳤다.
첫 번째 반란은 1917-1919년 사이에 마니뿌르에 일어난 쿠키(Kuki)혁명이었다.
롱자 마을이 이끄는 쿠키족은 영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 일은 영국인들이 전쟁지원을 위하여 노동부대에서 일할 징집병들을 강요함으로 일어났다.
반란을 진압하는데 2년 동안 5천명 이상의 무장한 남자들이 동원되었다.
쿠키족은 마니뿌르 기독교인 나가족의 영국 지지에 분개했지만 패배 후 기독교로 전향했다.
두 번째 반란은 마니뿌르의 롱메이 나가의 지도로 일어난 칸파이 종파의 반란이었다.
이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목적들을 결합한 나가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이었다.
저항집단은 교회의 지지는 없었지만 기독교 지도자들 아래 나갈랜드, 미조람에서 활동했다.
이런 영향으로 지난 20년 동안 가장 커다란 기독교 성장을 이루어 온 곳이 이들 지역이다.
반란군 운동과 이 지역의 지도자에 대한 불만은 정치적 경계를 광범위하게 바꾸어 놓았다.
시릴 퍼스의 <인도교회사>에서 (임한중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