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광한루600년역사글
남원광한루건립600주년역사글---명승제33호
2019년이 광통루건립 600주년의 해입니다
제89회춘향제를
5월8일부터~12일까지5일동안진행되었습니다
광한루건립600주년기념행사는
8월2부터1주일간 개최하여 볼거리를진행한답니다
8월3일에는 다채로운 행사를 진행한답니다
시민 모두 행사에 참여하시어 관람하시길 기대합니다
황희(黃喜, 1363-1452)는 본관이 장수(長水 : 장수 황씨)이고, 개성(開城)에서 출생했으며,
아호(雅號)는 방촌(庬村)이고, 시호(諡號)는 익성{익성(翼成) : 익성공(翼成公)}이다.
그는 사후(死後)에 전북 장수(長水)의 창계서원(滄溪書院), 경북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에
제향(祭享)되었고, 전북 진안(鎭安)의 화산서원(華山書院), 경기도 파주(坡州)의 반구정(伴鷗亭)에
영정(影幀, 초상)이 봉안되었다. 그의 문집으로는 『방촌집(庬村集)』이 있다.
위의 황희 초상화를 그린 초상화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은 ‘옹달샘 <26>’에서
자세히 언급한 바가 있다.
공조판서 때인 1418년(태종 18년) 황희가 양녕대군을 지지한 문제로 남원(南原)으로 유배를 갔다고 했다
. 남원은 오지(奧地)가 아니라, 요지(要地)였다. 그러한 남원으로 유배를 갔다는 것은
다시 불러들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철저한 유배생활이었으면 행동이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황희는 남원에서 그러한 유배생활이 아니었기 때문에 1419년(세종 1년) 누각(樓閣)을 건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누각이 광한루(廣寒樓)의 전신(全身)인 ‘광통루(廣通樓)’였다.
황희는 6대조 황감평(黃鑑平, ?-?)이 세운 서재 ‘일재(逸齋)’를 헐고, 그 자리에
더 큰 규모의 누각을 세우고, 그 이름을 ‘광통루(廣通樓)’라고 했고, 독서로 소일했다.
황희는 이전에도 많은 독서를 했지만, 그때의 독서가 후일 명재상이 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1444년(세종 26년)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내려가
남원의 아름다운 경치를 상찬(賞讚)하여 “달나라 미인 항아(姮娥)가 사는 월궁(月宮) 속에 있는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같다”라고 하여 ‘광한루(廣寒樓)’로 개명했다.
1461년(세조 6년) 남원부사(南原府使) 장의국(張義國, ?-?)이 보수했고,
요천(蓼川)의 물을 끌어다가 하늘의 은하수(銀河水)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고,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만난다는 오작교(烏鵲橋)를 만들었다.이 오작교는 무지개다리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58m)이다. 1582년(선조 15년)
전라도관찰사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은 광한루를 크게 증축(增築)하고,
연못 가운데에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州山)을
상징하는 봉래섬‧방장섬‧영주섬을 만들고, 봉래섬에는 배롱나무(목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었고, 영주섬에는 정자 ‘영주각(瀛州閣)’을 세웠다.
섬과 섬 사이를 사다리꼴의 다리로 연결한 광한루원(廣寒樓苑)은 천체와 우주를 상징하는
누원(樓苑)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광한루의 역사를 보면 관광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학‧예술‧역사 등의 문화 요소, 즉 스토리와 의미가 있어야 관광명소(觀光名所)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소설적‧전설적‧신화적 허구(虛構)일지라도 스토리와 의미가 있어야 관광명소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광한루가 1597년 8월 14일 왜군의 방화(放火)에 의해 불타버렸다.
그 날 광한루의 방화는 남원성의 함락과 1만 명의 조‧명 연합군과 조선 백성 순절(殉節)의
신호탄이었다. 광한루 불길은 조‧명 연합군에게 큰 심리적인 공포감을 주었다.
다시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로 돌아온다.
셋째 날인 1597년 8월 15일 왜군은 성을 포위하여 조총과 대포로 번갈아 공격하는 한편,
성 밖의 풀과 볏짚을 베어와 쌓기 시작했다. 명군(明軍)은 그것을 무엇에 쓰려고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것은 공성전(攻城戰)을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어둠이 깔리자 왜군은
그 풀과 볏짚을 성벽 가까이에 쌓기 시작했다.
