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에 관한 중세 독일의 민간 전승들
MARIA
⚫⚫⚫ 둘째 이야기 ⚫⚫⚫
성촉절의 환시
옛날에 그 귀족 부인은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하느님의 은총에 젖어 마음을 다하여 성모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인은 성모님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자기 집 앞에 조그만 성당을 하나 짓고 예쁘게 꾸며 성모님께 봉헌할 정도였습니다.
부인은 자기처럼 성모님을 마음 깊이 공경하는 심부님 한 분을 그 성당을 전담하게 하고 그곳에서 매일 하느님의 어머니를 위한 미사를 봉헌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성모님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 부인은 그렇게 하여 하늘의 여왕님께서 매일 큰 공경을 받으셨으면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이 겸손하게 당신 아드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주님 봉헌을 기념하는 이 미사에서는 특별한 촛불 예식이 있는데, 그래서 이날을 ‘성촉절(聖燭節)’이라고도 부르게 된 것입니다.
(주. 주님의 성탄 후 40일째 되는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에는 1년 내내 성당과 가정에서 사용될 초를 축성하고 촛불 행렬을 하는 관습이 있어 ‘성촉절Festum candelarum sive Iuminum’로도 불렀다. 이는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날 봉헌되었기 때문이며, 불을 켠 초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죄악의 어둠을 없애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인의 전속사제가 그날 중요한 용무가 있어 도시를 떠나 있었습니다. 당장 다른 신부님을 급하게 모셔올 수도 없었기에 아무래도 그해에는 성모님 성당에서 성촉절 미사를 드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일이 부인에게는 모든 행복을 다 앗아갈 정도로 크나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부인은 성모님을 묵상에서라도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그 작은 성당에서 혼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부인은, 교회의 거룩한 축일에 미사를 궐하게 되었고 또 그 때문에 자기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성모님께 특별한 찬미를 드릴 수 없게 된 것을 크게 슬퍼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상심이 컸기에 부인은 성당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잘 보십시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이토록 경건한 여인에게 어떤 기적을 행하셨는지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이에게는 어떠한 선물도 마다하지 않고 내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슬픔에 잠겨있는 이 부인의 영혼을 손수 일으켜 세우시고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갑자기 어느 대성전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성전은 수많은 장식들과 예술 작품들로 꾸며져 매우 화려했습니다. 그 성전 안에서 부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가 느껴졌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부인을 성전 안에 특별히 마련된 자리로 안내하여 거기에 앉기를 권했습니다. 이어서 성전 문 쪽에서 아리따운 처녀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습니다. 그 행렬의 맨 앞에선 아름다운 여인은 영롱하고 빛나는 옷을 입었는데, 그 여인의 아름다움에 부인은 넋을 잃어버릴 정도였습니다. 그 여인은 여왕처럼 옷을 차려 입고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처녀들은 제대 앞까지 행렬하고 나서 각자의 자리로 들어가 앉았습니다. 조금 후에 성당 입구에서 빼어난 미모의 사내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귀여운 소년들을 위한 자리도 성당에 각각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모두가 질서정연하게 들어와 그 큰 성전을 빼곡히 채었습니다. 이윽고 사람들이 불이 켜진 초를 성전에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처녀들의 행렬을 인도했던 그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초를 가장 먼저 건넨 다음에 다른 처녀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성당에 있는 모든 이에게 초를 하나씩 주었는데, 앞서 말한 우리의 경건한 부인만이 초를 받지 못했습니다. 다행이도 처녀들 중 한 명이 부인에게 초가 없는 것을 보고 초를 하나 가져다가 건네주었습니다. 초가 없으면 이 성대한 예식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 모두들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마침내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순간,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초를 하나씩 들고 성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다름 아닌 라우렌시오 성인과 빈첸시오 성인이었습니다. 이어서 자루로 된 예복을 입은 부제 한 명과 차부제 한 명이 뒤를 따랐고, 마지막에는 아주 화려한 제의를 입은 사제가 들어왔습니다. 부인이 보기에 그 부제들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처럼 보였고 사제는 예수님처럼 보였습니다.
