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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11월 4일 월요일]
『대동야승』 제11권 [기묘록 속집 (己卯錄 續集)] <화매(禍媒)>
화매(禍媒) : 기묘사화를 벌인 간흉한 자들
<송사련전(宋祀連傳)>
송사련(宋祀連)은 천인 중금(重今)의 손자요, 감정(堪丁)의 아들이다. 사예(司藝)ㆍ안돈후(安敦厚)가 성화(成化) 을미년년(1475)에 상처(喪妻)하고, 나이 늙고 병이 있어 동복형인 감사(監司) 관후(寬厚)의 여종 중금(重今)으로 잠자리를 모시게 하였다. 중금에게는 딸자식이 있으니, 곧 데리고 들어온 감정(堪丁)인데, 돈후가 데려오기 전에 낳은 딸이다.
이 감정은 성질이 교활하고 간사하여 나이 14, 15세 때에 도리어 불순한 말을 하였다. 사예(司藝)가 이간할 조짐이 있음을 노하여, 아들 총(璁)을 시켜 막대기로 심하게 발바닥을 때리어 발가락 두어 개가 부러졌는데, 배천[白川] 외가로 보냈다.
계묘년(1483)에 사예가 세상을 뜨자, 사예의 아들 정민(貞愍)과 그 형 부사(府使) 장(璋)과 정랑(正郞) 총(璁)과 의정(議政) 김응기(金應箕)의 부인이 모두 중금에게 길러져서 혼인하고 출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금이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을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이에 감정을 배천에 사는 갑사(甲士 군인) 송자근쇠[宋者斤金]에게 시집보내고 돈후의 아들 안인(安璘)이 송자근쇠를 관상감(觀象監)에 소속시켜 벼슬이 주부(主簿)에 이르렀고, 홍치(弘治) 무신년(1488)에 사련(祀連)을 낳았다.
장성하자 의사(醫司)에 붙이려 하였으나 모두 그 어미가 몸을 속량(贖良)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천문학(天文學)에 종사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그 아비가 기왕에 본감(本監)의 판관(判官)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인의 아우 안당(安瑭)도 지리학(地理學)으로 관상감에서 벼슬을 하였으니, 또한 김의정이 제조(提調)가 된 덕택이었다.
정덕(正德) 을해년(1515)에 중금이 배천 집에서 죽으니, 김응기의 부인이 처겸(處謙)에게 가서 호상하여 장사지낼 것을 권하였다. 집안에서 사련을 친자제 같이 보았는데 성질이 또 예민하고 재주 있어 사람의 눈치를 잘 알아차렸다. 그래서 대갓집에서 더욱 믿고 사랑하여 무슨 일이든 모두 그에게 맡겼다.
기묘년(1519)에 본학(本學) 과거에 참여하여 판관에 제수되었다. 신사년(1521) 겨울에 처겸이 친한 친구와 한담하다가, “아무개만 제거하면 사림을 위로할 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련이 이 말을 듣고 계교를 얻었다고 스스로 다행히 여기어 헛농담을 하는 체하고 화답하여 서로 거들어서 교묘하게 말을 꾸며 가지고 그 처남 정상(鄭瑺)과 더불어, “대신들을 도모하려 한다.”고 변을 고하려는데, 증거가 없는 것이 걱정이 되어, 처겸의 모부인의 초상 때의 〈조객록(弔客錄)〉과 초빈(初殯)ㆍ장사(葬事) 때 일을 한 역인(役人)의 명부(名簿)를 들어 사람을 불러 모아 거사하려 하였다 하고, 또 정상과 서로 결탁한 무뢰배 4~5명을 참모로 삼았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임금은 영상 정광필ㆍ좌상 남곤ㆍ지의금(知義禁) 심정ㆍ승지 윤희인(尹希仁)ㆍ조옥곤(趙玉崐)을 부르게 하여 함께 추고(推考) 국문하여 옥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남곤과 심정은 피고들이 자기들 비위에 저촉되었다고 노하여 얽어 씌워 더 큰 죄에 빠뜨렸다. 그리고 사련에게는 상을 주고 절충(折衝)을 가자하였으며 정상은 군직(軍職) 4품을 주었다. 그리고 각각 죄인의 가재(家財)와 전택(田宅)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 뒤에 사련은 운명을 판단하는 기술로써 사대부들과 교제를 하였으므로, 병조 판서 김모재(金慕齋)에게, “높은 품질(品秩)의 체아직(遞兒職)에 붙여 주자.” 