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고아>를 통해 본 창의적 연극 컨셉1
-분신의 연극성, 코러스의 상징성
1. 분신의 연극성, 분열의 연극성
해체와 분열 작법으로 연극 마니아들을 흥분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출생의 비밀 찾기라는 서스펜스 구조로 관객을 매료시킨 연극이 있다. 진실 게임, 그 정점에서 분열 이미지가 선을 보인다. 누구의 말이 옳을까. 불안 심리가 고조된다. 불안 심리의 정점에서 인물은 분열한다. 분신 이미지, 분열 이미지가 코러스와 조화를 이루면서 이색적인 연극성이 우러나온다.
극단 미추의 <조씨고아(趙氏孤兒)>(기군상 작, 티엔친신 연출, 손진책 예술감독,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는 인간 내면의 상반된 정서와 성격을 분신 기법으로 무대화하여 특별한 심미성을 경험케 한다.
여섯 살이 된 고아, 그의 꿈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어머니, 붉은 머리를 풀어 헤친 어머니, 수염이 난 어머니, 이런 꿈속 이미지, 과연 사실일까. 수염 난 어머니의 내력, 무슨 사연일까. 붉은 머릴 풀어 헤친 사연은 또 무엇일까. 어머니가 보고 싶다. 과연 어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임종 직전의 수양아버지가 자신의 출생 내력을 들려주려 한다.
무대에서 분열 이미지는 어떻게 실현될까. 강인한 성격의 성인 고아, 나약한 성품의 여린 고아, 두 명의 배우가 한 인물을 연출해낸다. 열여섯 살, 성인 정서와 어린애 정서의 분기점, 강한 고아의 배우(조원종)가 여린 고아 역의 배우(이강미)와 한 몸되어 걷는다. 여린 고아가 강한 고아의 발등 위에 달라붙어 있다. 걸음걸이와 생각, 몸놀림이 같은 듯 하다. 그러나 표정과 내면은 다르다. 이 둘은 생부, 생모에 관한 숨은 과거사에 대해 상이한 반응을 보인다. 이 연극은 분신 이미지로 분열된 정서 및 불안 심리를 정밀하게 추적해 나간다.
고아를 낳자마자 죽어간 엄마 장희의 사연은 무얼까. 무대엔 또 다른 여인이 미쳐 죽어간다. 연대기적 극구성이 무시된다. 포스트모던한 극구성 작법, 해체된 시각으로 각 장면은 일깨우기의 힘을 발휘한다. 여기에 미스터리 구성이 가미되면서 극적 서스펜스 묘미마저 우러나온다.
고아에게 생부라 여겼던 인물(함건수 분), 은인이라 여겼던 수양아버지(정태화 분), 자신의 출생 비밀을 놓고 대립한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평소 존경해온 수양아버지 도안고, 그분의 말씀을 신뢰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자신을 키워준 분, 생부라 여겼던 분을 부인해야 할까. 고아의 갈등은 시작되고 그 고뇌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된다. 분열이 가속화된다. 거부정서를 드러내려는 성인 고아, 생부의 말씀을 믿어보고 싶어 하는 어린 고아, 고아의 분열 심리가 다채롭게 변용된다. 관객은 분신 연극의 묘미에 흠뻑 빠져 들기 시작한다.
생부가 따로 있다는 폭탄선언, 진짜 부친은 왕명에 의해 멸족 당한 조삭이라니... 도안고는 펄쩍 뛴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내뱉는 정영의 고백 마저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한 동안의 판단력 상실, 믿기지 않던 과거사, 과연 진실일까. 이 모든 숨은 사연이 극중극을 통해 부활한다. 정영의 발설, 핵폭탄의 뇌관에 불을 붙이는 행동, 이는 그 자체로서 대단한 긴장 에너지를 발한다. 과연 사연이라면 어떤 연유일까. 다음 장면에 대해 기대감이 고조된다.
2. 핏줄 이어가기 전략과 긴장 미학
연극의 생명력은 긴장감 창출 여부에 달려 있다. 춘추전국시대, 탕녀 장희의 혼음 사건, 음모, 밀고, 모함, 결국 조씨 집안을 멸족하라는 왕명이 떨어진다. 혼란과 혼돈의 시대적 상황, 탕녀 장희가 조씨의 아이를 낳으려 한다. 아기를 낳으면서 그녀의 인물 변신이 이루어질 줄이야. 뱃속의 아기를 살리고픈 강력한 모성애,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기를 살려야 하지 않는가.
