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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형조 판서 장공 신도비명 병서 (刑曹判書張公神道碑銘 幷序) - 이의현(李宜顯)
성상 원년(元年,1725, 영조 1)에 장공 붕익(張公鵬翼)이란 장수가 있었다. 공은 위엄과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났으나 간사한 권세가들의 시기를 받아 머나먼 북쪽 변방으로 유배당해 여러 해를 보냈다. 그러다가 가장 먼저 임금의 급한 부름을 받고 돌아와 어영대장이 되고 훈련도감으로 전직하니 조정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보다 앞서 성상이 세제로 있을 때에 김일경(金一鏡) 등 여러 흉적들이 환관과 결탁하여 성궁(聖躬)을 위험에 빠뜨리고자 모의하였다.그런데 성상이 즉위한 뒤에도 흉악한 도모가 여전히 그치지 않자 공은 도성의 군대를 관장하면서 온 힘을 다해 왕실을 보호하였다.
정미년(丁未年,1727, 영조 3) 7월에 성상이 갑자기 교서를 내려 조정의 신하들을 모두 몰아내고는 김일경의 무리를 조정에 포진시켰으며, 급히 명하여 공의 병부(兵符)를 빼앗도록 하였다. 공은 물러나 향리(鄕里)에 머물고 있었는데 적들이 반드시 발호(跋扈)할 것임을 알고 근심하고 분노하다가 크게 병이 났다.
그런데 과연 무신년(戊申年,1728, 영조 4) 3월에 역적들이 삼남(三南) 지방의 군사를 모아 먼저 청주(淸州)를 도륙하여 절도사 이봉상(李鳳祥,1676~1728)을 살해하고 수일 내로 도성에 이르려 하였다. 공이 급보를 듣고 아픈 몸을 이끌고 조정에 들어가니 성상이 인견(引見)하고 가상히 여겨 장려하고는 도총부 부총관에 제수하고 대궐에서 숙직하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정권을 잡은 재상이 공을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내보내고자 청하였는데 성상은 도성의 경비가 허술해진다고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역적 이사성(李思晟,1678~1729/본관 전주)이 서도(西道, 평안도)의 병사(兵使)로서 반란을 일으키고 비장(裨將)인 안추(安樞)를 시켜 도성에 들어가 조정의 상황을 정탐하게 하였다.
공이 그를 은밀히 추적하여 체포하고는 법에 따라 처리하니 이사성이 체념하고 말없이 포박을 당하였다. 애초에 이사성은 여러 역적들과 청나라의 군복을 입고 말을 몰아 쳐들어오기로 약속했었으니, 만약 공이 아니었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뻔하였다.
총융사 김중기(金重器,?~1735)가 역적들과 내통한 행적이 드러나자 공에게 그 임무를 대신하도록 하니공이 부절(符節)을 받들고 가서 경기 좌도(京畿左道)를 다스렸다. 그러자 역적들이 공을 두려워하여 사잇길로 도망갔다. 공이 역적들의 장수 이배(李培)를 사로잡아 함거(檻車)에 실어 서울로 압송해 처형하고, 또 역적을 인도하거나 적에게 부응한 자들을 체포해 차례로 처형한 뒤에 시신은 거적에 말고 목은 나무에 매다니 역적들이 모두 평정되었다.
얼마 뒤에 어영대장으로 옮기고 다음해에 특별히 한성부 판윤으로 승진하였으며 또 다음해에 다시 훈련대장이 되었으니, 이는 성상의 은혜가 점점 융숭해진 것이다. 그러자 시기하는 자들이 그치지 않아 몰래 자객을 보내어 기어코 공을 살해하려고까지 하였다. 만일 밝은 성상이 위에 계시지 않았다면 공은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공은 인품이 엄하고 굳세어 법도가 있었으며 사람들을 통솔하는 데에 더욱 뛰어나서 군사들을 어루만지고 통제하기를 항상 마땅하게 하여 오직 대체(大體)만을 지키고 번거롭거나 까다롭게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기강과 규율이 절로 정돈되고 사람들이 쓰이기를 좋아하였다.
