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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100%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성품을 지닌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면, 먼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 기도들은 내게 말할수없이 큰 도움이 되었다.
첫째, 우리가 치르는 대가나 불 시험의 기간에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이 그 놀라운 이름에 합당한 최대치의 영광을 받으시기 원한다고 결정하고 하나님께 고백하라. 이 기도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계획과 안락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금세 판가름해 준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기록된 바울의 기도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둘째, 이 시련을 통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로 부르시고 주 예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라.
셋째, 불의 원인과 목적에 대해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원하시는지 계시해 달라고 구하라.
넷째, 시편 32편 8절 말씀을 신뢰하며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라. "내가 네 갈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이렇게 반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높은 뜻에 협력하는 자가 되며, 그 기도가 응답될 때 궁극적으로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지체될 때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님이 지신을 숨기실 때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 동기가 순수하게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이 가장 간단하게 검증하시는 방법은 중보의 사역에 대한 성경의 명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중보기도란 단순히 다른 사람을 위해 성령의 인도와 능력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역이 대부분 은밀하게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셨다(마 6:6 참고).
우리가 큰 일이나 작은 일, 열방이나 세계의 리더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단기 혹은 장기적으로 자주 기도하면서도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했다고 볼 수 있다.
동기를 시험하기 위해,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많은 일을 하고도 인정이나 감사, 격려도 거의 받지 못하는 사역을 많이 경험하게 하신다. 계획하고 계신 우리의 장래 사역과 책임에 대해 우리가 맡을 만하고 믿을 만한지 보시는 것이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마음의 동기가 에베소서 6장 5-7절과 같이 검증되기까지는 우리를 높이지
않으실 것이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좋아요. 하지만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사실이 제가 매일 삶의 어려움에 부딪힐 때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거죠?"라고 묻고 싶을지 모른다. 모든 면에서 도움이 된다. 주 예수님께 인생을 완전히 내어놓고 매일 그분의 거룩한 영으로 채워달라고 청한다면, 즉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을 통해 생각하고, 당신의 눈을 통해 보고, 당신의 입을 통해 말하고, 당신의 심장을 통해 사랑하며, 당신의 손을 통해 만지고, 당신의 발을 통해 걷도록 초청하고 그렇게 하실 것을 믿으면 주님은 그대로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런 뜻이다. “어려움이 올 때 당황하거나 긴장하거나 낙심하지 마라. 내가 이미 지났던 자리야. 나는 큰 하나님이고, 나를 넘어뜨릴 일은 아무것도 없단다. 내가 다스리고, 내가 네 안에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절박한 소원, 하나님을 가까이 알기 원한다는 간구의 내용을 보아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분명히 바울과 당시 예수의 도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맞는 얘기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고난을 겪게 되어 있다. 예수님조차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히 5:8) 배워야 했다면, 우리가 그분을 닮기 위해 고난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기뻐할 때, 하나님이 친히 그 영광을 보이사 보상하신다고 한 베드로의 말을 기억하라. 이는 매 순간마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한의 분량만큼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해 주신다는 의미다. 숨 막히는 특권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한다.
*이제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또 하나의 핵심 원리를 소개한다. 놀라운 결과로 이끄는 이 열쇠는 다름 아닌 시편 37편 5절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이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할을 하시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두 가지 일이 있다. '맡기고', '의지하는' 것이다. 첫째는 우리가 처한 상황과 거기 관련된 모든 사람을 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맡기다'의 히브리 원어는 문자적으로 ‘던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두 번째 요구 사항인 ‘저를 의지하기'를 어떻게 하는지 깨닫기까지는 짐을 온전히 던지기가 참으로 어렵다. 이때야말로 하나님의 성품에 집중해야 하는 때다.
• 그분은 모든 지식의 하나님으로서, 이 문제에 관련된 모든 요소를 다 알고 계신다. 그분은 모든 지혜의 하나님으로서, 언제 그리고 어떻게 문제를 풀어야 할지 알고 계신다.
• 그분은 절대적인 의와 공평의 하나님으로서, 그 문제에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옳고 공정한 일만을 행하실 것이다.