넷째 날인 1597년 8월 16일 왜군은 본격적으로 총공격을 폈다. 왜군은 풀과 볏짚 더미를
딛거나 사다리를 타고 성을 넘기 시작했다. 동문과 서문의 명군이 먼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 안은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명군 중에는 북문을 통해 달아나는 병사도 있었다.
성 안에서 벌어진 백병전(白兵戰)에서 1대16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명군은 맥없이 스러져 갔다.
명군은 지리멸렬(支離滅裂)했다. 달아나다가 살해당하는 병사도 있었다.
명군 3,000명은 거의 다 전사했다.
명군 부총병관 양원(楊元)의 휘하 장수로서 동문을 맡았던 중군(中軍) 이신방(李新芳, ?-1597),
서문을 맡았던 천총(千摠) 모승선(毛承先, ?-1597),
남문을 맡았던 천총(千摠) 장표(蔣表, ?-1597)도 전사했다.
북문을 맡은 조선군은 잘 방어하고 있었으나, 얼마 후 배후(背後)에서 파도처럼 밀어닥친
왜군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전라병마사 이복남(李福男, ?-1597)과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1597)는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 뛰어들어 장렬히 순사(殉死)했다. 조선군 1,000명은 거의 다
장렬히 전사했다. 남원부 민간인 6,000-7,000명도 도륙(屠戮)당했다. 이렇게 하여
남원성(南原城)은 왜군에게 비참하게 함락되었다.
명군의 부총병관 양원(楊元, ?-?)은 말을 타고 달아나 전주(全州)로 갔다.
그는 명나라로 소환되어서 처형되었다.
그렇게 정유재란(1597) 남원성전투에서 --건립한지179년만에 소실되었다
불타버린 광한루는 --1607년(선조 40년) 작은 누각이 복구되었고,
1626년(인조 4년) 남원부사(南原府使) 신감(申鑑, 1570-1631)에 의해 다시 광한루가 복원되었다.
편액 ‘廣寒樓’(광한루)는 선조의 부마(夫馬 : 왕의 사위)이자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때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한 척화오신(斥和五臣) 중의 한 명으로서 명필이었던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의 글씨이었다합니다. 소실되었다합니다
지금의 ‘廣寒樓’(광한루) 편액은
대한민국 제2, 4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정훈(趙定勳, 1914-1987) 의원쓴 편액이라합니다.
광한루 뒷면에 있는 편액 ‘湖南第一關’(호남제일루) 편액은 1855년(철종 6년)에
남원부사 이상억(李象億, ?-?)의 글씨이다. 『
춘향전(春香傳)』의 배경으로서의 광한루는
1626년(인조 4년) 남원부사 신감에 의해 복원된 바로 그 광한루이다.
그 후 1794년(정조 18년) 남원부사 이만길(李萬吉, ?-?)이 영주섬의 영주각(瀛州閣)을 복원했고,
1869년(고종 6년)에는 광한루 본관이 차츰 북쪽으로 기울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부사 이용준이---
수지면 고평리 추대목의 묘안을 받아들여 북쪽에 오르고 내리는 계단층층대을세워 고정시키었다합니다
1925년 수리공사 때 누의 동쪽 구석에 직실(直室)을 마련했다.
1931년 춘향사(春香祠)를 짓고, ‘萬古烈女春香祠’(만고열녀춘향사)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김은호(金殷鎬, 1892-1979) 화백의 춘향 초상을 봉정했다.
1963년에는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고 호수 주위를 정비하여 국악원, 월매(月梅)의 집과 방장섬에
육모정(六茅亭)을 세웠고, 광한루를 문화재 보물 제281호로 지정했다.
1964년에는 방장섬에 방장정(方丈亭)을 건립했고, 1965년에는 영주각(瀛州閣)을 단청했으며,
1969년에는 호수를 확장하여 수중누각 완월정(琓月亭)을 세웠고, 북쪽의 정문을 후문으로 하고,
남쪽에 정문을 신축하여 ‘廣寒淸虛府’(광한청허부)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1983년 경역(境域)을 더욱 확장, 정비하여 광한루를 사적(史蹟)으로 지정했고,
2008년에는 광한루원(廣寒樓苑)을 명승 제33호로 지정했다.