청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러자 모재는, “사련이 20여 년 동안 녹을 받은 것은 고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인들의 말이 만일 큰 죄에 해당되는데도 고변할 때에, 다만 대신을 도모한다고만 하였다면, 이는 임금을 속인 실증이 되는 것이요, 이미 거사할 시기가 지난 후에 자기 자신을 모면하기 위하여 한 것이라면, 이것은 다스릴 만한 죄는 있어도 기록할 만한 공은 없는 것이니, 머리와 목을 보전한 것만도 이미 족하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후진들에게 말하기를, “선현(先賢)들은, ‘벼슬을 하는 사람은 무당 보살할미 등속을 더욱 멀리하고 끊어야 한다.’ 하였고, 나 역시 ‘집에 있는 사람은 점치고 운명을 말하는 사람을 친근히 하고 서로 접촉할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련은 안씨의 집에 출입하며 그 집안의 운명이 비색한 것을 점쳐 안다고 하여, 은혜를 배반하고 화를 만들어 자신의 이익을 얻었으니, 이것은 거울삼을 만한 일이다.” 하였다. 기사년에, 금상께서 야대(夜對)할 때에 경연관이 아뢰기를, “지난 기묘년에 남곤ㆍ심정이 이미 당화(黨禍)를 일으키자, 이랬다 저랬다 하는 무리들이 서로 연속하여 상을 바라고 당시의 사류들을 모함하여 모두 어육이 되게 하고, 자기만 벼슬과 상을 보전하여 지금까지 편안히 누리고 있으니, 이것은 실로 사림이 통분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더 묻지를 않았다.
그 이튿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사련이 그 기별을 듣고 교외로 나갔는데 얼마 안 되어 죽었다. 한 딸과 다섯 아들이 있는데, 딸은 한 원수(漢原守)에게 출가하여 자녀가 없어 순 원령(順原令)으로 후사를 삼았고, 아들은 인필(仁弼)ㆍ익필(翼弼)ㆍ한필(翰弼)인데, 내외 세 파가 서얼로서 법을 속이고, 과거를 보다가 사관(四館)으로부터 정거(停擧)를 당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글을 올려 말하였으나 오히려 풀리지 못하였다.
[주-D001] 분황(焚黃) : 고관(高官)이 되면 그의 부ㆍ조ㆍ증조까지 관직을 추후로 내리게 되는데 그것을 증직이라 한다. 이 증직하는 직첩(職牒 사령장)은 반드시 누런 종이에 썼으므로, 그 누런 직첩을 그 본인의 무덤 앞에서 불로 태워서 이런 관직이 내렸음을 알린다. 그것을 분황이라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식 (역) | 1971
[참고자료 1] 신사무옥 辛巳誣獄
1521년(중종 16) 송사련(宋祀連)·정상(鄭鏛)이 모의하여 안처겸(安處謙) 등이 무리를 모아 변란을 일으키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무고하여 일어난 옥사.
1519년 조광조 등의 사림세력이 몰락한 기묘사화의 여파로 일어났다. 심정·남곤 등이 기묘사화를 기화로 사림파를 제거한 다음 정권을 잡자, 조광조 일파를 두둔했다는 이유로 안처겸·문근(文瑾)·유인숙(柳仁淑) 등을 파직시켰다. 이 과정에서 안처함(安處諴)은 그의 친구인 송사련으로부터 형 처겸이 친지들과 함께 현 집권자들을 비방했다는 말을 듣고 부친이며 조광조 일파와 가까웠던 당(塘)에게 고하여 자기 집의 농장이 있던 용인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얼마 후 처겸이 다시 그의 장인의 집에서 이정숙(李正淑)과 권전(權磌) 등을 만나 시사(時事)를 논하면서, 심정·남곤 등이 권력을 남용하고 있으니 이 무리를 제거해야 국가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 이 자리에 있었던 송사련은 남곤·심정에게 아부하여 출세하기 위해 그의 처남인 정상과 짜고, 안처겸의 모친상 조객록(弔客錄)과 발인할 때의 역군부(役軍簿)를 가지고 이들이 무리를 이루어 반란을 꾀하려 한다고 고발했다.