공은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장공(張公,張晩)의 족손(族孫)인데 평생 거쳐 온 관직이 장공과 매우 비슷하였으며 사람됨이 굳세고 지략이 풍부한 점 또한 같았다. 그러나 처한 시대는 옥성부원군의 때와 매우 달라서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처럼 위태로웠던 상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공의 입장에서 처신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공은 조정에서 역적을 너무 느슨하게 처벌한 탓으로 그들의 악행이 멈추지 않는 것을 보고 매번 천장을 우러러보며 속으로 탄식하였다. 이에 명령을 내려 일을 시작하거나 변경할 때마다 전후로 철저히 알린 뒤에 단호하게 시행하기를 힘썼다. 이 때문에 공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적들이 두려워하며 감히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였다. ‘공후간성(公侯干城)’이라는 옛말이 있는데 공이 참으로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공은 자가 운거(雲擧)이고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증조 차주(次周)는 홍문관 수찬을 지냈으며, 조고 세명(世明)은 한산 군수(韓山郡守)로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선고 하현(夏顯)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참판 단석(端錫)의 딸로, 생전에 정부인(貞夫人)으로 품계를 올려주는 고명(誥命)을 직접 받았다. 2대의 선조가 함께 추증의 은전을 받은 것은 모두 공의 관직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공은 어릴 적에 이미 동료들 사이에서 뛰어나 범상치 않았고 글씨를 잘 쓰고 문예에 숙달하였다. 그러나 어버이 봉양을 시급하게 여겨 문과 공부를 그만두고 기묘년(1699, 숙종25) 무과에 오르니 이때 나이가 26세였다. 선전관에 선발되고 도총부의 낭관과 태복시 내승을 역임하였으며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나갔다.
훈련원 정으로 있다가 금군장으로 승진하고 삼척(三陟)과 전주(全州)의 진영장이 되었으며, 또 정평(定平)ㆍ중화(中和)ㆍ선천(宣川) 세 고을의 부사로 나갔다. 차츰 승진하여 충청도 수사(忠淸道水使)와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가 되고 또다시 영흥 부사(永興府使)가 되었는데, 치적이 으뜸으로 평가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공은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뛰어나서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공의 은혜를 그리워하는 일이 많았으며, 화상(畵像)을 그려 사당에서 모시는 자도 있었다. 훈련도감의 중군으로 있다가 연이어 여주 목사(驪州牧使)와 춘천 부사(春川府使)에 제수되었으나 훈련도감에서 공을 계속 유임시키기를 원하여 보내지 않았다. 이윽고 경기 수사(京畿水使)에 제수되었다가 내직인 포도대장으로 옮겼다. 신축년(1721, 경종1)에 모부인(母夫人)의 상(喪)을 당했다.
종성(鍾城)의 적소(謫所)에서 돌아와서한성부 좌윤, 형조 참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여러 번 군기시 제조, 동지의금부사, 지훈련원사를 겸하였다. 뒤에 공조 판서와 형조 판서를 역임하고 지의금부사와 도총부 도총관을 겸하였다.
공이 별세한 뒤에 장자(長子)가 원종공신에 책록됨에 따라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인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통제사 홍좌(弘佐)의 딸이다. 아들 태소(泰紹)는 병사이고, 계소(啓紹)는 직장이다. 태소는 3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지항(志恒)이고 딸은 한사교(韓師敎)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 자식들은 아직 어리다. 계소는 2남을 두었는데 또한 아직 어리다. 공의 서자(庶子)로는 의소(懿紹)와 휘소(徽紹)가 있으며, 서녀(庶女)는 맹숙언(孟淑彦)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가정 안에서의 행실이 돈독하고 지극하여 어버이를 섬길 적에 한결같이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효로 여겼다. 형제와 친척에 대해서도 우애하고 공경하며 화목하여 다른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운 점이 많았고 남의 위급한 일에 달려가서 돕는 것을 더욱 좋아하였다.