• 그분은 모든 능력의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던지는 모든 문제를 잡아낼 수 있다.
• 그분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문제를 받아서 해결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창조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로 만나려면, 앞서 설명한 것처럼 먼저 주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한다. 이러한 만남에 대해 예수님은 유대의 랍비와 이야기하시며 다시 한 번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하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세주와 주인으로 삼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는 이후에 영생을 누릴 때 천국에 들어가는 여권이기도 하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자기중심적인 우리를 하나님과 타인 중심의 사람으로 바꾸시는 놀라운 변화의 능력은, 오직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삶 한가운데 모실 때만 찾아온다. 그리고 그것만이 생명력 있는 삶이다. 그 밖의 모든 삶은 단지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늘에 계신 신랑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게 될 때 보게 될 그 눈동자는, 단지 두려울 만큼 거룩과 흠 없는 순결로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으로 불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위대하신 우리의 주인은 우리를 향해 최대치의 영적 포부를 갖고 계시다. 그것은 바로 그분 자신을 닮는 것, 실제로 주님의 형상과 같게 되는 것이다. 아, 그게 정말로 가능하기나 한 말인가? 그렇다, 로마서 8장 29절에서 그분이 그렇다고 하시기에 그렇다. 앞에서 이미 강조한 사실이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차지하는 우선순위를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삶이란 결국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준비를 하는 것이다(엡5:25-27 참고). 영원이라는 길고도 긴 시간을 위한 준비인 것이다.
*만약 그 병에 대해 정확히 진단하는 의사들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렇게 진단해 준 것을 원망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더 나쁜 경우는, 하나님이 이미 허락하신 많은 방법이 있는데도 암을 제거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의료 기술을 통할 수도 있고, 기도를 통한 기적적인 치유나 천연 치유 방법을 통해서, 또는 복합적인 방법을 통해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말이다.
암의 비유를 생각하면 죄라고 하는 파괴적인 힘이 삶에 존재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가책을 주시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죄에 대한 찔림을 주시는 것은 '사랑'과 '거룩' 양쪽 모두에서 비롯된 일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죄는 우리를 파괴할 뿐 아니라 우리의 전 인격을 만족하게 하실 단 한 분에게서 우리를 떼어 놓는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12:10).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18-19).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진심으로 통회하는 마음이야말로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는 강력한 통로가 된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 66:2), 나는 내 사역에 대한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내가 얼마만큼 정결한 삶을 사는지와 비례함을 알고서 더욱 회개할 힘을 얻었다. 정결함과 능력은 동의어였던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레 10:3).
죄를 깊이 깨닫게 하심으로 그 인자한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놀랍고 친절하신지! 그 경험을 통해 나는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고 주님을 향한 더 큰 사랑과 이해함을 갖게 되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계3:19),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죄를 드러내시는 성령의 불에 결코 저항하지 말라. 그 불은 우리를 예수님과 더 가까운 관계로 이끌 뿐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위해 더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진실한 회개로 하나님께 협력하라.
*'좋은' 것은 항상 '최선'의 적이다. 자신의 주된 사역과 사역적 기능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에 집중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요청과 기대와 요구의 압력 때문에 옆길로 새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
잡초는 게으름의 결과로 자라난다. 우리는 태만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지연된 순종, 부분적인 순종, 그리고 불평하며 하는 순종은 성경의 기준으로 볼 때 모두 불순종임을 기억하라. 불순
종은 뽑아야 할 잡초에서 자라나는 지대한 장애물이다.
*• 그분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순결한 사람을 찾으신다.
• 재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쓸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신다.
•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찾으신다.
•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한 열정이 있는 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은 전도에 대한 논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을 찾지 않으신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마음의 부담 때문에 그들이 있는 곳에 찾아가 사랑하고, 기도하고, 울어주고, 증거하고, 그들과 삶을 함께하며, 필요하다면 그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목숨을 내어줄 사람들을 찾으신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욜 3:13-14).
*성령 앞에 정직하게 나아가서, 내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내 자신의 자아와 교만 때문에 고통스러운 부분은 없는지 보여달라고 요청하라. 자아라는 괴물에 대해 진심으로 죽고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기 원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로 들어서게 된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때문이다!