그결과 안당·안처겸·안처근(安處謹)을 비롯하여 권전·이경숙·이충건(李忠楗)·이약수(李若水)·조광좌(趙光佐) 등 많은 사림들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다음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송사련은 고발한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되고, 죄인들로부터 몰수한 전답·가옥·노비를 받고 30여 년 간 세력을 누렸다.
그뒤 심정·남곤의 일파가 몰락하고 사림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1566년(명종 21)에 안당의 손자 윤(玧)의 상소로 앞서 희생되었던 안처겸 등의 인물들이 신원되고 직첩을 돌려받았으며, 1575년(선조 8)에는 국가로부터 시호까지 받았다. 이 사건은 심정·남곤 등의 훈구파 세력들이 사림계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무고사건이었다. [daum백과]
[참고자료 2] 송사련 宋祀連 1496년(연산군 2) ~ 1575년(선조 8)
본관은 여산(礪山). 아버지는 송인(宋璘) 또는 자근금(者斤金)이며, 어머니는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안돈후(安敦厚)의 서출(庶出)인 감정(甘丁, 安瑭의 庶妹)이다.
안처겸(安處謙)의 고종사촌으로 안씨 집 사람들은 송사련을 친자제같이 출입하게 하여 믿고 지냈는데, 성장함에 따라 자기 지위가 미천한 것을 한탄하고 안당(安瑭)의 반대파였던 심정(沈貞)에게 아부, 벼슬이 관상감판관에 이르렀다.
송사련은 사주(四柱)보는 법에 정통하여 1521년(중종 16) 자기의 사주를 보니 운수가 대통하여 부귀를 얻을 운이었고, 안당의 집 사람들의 사주는 죽고 망할 운수였다.
이에 엉뚱한 생각을 품고 처남 정상(鄭鏛)과 공모하여, 고모인 안처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의 조객록(弔客錄)과 발인(發靷) 때의 역군부(役軍簿) 등을 증거로 삼아 안처겸 등이 모역을 꾀하였다는 사실을 조작, 옥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의 조작으로 안당·안처겸 등 안씨 일문과 권전(權磌)·이충건(李忠楗)·조광좌(趙光佐) 등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 그 결과 고변한 공으로 선조대에 이르기까지 네 임금을 섬기면서 절충장군·시위대장 등 당상관으로 30여 년간 세력을 잡고 종신토록 녹을 받았다.
그리고 송사련의 딸도 종실에 시집갔으며 아들 5형제도 모두 명문 집안에 장가들어 송익필(宋翼弼)과 같은 쟁쟁한 학자가 나오는 등 집안이 한때 번창하였다. 그러나 송사련이 죽은 뒤인 1586년(선조 19) 안당의 종손인 안로(安璐)의 처 윤씨의 상소로 안당의 무죄가 밝혀지자 송씨 집안도 맞상소하여 싸우다가 결국 패하여 관작이 삭탈되었다. [daum백과]
[참고자료 3] 송익필 宋翼 1534(중종 29) ~ 1599(선조 32)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아버지는 천문학관 사련(祀連)이다.
할머니가 안돈후(安敦厚)와 비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庶女)였으므로 그의 신분도 서얼(庶孼)이었다. 아버지 사련이 안돈후의 손자 처겸(處謙)을 역모자로 고변하여 안씨 일가를 멸문시켰다. 이 공으로 사련은 당상관에 오르고 부유해졌다. 그러나 죄상이 밝혀져 1566년(명종 21)에 안씨 일가에 직첩이 환급되었다. 따라서 송익필은 서얼인데다 아버지 사련의 죄로 인해 과거를 볼 수 없었고, 이후 출세의 길이 막히고 말았다. 과거를 단념하고 경기도 고양(高陽) 귀봉산 밑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진을 가르쳤다. 이이·성혼과 교유했으며, 무이시단(武夷詩壇)을 주도하여 당대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문명을 날렸다. 탁월한 지략과 학문으로 세인들이 '서인의 모주'라 일컬었다.