마음이 평탄하여 자질구레하지 않았으며 해학을 좋아하고 기절(氣節)을 숭상하였다. 겉으로는 소탈하여 헤아림이 적은 듯하였으나 마음속에는 치밀함이 있어서 계획하고 헤아릴 때마다 반드시 먼 앞날을 대비하였다. 평소 청렴함과 검소함으로써 몸을 단속해서 장수가 되었을 때에도 일찍이 재물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상할 만한 일이 있으면 재물을 나누어 줌에 인색함이 없었다.
공은 을묘년(1735, 영조11) 3월 13일에 별세하였는데, 3일 전에 큰 별이 떨어지니 그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았다. 부음이 알려지자 성상은 놀라고 슬퍼하며 애도하는 윤음을 내리고 부조(賻助)하기를 정해진 등급보다 융숭히 하였다. 풍덕(豐德)의 진봉산(進鳳山)에 장례하니, 곡하며 장송(葬送)하는 군교(軍校)들이 수십 리에 걸쳐 끊이지 않았다.
공이 낮은 벼슬에 있을 때에도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훌륭한 인물이라 여겼고 말년에는 더욱 믿고 가까이 하였다. 비록 어렵고 염려스러운 세상일이 눈에 가득하더라도 공이 조정에 있었기 때문에 종국(宗國)에 대한 근심을 다소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일이 날이 갈수록 더욱 위태롭고 두려워지고 있는데, 공은 이미 구원(九原)에 있어 다시 살아 돌아오게 할 수가 없다. 돌아가신 공을 생각하면 명(銘)을 짓는 일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전에 이르기를 북소리를 들으면 / 傳稱聽鼙
장수인 신하를 생각한다 하였으니 / 思將帥臣
옛날 옛적에도 / 自古在昔
반드시 적임자를 기다렸다네 / 必須其人
더구나 어려운 때를 만나면 / 矧値艱棘
신중하게 인재를 가려 뽑아야 하니 / 宜極選掄
도성에 있으면 나라를 공고히 하고 / 處則鞏國
나가서는 위난(危難)을 구제해야 하네 / 出爲濟屯
아, 거룩한 장공이여 / 於惟張公
타고난 자질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네 / 天賦超倫
선비로서 무인이 된 것은 / 用衿易弁
어버이에 대한 효성 때문이었다네 / 基以孝親
충성을 일월 같은 군주에게 바치니 / 移忠日月
참으로 알고 믿었다네 / 廸知忱恂
심려를 한번 잃으니 / 心膂一失
조정의 정국이 갑자기 변하였고 / 朝局倐新
무신년의 일로 / 黃猿之事
종묘의 종틀이 거의 없어질 뻔하였으니 / 鍾簴幾淪
아! 공의 힘이 아니었다면 / 噫微公力
누가 요망한 자들을 깨끗이 물리쳤겠는가 / 孰掃妖塵
저 흉악한 무리들이 / 奈此兇儔
가슴으로 욕하고 눈을 부릅뜨고 보는 것을 어찌하랴 / 胸詬目瞋
저들이 한창 공을 핍박하였으나 / 彼方急公
성상은 공을 의지하기를 순일하게 하였네 / 聖倚其純
장수로서 입곡에서 지휘하니 / 中權笠轂
용감하게 우뚝 섰네 / 仡然長身
장수의 별이 갑자기 떨어지니 / 將星俄坼
별들이 빛을 잃었네 / 緯曜沈湮
조 문자의 그리움이 사무쳐 / 文子之思
천추에 한이 맺히노라 / 恨結千春
내 공이 남긴 아름다움을 기술하여 / 我述遺美
아름다운 비석에 새기노니 / 刻之瑩珉
단지 공을 기술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 匪直公述
실로 이 세상을 슬퍼하는 것이라네 / 寔哀斯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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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성상이 …… 모의하였다 :
김일경(金一鏡)이 경종(景宗) 때 환관(宦官)이던 박상검(朴尙儉)과 결탁하여 당시 세제로 있던 영조(英祖)를 제거하려고 했던 것
을 이른다.