사제와 복사들이 제대 앞에 다다르자 모두들 이 특별한 축일의 성무일도를 노래로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부인은 그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며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빠져들었습니다.
성찬 전례의 예물 봉헌 시간이 되자 왕관을 쓰고서 여왕처럼 보였던 그 여인이 사제 앞으로 걸어 나와 무릎을 꿇고서 자신이 들고 있던 초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녀가 자리로 돌아오자 성전에 있던 모든 이가 차례로 제대 앞으로 나와서는 자신의 초를 봉헌하였습니다.
모든 이가 초를 제대 앞에 봉헌하자 거기 있던 모든 이의 그 귀족 부인을 향했습니다. 모두들 마치 ‘너도 앞에 나가서 네 초를 봉헌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미사를 집전하던 사제도 성가를 그치고 부인을 쳐다보며 그녀가 앞에 나오기만을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마치 부인이 초를 봉헌하지 않으면 미사가 계속 진행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꽤 길어지면서 성전 안에는 굉장히 오랫동안 정적이 흘렀지만, 부인은 그 어색한 분위기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모두들 그 부인이 초를 봉헌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다는 사실을 여왕이 알아챘습니다. 그러자 여왕은 시종 하나를 부인에게 보냈습니다.
“가서 부인에게 말하여라. 속히 초를 봉헌하지 않으면 부인은 지금 여기 있는 모두에게 큰 실례를 끼치는 것이라고, 부인이 초를 봉헌하여야 사제께서 미사를 계속 집전하실 수 있다고, 언제까지 우리가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시종은 부인에게 다가가, 어서 초를 제대 앞에 봉헌하라고 공손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대꾸했습니다.
“저는 이 초를 봉헌하지 않을 겁니다. 왜 저 때문에 신부님이 미사를 중단하시나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미사를 계속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리세요.”
여왕은 부인의 말을 전해 듣고는 다시 시종을 보내면서 전하도록 했습니다. 그래도 초를 봉헌해야만 한다고, 여기 모인 모든 이는 초를 봉헌하기 위해 잠시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모든 초가 봉헌되어야만 사제가 미사를 계속할 수 있으니 더 이상 사제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부인은 듣지 않았습니다.
“미사를 하셔야만 한다면 계속하시라니까요. 이 초는 절대로 못 드려요.”
여왕은 세 번째로 시종을 보냈습니다.
“가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인을 설득하여라. 초를 봉헌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고집을 부릴 것인지 의중을 알아보고 계속 고집을 부리거든 억지로라도 초를 빼앗아 오너라. 저 여인은 초를 갖고 있을 자격이 없으니까!”
시종은 다시 내려가 부인에게 어서 초를 봉헌해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부인은 화가 나서 초를 가슴에 꽉 끌어안으며 그를 노려보았습니다. 그러자 시종은 여왕이 명령한 대로 강제로라도 빼내기 위해 부인의 초를 손으로 붙잡으려 하였습니다. 부인은 시종의 손을 쳐내고서 초를 쥔 손에 힘을 주었고, 결국 두 사람은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부인이 너무나도 완강했기에 초를 빼앗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시종은 하는 수 없이 두 손으로 초를 세게 잡아당기자 부인도 질세라 있는 힘껏 초를 잡아당겼습니다. 그러자 초가 두 동강이 나버렸고 그렇게 싸움은 끝이 났습니다.
그 순간에 부인은 환시에서 깨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까닭에 영혼에게 은총을 기꺼이 또 아낌없이 내려주신다는 사실을 부인은 까달았습니다. 부인은 자기 손에 여전히 반쪽짜리 초가 쥐여져 있는 것을 보자 기쁨에 겨워 그전의 슬픔을 다 잊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토록 놀라운 체험을 하게 해주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감사하며 찬미를 드렸습니다. 그 후로 이 부인은 더 열정적으로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픈 이들 중 이날 축복 받은 초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 그 병이 말끔히 낫곤 하였습니다. 하늘의 여왕님은 찬미받으소서!
박규희 옮김
(마리아지 2018년 9•10월호 통권 211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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