1584년(선조 17) 송익필의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던 이이가 사망한지 2년 후, 1586년(선조 19) 동인들의 후원으로 안당 집안에서 송사를 제기,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송익필의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 70여 명이 안당 집안의 노비로 환속되어 추노꾼들에게 쫓기자 그들은 성명을 바꾸고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김장생·정철·이산해의 집을 전전하며 숨어 지냈다. 이름을 바꾼 그는 황해도에서 복술가(卜術家)로 변신하고 부유한 토호들을 꾀어 호남에 있는 정여립을 찾게 만들었다. 그런 뒤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변을 하여 1589년(선조 22)의 기축옥사를 일으키는 배후조종자 역할을 했다. 기축옥사로 정여립(鄭汝立)·이발(李潑) 등 동인들이 제거되자[4]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동인의 영수 이발이 송익필 일가가 노비로 환천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시기적으로 송익필 일가들이 노비로 환천되고 얼마 후 기축옥사가 일어났고, 기축옥사 직후에 송익필 일가들이 신분이 회복됐으며, 기축옥사 위관이던 정철이 송익필과 절친했다는 점들 때문에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 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뒤에 또 노수신, 이산해 등 동인들을 비난한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송한필과 함께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1592년(선조 25) 유배 중 임진왜란을 당해 명문산(明文山)으로 피했다가 면천에서 김진려의 집에 기식했다.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나 일정한 거처없이 친구·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다가 1599년(선조 32) 66세로 객사했다.
그후 제자들이 신원소(伸寃疏)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751년(영조 27)에야 신원되어 통덕랑사헌부지평(通德郞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이이, 성혼, 정철 등과 교류했고, 김장생, 정엽의 스승으로 서인 더 나아가 노론의 학문적인 스승으로 불리며 정치적으로도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 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세력의 막후 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이가 죽었을 때 '율곡 제문'을 썼던 송익필은 성혼의 죽음 앞에 시를 남겼다.
족보에서 누락되어 빠져있던 그의 이름도 사후 300년이 지난 1905년에 족보에 등재되었다. 1910년 7월 20일 대한제국이 망하기 한 달 전 자헌대부(資憲大夫)와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되고, 바로 순종의 명으로 문경(文敬)의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자료 4] 기축옥사 己丑獄事 기축사화(己丑士禍)
기축옥사는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서에서 촉발되어 다수의 동인이 처벌된 사건이다. 2년 반 정도 지속되면서 1,000명 정도가 사망한 사건이다. 지역적으로는 호남이, 당파적으로는 동인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에 대한 사료가 부족하고, 조선시대 내내 그에 대한 해석이 당파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현재까지도 여전히 그 발생 원인, 사건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상이한 사건이다.
1589년(己丑年) 10월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2년 반에 걸쳐 그와 관련된 1,000여 명의 동인계(東人系) 인사들이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발단은 1589년 10월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과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 군수 이축(李軸), 신천 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의 고변에서 열거된 정여립의 역모 죄상은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와 진안 · 금구 등지를 내왕하면서 무뢰배와 공 · 사노비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는 것이다. 또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해 민심을 현혹시킨 뒤, 기축년 말에 서울에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그 책임 부서까지 정해 놓았다고 주장했다.
이 고변서를 받은 선조는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都事)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하여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정여립은 안악에 사는 변숭복(邊崇福)에게서 그의 제자였던 안악 교생 조구(趙球)가 자복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도망하여 진안에 숨어 있다가 관군이 포위하여 도망갈 수 없게 되자 자결하였다. 고변서가 조정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고변서 내용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정여립이 도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가 모반을 꾀했다는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한양으로 붙잡혀 온 정여립의 아들 옥남은 문초를 받은 끝에 길삼봉(吉三峯)이 모의 주모자이고, 황해도 사람 김세겸(金世謙) · 박연령(朴延齡) · 이기(李箕) · 이광수(李光秀) · 변숭복 등이 공모했다고 자백했다. 그 결과 다시 이들이 잡혀 가 일부는 조구와 같은 내용을 자백하고, 일부는 불복하다가 고문 끝에 죽음을 맞았다.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들의 자백으로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은 사실로 단정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인의 지도급 인물로 인식되었던 이발(李潑) · 이길(李洁) · 김우옹(金宇顒) · 백유양(白惟讓) · 정언신(鄭彦信) · 홍종록(洪宗祿) · 정언지(鄭彦智) · 정창연(鄭昌衍) 등이 처형 또는 유배당했다.