*상처를 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상처는 더욱 쓰라리다. 게다가 그 상처에 불공평한 처사나 불의가 더해진 경우 아픔은 더욱 크다. 그러므로 용서가 가장 요구되는 대상은 종종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목록을 보며 내 안에 혹시라도 감춰진 원망의 마음이 있는지 점검하라. 아내, 남편, 아버지, 어머니, 친구, 학교, 선생님, 영적 리더, 함께 사역한 사람들, 함께 일하는 사람들, 권위자들, 우리의 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들,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의 정치가 및 정부 관료, 가까운 사람을 알게 한 정권이나 정부, 기타 내가 아는 모든 범주의 사람들……. 불행히도 영적 리더들이 인간적 연약함으로 우리를 잘못 판단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인에게도 약점은 있으므로, 완벽을 기대하지 말라.
*셜리 크로우의
'나를 바꾸소서'
사랑하는 주님, 내 삶에 예정된 당신의 뜻이나
시험이나 슬픔을 바꾸지 마소서
내 믿음을 새롭게, 나를 강하게 하셔서
주여, 당신의 뜻을 바꾸지 마시고 나를 바꾸소서
넘실대는 바다의 폭풍처럼
고난이 몰려와 눈물방울 떨어져도
주의 횃불로 내 배를 항구까지 인도하시고
주여, 폭풍을 바꾸지 마시고 나를 바꾸소서
그 거룩한 말씀 이해하지 못하며
주의 영광 나 보지 못할 때
내 눈을 가르쳐 내게 혜안을 허락하시고
주여, 당신의 말씀을 바꾸지 마시고 나를 바꾸소서
주님이 내게 먹도록 주신 열매가
쓰리고 시더라도, 내 뜻 아니라
주의 뜻 이루어지기를 간구합니다
주여, 그 열매를 바꾸지 마시고 나를 바꾸소서
사랑하는 주님, 당신을 위해 지는 십자가를
때때로 내가 불평한다면
내 어깨에 십자가 단단히 메시고, 대신 내 손 잡아 주소서
십자가를 바꾸지 마시고 나를 바꾸소서
사랑하는 주님, 만약 나를 기쁘게 하시기 위해
주의 길을 바꾸신다면
나 곧 차갑게 식어 당신에게서 돌아서리니
사랑하는 주님, 내 기도를 들으사
당신의 길을 바꾸지 마시고 나를 바꾸소서
언젠가 주의 얼굴을 뵙기 위해
내가 건너야 할 골짜기가 있으니
그렇지 않으면 당신께 어떤 권능이 있는지 잊을까
두렵습니다
주여, 골짜기를 바꾸지 마시고 나를 바꾸소서.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시 50:2-3). 부흥이란 하나님의 불이 인간의 일에 깊이 침투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화려한 영상과 4중 채널 스테레오로 보듯 하나님의 모습을 더욱더 자세히 보고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부흥은 지역 사회와 문화의 도덕적·영적 생활 자체를 변화시키는 놀랍고도 지속적인 하나님의 뚜렷한 임재다. 부흥은 하나님의 방식과 시간대에, (먼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이 주권적으로 부어지는 역사다. 이 시기에는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계시가 강하게 임하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권능 앞에서 깊이 회개할 기회를 얻는다.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한 가지는 스바냐 2장 3절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하나님은 겸손을 추구하는 모든 자에게 개인적 부흥을 약속하셨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이것은 대단한 약속이다. 겸손은 1906년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에 성령의 강한 역사가 임했을 때 명확하게 나타난 특징이었다.
*부흥이 오면 천국이 지상에 너무나 실제적으로 임하여, 우리가 이곳 땅 위에서 보내는 짧은 시간은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히 섬길 무궁한 시간을 위한 준비 기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훨씬 실감나게 이해하게 된다.
이 땅에서의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맡길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시험 기간일 뿐이다. 하나님이 장래에 교회에 위임하기 위해 준비시키고 계신 책임과 특권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알게 될 때, 비로소 현재 세상나라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주님의 신부로서 영원한 왕국을 다스리는 주권과 권세를 나눌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단 7:27).
