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의 연원 시조 이자성의 자성이족.성씨의 기원과 유래,
성의 칭호 李씨에 대하여 2/21
1. 李氏라는 李의 근원은 무엇인가.
성씨(姓氏) 또는 성(姓)은 출생의 계통을 나타내는 칭호로,
혈족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영어권 국가들에서도
성(family name=last name=surname)을 갖고 있다.현재 ‘성씨’라는 말로 통칭해서 쓰고 있지만,
중국 선진시대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성’과 ‘씨’는 구별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성이 먼저 나타나고
, 뒤에 씨가 나타났다.
성은 ‘여자[女]가 낳은[生] 자녀들’이라는 글자의 의미처럼 모계 씨족사회에서 동일한 모계 혈족을
구분하기 위해 출현했던 것이다.
때문에 ‘희(姬)’ · ‘사(姒)’ · ‘강(姜)’ · ‘영(嬴)’ 등 초기의 성들 중에는
‘계집 녀(女)’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들이 많다. 다시 말하면, 성이란 모계 씨족공동체 시기의 산물로
‘명혈연(明血緣)’, ‘별혼인(別婚姻)’의 기능을 위한, 즉 동성일 경우 서로 혼인할 수 없다는
일종의 동혈족 관념[生]을 표시하는 부족집단의 관칭(冠稱)이라 할 수 있다.
성에서 씨의 분화가 생기게 된 것은 부계사회로의 전환, 신분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시대변화가 전제되어 있었다. 먼저, 부계사회(父系社會)로 바뀌면서
성은 부계(父系) 혈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게 되었는데, 종족(宗族)에 따라 자신들의 거주지나
숭배물 등을 그 성으로 삼기도 하였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종족의 인구가 늘고 거주 지역이 확산되자, 하나의 성에서 갈라진 지파(支派)는
새로운 거주지나 조상의 이름 등을 따서 자신들을 구별할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나의 성에서 갈라진 계통의 구별을 나타내는 칭호를 ‘씨’라고 한다.이러한 의미를 가진
성과 씨의 변화를 시대별로 보면, 먼저 하(夏) · 상(商) · 주(周) 삼대(三代)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 770~221)에 이르기까지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당시 귀족들은 분봉(分封)받은 국읍(國邑)의 지명(地名)이나 관직(官職), 조상의 자(字)나 시호(諡號),
작위(爵位), 거처(居處) 등을 ‘씨’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부자 사이에도 성은 같지만 씨가
다른 경우가 생겼고, 성이 다른데도 씨는 같은 경우도 나타났다. 그래서 성이 같으면 결혼을 하지 않았고,
씨가 같아도 성이 다르면 결혼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씨로써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을 구별하니,
천한 자는 姓(어머니)은 있으나 氏(아버지)는 없었다(氏以別貴賤, 賤者有名無氏).
”각주 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씨는 ‘귀족’ 남자의 전칭(專稱)이 되었다.
씨는 이처럼 ‘혈(血)’ 혹은 ‘생(生)’보다 ‘토(土)’의 관념에 의거하는 정치적 지배권[封邑]의
관칭이었다.각주
따라서 혹자는 성姓을 혈족적 씨족제로, 씨를 영토적 씨족제로각주 ,
혹은 성姓을 혈족관계를 나타내는 부호로, 그리고
씨를 정권을 표시하는 부호각주 로, 혹은 성 · 씨 · 명이 로마의 Gens, Familia, Persona와
동일한 것이며,
각각 ‘혈연별 단체(血緣別團體)’, ‘주지(住地) 직업(職業) 등에 의한 성(姓)의 분파’,
‘개인의 별칭’으로 보았다.각주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종법(宗法) · 분봉(分封) 제도가 무너지면서 성씨제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종족의 유대와 연결 관계가 약해지면서 씨가 성처럼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전국시대 이후에는 평민의 지위가 상승해
그들도 성을 지니기 시작했다. 결국 진 · 한(秦漢) 시대 이후에는 성과 씨의 구별이
점차 사라져 하나의 의미로 쓰였으며,
백성(百姓)이 민중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한대 초기 포의(布衣) 출신들이 정권을 잡고는 구래의 성씨제도를 파괴해 버림으로서,
성과 씨는 점차 혼동이 생기기 시작하여 씨를 성으로 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고 한다.각주 예컨대,
사마천이 『사기』 중에서 공자의 자(字)를 중니(仲尼), 성을 공씨라 하거나,각주
유방(劉邦)의 성을 유씨라 한 것은각주 한대 사람들 사이에는 성과 씨가 혼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표징이다.
선진시대의 성과 씨가 씨족제적 체제에 밀착한, 말하자면 ‘족(族)의 관칭’인 데 대해,
진 · 한 이후의 성은 바로 ‘가(家)의 관칭’으로 기능하게 되었다.각주
2. 성姓씨에서, 우리나라의 이씨 사용은
진평왕 이후의 문서에서, 고려시대 쓴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원래는 정부의 수장, 방백, 호족장의 존칭어, 부르는 칭호에서 연유된 것이다.
里,代理, 李로 발음하였고, 고대사회는 씨족사회또는 부족사회인데 이것은 반드시
지역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는 것이고, 지역마다 그 지역부족을 대표하는 者가 있는 바
이의 칭호를 "리,이"라고 한 것이다.우리 고대신라 왕의 이름이 거서간 혁거세 이사금 마립간
차차웅, 임금, 간, 단 당굴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즉, 지역을 중심으로 호족이나 부족들의 후손들이 집성을 이루게 되자 그의 후손들이
<수.당 이후에 .요양이씨,낙양이씨, 화북이씨라고 칭>한 것이 시발이 된다.
즉 낙양에서 대대로 수장을 하던 세력(이) 의 후손이란 뜻이다.
경주이씨는 서라벌 부근에서 알평이라는 집단이 모여서 살고 있었는데
이 집단의 후손들이 높임어의 李로 부르게 된것이고(사실 당시에 李로 부르지는 않았고 통일신라이후
사가들이 지방의 관장이니 李라고 붙인 것임)
우리 광이는, 서러벌 분황사지 인근 서남에 <自成이라는 집단>이 살고 있었는데
이 집단의 후손들이 높임어의 李로 부르게 된 것이고 그래서 우리를 자성이족인 것이다
(廣이라는 것은 신라 서라벌(자성)과 칠원에서, 경기도 광주로 이속 때문이다)
일응,
우리나라에서 姓氏를 사용한 기록은 삼국사기나(고려시대기록) 기타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부여씨를 포함에 부여.사마(司馬),
수미(首彌), 조미(祖彌), 고이(古爾), 목협(木劦) 사(沙),연(燕), 협(劦), 해(解), 진(眞),
국(國), 목(木,李), 백(苩)씨등의 8성이 있었고,
세부적으로는 변진한 54개국을 비추어 적어도 54개 성을 갈음한 족명이 있었다
고구려는 왕의 高와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와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 환노부등 국내성 인근 거주지역등의 6개 부족姓을,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新羅本記)에 보면,
신라 제3대 유리왕이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어 성을 주었다 하는 기록이 있는 데,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양산부(楊山部)는 양부(梁部)로 하고 성은 이(李)로,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로 하고 성은 최(崔)로,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로 하고 성은 손(孫)으로, 간진부(干珍部)는 본피부(本彼部)로 하고
성은 정(鄭)으로,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로 하고 성은 배(裵)로,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로 하고 성은 설(薛)로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 편 삼국유사에는
사량부의 최와 본피부의 정이 서로 바뀌어
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르게 되어 있다. 이 6부는 혁거세가 임금이 되기 전에는 촌(村)으로,
알산양산촌(閼山楊山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다. 그리고 각 촌에는 촌장이 있었는 데,
양산촌에는 알평(閼平), 고허촌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 대수촌에는 구례마(俱禮馬),
진지촌에는 지백호(智白虎), 가리촌에는 기타(祇陀), 고야촌에는 호진(虎珍)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렇게 6촌장에게 사성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러나 이 6성의 기원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신라에서 성을 사용한 始期는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의 기록보다 훨씬 뒤인 건국 후
약 600년이 지난 제24대 진흥왕 때 부터라는 주장이다. 이는 앞에서 도 살펴 보았지만 진흥왕 때 이전에는
어디에도 왕의 이름이 나오는 기록이 없다. 또 제3대 유리왕 때 이 6촌장들에게 성을 주었다면
유리왕 때부터 진흥왕 때 까지의 역사 기록에서 6村長의 姓氏가 붙은 기록이 있어야 하는 데,
그런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신라는 지증왕 때 와서야 ‘신라’라는 國號를 썼다.
그 전에는 사로(斯盧)나 사라(斯羅)라고 하였다. 또 지증왕이 돌아가자 법흥왕은 중국의 격식에 따라
선왕에게 시호(諡號)를 내렸다는 시호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한다.이중 '이'는
양산부(楊山部)를 양부(梁部)라 하며 이로하는데』 李 의 어원은 李,理,(높임어)를 조상이나
지도자로 섬기는 씨족등의 稱인 바 오늘의 李氏인 것이다.
중국의 칠제 요순시대 李,理라는 득성은 노자의 李가설과
요나라때 요고라는 사람이 代理라는 지방 수장직을 지냈는데 이후 이 집안이 대대로 하북성 요녕성
만주일대의 리理의 직을 이어왔고(이이정.이징)이 있다 노자의 모친이 노자를 81년 동안
임신하다가 오얏나무
아래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노자의 귀가 커서 이耳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노자가 李로 성을 바꾼 곳이고
중국 동북부의 동이족의 지배하의 고을 수장이름이 代理 리 인지라 이들을 理로 불렀는데
나중에 성을 理로 하였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백의 집에는 桃梨園이라는 자두나무 정원이 있는 것이다.
(한단고기, 사기정의 현묘내편, 요순시대 중국사) 그래서
'이 리'라는 官職呼은, 동이족도 사용하는 용어로
韓半島 함경도나 평안도, 요녕성 하북성과 같은 동쪽 北方 엣 高句麗 地域에서
정부 책임자를 부르는 別稱이다, 즉, 祭政一致 시대에 祭司長과 君王이 동일체인 시대와
군왕과 제후가 分離되는 始期를 거치는데, 백성들을 다스리는 部, 권력을 휘두루는 府로 양분되는 바,
권력을 휘두루는 府는 왕,제왕 등의 통치자를 뜻하는 이름(옛언어)이고,
'이'는 백성을 다스리는 행정 政府, 지금의 수상이나 총리같은 職位의 別稱인 것이다.