이 사건은 무고한 많은 인명의 살상을 초래했다. 그 가운데 후대에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이들은 이발의 형제 · 노모 · 자식이었다. 이발은 자신의 집에서 정여립이 그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다시 불려 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호남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비롯한 50여 인의 상소로 나사침(羅士忱) · 나덕명(羅德明) · 나덕준(羅德峻) · 정인홍(鄭仁弘) · 한효순(韓孝純) · 정개청(鄭介淸) · 유종지(柳宗智) · 김우굉(金宇宏) · 윤의중(尹毅中) · 유몽정(柳夢井) · 조대중(曺大中) · 우성전(禹性傳) · 남언경(南彦經) 등 30여 인이 연루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때의 상소로 조정의 동인계 고관과 함께 호남 지방 사류가 다수 연좌되었다.
그리하여 그 뒤로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남 지역 사류 간 반목과 대립이 후대에까지 이어져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다. 진주에 거주하던 처사 최영경(崔永慶)은 모의 주모자인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옥사했는데, 그의 연좌 또한 지극히 모호한 내용이어서 많은 말썽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약 3년 가까이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또는 동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자가 무려 1,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이 사건은 그 뒤 당쟁이 벌어질 때마다 주요한 현안으로 소환되었다.
이 옥사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학설이 나누어진다. ① 노비 출신인 송익필(宋翼弼)이 당시 서인의 배후 인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친족 70여 인을 다시 노비로 전락시키려는 동인의 이발 · 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설. ② 당시 위관(委官)으로 있던 정철이 위축된 서인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사건을 악화시켰다는 설. ③ 일부 조작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정여립이 전제 군주 정치 아래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선양(禪讓)에 의한 왕위 계승 방식을 주장하는 등 혁명성을 가진 주장이 옥사를 발생시킨 요인이 되었다는 설, 즉 정여립의 모역상도 어느 정도는 인정된다고 보는 설. ④ 최근의 연구 성과로 국왕 선조가 조정의 분열을 이용해서 세력이 강해진 동인을 견제하기 위해서 확대시킨 사건으로 보는 설도 제기되었다.
기축옥사의 전모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은 점들이 많다. 일차적으로는 빈약하고 부정확한 사료가 원인이다. 그와 함께 이 사건이 여전히 조선시대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당파적 관점에 따라 해석된다는 것도 또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daum백과]
[팔경논주]
참고자료인 신사무옥, 송사련, 송익필, 기축옥사를 보면 <媒禍 송사련전(宋祀連傳)>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의 품격을 제쳐놓고 시원하게 한마디 한다. “참 못된 애비와 아들이다, 고얀 놈들!”.
여산 송씨 문중에 어쩌다가 저런 종자가 태어났는가. 송사련은 주인 안당 문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송익필은 기축옥사를 꾸미고 정철을 조종하여 1,000여 명의 동인 사대부들과 선비들을 학살했다. 이로써 이전의 4대 사화와 궤를 달리하여 양반사대부들끼리 벌이는 당파싸움이 사생결단 전쟁이 되었다.
송익필의 친구인 이이, 성혼, 정철 등이 김장생, 정엽을 거쳐 송시열에 이르렀다. 역사가 서인-노론이라 칭하는 그 인맥은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며 이후 300년 동안 조선의 정치 중심이 되었다. 그들이 어떤 정치를 했고 어떻게 처신했는지는 ‘조선 망국과 식민지 전락’으로 알 수 있다.