*기도는 부흥으로 인도하는 인과의 사슬에서 필수적인 고리다. 진리만큼 필수적이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열심히 진리를 역설하면서도 기도는 거의 강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엄청난 열정으로 설교하고, 말하고, 전도지를 나누어 준 후에 왜 열매가 없는지 의아해한다. 그것은 이 도구의 다른 면인 효과적인 기도 사용하기를 잊었기 때문이다. 성령이 없이 진리만 가지고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그런데 성령은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임하신다. 진리를 가장 열심히 적용하면서도 가장 열심히 기도하지는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언제나 불행한 일이다. 그들에게 다른 누구라도 기도의 영이 없다면, 진리 그 자체는 인간의 마음을 회개로 이끌지 못하고 더 완고하게 할 뿐이다. 심판날이 오면, 진리를 아무리 열심히 전했어도, 기도의 영이 없이 진리로만 얻은 열매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초대교회의 첫 부흥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분명히 술에 취했다"고 말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의 진리가 입증되는 장면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어떤 일이 주님에게서 왔는지 알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우리에게 분명히 주실 것이다. "신령한[영적인]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고전 2:15). 우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히 그리스도를 닮은 만큼 영적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만이 영적인 모든 사람의 궁극적 목표이자 최대 목표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은 겸손의 전형이시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유일한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신 한 가지가 연합임을 생각할 때, 교회가 크고 작은 여러 기독교 행사를 준비하는 데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쓰는 반면, 이 중요한 일에는 상대적으로 거의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이상하지 않은가!
교회가 연합되지 않고서는 부흥을 감당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연합은 우리가 구하는 성령의 대홍수를 위해 핵심적으로 준비해야 할 작업이다.
그리스도 몸의 연합은 우리가 연합의 의미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해할 때에만 경험할 수 있다. 이 연합의 기준이 예수님의 기도에 등장한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그러므로 성경적인 연합이란 곧 삼위의 연합,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항상 누리시는 연합과 같은 수준이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관계이기에, 삼위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48년 가까이 부흥에 대해 면밀히 연구하면서, 부흥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죄에 대한 무서운 자각, 고통스러운 통곡과 탄식, 통곡, 주체할 수 없는 눈물, 떨림, 외침, 고백과 회개, 넘칠 듯한 기쁨, 찬양, 노래, 간증, 강력한 말씀 선포, 끈질긴 기도의 응답, 잃은 영혼을 향한 막중한 부담감, 말씀에 대한 갈급함, 주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매우 커지고, 일이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계속해서 막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인간의 계획을 뒤엎으시며,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강력한 도구로 사용되는가 하면, 전에 없이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오며, 선교 사역이 크게 진척된다. 하지만 이상의 특징은 일부일 뿐이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뚜렷이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의 최우선 사항은 주의 백성의 연합이다. 바로 그 이유로 부흥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중보자들에게 응답을 보류하시는 면도 있다. 부흥이 왔을 때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식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 리더와 성도들이 너무나 많아서 이대로 응답하신다면 큰 분열이 일어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역대하 7장 14절의 친숙한 구절을 기억하는가? 어느 나라든 하나님이 치유하시기에 앞서 요구하시는 첫 번째 조건은 주의 백성이 스스로 겸비하여, 생각나는 모든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사실 기도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이 스스로 겸비하여 낮아질 사람을 찾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우리의 가장 큰 죄가 교만이며 우리에게 가장 찾기 힘든 것이 겸손이기 때문이다. 부흥이 오면 교만은 오래가지 못하고, 겸손은 번성한다. 부흥이란 하나님이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시간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철저히 무대 옆에 숨게 되며 기껏해야 무대 뒤에 설 뿐이다.
