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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십니다.(엡 1:3-6)
할렐루야! 하나님의 집에 참 잘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십니다. 매주일 예배에 참석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예비해 놓으신 하늘의 신령한 모든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매주일 살펴보고자 하는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죄인의 몸으로 갇혀 있으면서 썼습니다. 그래서 그때 함께 쓴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 네 권의 책을 흔히 ‘옥중서신’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는 몸으로 쓴 책이지만, 우리가 이 에베소서를 천천히 읽어보면, 어둡고 침침한 느낌이 들기보다는, 고요한 계곡에 서서, 아름다운 심산유곡을 바라다보는 느낌이 듭니다. 이에 비해, 같은 사람이 썼지만, 로마서는 아주 이론적입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딱딱한 책이 로마서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질책적입니다. 듣고 있다 보면, 바울 사도로부터 꾸중을 듣는 느낌입니다. 골로새서는 논쟁적인 편지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명상적입니다.
그런 까닭에 에베소서를 가리켜, 바울 서신의 꽃이요, 면류관이요, 왕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에베소서를 읽고, 진정한 회심을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깊이가 있고, 심오하고, 아름다움이 있는 책이 에베소서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렸던 맥케이라는 분의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나는 새로운 견해, 새로운 경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되었다. 나는 소생했다. 정말로 살아 있었다.”
여러분! 에베소서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앞에 펼쳐질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견해, 새로운 경험,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변화, 새로운 삶, 새로운 심령,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말씀을 통하여, 정말로 심령이 살아나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의 처음 1-2절은, 편지의 인사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이런 일 저런 일을 해보다가, 적성에 맞아,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도’의 본래 뜻은,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사람을 택해, 하나님을 대신해서 일하도록 보내신 것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교만한 가운데서 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울의 편지에서, 어디를 보아도, 바울이 교만한 것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데 대하여, 언제나 감격해 하고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12-14절을 보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 사도의 직분을 맡겨 주신 데 대하여, 감격과 감사를 금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감격과 감사 속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문안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 ‘은혜와 평강’이란 말은, 바울이 쓴 편지 가운데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먼저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 우리를 용서하시며, 영원한 생명과 기업을 주신 사실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인간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는 축복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값이 없습니다. 너무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엔 값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도 값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순간순간 호흡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공기, 하루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귀한 물도 값이 없습니다.
너무 귀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을 살리는 태양 광선도 값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이 없습니다. 거저입니다. 이 은혜는 받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큰 은혜가 무엇입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대신 죽으시고, 심판 받으시고, 속죄의 제물 되셔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이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찬송가 305장을 보면, 노예선의 선장이었던 존 뉴턴은 회심한 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는 존 뉴턴만의 고백입니까? 오리 모두의 고백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는 선물입니다. 거저 와서, 받기만 하면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고 말씀하셨고, 예수님도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흘러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평강’을 축원했습니다. 평강은 은혜를 받은 결과요, 상태입니다. 이것을 당시 히브리 사람들의 인사말로서 ‘Shalom(살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안을 빌라”(눅 10:5)고 하셨습니다. 또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고 하시면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평안을 원합니다. 그런데 환경과 조건만 좋아지면, 평안하리라 생각합니다. 돈 많이 벌어,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옷 입고, 기름진 음식 먹으면, 평안할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평화가 있습니까? 오히려 지위는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불안해집니다.
대통령 선거일을 기억하십니까? 투표가 끝나고, 밤 늦게, 박근혜 후보가 당선이 확실해졌을 때, 제일 먼저 찾아온 변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청와대 대통령 경호원들이, 경호에 들어갔다라는 것입니다. 경호원이 많이 배치된다는 것은 그만큼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불안해도 좋으니,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환경이나 조건이 주는 평안은, 참 평안이 아닙니다. 환경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평안입니다. 외적인 평안입니다. 육신적인 평안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은 환경이 주는 평안이, 아닙니다. 환경이 어떻게 변하고, 조건이 어떻게 달라진다고 하여도, 변함없는 평안입니다.