유유상종이라고 한다. 기질과 성품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당을 이룬다. 주인을 배반한 송사련과 그 핏줄을 이어받아 기축옥사를 조작하여 천여 명 인재들을 학살한 송익필과 친구인 이이, 성혼, 정철 그리고 제자인 김장생, 정협, 송시열이 어떤 기질과 성품인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이이는 서인의 우두머리가 되어 당대의 학자인 퇴계가 죽자 곧 비판했다. 또한 조광조를 죽이라는 상소를 올린 구미 생원 황이옥의 아들 황기로를 찾아가 인사를 하고, 아우인 이우를 황기로의 딸에게 장가들였다. 서인-노론은 자기들의 종장으로 이이를 추앙하고, 이이의 학문은 조광조에 근원한다고 말하는데, 조광조를 죽이라는 상소를 쓴 황가네 집과 사돈이 된 이이가 어찌 조광조와 연이 닿는단 말인가. 이이는 조광조와 기묘사림파들과는 무관하다. 또한 친구인 송사련이 신사무옥을 일으켜 안당과 유배된 기묘명현들을 죽이도록 했는데 어찌 조광조가 근원이 된단 말인가.
정철은 발생하지도 않은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조작하여 반대당인 동인들을 천여 명이나 학살했다. 그래놓고도 선조로부터 버림받아 유배형에 처해지자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어 바치며 다시 불러주시길 애원했다. 정철이 죽자 조선의 뜻있는 선비들은 모두 정철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화폐 5만 원 권에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도판으로 해놓고 있으며. 정철의 ‘사미인곡’ 등을 가사문학의 백미라고 치켜세우며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올려놓고 있다.
서인-노론 세력은 경술국치를 당해 식민지로 되자 곧 일왕으로부터 훈작과 상금을 받았으며, 일제치하 식민지 조선에서 귀족 대우를 받으며 친일파를 형성하여 기득권을 누리며 호의호식했다. 해방이 되자 친미파로 변신하여 항일운동가들을 탄압하고,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사회 상류층이 되어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지배권을 행사했다.
서인-노론의 후예들은 현재에도 견고한 세력을 형성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회 각 분야에서 교묘한 방법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이제 서인-노론의 천하가 아니다. 못난 왕과 서인-노론 세력이 자행하는 처형과 유배로 폐고되어 깊이 숨어 겨우 숨만 쉬며 자손을 보존해온 남인, 북인, 소론의 후예들이 민주와 자유의 시대에서 그동안 응축됐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 6위 권에 든 동력은 낡은 서인-노론의 동력이 아니라 300년 동안 쇄신한 남인-북인-소론의 싱싱한 동력이다. 비록 독재자였지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은 남인, 북인, 소론의 후예들이다. 북한의 김일성 역시 노론이 아니다. 현재 정치, 외교, 학문, 경제, 문화, 군사, 체육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활동하는 중심 인사들은 모두 낡아빠진 서인-노론 후예가 아니다.
순흥 안씨를 예로 들어보자. 고려 때 안자미를 중시조로 하는 순흥 안씨는 안향이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며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명문으로 발돋움 했다. 그러나 순흥에 위리안치된 금성대군에 호응해 세조를 제거하려는 거사가 발각되어 700여 명이 효수되면서 살아 남은 씨족들이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가 신원이 되어 겨우 문중을 수습했으나 송사련에 의해 안당이 죽음을 당한 이후 폐문하다시피 되었다. 그러나 간들간들 겨우 이어온 핏줄의 내력이 맺히면서 1900년대 초기에 안중근, 안창호 등 인물을 배출하기 시작하더니 현대에는 안재홍, 안춘생, 안익태, 안대희, 안철수, 안희정, 안성기 등 사회 각 분야의 인물들을 배출하고 있다. 이분들이 우리나라 발전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가. 우리 국민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씨가 찌들은 왕과 낡은 서인-노론이 지배하는 조선 시대가 계속 되었으면 지금 안씨 문중은 겨우 숨만 쉴 것이다.
조선 중후기 300년과 현대 100년, 합계 400년 동안 서인-노론 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작된 역사서를 깨뜨리고 사회와 각 문중 곳곳에서 비장되었던 사료와 자료들이 나타나 우리나라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이 조명에 의해 밝혀지는 역사의 진실이 앞으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어마어마한 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