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권당에 대한 기[萬卷堂記]
옛사람 가운데 장서(藏書)하기 좋아했던 사람들을 비록 다 들어 셀 수는 없으나, 모두가 한빈(寒貧)한 선비들이 했던 일이다.
그러므로 부귀한 집에서 생장(生長)하여 왕후(王侯)의 낙을 누리면서 책을 좋아했던 사람은 대체로 적고 책을 소장한 사람은 더욱 들어볼 수가 없다.
그런데 서경(西京) 시대에는 하간헌왕(河間獻王)이 금백(金帛)을 주고 책을 사들여, 얻은 것이 모두 선진(先秦) 시대의 옛 책들이었는바, 그 많기가 한(漢) 나라 조정과 맞먹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때에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또한 책을 좋아하여, 팔공(八公)의 무리들이 모두 방술서(方術書)들을 올렸는데, 이것은 대부분 부박(浮薄)한 언론들이었으니, 어찌 고사(故事)를 채집(採輯)하여 선왕(先王)의 예악(禮樂)이 심히 몰락되지 않도록 애쓴 하간헌왕의 행위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하간헌왕 이후로는 서책의 액운을 누차 겪음으로 인하여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곤 하였는데, 그 모인 것은 노씨장실(老氏藏室)이나 도가봉래산(道家蓬萊山)에 있지 않으면 한빈한 선비의 집에 퍼져 있었으니, 여기에서 더욱 하간헌왕의 어짊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감탄하게 되었다.
원(元) 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지 백여 년 동안에 문명(文明)의 치적이 화이(華夷)에 간격이 없었다. 그리하여 부마(駙馬)인 고려국왕(高麗國王)이 세자(世子)가 되었을 때부터 연경(燕京)에 거주하면서 학문을 좋아하고 선한 일 하기를 즐거워하는 것이 천성(天性)에서 나왔었다.
그의 귀(貴)로 말하자면 원 세조(元世祖)의 외손자이고, 그의 공훈으로 말하자면 욕일 보천(浴日補天)의 공훈이 있었으며, 그의 부(富)로 말하자면 한 몸에 양국(兩國)의 인(印)을 찼었다. 그런데도 일찍부터 부귀를 싫어하고, 조용하고 한가함을 좋아하여, 나라를 버리기를 마치 헌신짝 벗어버리듯 할 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는 이에 연경의 저택(邸宅)에 서당(書堂)을 짓고 육경(六經), 제사(諸史)와 백씨(百氏)의 서적들을 모두 구입하여 화려한 상자 속에 겹겹으로 싸서 간직해 놓으니, 그 질서정연하고 풍부하기가 석거(石渠), 천록(天祿)의 풍부함과 비길 만하였는데, 천지(天地)의 도와 황왕(皇王)의 정사와 생민(生民)의 기율(紀律)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에 편액을 만권당(萬卷堂)이라 써 붙였다.
아, 하간헌왕은 다시 볼 수가 없으나, 천백년 후에 하간헌왕과 같은 이를 보게 되었으니, 어찌 서적(書籍)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왕은 심의(深衣)와 치포관(緇布冠) 차림으로 여기에서 학문을 닦고 여기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대아 군자(大雅君子)인 요수(姚燧), 조맹부(趙孟頫), 우집(虞集) 등 제공(諸公)과 함께 여기에서 주선(周旋)하고 강마(講劘)하였으며, 그의 신하인 권한공(權漢功), 이제현(李齊賢) 같은 이는 또한 해동(海東)의 위인(偉人)들이다.
비록 나같이 불초한 사람으로도 일찍이 그 사이에 끼여서 번원(藩垣)으로부터 정계(庭階)에 이르고 정계로부터 당오(堂奧)를 엿보아서, 언제나 침착하게 연구하여 소득이 있은 다음에 나오곤 하였으니, 왕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참으로 성대하다 하겠다.
비록 그러나 왕의 용심(用心)이 어찌 여기에만 그쳤을 뿐이겠는가. 서책 모으는 것을 귀히 여긴 것은 그것으로써 유전(遺典)을 연구하고 자기 가슴속에 있는 권도(權度)로써 참작하여 수시로 나가서 경세 제민(經世濟民)의 쓰임으로 삼기 위해서인 것이다.
왕이 지금은 비록 한가로이 심성(心性)을 수양하고 있으나, 황상(皇上)의 사랑하고 의지함은 조금도 변함이 없어, 조정에 큰 일이 있을 적에는 왕을 불러서 물어보면 왕은 의당 경례(經禮)로써 절충(折衷)하여 아뢰곤 하니, 곧 천하가 그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왕국(王國)은 경사(京師)와의 거리가 거의 삼천리나 되므로, 왕이 여기에 있자면 그 천포(泉布: 금전을 뜻함)를 실어다가 왕의 비용을 제공함에 있어 그 폐단이 매우 크다. 그러나 왕이 만권당에 있는 것을 몽땅 거두어 싣고 동으로 돌아가서 박사(博士), 장고(掌故)로 하여금 이것을 관장하게 하고, 사군(嗣君)이 혹 의심난 것이 있어 여쭙거든 왕이 의당 경적을 고증하고 제도를 찾아, 옛 것을 원용(援用)하여 지금의 일에 증거를 대서 그 나라에 실정(失政)이 없도록 한다면 동국의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을 것이다.