광한루와 광한루원 확장 또는 정비 사업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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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광한루역사이야기
1170년무신난 정종부 이의방의난으로
공조판서였든-황공유가
무신난을 피하여 장수고향으로 피신을하였는데
장수에서도 이의방의 군사들이 내려와 잡의려들자
다시 남원광한루 부근으로 피신하여 살았다합니다
후손인 황감평이 조그만한 서실을 지어 남원의 젊은이들에게
후학양성 교육을 시키어 인재양성을 시키면서 살았다합니다
황희출생은---1363년에 개성 은두리 에서 황군서의 둘채아들로 출생하여
1388년고려창왕때급제하여고려말에조정에들어가 관료직을수행중3년만에
1392년이성계의 반정으로조정에서 물러나 두임금을 섬길수없다는일편단심으로
고려충신 72현과같이 두문동 깊은산에들어가
사는데 황히가 당시30세로 제일 나이가 어리어 72현들께서--
너는내려가서 나라를위하여
정치를 잘하라고 내려보내어 조정에들어가 태조의 비서역을하든중에
1418년에--양녕 세자책봉관계로
태종에게--세자 양녕대군의 폐출불가론을 상소하였다가
태종의 노여움으로인하여-------------
남원으로유배되어 1419년에 —고조 황감평이지은 일제서실을허물고
누각 을 건립하여 --광통루라 이름부르고--후대에-광한루 역사가 시작됨니다
1434년 남원부사 민여공이 증수하였다합니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하늘에 청허부와 같다하여
광한루라고 고처부르게되었다합니다
1597년8월14일 정유재란때 왜군놈들이 방화하여 완전소실되었답니다
건축한지 179년만에 소실되었다
1626년에소실된지29년된때에 부사 신감이 재건 복원하여
2018년 현재재건한지--392년이되었습니다
우리조선의 4대누각은--
평양에-부벽루-남원에 광한루- 진주에 촉석루-밀양에 영남루 이다
광한루가 건축됨에따라--오작교가 만들어젔고
성춘향이 1675년 음력4월8일에 태어낫다
남원부사 성씨양반과 퇴기월매와 사이에서 성춘행이 태어나
16세가 되던해 단오날 사또제자 이몽룡과 광한루에서 처음사랑을 맺는다
★황희 정승의 6대조인 황공유가 고려1170년 이의방이일의킨 무신난을 피하여
남원에 낙향하여---황희정승의 고조부인 황감평이지은 초당 逸齋라고하는
조그마한 서실을 지어 -- 남원의젊은이에게 교육을 가르치었다 합니다
황 씨 의 시 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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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씨시초 | 서기 28년에 후한 | 황락 | |
한국황씨시조 | | 황경 | |
장수에 터를 잡은사람 | 황경의-10세손인 | 황공유 | |
광한루에-처음 서실을지은사람 | 황경의15세손 | 황감평 | |
| 16세손--17세손 | 실전됨 | |
장수황씨 중시조 | 18세손 | 황석부 | 장수황씨 관향으로 기록됨 |
| 19세손-- 할아버지 | 황균비 | 대강-풍산리뒷산에 묘을쓰고 황희를 낳아다함 |
| 20세손--아버지 | 황군서 | |
| 21세손--본인 | 황희 | 1363년 개성-가조리에서 황군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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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제 행사는---
제1회---1931년---음력 단오날-음력5월5일---춘향추모 제사올림
이몽룡과 사랑을 맺은날자에진행함
제4회---1934년---성춘향이 태어난 날자인 음력4월초8일에 진행토록변경
제69회--1999년부터 양력5월5일로 일정을 변경하여진행
대한민국 의 미인-춘향 선발 대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재는--춘행제는 양력5월5일부터 개최하여 진행합니다
춘향제는 1931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남원 유지(有志)들이 주축 되어 권번(券番 :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의 기생(妓生)들과 함께 기금을 조성하여 춘향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제사(祭祀)를 지내게 되었다. ‘춘향제’는 『춘향전』만큼이나 소설적인 허구(虛構)로 시작되었으나,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 제20회 때부터는 단순한 제사(祭祀)를 탈피하여, 향토문화예술 축제(祝祭, Festival)의 형태로서 ‘춘향제(春香祭)’로 명칭을 바꾸었고, 또 ‘미스춘향’ 선발대회도 하기 시작했다. 1931년 시작한 이래 올해(2018년) 제88회 춘향제가 열렸다.
