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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에 부는 바람
칼 오베? 나, 아니 에르노야. 통화는 처음인 것 같군. 어때, 요즘 좀 살만하지? 그렇게 책이 많이 팔렸다니. 내숭 떨지 말고 좋아하게나. 그 마음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 당신 책 이야기로 여기 파리도 좀 술렁이고 있어. 그 곳 노르웨이에서처럼 하나의 현상으로 번질 조짐이 있지. 부러워. 이제 밥벌이에 신경 쓰지 않고 글쓰기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된 당신이. 사실 우리 작가들이란 말이야, 글쓰기 말고는 도통 다른 일에는 흥미를 못 느끼는데, 밥벌이를 위해 쓰던 글을 던져두고 밖으로 나가야 할 때, 참 심란해지지. 인구 500만인 나라에서 50만부나 팔리다니. 그건 당신나라 사람들 열 명 중 한 명이 읽었다는 말이잖아. 과연 ‘크나우스고르 현상’이라 할 만하군. ‘크나우스하다’라고? 당신의 현상을 일컫는 유행어가? 그 말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을 읽는다는 말이기도 하고, 어떤 일을 너무도 세세하게 기억한다는 뜻이라고도 하니, 당신의 이름이 동사로 전용된 거네. 가히 <나의 투쟁>의 폭발적 인기가 짐작돼. 그저께 한국의 손훈영이 나에게 긴 메시지를 타전했더군. 남북으로 갈라진 작은 나라의 그 애숭이 작가 있잖아. 이 21세기라는 것이 교신에 있어 속전속결 시대 아닌가. 까톡,까톡, 오도방정을 떨며 작은 창 안에 금방 깨알 사연을 소복이 쌓아줄 수 있는 카톡이라는 놈이 있는데도 느린 호흡의 아날로그적 긴 메일을 보냈더군. 그것은 드물게 기쁜 일이었지. ‘아니~’라 부르며 무람없이 손을 내미는 그 선선함이 마음에 들었어.
아니(Annie). 당신을 이렇게 '아니'라고 다정하게 부르는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선생님이나 작가님이라고 부르기에는 당신이 너무도 가깝게 느껴집니다. 나이와 성별과 피부색을 초월한 그 무엇이 이미 나와 당신 사이에 형성되어 버렸기 때문이겠지요.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이나 화선지에 스미는 한 방울의 먹물처럼 돌이킬 수 없게 말입니다. 매일 아침, 혹은 오후 어느 한 시간, 또는 한 밤중 잠시, 노트북을 열기만 하면 바로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바탕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의 존재감은 나의 글쓰기에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 동력을 제공합니다. 무엇보다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교신창을 열어주셔서. 이 메일의 시작은 당신의 책 <칼 같은 글쓰기>입니다. 오래전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었는데 잘 구해지지 않아 그만 잊고 있었던 책이었지요. <칼 같은 글쓰기>는 이미 절판되어 오프라인 서점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터넷을 뒤졌고 한 사이트에 매물로 나온 것을 발견하고 얼른 사들였습니다. 절판본이라는 몸값 때문에 출판당시 정가를 훨씬 상회하는 금액이었는데 그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발견의 기쁨은 컸습니다.
<칼 같은 글쓰기>는 말해주었습니다. 아니 에르노 당신이 결코 만만한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요. 이 ‘만만한’은 어디서 연유한 것이었을까요. 당신의 또 다른 책 <단순한 열정>, <탐닉>, <집착>등에서 당신의 연애담을 그런 식으로 까발리는 작가라는 선입견이 작용하지 않았다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책들에도 분명 나를 끌어당기는 자력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칼 같은 글쓰기>를 읽으며 느꼈습니다. 당신이 단지 까발리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 당신의 <단순한 열정>과 <탐닉>은 빙산의 10프로라는 것을요. <칼 같은 글쓰기>는 당신 안에 가라앉아 있는 90프로였습니다. 작품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당신의 글쓰기 방식과 더 나아가 삶의 태도에 대한 솔직한 토로는 어떤 허위나 포장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읽는 동안 제 안에서 일어난 그 무언가가 당신에게 메일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했군요.
