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통신 26> 서귀포에 환생한 이중섭
한 도시와 예술가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그런 도시들은 해당 예술가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어, 그 지명 자체가 특정 예술가를 연상시킨다. 탄생지라든지, 오래 오래 살았던 곳이라든지, 명작의 산실이라든지, 그런 인연의 작용이다.
이중섭과 서귀포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6·25 때 원산에서 피난 내려와 처음 머문 곳이지만, 그가 서귀포에 산 것은 1년도 채 못 된다. 그런데도 서귀포가 이중섭의 도시가 된 것은 왜일까. 이중섭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 서귀포시가 전국에서 처음 특정 예술가의 이름을 딴 거리를 조성하고, 미술관을 짓고, 매년 축제를 열고, 학생 미술실기대회를 개최해온 노력의 결실일 수도 있다.
어떤 미술평론가는 이중섭이 7년간의 결혼생활 중에서 가족과 행복하게 산 유일한 도시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어린이와 게와 물고기, 소와 닭 등 생명체에 관한 작품을 많이 생산한 곳이라는 의미를 지적한 것이다. ‘길 떠나는 가족’이라는 작품을 보면 그에게 서귀포는 오래 동경했던 유토피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의견을 따르고 싶다.
전쟁 중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뒤 맏아들(태현)에게 쓴 편지지에 그린 이 그림에 그 단서가 드러나 있다. 달구지에 아내와 두 아들을 태우고 소를 몰고 가는 그림에 유토피아의 즐거움이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아이는 꽃과 비둘기를 안고 있다. 화관을 쓴 엄마는 활짝 웃으며 아이들을 어루만지고, 달구지를 끄는 소 등에도 꽃다발이 걸렸다. 소를 모는 작가는 환호작약하는 모습이고, 하늘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둥실 떴다. 편지 글에다 그는 “수레에 가족을 태우고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고 있다”고 썼다.
1951년 1·4후퇴 때 원산에서 부산으로 피난 내려온 이중섭은 곧 서귀포로 건너가 둥지를 틀었다. 한겨울 피난민수용소 생활의 고통,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으로 들끓는 부산을 떠나 남쪽 끄트머리 따뜻하고 한적한 땅에 닿은 첫 느낌은 분명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날품을 팔 곳도 마땅치 않은 포구마을이어서 이중섭은 몹시 가난하였지만 행복하였다. 그래서 많이 먹게 된 것이 게였다. 바닷가에 가면 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 걸 잡아 반찬을 삼았고, 주전부리를 삼았다. 아이들과 그걸 잡는 놀이를 즐겼다. 생활과 가장 밀착되었던 생명체를 많이 그리게 된 연유다. 뒤에 “너무 많이 잡아먹어 게에게 미안했다”고 실토하였을 정도다.
작은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을 부비며 살았지만 그 때가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다. 그 해 12월 부산으로 옮겨가고부터는 그런 단란함과 영원히 멀어지게 되었다. 1952년부터는 종군화가가 되어 전선을 누볐다. 생활고에 지친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간 다음부터는 견디기 어려운 그리움과 고독에 휩싸여 살았다.
통영에 살던 1953년 친구 구상(具常)의 도움으로 외항선원증을 얻어 일본에 건너갔다. 히로시마로 달려온 아내와 두 아이를 만나보았지만, 그 행복은 딱 일주일간이었다. 수교가 되지 않았던 양국관계에 비추어 보면 일주일도 긴 재회였다. 그 뒤로는 더욱 외로웠다.
고독을 달래는 방법이 편지쓰기였다. 이중섭미술관에는 참 많은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아내에게, 혹은 두 아이에게 쓴 그의 편지글은 짧고 서툰 일본어지만 심금을 울려주는 문장이다. 그의 아내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이 남편에게 쓴 편지글 제목은 언제나 ‘나의사랑 아고리’였다. “이제는 영원히 다시 만나보지 못 하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는 편지의 예감처럼, 이승에서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 하였다. 영양결핍과 간 질환으로 고생하던 이중섭은 만 40세 때인 1956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행려병자처럼 이 세상을 떠났다.
‘아고리’란 일본유학 시대 이중섭의 별명이다. 도쿄 문화학원 시절 이씨 성을 가진 조선인 유학생이 셋이었는데, 개성 있는 턱을 가진 미남자 이중섭만이 여학생들 사이에 그런 별명으로 불렸다 한다. 그림 잘 그리고, 운동 잘 하고, 인물 좋고, 키 큰 남자는 여학생들 사이에 늘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중섭과 이남덕의 사랑 이야기는 대하소설 감이다. 유학시절 마사코가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삐었는데, 가까이 있던 그가 신을 벗기고 발가락을 주물러 주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사랑을 싹틔운 유명한 사건이다. 편지에 나오는 ‘발가락 군’은 그런 사연을 담고 있다.
1944년 대학을 졸업하고 원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얼마 뒤 마사코에게 전보를 쳤다. 결혼해야 하겠으니 빨리 건너오라는 내용이었다. 마사코는 일본을 떠나는 마지막 배편으로 애인을 찾아왔고, 둘은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남쪽나라에서 온 덕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남덕(南德)이란 우리 이름을 지어 주었다.
민족과 국경을 초월한 그 사랑은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시련을 겪게 된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공산군이 물밀 듯 밀고 내려오자, 부르조아 계급이었던 이중섭은 그 땅에서 살수 없게 된 것이다. 1·4후퇴 때 미군 전함 편으로 부산에 실려와 피난민수용소에 던져진 그는 혹한과 기아에 시달리다 못하여 따뜻한 곳을 찾아 서귀포에 짐을 풀었다.
그가 살던 마을은 1997년 시 당국에 의하여 ‘이중섭 거리’로 명명된 후 기념미술관이 서고, 기념공원이 조성되고, 옛집이 복원되어 독특한 문화특구가 되었다. 올해 이중섭 탄생 100년을 맞아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특별전시회가 큰 성황을 이룬 탓인지, 전시회 계절인 10월의 서귀포는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종일 가을비가 추적거린 8일에도 그랬다. 이중섭 거리에서는 서양인 화가 지망생들까지 작업코너 하나를 차지하고 이중섭 그림을 모사해 팔고 있다. 이중섭을 좋아하는 미술 애호가들이 전국에서 찾아든다.
그가 나의 원적지인 평안남도 평원군 태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더욱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술관을 둘러보는 동안 나를 감동시킨 것은 그림보다는 편지들이었다. 편지글에서 그는 아내에게 ‘한없이 상냥한 최애(最愛)의 사람 남덕 군’ ‘최미(最美)의 기쁨인 남덕 군’이라는 형용사를 썼다. ‘아고리의 생명이요 오직 하나의 기쁨인 남덕 천사’란 표현도 보였다.
편지글을 읽으며 전신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감동을 느껴본지 얼마만인가. 무딘 펜에 잉크를 듬뿍 묻혀 꾹꾹 눌러 쓴 손 편지를 써 본 일도, 받아본 일도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 언어의 쓰레기 같은 전달문과 경박한 영상들로 흘러넘치는 SNS 시대의 젊은이들이 평생 그런 감동을 느껴보기나 할는지, 걱정도 되고 측은하기도 하다.
올해 96세인 이남덕 여사는 지금 도쿄에서 두 아들의 보살핌 속에 편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남편의 재능이 아들과 손자에게까지 이어진 유전의 섭리에 감사하며 산다는 근황이 최근에 전해졌다.
( 2016,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