성춘향---
1675년 조선19대 숙종 음력 4월8일 에
남원부사 성씨라는 양반 과 退妓 월매와 사이에서 태어났다 합니다
16세가되던 단오날 사또자제 이몽룡과 광한루에서 처음사랑을 맺는다
이도령이 한양으로 영전해가는 부친을 따라 떠난후
후임 사또에 의하여 온갖 고초를 겪게되고 죽기직전에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에의하여 다시행복을 찾게된다
광한루[廣寒樓]의 유래
광한루원의 면적---지정구역49900m--15122평
광한루가조선4대루각 중에서도 으뜸이였다 합니다
조선시대에 4대루각은
평양에 부벽루---남원에 광한루---진주에 촉석루 --- 밀양에 영남루
1419년 세종원년에 황희 정승 이 건축하여---광통루 [廣通樓] 라하였으며
1434년 세종16년에 부사 민여공이 대대적으로 증건하였담니다
1444년 정인지가 경치가 월궁의 광한청허부 [廣寒淸虛府]를 닮아다하여
광한루 [廣寒樓] 라 고처불러다 합니다
1461년 세조17년에--부사 장의국이 요천물울 끌어들어
누 [樓] 앞에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만들고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담긴 오작교를 축조하였담니다
烏鵲橋 --7월7석날 견우 와 직녀가 1년에한번 만날수 있도록---
전설이담긴다리 까치와 까마귀가 놓아다는 다리
1582년 전라관찰사 송강 정철이
연못안에다--3개섬을만들어--삼신산산이라하였담니다
봉래섬===금강산을 상징---백일홍을 심고
영주섬===한라산을 상징---영주각을1794년정조18년에 부사이만길이증수
방장섬===지리산을 상징---방장각을1963년이화익군수가건립
1597년 정유재란으로 루각이소실되어--------
1626년 인조 4년에 남원부사 신감이 원래의 규모로 복원하여
현재의 광한루 모습입니다
★ --인터넷에 올려진 복원 년도를 1638년으로 올린글이있는데 잘못된 년도입니다
1855년 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호남제일루 [湖南第一樓]라는 현판을 걸었답니다
1879년 고종14년에 광한루가 북쪽으로 기울러지자
북쪽에다 오르고 내리는 계단을 만들어 기울러짐을 고정하게되었답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광한루 2층은 재판로로 사용하고
아래층은 우리민족을 가두는 감옥으로
1928년까지 18년간을 사용하였는 불행한 역사기간이였 담니다
일편단심------성춘향
1920년경에 춘향사를 건립-----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영전
1931년에 춘향사를 신축하였습니다---31년부터춘향제전을진행하여--시발점이였답니다
1934년제4회때에춘향탄신일인 음력4월초8일에진행토록 일정변경
1963년 군수 이화익이 광한루원 경역을 확장정비하였습니다
1957년 제27회춘향제전때부터---춘향선발대회를 진행하고
1963년 보물 제281호로 지정하였습니다
1964년에 방장각을건립하였담니다
1969년 북쪽에 정문을 후문으로하고-----남쪽에다 정문을 신축하였습니다
1971년 최봉채군수가--남쪽경역을 확장하고 수중완월정과
남쪽 정문인 淸虛府 를 신축하여 아름답게 단장하였답니다
1985년 서쪽경역을 확장하고 ---월매집 춘향관 서문 을 신축하였답니다
1999년 제69회때부터---춘향제일정변경---
음력일정4월초8일에서---5월5일 단오날로변경하였다가
농사철이라-농사철을피하여-- 양력 5월5일로 다시변경하였습니다
2008년 1월8일 명승 제33호로 지정되었답니다
2016년 5월11일 새로히 건축한 춘향관-개관식
2018년 현재 -----재건한지 392년 되었습니다
淸 虛 府 -----광한루 정문
현재 광한루에걸린 광한루 란 편액글씨는 전국회의원 조정훈 이 쓴 글씨람니다
1971년7월17일에 崔林彩 군수가--- 완월정 을 신축하였습니다