그리하여 위로는 황조(皇朝)에 시귀(蓍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아래로는 후손들에게 훌륭한 계책을 남겨준다면 왕의 훌륭한 명성이 더욱 천하 후세에 진동하고 빛날 것이니, 그 서책을 모은 이로움이 또한 넓지 않겠는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갓 서책 가운데서 성현(聖賢)만을 대할 뿐이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한림학사 (翰林學士) 승지(承旨) 모(某)는 기록한다.
[주해]
[주C-01]만권당 : 만권당(萬卷堂)은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 연경에 세운 독서당(讀書堂) 이름이다. 충선왕은 만권당을 세우고 많
은 서적들을 수집하여 당시 원 나라의 거유(巨儒)였던 요수(姚燧), 조맹부(趙孟頫), 원명선(元明善), 우집(虞集) 등을 불러 경사
(經史)를 연구하게 하고, 본국에서 이제현(李齊賢) 등을 불러 그들과 교유하게 하였다.
[주D01]서경(西京) 시대 : 한(漢) 나라의 서울인 장안(長安)을 가리킨 말로, 전하여 전한(前漢) 시대를 이른 말이다.
[주D02]하간헌왕(河間獻王)이……정도였다 : 하간헌왕은 한 경제(漢景帝)의 셋째 아들인 유덕(劉德)의 봉시호(封諡號)인데, 하간헌왕
은 특히 고서(古書)를 좋아하여 금백(金帛)을 주고 민간(民間)에서 고서를 많이 구입하였으므로 책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주D03]팔공(八公) : 한(漢) 나라 회남왕(淮南王)의 문하에 종유하던 8인의 문학지사(文學之士)로서, 즉 좌오(左吳), 이상(李尙), 소비
(蘇飛), 전유(田由), 모피(毛披), 뇌피(雷被), 진창(晉昌), 오피(伍被) 등을 가리킨다.
[주D04]노씨장실(老氏藏室)이나 도가봉래산(道家蓬萊山) : 모두 한(漢) 나라 때 궁중(宮中)의 장서처(藏書處)인 동관(東觀)의 별칭으
로 쓰인 말이다. 후한(後漢) 때의 학자들이 동관을 가리켜 노씨장실이니 도가봉래산이니 하고 일컬었는데, 즉 노씨장실이란 노자
(老子)가 일찍이 주(周) 나라 장서실(藏書室)의 사관(史官)을 지낸 데서 온 말이고, 도가봉래산이란 해중(海中)의 신산(神山)인
봉래산에는 유경(幽經), 비록(祕錄)들이 모두 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5]부마(駙馬)인 고려국왕(高麗國王) : 고려 충선왕을 가리킴. 그의 어머니는 원 세조(元世祖)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이고, 그의 비(妃)는 진왕(晉王)의 딸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였으니, 충선왕은 원 세조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주D06]욕일 보천(浴日補天) : 욕일은 옛날 희화(羲和)가 감연(甘淵)에서 태양을 목욕시킨 고사이고, 보천은 여와씨(女媧氏)가 하늘의
이지러진 곳을 기웠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모두 국가에 큰 공로가 있음을 의미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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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古之人有好藏書者。雖不可枚數。然皆韋布寒素之事也。其生長富貴。享王侯之樂。而嗜書者。盖少。而藏書者。尤未之聞也。其在西京。河間獻王。以金帛購書。所得皆先秦舊書。其多與漢朝等。是時。淮南王安亦好書。而八公之徒俱以方術進。率多浮辯。豈有採輯故事。使先王禮樂。不甚淪沒。若河間之爲也。河間之後。書之厄會屢更焉。聚而復散。散而復聚。其聚者。不在於老氏藏室。道家蓬山。則布於韋布寒素之家。於是乎益嘆夫獻王之賢。爲不可及矣。元有天下。且百餘年。文明之治。靡間華夷。駙馬高麗國王。自爲世子時。來居輦轂。好學樂善。出乎天性。言其貴。則世祖之外甥也。言其勛。則有浴日補天之烈也。言其富。則以一身而綰兩國之印也。而早厭富貴。愛靜好閑。視棄其國。不翅若脫屣。乃構書堂于燕邸。六經諸史百氏之書。靡不購求。華匱緹巾。十襲以藏。森然蔚然。與石渠天祿擬其富。天地之道。皇王之政。生民之紀律。盡在是矣。遂扁之曰萬卷堂。嗚呼。献王。不可見矣。得見如献王者於千百載之下。豈非書籍之大幸耶。王以深衣緇冠。游息於斯。藏修於斯。與大雅君子如姚如趙如虞諸公。周旋講劘於斯。其臣如權漢功,李齊賢。亦皆東海偉人也。雖以余之不肖。亦甞間廁其間。自藩垣而歷庭除。自庭際而窺堂奧。未嘗不沉浸涵泳。有所得而後出焉。王之波及於人。可謂盛矣。雖然。王之用心。豈止於此而已耶。所貴乎聚書者。以其能考究遺典。參以胸中之權度。時出而爲經濟之用也。王今雖居閑頤養。皇上之眷倚不少衰。朝廷有大制作。召王而訪之。當以經禮折衷而敷奏。則天下受其賜矣。王國距京師。幾三千餘里。王之在此也。其輸載泉布。以供王之費。其弊甚鉅。王能卷堂之有。䭾之以東歸。使博士掌故掌之。嗣君有疑而咨禀。王當稽經諏律。援古證今。使不失政於其國。則東民蒙其澤矣。上以蓍蔡於皇朝。下以燕翼於後昆。王之令名。益震耀於天下後世矣。其聚書之利。不亦博哉。不如是。徒對黃卷中聖賢。何爲也。翰林學士承旨某。記。<끝>
佔畢齋文集卷之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