이 작전은 성공을 거둘 것인가. 살육, 피비린내 상황, 이는 강한 긴장 상황을 예고한다. 출산을 앞둔 장희, 시골의사 주치의 정영에게 부탁을 한다. 뱃속의 아이를 살려달라고, 조씨 가문을 이어가게 해달라고 그리고 아이 이름을 조씨고아라 불러 달라고...
뱃속의 아기마저 낳는 대로 죽임을 당할 운명이다. 엄마 장희(서이숙 분)의 간절함, 아이를 살려만 준다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 그 비장함과 처연함이 머뭇거리는 정영(함건수 분)을 압도한다. ‘승낙을 할 것인가, 유보할 것인가...’, 한 동안의 갈등, 한 동안의 내적 줄다리기가 이루어진다.
핏덩이 아기를 낳기 위해 소리 한번 지르지 못했다. 진땀이 목까지 차고 넘쳐서 울어도 눈물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엄마 등 뒤에 붙어있는 고아, 그 천진함, 엄마의 사랑이 필요한 저 어린아이, 이제 저 어미는 죽어갈 운명이다. 정영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고아를 살려달라는 간절한 청, 정영은 결단을 내리는가. 극적인 승낙이 이루어진다. 그 때 부터 문제는 일파만파로 커진다. 효과적인 문제 제기, 연이어지는 장애물1,2 설정, 외관상 탄탄한 극 구조다.
고아 살리기 전략,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 수많은 장애물 및 암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공연은 내내 박진감과 긴장감, 스릴과 서스펜스로 가득하다.
한약재에 고아를 숨겨 장희의 집을 빠져나가려는 정영의 전략, 이미 한궐이 이끄는 무사들이 집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정영의 앞길을 가로막는 한궐, 들통 나기 직전의 위기 상황이 전개된다. 무사들이 눈치 채고 다가온다. 아슬아슬함이 최고조에 이른다.
정영(함건수 분)과 한궐(오광민 분)의 담판, 상대의 경계를 허물고 추적의 세계를 신의의 세계로 급변시켜내는 작업, 이는 죽기를 각오했을 때 가능하다. 정영의 비장함은 한궐의 내면으로 전이되면서 잠재된 또 다른 캐릭터를 부추긴다. 의인을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축복이다. 고아를 빠져나가게 하는 댓가, 이는 그 자신의 목숨이다. 자결을 결행하는 한궐, 의인의 열전 행각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위기 뒤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자식을 대신 죽여 바쳐야 한다. 친 혈육을 잃고 싶지 않는 어미의 가슴앓이, 정영 아내의 갈등이 시작된다. 갈등, 불안 초조 심리가 극에 달한다. 인물의 분열이 시작된다. 이 작품의 매력 포인트는 분신 드라마 작법에 있다. 남편의 뜻을 존중하려는 현숙한 지어미, 눈앞에서 아기의 죽음이 펼쳐진다. 어미의 정을 주체 못해 미쳐가는 여인, 내적 심리 갈등이 고조된다. 인물의 분열, 그 폭과 깊이가 더욱 확장된다.
정영 아내의 내적 몸부림, 그 분열 상황은 장희의 몸부림으로 전이된다. 여인들의 언어, 한편의 멋진 서정 언어를 방불케 한다.
우리 아기 얼굴이 달빛에 물들었구나
차가운 겨울 산에 흰 눈 내린 듯
살짝 벌린 두 입술은 연꽃처럼 붉구나.
달빛에 물들 정도로 고운 아기, 혈육의 죽음을 허용해야하는가. 차가운 겨울산, 이는 비정하고 냉혹한 주변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다. 미쳐 죽어가는 아내, 운율을 살린 시극의 맛이 관객을 매료시킨다. 엄마 장희의 단말마 시어가 정영 아내의 시어와 오버랩된다. 친 혈육 살리려는 몸부림, 그 시각에서 두 인물은 어느 새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된다. 포스트모던한 극작법에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내의 두 분신 역할, 두 명의 여배우(황연희, 최수현)가 상호 한 몸처럼 붙어 있다. 그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있지만 생각과 정서는 늘 달리한다. 거기에 이들의 비극이 잉태한다.
분신, 분열성,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 몸 따로, 생각 따로, 이렇게 살아가는 게 인생사인가. 이 작품은 정서적 나약함, 지적 의지의 의연함, 그 양 스펙트럼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다중성과 모순성을 밀도 있게 육화시켜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