우리가 후기의 언어로,
지방 방伯을 이사군으로 부른다거나 신라왕의 別稱인 "이사금의 이,나, "吏조, 吏令의 명칭은
벼슬의 이름, 部族長에서 根源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성李족은
지방수장의 李,理인 자성이란 뜻이다.
즉 理,長의 장인데 통일신라시대이후 알평의 후손들이 자신을 理라하고 자성의 후손도
理를 이라한 것이다, 원래 발음은 <리>인데 나중에 <이>로 썻기에 이라 발음한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도 지방의 군호들의 후손이, 대부분 李라는 성을 써서, 한국과 중국을 포함하여
이씨라고 칭호한 인구는 1억 명이 넘는다
(이씨라고 칭호한 이들이 절대 같은 친족은 아니다)
돌궐 세력의 중앙 아시아 유럽진출로 인하여 일부 영미에게 진출하니 <리lee>인 것이다
(廣李의 일부 중에서, 광이를 慶州李씨의 분파라고 問議한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절대 경이의
分派가 아닌, 獨立된 자성족, 즉 자성理족이다)
3.
그렇다면 廣李족은 초기 신라 서라벌 인근(분황사지域)에서 발흥,
始原(휘 우생의 묘지명,박상의 문호공신도바명, 율정초보.승지 이이만의 세보별보초권)으로하는
族인데동성보에 전해오는 오늘날 같은 이의 기원과 유래는 무엇인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中國 史書에서는 檀君 조선과 高句麗 우리 疆土의 나라 명칭을 곧 왕의 姓으로 기록하고
기타의 이름은 고을,강, 산의 이름을 차자하거나 높임말이된 단어를 借字하여 當時가 아닌
後世의 史家들이 이를 기록하였다
즉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나 한서 지리지, 중국후대사서 고려사에서 단군조선-삼국시대의
人名에 대하여는
"고을이름- 나라 이름"을 借字한 것이다. 즉 當時 部族이 거주하는 地域의 이름이나 높임말의 이름을
소리나는 글자로 표기한 것이 오늘의 金 李 朴이다.
그래서 高句麗의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高의 나라 주몽 高의 나라 映하거나 을지문덕
연개소문 천개소문 소리나는 것을, 借字하거나, 부여 玉의 저,東의 명,예의 구, 등을 기록한 것이다
그것이 마한 진한 변한 地域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나라(고을)마다 마을의 이름이 있거나
우두머리가 있고, 우두머리는 全部,단군, 당굴, 천제, 칸, 거서간. 차차웅, 마립간,
세, 님금. 이사군 등으로 불린 것으로 이것이 오늘의 姓氏名이 되기도하고
官名이 되기도 하고, 나라이름이나 部族이름이거나 地域의 이름이 되기도 한 것이다
우리 始祖의 이름이 이자성이라한 것, 이군린이라고 한 것과 같다.
부족 명칭은, 지명의 "집단지의 명"이나 높임 말 등으로 부르다가, 후세에, 이를 한자로 표기하거나
외교문서, 사서에 기록시에 후인들이 부족 이름"이 된 것이다.
이것들이 漢字가 導入되고 과거를 보는 선비家에서 父母의 4대의 이름을 적어야하는 출신을
必要로 하여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 "소위 姓本"이 된 것이다
漢江 以南의 姓氏들은 부여와 단군의 지배층 族이, 南下를 하게 되므로
各各의 部族 名稱을 사용하니 高족,夫餘族이라고 기록으로 傳하였다.(박한제(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명예교수) 성씨(姓氏)론)
新羅시대의 徐羅伐은 서라, 수라, 신라 실라등이었는데 "밝다"의 박과 "석"등도 있으나
주로, 金성이 서라벌을 지칭하는 이름이므로, 후에, 이를 金(진한,김한)이라한 것이다.
진한 지역의 서라벌은, 金국, 금성의 나라인 바, 金부족 이라 하다가 朴(밝다)부족이라 하다가
지역의 수장이름과 지역이름 높임말같은 李씨라 孫씨라 薛씨라 하는 것으로
일종의 마을과 존칭의 이름명의 기록인 것이다.
전부, 금성과 서라벌 부근의 지배 세력의 別稱으로.오늘날 金씨가 많은 이유는
金성, 金나라의 지도세력인 新羅가 三國을 統一하고,
韓半島를 支配권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므로, 金씨 성을 칭한 口가 많은 것이다
여기서 同一 姓이라 하여, 같은 씨족도 원천이 같는 성족은 절대 아니다. 즉 시대 부류들인 것이다.
당시 高句麗가 통일 하였다면, 오늘날 高씨나 부여씨가 많아졌을 것이다.기실 金李朴의 의미는
유래 고찰"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漢文化 수입으로, 붙여진 일종의 갈래이지, 정확한 氏의 유래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李氏라는 것은 같은 친족도 아니고 같은 지역 씨족이라야
비로소 親族이 되는 것이다 . 다른 김씨, 박씨도 이와 같다.
연구결과 李氏는 三國遺事의 설화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李(里.吏)라는 칭은
신라가 지난 통일신라 시기 신라등 삼국과 교류가 있었던, 수당서의 일부에 기록된 것이 처음이다
우리나라에서 姓氏는 初期에는, 豪族名(족이 집단 거주하는 지역의 이름또는 별칭)을
사용하였고, 고려 초기에, 왕건이 各州 君縣의 豪族을 封君하고, 爵位를 下賜 하면서는
호족의 別稱(군작)을 성으로 사용한 것이다,
고려 광종시에 처음, 과거제를 시행한 것인데 당시 호족의 子孫들이
科擧시험에 진출하여야 만 벼슬에 임명하는 것이므로, 과거응시자는 자신의 출신 성분을 기록하는데,
그때는 주로 族長 豪族장과 父親 母親의 출신을 기록하였다, 대부분 부친과 모친의 출천은
君號를 기록하는 것이므로 初期에는 爵位를 기록하여, 그 爵位가 姓本을 말하였고, 姓本의 別稱이,
소위 姓인데, 성이란 것이 대부분 고을의 이름(김 석 박), 나라의 이름(한 정), 벼슬의 이름(이 설)을
따온 것이 오늘의 姓이다
그러다가 오늘날처럼 姓本으로 확립이 된 것( 이수건,『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은
高麗말 朝鮮조 初에 確立된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李는 원래는 官職의 尊稱語이다, 古代 中國의 7제 시대 북조 요녕성 하북성등의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지방에서 通用된 用語로(趙瑞民, 『姓與中國文化』 (海南人民出版社, 1988)., 높은 地方 정부의
수장의 호칭이다
. 지금사 용된 중국과 한국의 성씨가 대부분 고을=나라이름이나 관직이나 帝王의 別稱에서 由來된 것일 때,
李氏는 관직의 이름, 즉 정부 수장, 방백. 호족장의 별칭인 것이다(尾形勇, 『中國古代の「家」と國家』
(東京: 岩波書店, 1979).
이것을 오늘날 성씨로 중국에서 부터 사용한 것을 우리도 통일신라 고려부터 사용을 한 것이다.
그래서 고대어로, 李는 사실 오얏나무 李氏이나 이 오얏나무의 李는 地方政府宰相의 이름으로
중국 동북부의 부족의 하나인 李연 李세민의 당나라 창건자가 사용한 성에서 보듯
하나의 部族장의 尊稱語인 것이다
그러던 것을, 신라말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수당서에 톨일신라시대의 인물고에 이라는이름이
나오고 이것이
고려 과거시험의 실시로 성본이 필요하게 되자
일부의 호족들이 李를 사용한 것이다(廣州, 慶州이씨등) 고려에서도 문음(門蔭)을 받기 위한 조상의
내외세계가 기재된 씨족·족도(族圖)·정안(政案) 등이 작성되었고, 지방의 각 읍사에는 향리의
명부인 이안(吏案, 壇案)이 비치되어 향리의 선임과 승진, 향공(鄕貢)과 기인(其人)의
선임등에 활용했다 여기서 이안의 이는 지방정부의 수장이나
백, 호족의 존칭어 이/리에서 연유된 것이다
중국측 기록의 김씨의 김씨 칭호 유래,
(동이족 천손인데 중국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을 기록함)
姓氏起源:김씨 성
1、出自少昊金天氏。하늘에서 온 소호의 금천이다(소로는 동이족이란 뜻)
相传少昊是上古五帝之一,是黄帝的己姓子孙,
少昊死后被尊为西方大帝;按照古人的五行学说,西方属金,
所以少昊又有金天氏的称号。
他的后裔就有以金为姓的,称金氏。 ..소호는 고대 5황제로 이항제의 자손이다.
.....소호 또는 금천이라 칭했다. ...서방은 금에 속한다...다른사람들이 이들의 후예를 금천이라하고
이후 김씨라 함,
2、出自匈奴休屠王太子金日磾之后。
汉代,匈奴休屠王的儿子 叫日磾,在汉武帝时,归顺于汉室。
由于他曾铸铜人像(又称金人) 以祭天,遂被赐姓"金"氏,
称金日磾,从此他的子孙就统统姓了金。
...흉노(동이.중국에서는 동이를 흉노로 부름) 휴거왕왕태자 김일제로 시작된다, 한대에 흉노휴거왕의 아들 일제 봉기하다.,주동으로 인상이니 숭하고 금인이라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사성 김씨다
또는 칭하기를 김일제, ....
....
3、为刘姓改姓为金氏。
唐末五代时,吴越国(十国之一)开国 之王钱鏐的"鏐"与"刘"为同音字,
为了避嫌,
便将吴越国中的刘氏改 为金氏。
....위 유를 고쳐 김씨, 당말 5대시,오월국 십국의 하나인 변국의 왕 전금의 금이 유의 음이 같다
피체를 당하여 오월국 유씨를 김씨로 변개
郡望, 서한의 팽성군, 경조군, 장안.