당신이 갈망하고 타는 열망으로 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면, 이번 장에 나오는 나머지 모든 대가도 기꺼이 지불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의 백성이 성별, 인종, 교과, 세대의 간극을 뛰어넘어 서로 화목하고 하나 되어 일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부흥과 영적 각성의 역사를 맡기실 수 없다.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교만과 편견을 드러내실 분은 오직 성령님뿐이다. 입으로는 모두 한마음이라고 훌륭하게 말할 수 있지만 우리의 행동은 이 모든 영역에서 아직 그 말에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께는 다이아몬드에 비할 수 없이 멋지고 절묘한 다면적 성품이 존재한다. 우리가 그 모든 면을 빠뜨리지 않고 하나씩 공부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쏟을 때에만 그분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알 수 있고, 또한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다. 만일 자신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끼는 하나님의 성품 몇 가지만을 중점적으로 연구하여 가르친다면, 하나님에 대해 왜곡된 관점을 전하게 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균형 잡힌 관점으로 제시한 구절은 예레미야 9장 24절이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예레미야 5장 4절과 5절에 이르면 하나님이 영적인 성숙과 그 부족함에 대해 다소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첫째,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주의 길을 모른다. 둘째,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들은 그 두 가지를 안다. 그 사실을 잘 생각해 보라.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심판]을 알지 못하니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 [심판]을 안다 하였더니.”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함, 하나님의 사랑, 거룩함, 성실함, 자비, 공의, 평화, 여호와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주권, 우리 영혼의 연인이신 하나님의 이해와 다정함에 대해 광범위하게 연구하고 가르쳤다.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리고자 한다면, 그분의 심판과 진노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강의하며, 지금처럼 글을 써야 마땅하다.
*요한일서 2장 28절에는 우리 모두를 향한 엄숙한 경고가 있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두려움으로 피하지 않게하려 함이라. 진정으로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영적 사건의 유일한 이유가 예수님이 되는 것이다.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완전한 의존과 믿음을 말한다. 이 두 가지가 함께할 때, 지속적인 열매를 맺는 강력한 능력이 된다. 이런 열매를 목도하면, 광대하신 주인,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아닌 이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일인지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반복적으로 같이 언급하신 주제는 연관지어 생각해야 옳다.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정의가 그렇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 (창 18:25)
“[하나님이]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행 17:30-31).
사랑이 가득하고, 이해가 한이 없으며, 긍휼이 크신 하늘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제발 심판날에 대비하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고 후회로 가득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외치는 음성을 들으라. 내가 너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회개하지 않은]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겔 18:30).
*나답과 아비후의 교만 - 하나님의 반응은 곧바로 나타났다. 두 번째 기회는 없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2). 성경은 그들이 여호와 앞에 가져온 불을 '불경스러운 불'(NKJV)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겨 사역할 때 우리가 믿음으로 받고 의지하는 것이 성령의 권능의 불이 아니라면, 아무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권위 없는 사역을 통해 사람들에게 왜곡된 하나님 상을 심어 주게 된다. 하나님은 가짜에게 기름붓지 않으신다.
이 심판에 대해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나를 가까이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고 설명하신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아론은 잠잠했다(3절). 아론이 침묵한 것은 그 메시지를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변호할 말이 전혀 없었다.
기름부음 받지 않은 좋은 사역할 때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시킨다. 당신이 사역자라면, 반드시 베드로전서 4장 11절 말씀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믿고 순복하고 의지하고 순종할 때, 그리고 우리가 겪는 모든 일에 대한 유일한 목적이 하나님일 때만이 그분은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
사역에 있어 하나님의 관점에서 아래의 조건을 충족하는지 늘 점검해야 한다.
*우상이란 내 생각이나 내 시간, 애정, 충성, 순종의 영역에서 주 예수님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사물이나 사람을 말한다. 무엇이 우리를 가장 흥분하게 하는가? 무엇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가? 무엇으로 가장 큰 만족을 느끼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인가? 잠시 하던 것을 멈추고 이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보다 다른 일에 훨씬 더 큰 사랑을 보인다. '다른 일'의 전형적인 예를 들면, 스포츠, 쾌락, 여가 시간, 명성, 음식, 섹스, 교육, 취미, 권력욕, 돈벌이, 더 많은 소유, 오락거리 등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이것들을 정직하게 살펴보고 목록을 작성하여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반응해야 할 것이다. 즉, 이러한 우상숭배의 영역 중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해당되는 것이 있다면 성령님이 바로잡아 주시도록 기도하고 주앞에 회개해야 한다(렘 14:7, 20-22).