1722년(경종 2) 1월에 박상검은 김일경의 사주를 받고 환관과 궁녀들을 매수해 놓고는 궁 안에 돌아다니는 여우를 잡는다는 구실
로 청휘문(淸暉門)에 여우덫을 놓고 함정을 파놓아 세제가 경종에게 문안을 드리거나 시선(視膳)하러 가는 길을 가로막아 경종과
세제 사이에 불화를 조성하고, 대전(大殿)의 궁녀들로 하여금 세제를 헐뜯는 말을 하게 함으로써 세제를 제거하려 하였다.
[주02] 정미년 …… 포진시켰으며 :
1727년(영조 3)에 영조(英祖)가 탕평책의 일환으로 노론(老論) 강경파를 파면하고 소론(少論)을 정권에 참여시킨 정미환국을 가
리킨다. 노론 정권이 왕의 탕평책에는 잘 따르지 않고 소론 공격에만 급급하자 영조는 소론에 대한 보복을 고집하던 민진원(閔鎭遠)
과 정호(鄭澔) 등을 파면하고 이광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소론을 다시 정권에 참여시켰다.
[주03] 무신년 …… 하였다 :
1728년(영조 4)에 소론(少論)과 남인(南人)의 일부 세력이 영조(英祖)와 노론(老論)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추
대하고자 일으킨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을 이른다. 영조가 즉위하여 김일경(金一鏡) 등이 제거되고 노론 정권이 들어서자, 일부 소
론들이 남인들을 포섭하여 반정을 도모하기 위해 비밀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1727년에 영조가 정미환국으로 탕평책을 실시함에 따
라 서울의 많은 소론들이 이탈하였다.
이에 초조해진 지방의 세력들이 이인좌를 대원수로 삼고 1728년 3월초에 안성과 양성에서 거병하여, 3월 15일 충청 병사 이봉상
(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을 죽이고 청주성을 함락한 후 기세를 떨치고 도성을 향해 진격하였으나 안성(安
城)과 죽산(竹山)에서 관군에게 대파당하고 이인좌 등 수뇌부가 체포되어 평정되었다.
[주04] 이사성(李思晟) :
?~1729. 1728년(영조4)에 이인좌(李麟佐)가 정변을 기도할 때, 총융사 김중기(金重器), 금군별장 남태징(南泰徵) 등과 모의하여
병사를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영조(英祖)의 친국(親
鞫)을 받았다. 이듬해 3월에 참형되었고 그의 처자도 또한 연좌되어 처형되었다.
[주05] 총융사 …… 하니 :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총융사로 있던 김중기(金重器)에게 출진하도록 명하였으나 병사와 말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머뭇
거렸고, 출진(出鎭)한 후에도 혼미하여 그르친 일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장붕익(張鵬翼)이 총융사의 직임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英祖實錄 4年 3月 17日, 20日, 21日》
[주06]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장공(張公) :
장만(張晩, 1566~1629)으로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집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이 공로로 진무 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
祿大夫)에 올라 옥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이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통진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주07] 공후간성(公侯干城) :
국가를 위하여 방패가 되고 성이 되는 훌륭한 장수를 뜻한다.《시경(詩經)》〈주남(周南) 토저(免罝)〉에 “씩씩하고 늠름한 장수는
공후의 방패와 성이로다.〔赳赳武夫, 公侯干城.〕”라고 하였다.
[주08] 종성(鍾城)의 적소(謫所)에서 돌아와서 :
장붕익(張鵬翼)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에 김재로(金在魯), 신사철(申思喆) 등과 함께 노론(老論) 김창집(金昌集)의 당(黨)으로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풀려나왔다.
[주09] 전(傳)에 …… 하였으니 :
《예기(禮記)》〈악기(樂記)〉에 “군자는 큰북 작은북 소리를 들으면 장수의 신하를 생각한다.〔君子聽鼓鼙之聲, 則思將帥之
臣.〕”라고 하였다. 고(鼓)는 큰북이고 비(鼙)는 작은북인데, 고대에 군중(軍中)에서 공격 명령을 내릴 때에 사용하였다.