그동안 저의 글쓰기는 열망과 회의의 길항작용이었습니다. 글쓰기 자체가 주는 희열이 컸던 만큼 문학적 도식이라는 올가미가 주는 고통 또한 컸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 대부분에게 통용되는, 소위 문학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도식. 그 도식 안에 제 글쓰기를 집어넣어야 하는 힘겨움은 자주 글쓰기의 맥을 놓게 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도대체 어떤 것에서 지속적 글쓰기의 동력을 얻는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칼 같은 글쓰기>에는 당신의 문학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책이 대담형식인 줄은 첫 장을 넘기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엄격하고 대담한 글쓰기의 궤적이 더 이상 솔직할 수 없을 정도로 세세하게 말해지고 있었습니다. 일상과 글쓰기의 상호 침투에 대한 부분은 아, 아무런 소득 없이 매일 뭔가를 끄적이고 있는 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던지요. 하나의 텍스트를 구상하고 실현해 나갈 때 그 시점의 삶이 텍스트에 작용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텍스트를 만들어 가는 글쓰기 자체가 삶을 변화시키기도 한다는 말. 그것은 글쓰기가 단순한 여기이자 취미이기에는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가볍지 않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그것도 긍정적 영향 쪽으로 말입니다. 자신의 삶을 쓰고 자신의 글쓰기를 산다는 것은, 삶과 글쓰기라는 두 차원을 동시에 사는 느낌을 주는, 어쩌면 가장 멋진 삶의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외부-인간 일반과 세상적 진실-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내부-나라는 인간 하나만을-를 씁니다.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살을 붙이고 허구라는 틀에 세상의 진실을 쏟아 넣어 보여주는 것이 문학이라면 저의 글쓰기는 문학과는 거리가 멉니다. 나는 나를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글쓰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 굳이 허구라는 틀을 만드는 일에 힘을 쏟고 싶지 않습니다. 내 한정된 에너지는 내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만으로도 늘 간당거립니다. 내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일은 그 어떤 것을 쓰는 일보다 급박합니다. 허구를 만들고 살을 붙이는 일에 쏟을 시간과 에너지가 없습니다. 제 삶의 진실 하나만이라도 바닥까지 파헤칠 수 있다면 이미 그 글쓰기는 문학적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글쓰기에서 아릿한 진실하나, 피 묻은 깨달음 하나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을 얻게 되는 순간 저는 이 세상과 견고하게 연결될 것입니다. 비록 문학적 글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하더라도, 문학이 한 미소한 인간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것이라면, 저는 문학적 글을 쓰는 셈이 됩니다. 내부를 나열하는 것만으로 그치든, 내부와 외부가 연결될 때까지든, 어느 쪽이든 저는 쓰겠습니다. 나만을, 나의 이야기만을 쓰겠습니다. 자전적 글만을 쓰겠다는 말입니다. 그 일에 나의 구원이 있기에. 그런 의미로 당신은 나의 후원자입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으며 이야기 대신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행동 대신 내면 독백이 많은 것. 도덕이나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넘어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감정들을 찔러대는 당신의 글. 당신의 글들은 내내 저를 떠나지 않던,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불안과 의혹을 단번에 제압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안심이고 위로였습니다.
당신이 글쓰기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말할 때 당신은 ‘작품’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것은 닫힌 단어라고요. ‘글쓰기’ 내지는 ‘책쓰기’같은 단어를 선호하는데 그것은 진행 중인 활동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문구를 읽는데 하, 마음이 벅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너의 판단이 그르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았을 때의 감정이었다고나 할까요. 종종 제가 쓴 글을 칭해야 할 때 작품이라 말하기가 웬지 쑥스럽고 내키지 않은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작품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주로 ‘내 글’이라는 말을 쓴 이유를 말입니다. 한 편의 글이 완성되었을 때의 뿌듯함은 언제나 얼마간의 부끄러움이 혼재하는 감정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오래 동안 전 세계 양식 있는 작가들의 너무도 높고 깊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읽어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그 작품들과 내 글이 은연 중 비교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내 글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내 글을 무의미하다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진지하게 자신을 거기에 투영했습니다. 그런 복잡 미묘한 감정이 깔려 있으니 내 글을 남에게 내보일 때 쑥스럽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의미의 쑥스러움입니다. 내 글을 작품이라 말하기가 내키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작품이라고 하면 작품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글쓰기라는 말에는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에 방점이 찍힙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 글쓰기는 작품을 생산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보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과정 그 자체에 글쓰기의 모든 보상이 다 들어 있다고나 할까요. 그것이 글을 쓰고 있는 저의 행위에 다른 어떤 대가나 보상이 들어 있지 않다하더라도 저의 글쓰기가 지속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얼마 전 어느 동인지에 낼 짧은 글을 하나 쓰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10매 인간. 그 글에서 저는 말했지요. 글쓰기는 저의 투쟁의 도구라고요. 만만한 삶이 있을까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삶은 두 주먹을 불끈 쥐어야 하는 일입니다. 맨주먹으로 싸우는 것보다 도구가 있으면 좀 더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선택한 그 도구가 바로 글쓰기라는 말이지요. 왜냐면 좀은 잘 다룰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종종 뜻하지 않은 희열과 맞닥뜨리기도 하니까요. 삶을 밀어 붙이는데 저에게 이보다 더 적합한 도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Annie) 당신도 알다시피 지금 노르웨이에서 ‘크나우스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칼 오베, 그 말입니다. 하필 그가 그 때 눈에 뜨이다니요.