彭城郡:西汉地节元年改楚国为彭城郡。
东汉章和二年改为 彭城国,治所在彭城
。南朝宋改为郡。
京兆郡:汉太初元年改右内史置京兆尹,为三辅之一,
治所 在长安
。三国辖区改为京兆郡。
堂号:
"丽泽堂":宋朝的时候金履祥最长濂洛之学,
皇帝召他任国史馆编修,没到任就死了。他曾在丽泽书院讲学,所以称"丽泽堂"。
金姓又有以"彭城"、"京兆",为其堂号名的
迁徙分布.............소호의 지역, 곡부, 산동, 신라 고려. 백제지역,
장안지역에서는 대대로 관환을 세습하다,
납북조시대는 감숙성, 북제 대도독으로 김조 .당조에 촉도와 분주 하서군에
金姓姓源较多,最早的一支源于上古时的少昊。
少昊自穷桑登帝 ,后徙曲阜。
穷桑在今山东曲阜市北。
新罗,朝鲜古国名,与高丽、百济并立,其国王姓金。
金日磾家族居住在长安,累世官宦。
南北朝 时,金氏有迁至今甘肃境者,
如北齐大都督金祚,就是安定人。
唐朝 贞观年间所定益州蜀都三姓之一有金氏
,汾州河西郡四姓之一有金氏 。
宋明时期,南方的金氏除在今浙江、江苏一带发展外,
还分布于今 江西、安徽、湖南、湖北、福建、广东等省;北方的河南、
河北、辽 宁等省也都有金氏的聚居点。
从清朝嘉庆年间开始,闽、粤金氏陆续 有人迁至台湾,
此后,有的在迁海外,
侨居于新加坡等国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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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박한제(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명예교수) 성씨(姓氏)론)
성씨론
중국의 성씨론
1. 사마천은 『세본(世本)』 · 『주보(周譜)』를 근거로 하여 중국 고대의 성씨의 유래를 정리 · 서술한 바 있다.
즉 『사기』에서는 본기(本紀) 세가(世家) 열전(列傳) 등에서 등장인물의 계보를 서술하였다.
이후 『사기』를 모방하여 역대 정사에서 그러한 서술방식을 견지하였다.
특히 『한서(漢書)』 고금인표(古今人表), 『위서(魏書)』 관씨지(官氏志), 『신당서(新唐書)』 종실
· 재상세계표 등은 각기 당대 관련 인사의 성씨 관향의 유래와 이민족의 한성화(漢姓化),
종실 · 재상 가문의 계보를 서술하였다.
중국의 성씨 사상 가장 큰 변화는 위진남북조시대에 일어났다.
이 시대 들어 성씨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문벌사회의 진입으로 주 · 군 · 현 성씨에 있어서 갑 · 을 · 병 · 정 등 가격(家格) 등제(等第)가 생성되었다.
그와 동시에 각 지역, 특히 소위 ‘군성(郡姓)’ 혹은 사성(四姓)이라 지칭되는 지방을 대표하는 성씨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신당서(新唐書)』 권109 유충(柳沖)전에 의하면,
남조시대에 ‘보학(譜學)’이라는 학문과 그것을 관장하는 ‘보국(譜局)’이 생겼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사상의 ‘민족이동’으로 종래 중원의 세가가 강남으로 이동함에 따라
강남, 주(朱) · 장(張) · 고(顧) · 육(陸)을 위시한 ‘오성(吳姓)’ 토착성이 생겼고,
-- 왕(王) · 사(謝) · 원(袁) · 소(蕭) 같은 교민의 소위 ‘교성(僑姓)’이 생겼다.
북조는 원(元) · 장손(長孫) · 우문(宇文) · 우(于) · 육(陸) · 원(源) · 두(竇) 이민족 출신 ‘노성(虜姓)’이 출현하게 되었다.
문벌사회의 전개로 당대가 되면 대표적인 문벌출신 지역이 산동에
왕(王) · 최(崔) · 노(盧) · 이(李) · 정(鄭) 같은 군성이,
관중(關中)에 위(韋) · 배(裴) · 유(柳) · 설(薛) · 양(楊) · 두(杜) 같은 군성이 출현하게 되었다.
소위 군성이 문벌사회의 소산이라면,
노성은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의 낙양으로의 천도 정책으로 중원으로 이동하였던 유목민의 한성화(漢姓化)의 결과이다.
현재 중국에는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단자성(單字姓) 외에 수천 개의 복자성(複字姓)이 있는데,
이는 대개 이민족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민족의 한성화를 추진한 자가 북위 효문제라면, 호성(胡姓=虜姓)으로의 환원을 시킨[胡姓再行]
자가 서위 북주의 당권자인 우문태(宇文泰)였다.
이 성씨 문제는 호 · 한 간의 정치노선 투쟁의 문제와 관련된 것인데,
이런 투쟁을 거친 통일시대인 수 · 당대에 들어서면 호성과 한성이 병립하는
형태를 취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국의 성씨 수의 추이를 보면, 후한시대 응소(應劭)가 편찬한 『풍속통의(風俗通義)』
「성씨편(姓氏篇)」에 고대의 성씨 약 500개 전후를 나열하고 있다. 한편,
송대 정초(鄭樵)가 편찬한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에는 당시 통용된 성을 약 1,745개 나열하고 있고,
명 태조 시기의 사람인 오침(吳沈)이 「천자성(千字姓)」을 찬술하면서 1,968성을 열거하였고,
청대 사람인 장주(張澍)의 연구에 의하면 청대에 5,129성이 있다고 하였으며,
현대 중국에는 5,660여 개의 성이 있으며,
그중 단성(單姓)이 3,480여 개, 복성(複姓)이 2,030여 개, 삼자성(三字姓)이 240여 개가 있다고 한다.각주 참고로
성씨 관념에서 볼 때, 동아시아에서 별종이라 할 수 있는 일본에는 현재 10만 개의 성이 존재한다고 한다.각주
2..
한국은 중국의 『세본』과 같은 제왕의 계보는 삼국시대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각기 국사를 편찬할 때
작성되었다고 짐작되며, 신라 말기의 최치원에 의해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다시 『삼국사기』의 본기와 연표 및 『삼국유사』의 ‘왕력’조에 삼국 내지 가락국의 왕실계보로 체계화되었다.
한국의 성관의 형성과 유래에 관한 최초의 기본 사료는 『세종실록지리지』 성씨조이다.
15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수많은 보학자들에 의해 보계서(譜系書)가 정리되어 출판되었고,
여기다 각 성별마다 본관별 · 파별, 문중 단위로 편찬된 족보를 갖고 있다.
한국은 16세기까지만 해도 전체 인구 가운데 적어도 40% 안팎은 무성층(無姓層, 천민층)이 차지했고,
17세기까지도 명실상부한 양반층은 10% 미만이었다.
신라의 박(朴) · 석(石) · 김(金) 3성과 이(李) · 최(崔) · 정(鄭) · 손(孫) · 배(裵) · 설(薛) 6성 및
기타 왕실 · 귀족 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성관은 모두 고려 초기에 나왔다.
중국처럼 봉후건국한 데서 성을 받은 것이 아니고,
고려 초기 토성(土姓)을 분정받고 그 후에 공신 · 외척 · 고관 등으로 인해 분관별로
작읍호(爵邑號)를 받은 것이며,
어떤 고을에 봉군(封君)됨으로써 본관을 받게 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토성과 외래성[시조가 중국에서 왔다는]으로 크게 구별할 수 있다.
외래성 가운데 상당수는 토성이 중국성을 모칭한 것이라고 한다.각주
성씨론, 백과,,이수건, 『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1. 성씨란 일정한 인물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단계혈연집단(單系血緣集團)의 한 명칭이며,
곧 족적 관념(族的觀念)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데서 결국 족의 문제와 직접 연결된 것으로,
고대로 거슬러 올라 갈수록 더욱 밀착되어 있다.후대의 성씨는 한자식 표기로서 이름 앞에 붙어 족계(族系)를 나타내는
동계혈족집단의 명칭을 가리키고, 이는 바로 중국식 출자율(出自律)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성씨제도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의 수용 및 보급, 분화과정과 본관의 세분과 통폐합 등 성씨체계가 특이하고,
성명의 구성이 복잡하고 고유한 점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한국인의 인명을 살펴보면 성과 본관은 가문을, 이름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항렬(行列)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세대까지 나타나,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성명체계이다.
또한, 한국인의 성은 남계의 혈족을 표시하는 칭호로서, 말하자면 우리 나라의 성은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의 호칭이 아니라,
부계 위주의 가계 그 자체를 본위로 한 칭호이다.
2. 우리 성씨의 구체적인 모습은 최초의 인문지리지인 ≪세종실록≫ 지리지의 성씨조에 담겨져 있다.
성씨 그 자체가 혈연과 지연의 이중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우리 성씨의 특징규명에는 성의 생성·분화 과정과 함께
그 성의 출자지(出自地), 곧 본관의 지역적 구획과 연혁을 동시에 결부시켜 고찰해야 한다.
중국식 성씨제도는 벌써 삼국시대부터 왕실·귀족순으로 수용되어 왔지만
한국적 성씨체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시기는 고려 초기였다.
후삼국시대의 격심한 사회적 변동에 따른 신분제의 재편성과정에서 태조 왕건(王建)은
반도를 재통일한 다음 당대의 실질적인 지배세력을 대표했던 전국의 호족을 각 출신지역별로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여 지역적·신분적으로 재편성하였고,
이러한 성씨체계가 뒷날 ≪세종실록≫ 지리지의 성씨로 나타났던 것이다.
고려 초기에 전국 주·부·군·현과 향·소·부곡 등 군현과 임내(任內)별로 분정된
성씨의 구성요소는 읍치(邑治)의 지배성단인 인리성(人吏姓)과 촌락지배성단인 백성성(百姓姓) 및 각종 임내성이었다.
이들 성씨의 수장들은 후삼국시대에는 성주·촌주 등의 직함을 지니면서
지배세력을 대표했던 이른바 호족이며,
고려의 개국과 통일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각 출신지·거주지별로 토성(土姓:토박이성)이 되었다.
그 결과 고려시대에 진출한 귀족과 고급 관인을 출신 성씨별로 분석해 보면,
소수의 중국·발해계의 귀화인·유민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군현의 토성들이었다.
후삼국시대 호족들은 왕건과의 연결과정에서 개국관료와 태조공신(太祖功臣:三韓功臣)이 되고
각기 성과 본관을 분정 또는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각 읍(邑) 성씨들은 본관을 떠나 일찍이 서울로 진출하여 재경관인(在京官人)이 되거나
그대로 토착한 성씨는 각기 읍사(邑司:州司·府司·郡司·縣司·鎭司·鄕司·部曲司 등)를 중심으로
향리·장리(長吏)층을 구성하여 지방행정을 장악해 나갔다.