[주10] 심려(心膂)를 …… 변하였고 :
영조(英祖)가 정미환국(丁未換局)을 일으켜 노론(老論) 중신들을 물리치고 소론(少論)을 조정에 포진시킨 일을 말한다. 심려는 주
목왕(周穆王)이 군아(君牙)를 대사도(大司徒)에 임명하면서 “나를 도와 넓적다리와 팔뚝과 심장과 등뼈가 되어라.〔予翼, 作股肱
心膂.〕”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여 임금을 보좌하는 중신(重臣)을 뜻한다. 《書經 君牙》
[주11] 종묘의 …… 뻔하였으니 :
환란을 겪어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하였다는 뜻이다. ‘종묘의 종틀〔鍾簴〕’은 국운(國運)을 비유하는 말로, 《신당서(新唐書)》
권203〈우공이열전(于公異列傳)〉에 “종틀이 옮겨 가지 않았고, 종묘도 예전과 같았다.〔鍾簴不移, 廟貌如故.〕”라는 말이 나온
다.
[주12] 입곡(笠轂) :
장수가 타는 병거(兵車)의 뜻으로, 곧 고관의 지위를 비유한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선공(宣公) 4년 조에 “또 한 대의 화살
을 쏘니, 수레의 끌채를 지나 입곡에 꽂혔다.〔又射汰輈, 以貫笠轂.〕”라고 했는데, 그 주에 “병거에는 덮개가 없다. 존귀한 사람이
병거에 탔을 경우 곁에 있는 사람이 삿갓을 들고 곡(轂)에 의지해 서서 추위나 더위를 막는 것을 입곡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며, 일
설에는 삿갓 모양으로 된 시루의 뚜껑인데 화살을 막는 것이라고도 한다.
[주13] 조 문자(趙文子)의 그리움 :
훌륭한 사람이 죽어서 다시 살아 돌아오게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그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조 문자는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상
경(上卿)인 조무(趙武)로, 문자는 그의 시호이다.《예기(禮記)》〈단궁(檀弓)〉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 문자가 숙예(叔譽)와 함께 구원(九原)을 구경하였는데, 조 문자가 말하기를 ‘여기 죽은 이들을 만일 살릴 수 있다면 내 누구와
함께 돌아갈까?’ 하니, 숙예가 말하기를 ‘아마도 양처보(陽處父)일 것이다.’ 하였다.
조 문자가 말하기를 ‘양처보는 진나라에서 일을 혼자서 다 처리하고 너무 꼿꼿하여 자기 몸을 제 명대로 마치지 못하였으니, 그의 지
혜는 칭찬할 것이 못 된다.’ 하였다. 그러자 숙예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구범(舅犯)일 것이다.’ 하니, 조 문자가 말하기를 ‘이익을 보
고 그 군주를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의 인(仁)은 칭찬할 것이 못 된다.
나는 수무자(隨武子)를 따를 것이다. 자기의 군주를 이롭게 하면서도 자신의 몸을 잊지 않았으며, 자기 몸을 도모하면서도 자기 친
구를 버리지 않았다.’ 하니, 진나라 사람들이 조 문자가 사람을 잘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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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刑曹判書 張公神道碑銘) - 李宜顯
上之元年, 其將曰張公鵬翼。 公威望夙著, 中權奸忌, 竄之極北者有年。 首膺鋒車之召, 自御營轉訓局, 中外翕然。 先是, 上在春宮, 一鏡等諸賊締結宦豎, 謀危聖躬。 及上嗣位, 凶圖猶未戢。 公掌轂下兵, 一力衛護王室。 丁未七月, 上忽下敎盡逐廷臣, 布列一鏡黨, 而公則亟命奪符。 公退居鄕里, 知賊必動, 憂憤疾大發。 戊申三月, 賊歐三南兵, 先屠淸州, 殺節度使李鳳祥, 不日將傅京都。 公聞報, 輿疾入朝。 上召見嘉奬, 拜副摠管, 命直宿闕中。 柄相欲出之南漢, 以內輕不許。 時逆賊思晟以西閫反, 使裨安樞入京察事機。 公密跡而寘之法, 晟喪心無辭就縛。 始晟與諸賊約以胡服長驅, 微公其殆矣。 摠戎使金重器有通賊跡, 以公代其任。 駐節畿左, 賊徒憚公, 從間路行。 公擒其將李培, 檻送京師, 誅之。 又捕導賊應賊者, 次第藁懸, 諸賊悉平。 亡何, 移拜御營大將。 明年, 特陞判尹。 又明年, 復領訓局。 睿眷愈注, 而忌者不止, 至陰遣刺客必欲害公。 苟非聖明在上, 公之保全難矣。 公爲人嚴毅有防範, 尤善於御衆, 拊循制節, 操縱得宜, 唯持大體, 不事煩苛。 以此紀律自整, 而人樂爲用。 公於玉城張公門孫也, 平生揚歷多彷彿, 伉健饒籌略亦同。 然其所値之時, 視前益懸, 履虎愬愬, 蓋不足言, 爲公者噫亦艱矣。 公見朝廷治賊太緩, 使梟音未悛, 每仰屋竊嘆, 務爲先庚後甲之圖。 以是終公之世, 賊畏慴不敢逞。 古所謂“公侯干城”, 公眞其人哉!