바람이 불면 바다 물결은 출렁거립니다. 그러나 깊은 바다 속은 파도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고요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평안은 우리 심령의 평안입니다. 어느 평안이 참 평안입니까?
여러분! 육신의 평안을 원하십니까? 마음의 평안, 심령의 평안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 마음의 평안을, 우리는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죄를 범한 사람의 마음 속에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말씀만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귀한 생활의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만, 오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버린 우리 인간을 화평케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먼저 죄의 용서함을 받아야,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너무 험한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장래를 생각하며 불안해합니다. 옛날 모세도, 여호수아도, 중한 책임을 맡았을 때,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할 때, 우리의 평안을 뺏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은 주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당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사람도,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마음의 평화를 빼앗지 못합니다. 이것이 참 평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평안을 받기를 축원한 것입니다.
여러분! 11일자 인터넷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광주 남구에 따르면 구청에서 기초생활수급자 자활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지모(48·여)씨는 큰 딸(21)이 전날 새벽 교통사고를 당해 숨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씨는 이후 출국을 서둘렀지만, 여권이 없는데다, 수백만원에 이르는 비행기 값을 마련할 길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특히 지씨의 큰 딸은 미국에서 치과대학을 다니며 치과의사의 꿈을 꾸고 있었고, 방학을 이용해 한국에 들어와 부모를 만나려 했지만, ‘비행기값이 없다’는 부모의 만류로 돌아 오지 못했다. 지씨와 큰 딸은 휴대전화 메신저를 통해 안부를 주고 받으며,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고 숨지기 전날까지도, 밤새 대화를 한 뒤, 잠시 눈을 부치는 사이, 교통사고를 당해, 숨졌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또 큰 딸은 크론병이라는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53)의 건강까지 챙기며 유학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가족은 지난 2003년 목회자의 꿈을 안고 있는 아버지를 따라 가족 모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동생들과 함께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공부도 곧잘 했던 큰 딸은 치대에 진학해 꿈을 이어갔다. 하지만 유학 8년만인 지난 2009년 11월 복통을 자주 호소하던 아버지가 크론병 진단을 받았고, 미국에서는 병원비가 비싸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어려운 생활은 이어졌다. 아버지의 치료비로 모든 돈이 들어갔고, 가족은 집 한칸 마련하지 못해, 힘들게 살다, 친정 부모의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씨가 기초생활수급신청을 하고 남구청 사회복지 도우미로 활동하며 받은 70여 만원 남짓한 돈으로 온 가족이 생계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큰 딸에게는 학비조차 보내 줄 수 없었다. 큰 딸은 각종 아르바이트와 이모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이어가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이 소식을 접한 남구청 사회복지기획과 직원들은 200여 만원을 모아 지씨에게 전달했다. 또 외교부의 도움으로 긴급 여권을 발급받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병색이 짙어져, 거동조차 할 수 없어, 싸늘한 시신이 돼 돌아오는 딸을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다. 남구청 관계자는 ‘미국에서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큰 딸을 믿고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던 분인데 안타깝다"며 "이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많은 분들이 도와 주길 바란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은 광주 남구청 복지기획과 복지행정팀 오은경(062-650-8183)씨에게 연락하면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했던 남편은 크론병이라는 난치병을 앓고 있고, 힙겹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치과대학을 다니고 있던 딸은, 친구 차를 탔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여러분! 목회자로서 부르심을 받고, 그 길을 가고자 했던 믿음의 가정입니다. 그런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슬픔 속에 빠져 있습니다. 누가 이 사람들을, 이 가정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듣고, 보내오는 돈으로 위로가 될까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그리고 슬픔을 당한 그 가정 위에 풍성하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따스한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아멘.