이러한 군현성씨의 진출기반은 강력한 씨족적 유대와 공고한 경제적 기반 및 학
문적·행정적 소양의 바탕 위에서 출발하였다.
고려 광종 이후에 새로 진출한 성씨들은 대개 군현 향리층의 자제였다.
그들은 향공(鄕貢)·상경유학(上京留學)·기인(其人)·시위(侍衛)·선군(選軍)·부전(赴戰) 등의
수단을 통하여 당시의 3대 출사로인 문(文)·무(武)·이(吏)의 세 계열로 진출하였다.
그 결과 시대가 내려올수록 지방성씨의 진출이 활발하여 지배층의 저변확대를 가져왔다.
이런 추세는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초기 급격한 정치적·사회적 변동으로 인하여
집권세력이 점차 문벌귀족에서 무신 내지 신진사대부로,
근기(近畿)지방의 군현토성에서 삼남지방의 토성으로,
대읍(大邑)토성에서 중소군현토성으로 확산되어 가는 결과로 나타났다.
빈번한 정변과 기성관인들의 정권쟁탈전이 끊임없이 세력교체를 가져왔고,
그러한 와중에서 지배세력의 신진대사가 활발하여 신흥세력은 주로 지방의 토착성씨에서 공급되었다.
고려 초기부터 각 본관마다 읍사를 중심으로 반근착절(盤根錯節)되어 있던
토성은 상경종사(上京從仕)·유이(流移)·소멸 등의 과정을 밟아 지역적 이동과 신분적 분화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기존 토성의 소멸에서 망성(亡姓)이 생기고,
북진정책에 따른 사민(徙民)에서 입진성(入鎭姓)이 생겼는가 하면,
지역적인 이동에서 경래성(京來姓)·내성(來姓)·입성(入姓) 등이 발생하였고,
특히 고려 후기 군현간의 향리조정책에 의하여 속성(續姓)이 대량 발생하였다.
토성을 제외한 다른 성종(姓種)은 귀화성이나 새로운 사성을 제외하면
모두 토성에서 분화된 것이며, 15세기라는 시기를 기준하여 볼 때 이른바 거족(鉅族)이나
신흥사족 및 상급 향리층을 막론하고 그들의 출신 뿌리는 각기 군현토성에서 나왔다.
서울로 진출한 재경관료나 유향품관(留鄕品官)을 중심으로 한
경재소(京在所)와 유향소(留鄕所)의 구성 주체, 경저리(京邸吏)·영리(營吏)·읍리(邑吏)를 공급했던
향리의 주체들도 역시 군현성씨에서 나왔다.
고려시대 지방의 재지세력을 대표했던 계층은 각 읍 향리의 상층부인 호장(戶長)층이었다.
마치 서울의 집권세력이 그 권세를 계속 유지하면서 고관요직을 놓치지 않고 부지해 나가는 데서
가문의 영광을 지킬 수 있는 것과 같이,
토착세력은 호장층의 확보 여부가 그들 성씨의 세력소장에 직결되었다.
그러므로 지방 향리에서 서울로 진출한 계층은 대개 호장층의 자제였고,
후대에 대성명문으로 성장한 성씨의 시조 가운데는 호장이 많았다.
한편, 12세기 후반 무신집권을 계기로 한 급격한 사회변동은 군현 및 향·소·부곡 성씨의 대규모적 이동을 가져왔다.
그 결과 군현토성 이외에 촌성(村姓)·향·소·부곡성과 내성·속성 등 비(非)토성 출신의 관인이
점차 증가해 갔는데, 이러한 추세는 원의 지배시기와 왕조교체기를 겪으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와 조선왕조의 집권화과정에서 향리의 지위와 권한은 계속 저하되고 축소되어 갔으며,
후대에 올수록 향리에게 부과되는 향역(鄕役)이 과중해지자 토성향리의 유망이 보편화되었다.
이산한 향리자원을 보충하고 행정구역간에 향리수량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비토성 향리가 계속 증가해 갔다.
우리 성씨체계는 그 토대가 왕건의 토성 분정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중국의 경우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의 성족분정(姓族分定)작업과
당태종(唐太宗)의 ≪정관씨족지 貞觀氏族志≫ 편찬사업과 비교된다.
조위(曺魏)의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 실시를 계기로 문벌사회가 확립됨에 따라
각 군별로 군망(郡望)이 형성되어 갔다.
그 뒤 진실(晉室)의 남도(南渡)와 오호(五胡)의 강북지배에서 종전의 성망체제가 획기적으로 개편되었다.
그 결과 이른바 군성·교성(僑姓)·오성(吳姓)·노성(盧姓)이 지역과 씨족에 따라 구분되었고,
그들은 남북조 역대 왕조의 흥망과 집권세력의 소장에 따라 성씨와 가격(家格)이 한결같지 않았다.
3.
≪세종실록≫ 지리지의 군현성씨가 읍격(邑格)에 따라 주·부·군·현성이 있듯이,
수·당시대의 군망도 사해대성(四海大姓)·군성·주성·현성이 있었다.
한편, 효문제가 적극적인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실시하면서 496년에 성족(姓族)을 새로 정하자
북방 이민족의 한성화(漢姓化)가 활발해진 것은,
신라 말 고려 초 호족이 고유명에서 한식성명을 수용한 경우와 비슷하였다.
한편, 당나라의 새 질서를 강화하려 했던 태종(李世民)은 당대의 현실적 힘의 관계에 의하여
기존의 최(崔)·노(盧)·이(李)·정(鄭)과 같은 특정 대상의 성족을 확대, 개편해서 평준화해 갔던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문벌관념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당시에 합당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려는 데 당태종의 의도가 있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940년(태조 23)에 전국의 군현토성을 분정한 배경도,
좁고 폐쇄적인 신라의 골품제도를 청산하고
새 왕조를 담당할 새로운 지배신분을 편성하는 데 있었다.
고려 태조는 940년 3월에 전국의 군현 명칭을 개정하면서
경주를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승격하고
6성의 출자처인 6부의 명칭을 개정하는 한편,
후일의 호장인 당제(堂祭:堂大等) 10명을 크게 갈아서 임명하였다.
이때 명칭이 개정된 읍수는 218군현으로서 종전의 9주 5소경을 위시한
전국의 대읍은 물론 일부의 소현까지 미치고 있다.
마치 본관이 국가에 의하여 정해지듯이,
고려왕조를 창건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적극 참여했던 전국의 크고 작은 호족이 제각기
출신지 군현에 토성으로 지정되면서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들은 이때를 기하여 시작되었다.
940년 이전에 폐합된 군현에는 토성이 없으며,
또한 그때까지 토착씨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지역, 즉 신라 말의 북쪽 국경선인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선의 이북지방(평안·함경도)에는 토성이 전무하였다.
대소읍 사이에 영속관계(領屬關係)가 형성되어 갔듯이,
기존의 토성은 본읍의 읍치를 중심으로 점차 임내와 직촌(直村)으로 확산되어 감으로써
성씨의 분화와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즉, 토성 다음에 가속성(加屬姓)·입주후성(立州後姓)·차성(次姓)·차리성(次吏姓) 등이 생기게 되었다.
본읍 성씨와는 별도로 속현 및 향·소·부곡·처(處)·장(莊)성과 촌락을 본관으로 하는 촌성이
시간적 선후를 두고 계속해서 생성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성씨조에 의거 당시 본관으로 존재했던 구역을 통계하면,
주읍 331, 속현 72, 폐현 141, 합계 544읍은
신라시대의 9주 소관 450읍에 후대 북진정책에 따라 양계(兩界)의 신설 주진이 가산된 것이며,
일부 군현은 종래의 향·소·부곡에서 승격되었다.
군현을 제외한 특수본관을 통계해 보면 부곡 377, 향 130, 소 243, 처 35, 장 9개 소나 되었다.
이들 구역에도 당초에는 각기 토성이 존재하였다가
그 뒤 임내의 소멸과 함께 토착씨족이 유망되어 15세기 이후에는 거의 없어졌다.
이러한 군현과 향·소·부곡은 고려 초기 이래 승격과 강등, 병합과 폐합, 영속의 변동,
임내의 직촌화 등의 변동은 빈번하였지만, 그들의 원구역만은 좀처럼 쉽게 분해되지 않고
16세기까지 존속되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 구역에는 각기 토박이 성씨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위 지리지 편찬자들은 각 읍 성씨조를 정리하면서
그 폐읍이나 향·소·부곡 등은 비록 이미 혁파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곳 성씨의 출자지, 즉 본관을 밝혀야 하였기 때문에, 이미 혁파되고 직촌이 된 구역들로
각 읍의 고적조에 기재하였다.
본관인 읍격의 높고 낮음은 그곳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세의 대소강약과 대체로 비례하였다.
여기에서 비로소 본관의 우열이 나오게 되었다.
고려 초기 이래 인구증가에 따른 신생촌락의 계속적인 발생은 주읍토성의 임내성화를 촉진시켜
본관의 세분화와 다양화를 가져왔다.
국가에 의하여 붙여진 본관은 그 바탕이 된 구역의 성격에 따라 격차가 있게 되고
신분과 직역(職役)에 따라 본관이 가지는 의미는 서로 달랐다.
읍격이 높은 토성이나 기성 명문대족은 그 본관을 명예롭게 생각하였는가 하면,
섬이나 역·진 또는 향·소·부곡을 본관으로 한 사람들은 기회만 주어지면
그 본관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이에 비하여 국가에 조세·공부·역역(力役)을 지고 있는 일반 양민들은
그 거주지를 각기 본관으로 해서 편호(編戶)되고 있다는 사실을 국가로부터 확인받고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각 읍 성씨조는
바로 고려시대 인민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편제된 성씨체계의 구체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지역을 세분하여 파악하였던 고려시대의 성과 본관은
후기 이래 시대적·사회적 변동에 따라 지역적인 편제와 신분구조에 획기적인 변혁을 초래하였다.