창작의 과정이란 것이 몇 번의 허물을 벗으며 마침내 하나의 견고한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인데 그 허물벗기에 어찌 한 점 고통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창작이란 애벌레에서 나비까지의 그 고통의 기록일지도 모릅니다. 해서 극단적인 해석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고통이 따르지 않는 예술 창작이란 교묘한 속임수로 포장된 하나의 고급사기라고요. 나의 글쓰기는 나의 곤경의 기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비망록쓰기’는 그랬습니다. 더 이상 쓸 수 없는 것 아닌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에 의기소침해 있다가도 어느 날 매듭이 풀리듯 한 줄 두 줄 풀리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느낌이 이어지도록 계속 노를 젓는 일입니다. 바닥이 조금씩 움찔거리는 느낌에 힘을 내 계속 저으면 마침내 봇물문장이 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정박할 장소입니다. 출항은 했는데 정박할 장소가 어딘지 모르는 나의 출항. 내가 쓰는 비망록을 어떤 종류의 장르에 귀착시킬 수 있는 것인지, 그 장르를 말할 수 없어 시무룩해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똑 같은 방법, 똑 같은 환경에서 글을 써온 저에게 글쓰기에 대한 총체적 갈등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방법은 아닌 것 같은데 새로운 방법은 아직 잘 모르겠는, 그런 오리무중의 시간이 그만 맥을 놓게 하고 있을, 바로 그때 말입니다.
굳이 문학을 정의하지 않는, 정의된 문학론에 맞게 글을 쓰려는 생각을 과감하게 작파하고 글을 쓴다는, 그래도 좋은 작가로 자리매김하는데 하등의 문제가 없는 작가 두 명이 내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당신 ‘아니 에르노’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칼 오베’는 제가 가장 최근에 발견한 작가입니다. 시력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되고부터 한 작가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은 얼마나 요원한 일이었던가요. 그것은 요즘 제 삶의 가장 쓸쓸하고 가장 암담한 절망감이었습니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노르웨이 작가인 그가 어떻게 나에게로 왔을까요. 한 사람과의 인연이 어떤 징조를 내포하는 것이라면 그와의 만남의 첫 순간이 그렇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제 책상이 놓여있는 골방 수납장 안에는 주로 책과 글에 관련된 물건들이 쌓여있습니다. 스크랩 한 자료들과 욕심스레 사 둔 프린트 용지와 옛 일기장과 편지들. 그 사이로 작은 책자 하나가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더위를 피해 어딘가로 출발하기 위해 가방을 꾸리는 저녁. 수납장 문을 열고 그의 얼굴이 프린트되어 있는 검은 표지의 작은 책자를 발견했을 때, 언제 어떤 경로로 이것을 보관하게 되었는지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칫 다른 책 더미에 묻혀 버렸을 수도 있을,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책 <나의 투쟁>을 출간한 한길사가 그 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낸 작은 사이즈의 얇은 책자였습니다. 표지에 나온 그의 얼굴은 한 번 보면 잘 잊을 수 없을 것 같이 강렬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마를 가로지르고 있는 굵은 주름과 시니컬한 눈동자 그리고 수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단호할 그의 입매.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이었습니다. 뒷면의 전신사진 역시 그랬습니다. 담배를 문 길쭉한 손가락과 덥수룩한 헤어스타일. 사진기만 들이대면 즉각 편집된 표정을 들이미는 여느 사람들 마냥 카메라를 의식한 얼굴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심장으로부터 소용돌이치는 온갖 감정을 무표정이라는 견고한 포장지로 잘 싸매둔 자의 얼굴이었습니다. 큰 키에 잘 어울리는 무채색 자켓. 그런데, 아, 찢어진 청바지입니다. 묘한 느낌의 남자였습니다. 그를 둘러싼 여러가지 외모적 요소들이 그의 정체성을 잘 가늠해볼 수 없게 하는, 복합적이고 미묘한 느낌을 발산하고 있는 남자. 이런 남자라니, 멋지구나. 더구나 나의 투쟁. 이보다 더 멋진 책제목은 요 근래 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책제목을 보자마자 금방 떠오른 것은 히틀러였습니다. 