2012년도 춘향이로 선발된 춘향 진-------
9마리 용이승천 하였다는
구룡폭포---삼복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장소입니다
광한루의 명승으로승격
1963년1월21일에---광한루=보물 제281호로지정
1983년7월20일 사적 제303로지정
2008년1월8일에---사적제303호지정해제하고
명승 제303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황희정승 일생
1363년에 개성 은둔리 에서 출생하여
1418년에 양영대군의 세자폐출 불가함을 상소하여
태종의 노여움으로 남원으로 귀양을 보내었다가
1419년 세종원년에 최초로 광통루를 건립하였담니다
1422년2월에 세종4년에 황희를 불러 올려 중용복직이 되었담니다
1426년 세종8년에 64세로 우의정 임명
1427년세종 9년에 65세로 좌의정 임명
1431년 세종13년에 69세로 영의정에 임명
1449년 세종 31년에 사양하여 물러남
정승 24년간 영의정 18년간 41년간을 재상으로 정치를하였다합니다
1452년 문종 2년에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명한 일화---무복자는 계란에도 유골 이라말이 전하여졌다
광한루란 편액글씨=전국회의원이셨든 조정훈 의원이쓴편액글씨 랍니다
오작교 ---길이57 넓이 2.4m 4개의홍예경간
淸 虛 府---광한루 남쪽 정문
광한루원의 정문인 청허부 를통하여 들어가면
달나라 월궁에 들어옴을 상징한 뜻의
편액 글문 이랍니다
춘향제의 연혁
- 제1회 (1931년) : 단오날 남원 권번(券番) 주관으로 전국 각지의 명기(名妓) 1백여명이 모여
처음지은 춘향사당에서 추모의 제사를 올림 ※ 춘향과 이도령이처음 만난 것을 기념
- 제4회 (1934년) : 농번기를 피하여 춘향 생일 (음력 4월 초파일)에 제사를 올렸음
- 제20회 (1950년) : 남원군이 주관하여 명창대회, 춘향선발 등 문화축제 면모를 갖춤.
6.25전쟁으로 춘향영정이 없어짐.
- 제52회 (1982년) : 시 승격과 함께 시에서 주관. 1984년까지 '시민의 날'과 병행하여 열림.
- 제56회 (1986년) : 사단법인 춘향문화선양회 발족으로 춘향제전위원회 주관, 용마놀이 재현,
풍물시장(난장)개장, KBS의 행사 참여(춘향선발 및 명창대회)
- 제65회 (1995년) : 전국 이도령 선발대회개최
- 제66회 (1996년) : 춘향선발대회에 해외동포(미국 워싱턴, 우즈베키스탄, 중국 연변등)참여
- 제69회 (1999년) : 도지사를 공동제전위원장으로 함(주한 외교사절 및 해외 언론사 대거 참여)※
세계화를 위해 제69회부터 양력 5월 5일로 변경. 역대 춘향전 영화상영, 사이버 춘향제,
춘향별(처녀좌의 '스피카')
지정, 무지개 분수터널 개통, 춘향전 기행, 춘향 캐릭터 상품 판매 등 다양한 이벤트 개최.
제71회(고희연) 새천년
첫해 지역축제 선정 (새천년준비위원회)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년연속
문화관광부 문화관광축제 선정
- 제72회 (2002년) : 제72회 춘향제전위원회주관 춘향제시행,
제1회 전국국악농악경연대회개최
- 제73회 (2003년) : 제73회 춘향제전위원회 주관 춘향제 시행,5년연속
문화관광부지정축제로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자리매김
- 제74회 (2004년) : 제74회 춘향제전위원회 주관 춘향제 시행,
2004년 남원허브산업엑스포개최
- 제75회 (2005년) : 제75회 춘향제전위원회 주관 춘향제 시행,
2005년 남원허브산업엑스포개최, 7년연속
문화관광부의 한국 상징 문화관광대표축제
- 제76회 (2006년) : 제76회 춘향제전위원회 주관 춘향제 시행,
2006년 남원허브산업엑스포개최
역대춘향이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