임내의 승격과 소속의 변동, 향·소·부곡의 승격과 소멸, 행정구획의 개편과 폐합, 즉 성이 딛고 선 본관의 개편과 변질이 획기적으로 가해지면서 15세기 말부터는 세분된 본관이 점차 주읍(主邑) 중심으로 통합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즉 촌과 향·소·부곡 등이 소속군현에 폐합되듯이, 종래의 촌성과 향성·소성·부곡성이 군현성에 흡수되어 갔고, 향·소·부곡과 독자적인 촌이 소멸되어 갔듯이, 그곳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가 이제는 당초의 본관을 버리고 소속 군현성에 흡수, 병합되어 갔다.
그 결과 15세기 지리지에 실려 있던 폐현·촌·향·소·부곡·처·장·역 등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는 대부분 소속 주읍성에 흡수되거나 주읍을 새 본관으로 개정하게 되고, 15세기까지 존재했던 임내성의 본관은 대부분 사문화(死文化)되었으며, 일반 양민·천민들은 현 거주지에서 편호됨으로써 앞 지리지에 없던 새로운 본관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17세기 이후의 울산·대구·단성·언양 등의 호적대장에서 확인된다.
이상과 같이 한국 성씨체계의 특징은 일찍이 중국의 것을 수용하면서 발전해 왔고,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성씨 가운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신라에서 출자한 성씨가 9주 5소경을 중심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그러한 추세는 후삼국시대 지배계층인 호족에 미쳐 사성·모성·자칭성 등의 수단을 통하여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고, 고려 초기 태조 왕건에 의하여 전국 군현별로 각기 토성이 분정되면서부터 성씨체계가 비로소 확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성씨가 귀족·관료에서 점차 양민층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천민층의 양민화에 따라 성씨를 새로 취득한 계층이 후대에 올수록 늘어갔다. 조선 후기 사회변동으로 인하여 천민층의 신분해방과 함께 무성층이 새로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고, 신분질서의 해이에 따른 위조족보가 대량 나오게 되었다.
그 결과 무명성씨나 신흥세력들은 다투어 기성의 대성명문에 투탁함으로써
기존의 대성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희성·벽관(僻貫)이나 현조(顯祖)를 확보하지 못한 무명의 성씨들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이러한 추세는 한말을 거치면서 모든 한국인은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되었고, 모든 성씨가 양반성씨로 되어 갔던 것이다.
성씨의 유래와 보급과정,
삼국이 성립하기 이전 고대 씨족사회에는 아직 성이라는 것이 없었다.
가령,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같은 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당시 중국인들이 우리의 토착사회에서 일정한 집단 안에서는 족내혼(族內婚)을
하지 않는 풍속을 보고 그 일정한 집단을 동성이라고 표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
성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인류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원시사회는 혈연을 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만 확실히 알고 아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에 모계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이른바 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었거니와, 모계거나 부계거나 원시사회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다.
이처럼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원시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나 산·강 등의 이름으로 성을 삼았다.
신농씨(神農氏)·황제(黃帝)의 어머니가 각각 강수(姜水)와 희수(姬水)에 살았으므로
성을 강씨와 희씨로 하였던 것이며,
성자 자체가 여성에서 나온 것처럼
중국 초기의 성자에는 여자(女字)변을 딴 글자가 많았다.
우리의 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중국문화를 수입한 뒤에 사용한 것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우리의 옛 사적에 의하면,
고구려는 시조 주몽(朱蒙)이 건국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기 때문에
고씨(高氏)라 하고, 백제는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씨(夫餘氏)라 하였다 한다.
또한 신라는 박·석·김 3성의 전설이 있고,
제3대 유리이사금 때 6부(촌)에 이·최·정·손·설·배씨 6성을 주었다고 하며,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도 황금 알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 중국문화를 수용한 뒤에 지어낸 것이다.
신라 진흥왕 때(540∼576)에 건립한 4개 순수비,
진지왕 3년(578)과 진평왕 때(579∼632)에 각각 건립한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와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등 7세기 이전의 금석문에 나타나 있는 인명을 보면, 성을 쓴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 역사상 중국식 한자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이후의 일로서,
고구려는 그 사용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장수왕 때(413∼491)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씨의 성을 썼으며,
백제는 근초고왕 때(346∼374)부터 여씨(餘氏)라 하였다가
무왕 때(600∼640)부터 부여씨라 하였으며,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김성을 사용하였는데 ≪삼국사기≫와 ≪당서 唐書≫
이전의 중국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의 성을 보면,
왕실의 성을 쓴 사람이 가장 많이 나타나 있다.
그 밖에 고구려는 해(解)·을(乙)·예(禮)·송(松)·목(穆)·우(于)·주(周)·마(馬)
·손(孫)·창(倉)·동(董)·예(芮)·연(淵)·명림(明臨)·을지(乙支) 등 10여 종,
백제는 사(沙)·연(燕)·협(劦)·해(解)·진(眞)·국(國)·목(木)·백(苩)의 8대성과
왕(王)·장(張)·사마(司馬)·수미(首彌)·고이(古爾)·흑치(黑齒) 등 10여 종,
신라는 3성(박·석·김)과 6성(이·최·정·손·배·설) 및 장(張)·요(姚) 등
10여 종에 불과하다.
고대 중국의 경우, 성은 천자가 내리는 것이며,
제후의 경우 그 출생지에 연유하여 성을 주고 그 봉지(封地, 采邑)에 연유하여 씨를 주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제후는 사성할 수 없으므로
그 지족(支族)인 공손(公孫)들은 그 왕부(王父)의 자(字)로써 씨를 삼았다 한다.
또 관직자나 치읍자(治邑者)는 세공(世功)이 있을 때 그 관직명이나 고을 이름으로 씨를 삼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초기의 성씨 사여(姓氏賜與)는 우선 국왕의 지배를 전제로
그 영역 내의 인민을 출생의 지연에 따라 성별을 나누되,
다시 일족을 이룰 만한 지배세력에게는 씨를 명함으로써 그 족계(族系)를 분명히 하였다.
우리 나라의 경우 고구려 건국기의 성씨 사여는 국왕을 전제로 제도화한 감이 있다는 점,
그 수성자(受姓者)들에게 정치적 배려가 주어지며,
또 그들 각자가 연고지가 있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
당시 상황이 아직은 집권화가 크게 진전되지 못하였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그것은 곧 그 정치적 지배조직과 좀더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백제·신라 할 것 없이 고대국가 체제정비기에 사성은 부제(部制)개편,
관등설정 등과 함께 국왕을 중심으로 지배층의 정치적 편성의 한 방법이었음을 예상하게 한다.
신라시대 성씨 취득과정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박·김·석·신김씨와 같이 중고 왕실지배층의 성씨 취득,
삼국통일 전후의 6부 사성 및 나당(羅唐)관계에서 견당사신(遣唐使臣)·견당유학·숙위학생·입당수도승,
기타 중국에 내왕한 인사(張保皐·鄭年 등)들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성씨 취득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 성씨 취득은 주위 여러 집단에 대한 배타적 집단을 의미하였고,
특히 성씨를 획득함으로써 정치적·사회적 특권이 예상되었다.
둘째, 전통적 친족출계관념, 즉 신라 고유의 출자관념은 부계나 모계 또는 양계출자(兩系出自)라는
한정적인 것이었다기보다는 성원권의 획득에 있어서 부계·모계 중에서 선택할 수 있으나
변경할 수 있는 융통성이 존재했던 사회였고, 성씨를 취득함으로써 출자율이 부계로 전환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셋째, 성씨를 취득하는 집단은 족적 관념의 변질 및 혈족 자체 내의 극심한 변동으로
말미암아 분열되어 사실상 족단 또는 친족공동체라는 용어로서의 의미는 사라질 만큼 해체되었다.
성을 최초로 지닌 집단은 왕실·귀족과 같이,
성이 골(骨)·족(族)과 관련되면서 최상층 지배집단에서 비롯되었다.
6부성을 비롯한 통일신라시대의 성씨 취득이 통일과정과
그 뒤 국가체제의 재정비과정에서 발생했던 것이며,
그것은 또한 각 족단의 세력변동을 단계적으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들 집단의 성씨 취득과 등장이 비단 6부성에 그치지 않고
신라 하대로 갈수록 현저히 많은 성이 계속적으로 나오고 있음은
6성 사성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단계적이고 계기적임을 시사한다.
우리 나라의 중국식 한자성의 수용과정을 살펴보면
왕실부터 시작해서 귀족·관료·양민 및 천민순으로 보급되어 갔다.
7세기 초부터 신라의 종성인 김씨·박씨가 ≪구당서≫·≪신당서≫에 나온다.
그 기록에 의하면 “(신라)임금은 김진평(金眞平)이며,
국인에는 김·박 양성이 많고 이성(異姓)끼리는 서로 혼인하지 않는다.”라든지,
“왕의 성은 김씨, 귀인의 성은 박씨이며, 백성은 씨는 없고 이름만 있다.”라고 하였다.
한편, 6성의 대두시기를 보면 설씨는 삼국 말기,
이씨는 경덕왕 때,
정·손·배씨는 통일신라시대,
최씨는 신라 하대에 각각 나타난다.
그런데 3성 또는 6성이 한성화(漢性化)한 시기는 비록 7세기 이후라 하더라도
그 씨족적 유래는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이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데서 고구려와 백제계의 성씨는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신라계의 성씨를 중심으로 후삼국시대부터 한자성이 보급되어 갔다.
7세기 후반부터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진골과 육두품 계층은 점차 한성을 수용했던 것이며,
또한 신라는 통일 후 9주와 5소경에 왕경의 귀족을 정책적으로 이주시킨
결과 이미 한성화한 중앙의 귀족과 관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렇게 지방에 확산된 중앙 귀족·관인은 한성화 전에 이주한 자와 한성화 뒤에 이주한 자로 나눌 수 있다.
한편,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의 동성불혼(同姓不婚)의 관념이 점차 수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사정은 전혀 그러한 제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왕실부터 철저한 근친혼을 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당의 책명(冊命)을 받기 위해서는 중국의 동성불혼의 예에 따라
동성의 왕대비(王大妃) 또는 왕비(王妃)의 성을 왕의 성과 다른 성자로 표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성씨관계 기록 가운데 국내의 실제사실을 반영한 국내자료와
당나라의 책봉을 받기 위하여 보낸 외교문서 사이에는 차이가 나기 마련이었다.