히틀러가 쓴 자서전 ‘나의 투쟁’의 부정적 이미지를 감수하고 과감하게 사용한 그의 책 제목은, 그랬기에 더 멋지게 와 닿았습니다. 분명 그런 제목을 써야만 했을 필연성 같은 것이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과연 그랬습니다. <나의 투쟁>에는 한 개인이 자신의 삶과 대면하여 벌일 수 있는 투쟁의 본질적 의미가 들어 있었습니다. 나와 맥락이 닿은 느낌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그 책 제목이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검정 표지의 그 홍보용 작은 책자가 침체기에 빠진 듯 하던 요즘 내 글쓰기 기운을 단번에 끌어 올려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는 말합니다. 다 가졌는데 기쁘지 않다고. 그래서 글을 쓴다고. 다 가지다니, 뭘 다 가졌겠습니까. 이때 ‘다 가졌다’고 표현한 것은 그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자신이 인생에서 다른 것을 타깃으로 삼으니 지금 있는 것들이 그저 그런 것일 뿐. 요컨대 그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남들이 다 가졌다고 말할 때의 내용물인, 그런 것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의 불행감의 시발점은 바로 여기이지 않을까요. 다른 것을 더 원한다는 것. 이 상태를 아니(Annie), 당신만큼 잘 표현한 사람이 있을까요. “제가 첫 책을 쓰고 있었을 때 저는 가장 강렬한 시간을 살았어요. 오직 삶만이 있는 삶, 그 삶은 충분하지 않아요.” 사는 것만으로 가득 채워진 삶.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 속에 세속적 온갖 좋은 것들이 다 들어 있다 해도, ‘그것들이 다 뭔가’ 그런 지점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아니(Annie) 당신과 칼 오베, 당신들이라고 왜 세상적 온갖 좋은 것들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당신들은 그런 것들이 다 없어도 ‘한 가지만 채워진다면’의 그 ‘한 가지’가 있어야하고, 그 ‘한 가지 열망’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다른 것들은 다 무의미해지는 그런 감각과 감수성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열망은 무엇이겠습니까. 전 존재의 활성화. 자기 몰입과 몰두로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 즉 자신을 넘어서는 상태. 당신들에게 삶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당신들이 바라는 삶의 최종 목표입니다. 마약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상태, 당신들은 무엇으로 이런 상태에 도달하는가. 바로 글쓰기이지요. 당신들은 사는 것만으로 이어지는 지루하고 권태로운 삶에서 하나의 구원을 발견한 셈입니다. 그 구원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내어놓지 않으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는 점에서 위험부담이 큰일입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 한 아름다움을 창조한다는 것. 완미(完美)의 세계는 하나의 경지입니다. 모든 창작자들의 최종 도달점인 완미의 세계. 아침이슬이나 초사흘 눈썹달 같은 지고의 아름다움은 왜 모두 그리 빨리 사라지는지요. 아니, 찰나에 사라져 버려야 할 운명이기에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위험부담으로 인해 섣불리 많은 사람들이 덤벼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기꺼이, 그것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무의미하기에, 그것에 매달리는 위험한 종족.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 위에 작은 쪽배를 타고 흔들리는 21세기의 소수종족입니다. 조금 불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저도 다수보다는 소수 쪽임을 자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제법 가졌음에도 저는 기쁘지 않습니다. 해서 글쓰기를 합니다. 글쓰기에는 행복에는 없는 강렬함이나 타오름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는데 기쁘지 않아 글을 쓴다는 칼 오베. 누가 뭐라던 당신과 칼 오베는 같은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프랑스어로 칼 오베는 노르웨이어로. 그리고 나, 손훈영은 한국어로 조용히 읊조리고 있군요. 이제 그 누구에게보다 친밀함을 느끼게 된 당신들 곁에서.