왜! 하나님을 찬송하고, 찬양하고, 경배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바로 여러분과 저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찬송하지 않을 수 없고, 찬송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독교의 첫 페이지는 찬송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선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존재하시지 않는가?”
성경은 이런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확실한 선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복음을 가진 그리스도인, 예수를 만난 그리스도인,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경험한 그리스도인, 구원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그의 첫 시작을 찬송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구원과 사랑에 감격하여, 목이 쉬도록 찬송을 불러 본 경험이 있습니까? 밤에 자다 일어나서,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하는 건지, 무슨 곡을 하는 건지 모르지만, 목이 쉬도록 찬송을 불러 본 경험이 있습니까?
설교를 준비하면서, 회개를 참 많이 했습니다. 회상해 보니, 최근 들어 첫 은혜 받았던 때처럼, 감격스럽게 찬송을 불러 본 일이, 별로 없어서였습니다. 요근래 눈물을 흘리면서, 찬송을 불러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눈물의 찬송이 없는 걸 보니, 내 마음에 감사가 적어졌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찬송은 은혜 받은 자만이, 부를 수 있는 하늘의 노래이기 때문에, 바울은 먼저 찬송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감격과 눈물 없이는, 진정한 찬송은 없습니다. 기도가 메마르면, 찬송도 메마릅니다. 말씀이 메마르면, 찬송도 메마릅니다. 사랑과 겸손이 메마르면, 찬송이 나오지 않습니다. 신앙의 척도는, 찬송에 있습니다. 입술에서 감사와 찬송이 나오는 사람은, 성령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찬송이 사라지게 됩니다. 감사가 사라지고, 기도가 사라지고, 은혜가 사라지고, 찬송이 사라집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적인 세상이요, 무신론적인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것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도덕이나 윤리 같은 것은, 거추장스럽습니다. 성경도 산상보훈이나 황금률이면 족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찬송할 일이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찬송할 이유를 말합니다.
4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사실이 너무 감사해서 “찬송하리로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일을, 우리가 왜 찬송해야 합니까?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면서, 육신적인 것은 우리가 택할 수 있으나, 영적인 면에는 선택권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를 선택해 주셨는데, 누가 우리를 선택했습니까? 사람에 의해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을 믿었기 때문에,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눈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알아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택해 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여기에 감격이 있습니다. 여기에 감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선택이요, 부르심입니다.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은, 내가 그것을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오늘 말씀에 의하면, 전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교회를 다니게 된 것도, 예수님을 알게 된 것도, 예수님을 위해서 내 생애를 바치고 싶은 마음이 든 것도, 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혹시 믿지 않을까 봐, 하나님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수없이 반복해서, 말씀하고, 또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번 말씀하시면, 알 만한 말을, 자꾸 반복하십니다.
“놀라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구원했다. 너를 잊어버리지 않겠다”, “젖먹이 아이를 부모가 잊어버릴지언정 나는 너를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택했다”, “내가 너를 불렀다”, “내가 너를 세웠다”, “나를 믿고 앞으로 전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시는 만큼, 인간은 계속해서, “아닙니다. 아니올시다. 나는 나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집니다. 하나님도 주무시겠지요. 하나님도 졸고 계시겠지요. 내가 하나님을 잘 잊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나를 잘 잊어버리겠지요. 하나님이 계십니까? 믿지 못하겠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안 계시는거죠. 내 삶의 형편이 어려우니, 날 도와주지 않는거죠.”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을 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반복되는 두 평행선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택은 지독합니다.
“너는 내 백성이다. 내 사람이다”라고, 거듭 거듭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이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택은, 순간적으로 꾸며낸 드라마가 아닙니다. 그것은 2천년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저녁에 방영되는 드라마를 위하여, 작가가 아침에 급하게 써내려간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이 지구가 생기기 전부터,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4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 전에 나를 택하셨다는 말씀 앞에, 우리는 무슨 고백을 하게 됩니까?