즉, 국내의 실제사정은 왕과 왕모 또는 왕비가 다같이 김씨였지만,
당나라의 책봉을 위하여 보낸 문서에는 그 김씨가 왕모 또는 왕비의 부명(父名)을 따서
숙씨(叔氏)·신씨(申氏)·정씨(貞氏)와 같은 성자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씨 표기방식은 고려시대에도 계승되어
왕실은 근친혼을 계속하면서 동성의 왕비로 하여금 모성 또는 외조모성을 따르게 했던 것이며,
그러한 관념이 지배층에 보급되자 성과 본관의 분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득성 사실과 시조 유래에 관한 신화·전설·민담 등 설화는
상고시대의 건국신화 외에도 각 가문의 가첩·족보 등에서 구전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건국신화 겸 시조설화로는 혁거세(赫居世)·탈해(脫解)·알지(閼智)·수로왕,
제주의 고(高)·양(良)·부(夫) 3성시조설화가 있다.
신화는 신성시되는 이야기라는 입장에서 본 것이며
신성성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였거나 존재하는 것을 포괄적·규범적 의미를
가지도록 차원을 높여 나타내는 현상이라는 관점과 주인공의 숭고하고 위대한 행위로써 성립된다는 이론에 근거한다.
신라의 박·석·김씨 시조의 3성신화를 대비하여 볼 때,
각 신화가 가지는 화소(motif)가 공통되는 면도 보이고 있으나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른 점을 보인다. 그것은 제의론적(祭儀論的)
측면에서도 각 족단이 소유한 신앙대상과 체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 신화의 화소를 비교해 보면, 첫째 동일 화소로서는
① 태어나자 부모로부터 유기됨, ② 유기 후 짐승들로부터 보호를 받거나 도움을 받음,
③ 사람에게 구출되어 양육됨,
④ 모두 신화와 관련되는 성을 가진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둘째 이질적인 화소로는 ‘난생(卵生), 왕자로 태어남,
꿰짝 속에 들어 있음, 표류되어 왔음, 특이한 여자와 결혼, 죽은 뒤에 신이 됨’ 등이 있다.
이들 신화는 그 자체로서는 허구이지만, 우리의 상고사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를테면 부족의 이동이나 형성,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 원시민간신앙 등을 아울러 반영하고 있다.
이들 시조설화는 대개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난생설화를 가진 혁거세·탈해·수로왕의 경우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강족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하여, 알영(閼英)이나 허황후(許皇后) 또는 제주 삼을나(三乙那)의 배필이 된 처녀들은 바다를 건너왔거나 아니면 우물과 관련된 지신족임을 나타내고 있다.
상자 속에 담겨 표류하다가 노파에 의해 건져지고 수양되는 탈해의 전승은 후세의 시조설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파평 윤씨·강화 봉씨의 시조와 남평 문씨의 시조는 각기 연못에서 석함에 담겨진 상태로 노파에 의하여 발견되거나 바다 위에서 발견된다. 이들의 탄생에는 대개 구름과 안개 또는 천둥과 번개가 개재되어 더욱 신이한 것으로 수식되었다.
또 황간 견씨의 시조 견훤(甄萱)은 여인과 지렁이와의 교배에 의하여 태어나고
호랑이에 의하여 길러진다. 이런 이물교혼담(異物交婚譚)은 우리 민담에 널리 퍼져 있다.
특히, 신라의 시조설화는 민간신앙과도 결부되어 지금도 영남지방에는
‘골맥이’라는 동신제가 전승되고 있다. 여기에는 성씨가 붙어서 ‘골맥이김씨할배’·
‘골맥이이씨할매’ 등으로 불리는데, 이때의 김씨할배는 그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시조신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
후삼국시대의 인물인 신숭겸(申崇謙)·김홍술(金洪術)·김인훈(金忍訓)·
손긍훈(孫兢訓)·박영규(朴英規) 등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각기 출신지인 곡성·의성·양산·밀양·순천의 성황신(城隍神)으로 기재된 것이 그 예이다.
또 남부지방에는 이른바 ‘조상단지’나 ‘삼신바가지’라는 단지에 쌀·보리 등을 넣어
방안 시렁 위에 모시는 풍습이 있는데, 이 쌀알은 조령(祖靈)을 상징한다.
알지(閼智)신화에서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는 금궤(金櫃)는
바로 이 조상단지의 신화적 반영이며, 계림(鷄林)은 곧 ‘골맥이제당’이었다.
신라에서 출자한 3성과 6성의 시조와 같이
고대에 등장하는 족장들은 다같이
천강설화(天降說話)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전승은 고려·조선시대까지로 면면히 이어져,
현존하는 대성들의 시조 또는 원조로서 숭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마다 제향이 베풀어지고 있다.
또한, 이천 서씨의 시조 신일(神逸)이
사냥꾼으로부터 사슴을 구하고, 문화 유씨의 유효금(柳孝金)이 범의
목구멍에 걸린 여자의 은비녀를 제거해 줌으로써 각각 신령이 꿈에
나타나 보은을 약속한 데서 그 자손들은 음덕을 받아 대대로 현달하였다는
설화는 후삼국시대 이래 고려·조선의 성씨 관계자료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는 시조 또는 조상의 비상한 은공과 효성에 감복한 신령(산신령과 같음)이
그의 자손들로 하여금 대대로 음덕을 입게 하였다는 것이다.
후삼국시대 지방호족의 성씨 취득은 지방사회 자체 내에서의 성장과
신라 중앙문화의 지방 확산이라는 두 가지 사회적 배경과 신라 하대
중앙통제력의 점진적인 약화라는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일찍부터 지방에 정착하기 시작한 중앙귀족의 후예들과
신라 하대 재래의 토착촌주층이 중심이 되어 이 시대의
정치적·사회적 변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지방군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호족이었다.
그들은 신라의 지배로부터 이탈하면서
재래의 군현조직과 촌주층의 직제를 통하여 지방행정 말단에
참여해 온 경험과 발달된 중앙관제의 영향 속에서 중앙관제에
버금가는 스스로의 관반(官班)을 형성하고 주민을 통치했던 것이다.
통일신라의 군현조직체계와 후삼국시대 호족의 군현지배기구를 이어받은 태조 왕건은
후삼국통일사업을 완수한 다음 전국 군현의 개편작업과 함께 군현토성을 분정하였다.
한성화 그 자체가 중국 성씨제도의 모방인 이상 고려왕조의 전국적 성씨분정책도
중국의 성족분정, 씨족지·성씨록의 편찬·반포 및 ‘천하군망표(天下郡望表)’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5세기 초를 기준하여 우리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자(姓子)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전자는 대부분 중국의 유명 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후자에 없는 것은 박씨 등 16성(朴·沈·河·玉·明·俊·昔·諸·益·森·邦·芳·價·勝·濯·承氏)에 불과하다.
그나마 군망표에 없는 성자도 박씨를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정초(鄭樵)의 ≪통지략 通志略≫ 씨족지에 나타나 있다.
정초는 그의 서문에서 중국 역대에 걸쳐 성씨를 취득한 연원 32가지를 열거하면서
국(國)·읍(邑)·향(鄕) 등 지명을 성자로 한 것이 가장 많고,
명(名)·자(字)로 한 것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성자는 바로 이렇게 생성된 중국의 것을 모방했던 것이다.
물론, 우리의 성씨가 모두 중국의 것만을 모방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박·석·김씨와 같은 신라의 종성은 본래 신라에서 출자한 것이며,
후삼국시대 이래 호족들의 한성화과정에서 스스로 성씨를 호칭해 놓고 보니
우연히 중국의 성자와 동일한 것도 많았던 것이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 擇里志≫에서 우리 성씨의 보급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성씨의 보급과정을 설명하면서 크게
① 고려 초 사성(賜姓) 이전의 성씨(삼국 및 가락국의 왕실),
② 중국에서 동래(東來)한 성,
③ 고려 초 사성 등 셋으로 나누면서,
①과 ②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③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대하여 확실한 근거자료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940년(태조 23)경을 전후하여 전국 군현에 성씨가 분정되었던 것이며,
이는 다음의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첫째, 왕건은 즉위 이래 개국관료·개국공신 및 귀순호족들에 대한 사성을 광범위하게 실시하였다.
둘째, 신라의 3성과 6성 등 고려 건국 이전에 성립한 기존의 한성과 중국에서 도래한 외래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각 성의 시작은 대부분 고려 초기로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고려사≫ 태조세가에 등장하는 인물을 분석해 보면
태조 23년을 전후하여 그 이전에는 고유명이 주류를 이루다가 그 이후부터는 한식성명이 일반화되고 있으며,
광종을 거쳐 성종대(982∼997)와 현종대(1010∼1031)로 내려오게 되면
고유명을 가진 인물이 관료계층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성종(10세기 말) 이후가 되면 지방군현의 양민층에게까지 성씨가 수용되고 있었다.
고려 초에 확립된 성씨체계는 15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분관·분파 등을 통해 성의 분화와 발전이 계속되었던 것이며,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는데
그것이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위 지리지에 의거하여 15세기에 존재하였던
우리 성씨의 종류와 본관수의 도별 통계는 [표 1]과 같다.
[표 1]
성씨의 도별·성종별 본관수
이에 의거하여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종(姓種)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본관에 의한 구분:주성(州姓)·부성(府姓)·군성(郡姓)·현성(縣姓)·촌성(村姓)·외촌성(外村姓)·부곡성(部曲姓)·향성(鄕姓)·소성(所姓)·처성(處姓)·장성(莊姓)·역성(驛姓)·수성(戌姓).
② 성씨의 출자에 의한 구분:천강성(天降姓)·토성(土姓)·차성(次姓)·인리성(人吏姓)·차리성(次吏姓)·백성성(百姓姓)·입주후성(立州後姓)·입현후성(立縣後姓)·가속성(加屬姓).
③ 성의 소멸과 이동에 의한 구분:망성(亡姓)·망촌락성(亡村落姓)·경래성(京來姓)·내성(來姓)·입성(入姓)·입진성(入鎭姓)·속성(續姓)·망래성(亡來姓)·망입성(亡入姓).
④ 사성 및 귀화성에 의한 구분:사성(賜姓)·당래성(唐來姓)·향국입성(向國入姓)·투화성(投化姓).