당신과 칼 오베를 읽어 나가는 일련의 작업들은, 여느 책읽기와는 다르게, 나의 지적 허영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글쓰기 감수성을 심화시키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난관에 봉착한 내 글쓰기에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해 준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그 무엇도 자신을 자극하는 것이 없는 폭염의 나날에 유일하게 나의 뇌리에 꽂힌 사람.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그는 말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매일의 삶을 이겨나간다고. 글쓰기가 곧 나의 투쟁이라고. 그 투쟁의 과정을 기록해 놓은, 총 6권 3622쪽에 달하는 그의 자서전적 글을 통해 나에게 힘주어 말합니다. 너와 나의 글쓰기 바탕은 이란성 쌍생아 같은 것이라고. 그러니 너의 비망록을 출판하라고. 그것의 출간은 세상적으로는 실패라 할지라도 너의 투쟁에서는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 확실하다고. 오늘부터 명확하게 내 의식 안에 새겨놓겠습니다. 앞으로 내 글쓰기의 전범은 당신의 <칼 같은 글쓰기>와 칼 오베의 <나의 투쟁>이라고. 묵시록적 더위의 포위망 안에서 내내 그를 생각했습니다. 그가 그리했으니 나도 그리하리라. 그는 이미 그가 한 일로서 내가 앞으로 할 일에 보증을 서줍니다. 노르웨이의 보증인, 글로블적 보증인입니다. 분명한 것은 내 글쓰기 방향에 이보다 더한 확실한 보증을 해 준 사람은 지금까지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올 여름은 그다지 허무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름에 일어난 생각들과 결심을 잘 마무리 한다면, 더 정확하게는 ‘아니 에르노’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를 체화시킨다면. 그동안의 글쓰기를 일단락 짓고 처음처럼 새로 선 플랫폼, 그곳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참 청량합니다. 당신의 칼 같은 글쓰기는 내내 이어지겠지요. 당신의 칼이 더 예리해지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어느 매체와 진행한 칼 오베, 당신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지.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있었는데 그 질문들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아주 명쾌했어. 작가가 되려면 작가가 되는 게 인생의 딱 한 가지 바람이어야 한다는 거, 쓸 때와 읽을 때는 다른 일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칼 오베 당신은 말했어. 투쟁이 곧 인생이고 투쟁 덕분에 인생이 살 만하고 풍요롭다고. <나의 투쟁>을 읽으며 손훈영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열광했어. 당신은 참 촘촘하게도 추적해놓았더군. 당신의 일상생활에서 겪은 소소한 굴욕감, ‘파충류’적인 욕망, 떨치기 힘든 나쁜 생각들을 말이야. 굴욕감, 욕망, 나쁜 생각들. 누군들 이런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어. 그것은 거의 일기에 가까웠어. 내 글쓰기에도 이 일기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당신도 알다시피 내겐 두 가지 형태의 글쓰기가 있지. 미리 계획된 텍스트들이 있고 오래전부터 행해온 잡다한 형태의 일기쓰기가 있어. 한국의 수필작가인 손훈영도 이런 방식의 두 가지 형태의 글쓰기를 하고 있다더군. 저 멀리 지구 한 귀퉁이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과 같은 방식의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무엇보다 큰 위로였나 봐. 프랑스의 아니 에르노와 한국의 손훈영은 그렇게 연결되었고 앞으로 우리 둘의 관계는 아마 더 돈독해 질 거야. 이것이 책이 가진 위력 아닐까? 칼 오베 너도 끼워 줄까?
(수필세계 2018 겨울호 발표)
약력/
2016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2016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2016계간 수필세계 봄호 등단
첫댓글 글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부럽습니다.
선생니임~
그저 반가울 따름입니다.
잘, 계시지요?
공간은 달라도
우리의 지향점이 같다는 생각은
선생님을 아주 가까이 느끼게 합니다.
건필하십시요.
손훈영 작가님~ 잘 읽겠습니다^^
와우~ 진짜 뜻밖의 분이 들어오셨네요^6^
님이 문춘희님일때부터,
작품을 눈여겨 보고 있었던 터라
오늘 지면으로의 이 해후가 얼마간 설레기까지 하는군요.
반가웠습니다^!^
수필세계 겨울호에서도 읽고요,
여기서도 또 보네요.
역쉬 훈영샘.
훈영샘이 칼 오베나 아니를 만날 수 있기를 ......
이것이 원본입니다.
수필세계 게재원고는 어느 과정에서 잘못됐는지
첫째 단락이 완전 허물어져 있더군요ㅠㅠㅠ
잘 읽었습니다.
소설쓰기는 나이들어선 힘들다고
얘기 하던데 손작가님은 아닌가 봅니다.
부럽습니다.^^
이 글은 소설이 아닙니다.
긴 수필이지요. 자전적 글이니까요.
하긴 수필이라는 장르를 너무 좁은 틀안에 가둘 때
이 글은 수필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일과 글로 늘 바쁜 송작가님이 읽기에는 너무 긴글이었지요?^^
건필하십시요~
아~그렇군요. 죄송합니다.
그
근무 중 읽다보니 여유가 없었네요.
조용한 시간에 들러 다시 찬찬히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