“내가 하나님을 몰랐을 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셨구나”,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할 때도, 내가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도,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에도”, “내가 하나님께 예배도 드리지 않고 교회에 다니지 않을 때도,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때도, 찬송하지 않을 때도, 하나님은 나를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지키고 계셨구나”, “기가 막힌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눈물이 납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모태에서 나를 지어 주셨다”는 생각이, 어느 새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니다. 2천년 전부터 나를 계획하셨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은 나를 계획하셨다”고 믿어집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립니다. 느껴지지 않던 것이 느껴집니다.
여러분!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만을 위해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진짜 사랑을 하게 되면, 자기 자신만을 위해, 하나님이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 나 한 사람만 보호해 주시고, 나 한 사람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 주시는, 그런 분처럼, 인식이 됩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까? 3절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자연적인 복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열심히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면, 농사가 잘 되는 것은 자연적인 복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농사를 잘 짓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장사나 사업을 잘 합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복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복을 준비해 놓으시고, “네가 노력해서 얻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노력해서 얻는 복입니다. 그래서 오래 사는 것은, 복입니다. 승진하는 것도, 복입니다. 월급 많이 받는 것, 또한 복입니다. 자녀들이 잘 되는 것, 세상에서 형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 역시 복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인간이 노력해서 얻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야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거저 주시는 복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죄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내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용서받고,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얻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께 “찬송하리로다”라고, 바울 사도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해서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선택의 이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 때문에 택하셨습니까?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선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4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혹시 흠이 없는 사람, 완전무결한 사람 있습니까? 인생을 한 3,40년 살다보면 저절로 흠이 생깁니다. 상처가 많이 생깁니다. 누구나 상처가 있고, 수치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땅에 묻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참 많습니다. 있다면 타임머시를 타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가서, 부끄러운 과거를 싹 지워버리고, 새롭게 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 말로 하기에, 부끄러운 부분들이, 우리 인생에 많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수치스런 사실들이 다 드러난다면, 쥐구멍이 열 개라도, 우리는 부끄러워서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완전히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새 것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여러분의 과거가 참 말할 수 없는 수치요, 창피요, 도무지 내놓을 수 없는 천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완전한 신부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요, 목표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여러분에게 연단을 주십니다. 고난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지상에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 목표에 이르도록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천국 시민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우리의 죄악과 더러움과 수치를 벗겨내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택의 동기는, 4-5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사랑과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사랑 안에서”, 그리고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입니다.
총각이 처녀에게 프로포즈를 합니다. 왜! 그 여자를 사랑하는지 물어 보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 사랑이 생겼습니다. 한 눈에 반했습니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사람만 눈에 들어옵니다.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연약하고,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못나고, 엉터리고, 형편없고, 무절제하고, 그렇게 변덕이 많고, 그렇게 추한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깊으신 뜻입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하시기로, 하나님이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택하신 목적 하나가 더 있습니다.
5절을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5절에도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6-7절)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종노릇하였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고, 우리를 사서,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내가 나의 인생을 결정하고, 나의 미래를 선택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된다면 얼마나 무섭고 두렵습니까? 그러나 나를 불러 주시고, 나를 선택하시고,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 생애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어 주신 하나님이, 내 생애를 인도해 주신다고 믿고 산다면,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두렵고, 불안한 인생 항로를, 스스로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고, 선택하시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고백하고, 안심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따라가겠습니까? 이것을 깨달았을 때, 바울은 소리치며, 찬송을 불렀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외쳤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여러분의 영원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택대로, 안전한 안내와 인도를 받으십시오.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에게 물어 보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용기를 얻으십시오. 위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는 대로, 여러분의 인생 항로를 걸어가 보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건강하게 하시고, 행복하게 하시고, 풍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흠 없고 거룩하고, 완전한 생애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약속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여러분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찬송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날마다 복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거룩하고 흠없는 삶의 모습으로 오직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택하여 주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소중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