公字雲擧, 仁同人。 曾祖次周, 弘文修撰; 祖世明, 韓山郡守、贈吏曹參判 考夏顯, 贈吏曹判書。 妣全州李氏, 參判端錫女。 親受貞夫人誥與兩世追典, 皆用公貴也。 公幼, 已踔厲不群, 工書鍊藝。 急於養親, 投筆登己卯科, 時年二十六。 選宣傳官, 歷摠府郞、太僕內乘, 出爲昌原府使。 由訓鍊正陞禁軍將, 轉三陟、全州二營將, 又出爲定平、中和、宣川府使。 稍遷忠淸水使、慶尙左兵使, 又爲永興府使, 以治最陞嘉善。 公才長於剸理, 所歷多樹碣見思, 至有繪像以祠者。 以訓局中軍, 連拜驪州牧使、春川府使, 軍門留, 不遣。 已拜京畿水使, 內遷捕盜大將。 辛丑, 丁母夫人憂。 旣自鍾城謫所還, 爲漢城左尹、刑曹參判、同知中樞, 屢兼軍器提調、同知義禁、知訓鍊事。 後歷判工、刑二曹, 兼知義禁、都摠管。 及卒, 用長子從勳贈左贊成。
夫人草溪鄭氏, 統制使弘佐女。 男泰紹, 兵使; 啓紹, 直長。 泰紹三男四女 男志恒, 女適韓師敎, 餘幼。 啓紹二男, 亦幼。 側室男懿紹、徽紹, 女適孟淑彦。 公內行篤至, 事親一以順志爲孝, 以及昆弟族戚, 友悌睦姻, 多人所難及。 尤喜赴人之急, 心事坦夷, 不帖帖細瑣。 好談諧, 尙氣節, 外若疎蕩, 少商量, 而中有彌綸, 所計度必皆經遠, 唯以廉謹自飭。 其爲將, 未嘗浪費財力, 有可賞, 散給無吝。 公以乙卯三月十三日卒, 前三日, 大星隕, 其聲如雷。 訃聞, 上震悼, 下哀綸, 賻助加等。 葬豐德進鳳山, 軍校之哭送者, 亘數十里不絶。 公之爲小官, 余已心器之, 至晩年愈信近。 雖艱虞溢目, 猶以公在朝, 少紓宗國之憂。 今時事之危凜, 日甚一日, 而公則九原, 已難作矣。 感念存沒, 銘其可辭 銘曰。
傳稱聽鼙, 思將帥臣。 自古在昔, 必須其人。 矧値艱棘, 宜極選掄。 處則鞏國, 出爲濟屯。 於惟張公! 天賦超倫。 用衿易弁, 基以孝親。
移忠日月, 迪知忱恂。 心膂一失, 朝局倏新。 黃猿之事, 鍾簴幾淪。 噫微公力, 孰掃妖塵 奈此凶儔, 胸詬目瞋 彼方急公, 聖倚其純。
中權笠轂, 仡然長身。 將星俄坼, 緯耀沈湮。 文子之思, 恨結千春。 我述遺美, 刻之瑩珉。 匪直公述, 寔哀斯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