역사상 우리 나라 성씨의 수용 및 보급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첫째 왕실과 중앙귀족층에게 수용된 시기는 삼국 말기부터 신라 하대까지이며, 둘째 지배층 일반에게 성씨가 보급되어 성과 본관체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초기이며, 셋째 양민층에게 확대된 시기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성씨가 보급된 뒤에도 무성층으로 남아 있던 공사노비, 화척(禾尺), 향·소·부곡민,
역·진민 등 천민층은 10세기 이래 조선시대까지 개별적인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성씨를 획득해 갔지만,
그들에게 성씨가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였다.
조선 전기(15∼16세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 가운데 대략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무성층은 그만큼 많았다. 16세기 말부터 시대적·사회적 변동에 따라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이 성을 갖게 된 계층이 격증해 갔다.
당시 사회계층을 크게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나눌 때, 양반층은 일찍이 군현토성에서 귀족과 관인을 배출한 사족(士族) 가문이며, 중인층은 군현과 임내의 이족(吏族)에서 서리·기술직을 맡은 계층으로 양반의 서얼 출신이 여기에 해당된다. 상민층은 고려 이래 관인을 내지 못한 일반 농민층으로서 성종상 백성성·촌성·향·소·부곡성 출신이 많았다.
천민은 대체로 무성층이었다. 최하층인 이들은 조선 후기 300년간에 걸쳐 점차적인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계급이 타파되며 성의 대중화가 촉진되었고, 1909년 새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부터는 누구나가 다 성과 본을 갖게끔 법제화되었다.
이 밖에도 시조전설이나 연고지를 상징화하여 성으로 쓴 일도 많았다.
가령, 파평 윤씨의 경우 평소(平沼)라 하였는가 하면,
한산 이씨는 본관에다 목은(牧隱:李穡)의 자손임을 강조하여 목산(牧山)이라 하였고,
청주 한씨는 청주의 고호인 서원(西原)을 그대로 성으로 썼다.
이러한 일본인식 창씨는 입부혼인(入夫婚姻)·서양자(婿養子) 제도와 함께
1939년 말부터 실시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한 뒤, 미군정의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이
1946년 10월 23일 법령 제122호로 공포되며 일제하의 창씨개명으로 인한
일본식 씨명은 그 효력을 잃고 말았다.한편,
성자에 의한 우리 성의 수는 성씨관계 문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우리 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성씨 관계자료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모두 250여개의 성이 나오는데,
그 중에는 이미 소멸된 망성이 포함되어 있다.
1486년(성종 17)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세종 이후에 귀화한 성과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망성 포함)를 수록한 결과 277성이나 되었다.
영조 때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 陶谷叢說≫에는 298성이 나오는 데 비하여
고종 때 발간한 ≪증보문헌비고≫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재했던 고문헌에 있는 모든 성을 거의 망라하였기 때문에
무려 496성이나 수록되었는데, 여기에는 한성화 이전의 고유명자(固有名字)와
이미 소멸된 역대의 망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후대까지 존속된 성수는
15세기 지리지 소재 성수대로 대략 250성 내외였다.
그러한 사실은 1930년대 국세조사 때 250성, 1980년대 국세조사 때 250성 안팎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된다.
성세(姓勢)와 본관수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김·이·박씨 등과 같이
대성일수록 본관수가 많았다.
이의현은 ≪도곡집≫의 <도곡총설>에서 우리의 성 298성을
그 성세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① 저성(著姓):李·金·朴·鄭·尹·崔·柳·洪·申·權·趙·韓(12성).
② 그 다음 저성:吳·姜·沈·安·許·張·閔·任·南·徐·具·成·宋·兪·元·黃(16성).
③ 그 다음 다음 저성:曺·林·呂·梁·禹·羅·孫·盧·魚·睦·蔡·辛·丁·裵·孟·郭·卞·邊·愼·慶·白·全·康·嚴·高(25성).
④ 희성(稀姓):田·玄·文·尙·河·蘇·池·奇·陳·庾·琴·吉·延·朱·周·廉·潘·房·方·孔·偰·王·劉·秦·卓·咸·楊·薛·奉·太·馬·表·殷·余·卜·芮·牟·魯·玉·丘·宣 (41성).
⑤ 그 다음 희성:都·蔣·陸·魏·車·邢·韋·唐·仇·邕·明·莊·葉(섭)·皮·甘·鞠·承·公·石(19성).
⑥ 벽성(僻姓):印·昔·龔·杜·智·甄·於·晉·伍·拓·夜·賓·門·于·秋·桓·胡·雙·伊·榮·思·邵·貢·史·異·陶·龐·溫·陰·龍·諸·夫·景·强·扈·錢·桂·簡(38성).
⑦ 그 다음 벽성[貴姓]:
段·彭·范·千·片·葛·頓·乃·間·路·平·馮·翁·童·鍾·酆·宗·江·蒙·董·陽·章·桑·萇·程·荊·耿·敬·寗·京·荀·井·原·袁·萬·班·員·堅·騫·燕·時·傅·瞿·嵇·米·艾·梅·雷·柴·聶·包·何·和·賀·花·華·賈·夏·麻·牛·僧·俊·曲·栢·翟·畢·谷·弓·種·邦·凉·良·芳·卿·刑·永·乘·登·昇·勝·信·順·侯·藩·端·鮮·芊·牙·水·彌·吾·珠·斧·甫·部·素·附·凡·固·台·才·對·標·肖·那·瓜·化·壽·祐·價·尋·森·占·汎·克·郁·翌·宅·直·則·澤·綠·赫·冊·濯·骨·燭·律·物·別·實·弼·合·乜·鴌·揚(136성).⑧ 복성(復姓):南宮·皇甫·鮮于·石抹·扶餘·獨孤·令狐·東方·西門·司馬·司空(11성).
이상 298성에는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250여 성과 ≪동국여지승람≫ 270여 성 및
그 뒤 귀화성이 모두 합산된 것으로 조선 후기에 이미 소멸된 망성이 많이 포함되었다.
성의 종류는 시대에 따라 늘고 줄게 마련이어서 옛날에 있던 성이 뒤에 소멸되기도 하고
과거에 없던 성이 새로 생겨나기도 하였다.
15세기 이래 현재까지 우리 나라의 성수는 대략 250성 내외가 되었는데,
송나라 소사(邵思)의 ≪성해 姓解≫에 의하면 한자성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2,568성이나 되며,
우리의 성에 해당되는 일본의 씨(氏)는 그 종류가 10만에 가깝다 하니,
중일 양국과 비교하면 우리 나라의 성종은 많은 편이 아니다.
더구나 250여 성 가운데 김·이·박·최·정씨 등 5대성이
전체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성과 본관
씨성(氏姓) 또는 토성(土姓)이라 할 때 ‘씨’와 ‘토’는
그 성의 출자지인 본관을 의미하고 있다.
성과 본관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우리의 성씨 체계 가운데 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본관제도이다.
성이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이족(異族)이요,
반드시 성과 본관이 같아야만 동족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론이지,
실제로는 예외가 많아 상당히 복잡하다.
씨족의 연원을 같이하면서도 성 또는 본관을 서로 달리하는 성씨가 많은가 하면,
반대로 이족이면서도 성과 본관을 같이하는 경우도 많다.
편의상 성과 본관을 조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개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동족의 동성동본과 동성이본, 동족의 이성동본과 이성이본, 이족의 동성동본과 동성이본, 이족의 이성동본과 이성이본 등 8가지 경우가 있다.본관의 연원을 추적해 보면, 첫째 성을 사용하기 전인 7세기 이전에는 그 사람의 출신지(거주지)가 신분의 표시로서 성의 구실(신라의 6부 같은)을 하였으며, 둘째 본관이란 시조의 출신지 또는 그 씨족이 대대로 살아온 고장을 가리킨 것이며, 셋째 신라 말 고려 초 이후 성이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혈족계통을 전혀 달리하는 동성이 많이 생겨남으로써 이족의 동성과 구별하기 위하여 동족의 표시로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성의 분화과정에서 성만으로는 동족을 구별할 수가 없으므로, 조상의 출신지 또는 씨족의 거주지를 성 앞에 붙여서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본관이 곧 신분의 표시이기도 하였으므로
주로 지배층에 사용되었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성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신분질서의 유지와
효과적인 징세·조역의 필요상 일반 주민에게까지도 호적에 본관을 기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호적제도가 정비된 고려시대부터는 성이 없는 천민층도 본관을 호적에 기입했던 것이다.
성의 분화와 같이 본관도 후대에 내려올수록 분관·분적이 늘어 시조의 발상지 외에
봉군지(封君地)·사관지(賜貫地) 또는 그 후손의 일파가 이주한 곳이 새 본관이 되었다.
우리의 본관체계가 최초로 확정된 시기는 고려 초이며,
그때부터 15세기 초까지 본관의 구체적인 모습이 담긴 기본자료는 ≪세종실록≫ 지리지 성씨조이다.
이에 의거 본관의 지역적 성분을 고려하여 정리하면
[표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씨 체계가 확립된 고려 초기부터 15세기 지리지가 편찬될 때까지 모든 성은 본관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즉, 주·부·군·현·진·촌 및 향·소·부곡·처·장·역·수 등 시조의 출신지나 주민의 거주지별로
각기 본관이 구분되어 있었다.
이는 조선 초기 신분제도의 재편성과 행정구획의 개편에 따라 현 이상의 군현을 본관으로 한 것만 남고,
진·촌·향·소·부곡 등 임내와 특수지역을 본관으로 한 것은 그 구역의 직촌화와 함께 대부분 소멸되었다.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발전에 따라 기존의 대성과 명문들의 본관은 우월시되고
무명의 벽관은 희성·벽성과 함께 천시하는 관념이 만연되어 갔다.
그래서 기성 사족(士族)이 된 본관은 그 성씨가 계속 증가해 간 반면,
관인이나 현조를 내지 못한 본관은 개관(改貫)하는 추세에 있었다
.이를테면, 조선 전기에는 본관수가 수십이 넘던 성 가운데 조(曺)는 창녕 조씨,
한(韓)은 청주 한씨, 심(沈)은 청송 심씨, 문(文)은 남평 문씨 하는 식으로 본관의 개변이 많았다.
우리의 성씨는 16세기부터 성을 바꾸는 행위는 극히 드문 반면
본관을 개변하는 경우는 많았다.
왜냐하면, 성보다는 본관에 따라 성씨의 우열과 가문의 품격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의 행정실무를 장악하고 있던 군현 향리의 사족화에 따라 본관의 개변이 자행되었고,
왜란·호란 후 모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주(朱)씨는 신안(新安), 공씨는 곡부(曲阜), 천씨는 영양(穎陽)으로 바꾸는 예가 있었다.