*우상숭배는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소원해지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스라엘 장로 몇 명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질문하러 찾아왔을 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셨다.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라" (겔 14:3-5).
그리고 말씀하신다.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을 놀라움과 표징과 속담 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에서 끊으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 14:8). 우상숭배는 모든 죄 중에 가장 교묘해서, 절대 그럴 리 없어 보이는 영역에 숨어 있다. 나는 우상숭배가 내 삶의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역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상숭배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예레미야 2장 11절에 아주 생생하게 나타난다.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그 다음 구절에는 다른 무언가를 하나님보다 위에 두기로 선택한 인간의 광기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된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웅덩이들이니라”(렘 2:12-13). 백성이 '하나님 섬기는 일'을 버렸다고 말하지 않으신 것을 주목하라. 그들은 그분을 버렸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삶의 이유, 그들의 첫사랑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타락시키고 파괴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전혀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거룩하지 못한 것과 대면하는 곳에는 항상 충돌이 있다. 지으신 피조물을 보존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파괴하신다. 세계 역사에 있었던 모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거룩한 보존 행위였다. 하나님은 그 사랑과 자비로 우리에게 '다가올 진노를 피하라'고 말씀하신다.- A. W. 토저
하나님의 심판은 고의적인 죄 때문인데, 사실 죄는 파괴력이 가장 크다. 심판으로 인한 고통은 우리를 죄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다.
*내가 보기에 그와 같은 죄의 자각이 오늘날 이처럼 드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깊이 있게 가르치는 설교자와 교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둘째, 회개의 진정한 의미와, 예수님의 사역에서 회개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가르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회개하도록 가르치게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최초로 가르친 메시지이며, 또한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다시 가르치신 것이다(마4:17 참고). 예수님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 명하셨다(눅 24:47). 사도행전 2장 38절에 기록된 부흥에서는 베드로가 이것을 설교했으며, 뒤를 이어 각 사도들이 계속해서 설교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거의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 깊은 죄의 각성이 일어나기를 구하는 믿음의 중보기도가 주님 앞에 거의 상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롬 2:4) 하신다는 사실을 함께 가르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박해를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박해와 빈곤 속에 살아가는 이들과 관련해 하나님이 주시는 엄한 경고가 있다.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 21:13). 쉽게 말해서 우리가 도울 힘이 있는데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가 곤경에 처해 부르짖을 때에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실 것이라는 의미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돕지 않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들어 보라.
“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그러므로 너희가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 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5:26-29).”
*여러 해 전 처음으로 빌립보서 3장 10절 말씀으로 기도할 때, 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려면 먼저 내가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하고 논리적인 결론이었다. 나는 또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이 깊고 지혜가 무궁하시므로, 그것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데 있어 가장 훌륭한 준비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면면이 공부하는 것이다. 말씀에서 얻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도에 대한 계시는, 두말할 나위 없이 고통과 혼돈, 응답받지 못한 기도들의 사나운 강풍 속에서 믿음을 견고하게 지키는 가장 훌륭한 닻이 된다.
*믿음의 가장 큰 시련은, 하나님의 숱한 약속들이 성취되기를 기다리기까지 오랜 세월과 고통에서 오는 혼란의 시험(the perplexity test)이다. 욥의 가장 큰 시험은 '혼돈'이었다. 아브라함의 시험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약속과 오랜 기다림이었다. 요셉의 시험은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모든 일이 더 악화되는 상황이었다. 나 자신도 최근 몇 년 동안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세 사람 모두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삶을 통해 큰 힘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기 전에, 베드로 사도의 고난에 대한 메시지를 들어 보라. 그는 우리가 불 시험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즐거워해야 하며, 그러면 넘치는 기쁨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놀랍고도 중요한 상급이다.
*성경을 읽을 때 지성으로만 접근하면 정보만 얻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께 마음의 눈을 열어 달라고, 하나님의 성품과 길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믿으면, 진리를 깨닫게 된다. 진리를 깨달을수록 순종하려는 마음이 커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연애 편지인 성경을 읽는 목적이다.
지적인 교만에 마음을 빼앗기면 예수님처럼 부지런히 진리를 추구하는 겸손한 자가 아니라 진리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쟁하게 되며, 속임과 종교의 영이 공격하는 대상이 된다. 속임과 종교의 영에 점령당하면 관점과 신념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영은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겸손하고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도인,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항상 인식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완전한 능력, 완전한 사랑, 완전한 지혜, 완전한 공의를 지니셨고, 절대적으로 신실하며 거룩하시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기 때문이다.
*종교와 속임의 영이 주로 쓰는 전략은 우리의 교만과 불신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 영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획보다 더 매력적인 계획이 있다는 것과, 그들은 특별한 존재이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계획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으면, 믿음의 길도 바꾸게 할 수 있음을 안다. 이 모든 것이 생각에서 시작되므로 그곳이 전쟁터다. 마귀의 속임수는 항상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나 타협하게 만든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와 속임의 영에 묶인 종교적인 사람들의 전형적인 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를 강하게 표현하셨다. 하나님은 율법주의와 냉담한 마음, 판단하는 태도, 부정직과 위선과 교만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 중에 예외가 있었다. 니고데모라는 유명한 율법 교사는 절실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지런히 찾았으며 모든 정직한 구도자와 마찬가지로 마침내 찾아냈다. 성전에 나가는 종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을 부인하게 하려는 사탄의 계책에 니고데모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가 예수님을 시기하지 않고 진심으로 배우기 원했기 때문에 속이는 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이번에는 초대교회 당시 종교 지도층이었던 한 열심 당원을 살펴보자. 바로 다소에서 온 사울이다. 사도 바울도 종교의 영에 붙잡힌 적이 있다는 말인가? 종교 지도자들은 항상 과격하리만치 헌신 예수의 제자들을 눈엣가시로 여겼고, 사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울은 속이는 자요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 이끌려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던져 넣었다.
니고데모와 사울이 같은 바리새파였다는 점이 흥미롭지 않은가? 둘 다 히브리 율법과 전통지식에 깊이 젖어 있었다. 둘 다 당대의 학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데 왜 진리이신 예수님과 직면했을 때 그토록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을까? 마음의 상태가 달랐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울은 니고데모처럼 직접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똑같은 기회는 없었지만, 굉장히 좋은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사울의 핍박을 그토록 심하게 받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독한 헌신과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리려는 뜨거운 열망 때문이었다. 이렇게 귀하고 헌신된 예수의 제자들을 학대하고 위협할 때마다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볼 기회가 사울에게는 있었다. 그는 순교자 스데반이 천사같이 빛나는 얼굴로 돌을 맞는 것을 목격했고, 그가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 760) 라고 기도하는 소리도 들었다. 분명히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날마다 강렬하게 만나고 있던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잠이니라" (잠 16:18).
*교만은 모든 속임의 근본이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옵 1:3). 반대로 겸손은 지혜의 근본이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우리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할 때 예수님은 계속 어린아이의 예를 사용하셨다. 단순하고, 투명하리만큼 정직하고 사랑스럽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는 마음. 사도 바울은 그러한 마음으로 변했고, 종교와 속임의 영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풀어주는 일에 놀랍게 쓰임 받았다. 겸손이 이러한 차이를 낳은 것이다.
*성경과 나 자신의 체험을 통해 100% 확신하는 사실이 있다. 어떤 위치에 있든 어떤 상태이든 간에, 유혹의 불화살을 막는 최대의 방패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잠 8:13)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 짓기로 선택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죄가 특정한 모양새로 다가왔을 때, 우리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거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반응이 일어나는 곳은 '생각'이다. 우리에게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지에 따라 결과가 판가름 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극복하는 가장 큰 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 싫어하는 것을 일부러 선택하는 사람은 없으며, 오히려 전염병을 대하듯 피할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다음과 같이 정직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내가 죄를 지은 이유는 내가 그 죄를 사랑하고,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죄에 대한 마음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해답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가 여호와 경외하는 마음을 구하고 믿음으로 받을 때 하나님은 신실하게 응답하실 것이다. 전혀 복잡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