성의 자료와 족보학,
우리 나라에서는 성씨 관계자료가 고려시대부터 단편적으로 나타나지만,
한자성씨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중국에서는 사마천(司馬遷) 부자가
재래의 세본(世本)과 주보(周譜)를 근거로 하여 ≪사기 史記≫를 편찬한 데서 성씨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
≪사기≫는
그 본기·세가·열전 등에서 등장인물의 계보적 서술이 상세하였고,
그것을 모방한 후대의 역대 정사(正史)들은
≪사기≫의 그러한 서술태도를 견지하였다.
특히, ≪한서 漢書≫의 ‘고금인표(古今人表)’, ≪위서≫의 관씨지(官氏志), ≪신당서≫의 종실·재상세계표(宗室宰相世系表) 등은
각기 당대의 관계인사의 성씨·관향 유래와 이민족의 한성화(漢姓化) 및 종실·재상 가문의 계보적 서술을 하였다.
후한 말부터 문벌사회가 성립되고 곧 이어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이 실시되자
군현성씨의 가격등제(價格等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 뒤 위진남북조와 수당시대를 경과하면서 신분제의 재편성과
이민족의 한화(漢化)에서 성씨의 개편이 수반되었다.
그 결과 각종 보첩류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고,
≪수서 隋書≫ 경적지의 보계편과 ≪구당서≫·≪신당서≫의 예문지 보첩류편에는
이른바 후위의 방사격(方司格), 당의 씨족지를 비롯하여 각종 족보·가보류가 실렸다.
중국의 세본과 같은 제왕의 계보는 우리 나라의 경우
, 삼국시대에 각기 국사를 편찬하는 가운데 작성되었다고 짐작되며,
신라 말기 최치원(崔致遠)에 의하여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으로도 나타났다.
그것은 다시 ≪삼국사기≫ 본기와 연표 및
≪삼국유사≫의 왕력조(王曆條)에서
삼국 내지 가락국의 왕실 계보로 체계화되었다.
신라와 후삼국시대의 인물 성씨를 기재한 자료는
정사의 열전과 비문이 있다.
최치원·최언위(崔彦撝) 등 육두품 출신 문사들에 의한 승려들의 비문에는
우리의 성씨가 주로 중국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1152년에 작성된 김의원(金義元)의 묘지(墓誌)에
“옛날에는 족보가 없어 조상의 이름을 모두 잃었다.”고 한 바와 같이
고려 초기만 하더라도 보첩과 같은 것은 없었다.
문종 이후 고려의 문벌귀족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씨족·가보·가첩·세보·족보 등의 용어는 있어 왔지만,
이들 보첩류는 15세기에 비로소 나타나는 조선시대의 족보와는 성질이 달랐다.
중국에서 구품중정법 실시와 군현성의 성립에 따라
벼슬과 혼인에 인물과 가격을 결정하는 보첩류가 쏟아져 나왔듯이,
고려에서도 문음(門蔭)을 받기 위한 조상의 내외세계가 기재된 씨족·족도(族圖)·정안(政案) 등이 작성되었고,
지방의 각 읍사에는 향리의 명부인 이안(吏案, 壇案)이 비치되어
향리의 선임과 승진, 향공(鄕貢)과 기인(其人)의 선임등에 활용했다.
거기에는 그들의 내외세계와 가격의 고하 및 개별적인 인적 사항이 기재되어,
각 읍 향리의 족파(族派)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 각 읍별로 향내 사족을 망라한
향안(鄕案)이 유향소나 향교에 비치되었던 사실과 비교된다.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 관계자료인 고적(古籍)은
바로 고려 이래 당시까지 중앙과 지방에 전래되고 있던 문서였던 것이다.
성씨에 관한 가장 구체적인 최초의 자료는 위 지리지를 비롯한
≪경상도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씨조이다.
이상의 세 지리지의 성씨조는
그 기재양식이 약간씩 상이하여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각 읍 성씨 가운데 전자에 누락된 것이 후자에 기재되었는가 하면
그 반대인 경우도 있으며, 성종 표기에도 상이한 점이 있다.
≪경상도지리지≫에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있는 인리성·백성성·속성 등이 없고
그 기재 형태가 고졸하여 세련되지 못한 느낌을 준다.이에
반해 후자는 당대 최고의 문사들을 동원하여 고려시대부터 전래된 고적과 전자를 비롯한 팔도지리지 및
≪주관육익 周官六翼≫ 등을 참고·종합·정리하여 각 읍 성씨의 내부구조와 그 변화과정을 체계화했다.
성종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성씨조에는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토성·차성·인리성·차리성·백성성·입주후성·입현후성 등의 용어가 없어지고,
단지 본관을 본읍과 임내로 구분, 기재하였고,
특히 망성을 토성과 혼효(混淆)하여 기재하였다.
그 편찬자의 주해처럼 이 지리지의 성씨조는 ≪주관육익≫·≪세종실록≫ 지리지
·≪경상·전라관풍안 慶尙全羅觀風案≫에 의거 편찬했던 것이며,
이래(移來)한 성씨에 대해서는 본관을 세자(細字)로 주기하되
본관을 모를 때는 성자 밑에 ‘내(來)’·‘속(續)’·‘속(屬)’자를 주기하였다.
이런 특징을 가지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 시대의 진전에 따른 성씨 관념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며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의 대종을 이루었던 ‘토성’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은 것은,
당시 양반사족의 본관이 거주지와 분리되는 현상이 일반화되면서 종래 토착적 의미의 토성은 무의미해지고,
그 대신 성의 출자와 지망(地望) 내지 문벌을 추상적으로 의미하는 본관만이 문제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국여지승람≫ 성씨조는 그 기재내용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비하여 훨씬 후퇴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인물조와 고적조를 대폭 강화하여 그 본관 출신의 인물과 각 성의 본관을 기재함으로써
후대 읍지와 족보 및 ≪증보문헌비고≫ 씨족조에서 인용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최초의 성씨관계 단행본이라고 사료되는 ≪해동성씨록 海東姓氏錄≫은
1467년(세조 13) 왕명을 받은 양성지(梁誠之)에 의하여 찬진되었으나
현존하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며,
단지 당의 씨족지·성씨록을 모방하여 우리의 성씨를 각 군현별로 정리하였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사가의 족보편찬에 앞서 조선왕조의 왕실에서는
1412년(태종 12)에 ≪선원록 璿源錄≫·≪종친록 宗親錄≫·≪유부록 類附錄≫이 작성되었는데,
이는 태종이 서얼차대법을 제정하고 난 다음 종실에서도
적서(嫡庶)를 명확히 구분하여 명분을 바로잡겠다는
의도에서 나왔다.
이로부터 왕실에서는 ≪국조보첩 國朝譜牒≫·≪당대선원록 當代璿源錄≫·≪열성팔고조도 列聖八高祖圖≫ 등을
종부시(宗簿寺)에서 편찬, 비치하고,
돈녕부(敦寧府)에서는 외척과 부마를 대상으로 한 돈녕보첩(敦寧譜牒)을 편찬하였는가 하면,
충훈부(忠勳府)와 충익부(忠翊府)에서는 각기 역대공신과 원종공신들의 족보를 작성, 비치하였다.
왕실과 관부의 이러한 보첩편찬은 사가의 족보편찬에 하나의 촉진제가 되었다.
우리의 족보사상 판각, 성책해서 반포한 것은
≪안동권씨성화보 安東權氏成化譜≫(성종 7, 1476)가 최초이다.
나머지 명문들의 족보는 주로 구보(舊譜)의 서문에 나타나는 사실로서,
초고 또는 족도·세계도·가첩 형식으로 전해오다가
16세기 또는 17세기에 와서 족보를 정식 간행할 때 전재되었다.
≪안동권씨성화보≫가 발간된 뒤 족보편찬은 오랫동안 중단상태에 있다가
1565년(명종 20) ≪문화유씨가정보 文化柳氏嘉靖譜≫가 간행되면서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여러 성씨의 족보가 이에 힘입어 작성되었다.”는 김안국(金安國)의 말과 같이,
권씨·유씨의 족보는 조선 전기 여러 성씨의 족보편찬에 중요한 전거가 되었다.
이들 족보는 자녀의 기재를 출생순으로 하되 부→자로 이어지는 친손계는 물론,
부→여로 이어진 외손계까지 대수에 관계없이 등재하였으니,
이는 바로 당대 만성보(萬姓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족보편찬은 18세기 이후처럼 친손들이 주관하지 않고
친손과 외손들이 합작하였다.이러한 조선 전기의 족보는 17세기 후반부터 가족제도·상속제도의 변화와 함께
서서히 변모해 갔다. 16세기 이래 민중의 성장에 따른 천민층의 양민화와 왜란과 호란을 겪고
신분질서가 크게 해이해지자 전통적인 양반과 신흥세력을 막론하고
모두 세계·족계를 새로 정리해야 하겠다는 의도에서 17세기 후반부터 족보가 속간되었다.
조선 후기는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지는 등 사회적인 차별이 심하였다.
그래서 양민이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기도 하고 호대동보적 성격을 띤 족보가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실제 혈연적으로 관계없는 타성이 동성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본래 같은 조상에서 나온 파계가 사족과 이족 또는 성장과 진출의 선후에 따라 서로 타성으로 오인되는 예도 많았다.
그 결과 희성·벽관들은 비교적 순수성을 지녔으나 대성·명문일수록 투탁자가
급증하였고 한말·일제강점기로 내려오면서 모든 성씨가 양반성화하면서 족보편찬도 일반화되었다.
일제시대 성의 연혁과 당시의 성에 관한 연구·조사서로는
총독부 중추원 발행의 ≪조선의 성명씨족에 관한 연구조사 朝鮮の姓名氏族に關する硏究調査≫와
국세조사과에서 간행한 ≪조선의 성 朝鮮の姓≫이 있다.
1930년대에 이루어진 이러한 광범위한 조사와 연구검토는
식민통치하에 우리 나라의 특징적인 현상이라는 혈연을 중심으로 한
동족부락의 성격을 보다 조직적으로 파악하려는 데 궁극적 목표가 있었다.
(자성李族의 수장, 이자성等 동시대 무렵의 사로국 부족연맹장회의, 다음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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