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텔과 예식장의 공통점은 뭘까? 남녀가 만나, 관계를 맺고, 욕망을 완성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찰나의 쾌락을 꿈꾸는 인스턴트 커플과,
장밋빛 미래를 약속한 연인들이 찾아드는 이곳의 환상을 바늘구멍 사진기로 포착한 사진가 박홍순을 만났다.
박홍순의 세 번째 개인전인 ‘꿈의 궁전’ 출품작은, ‘대동여지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백두대간과 한강
지류를 기록해온 전작과 사뭇 다르다. 엄정한 흑백사진으로 구현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면모는 사라지고, 파파라치가 다급히 찍은 캔디드
사진처럼 흐릿한 컬러사진만 남았다.
2004-03-10 양수리 1-1
꿈처럼 아련히 보이는 사진 속 풍경은, 뾰족지붕에 깃발이 꽂힌 유럽풍 성채나, 이슬람 양식의 원추형 지붕, 이집트 피라미드, 자유의 여신상
따위다. 처음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나 감회에 넘쳐 찍을법한 이런 기념사진을, 박홍순은 왜 굳이 찍은 걸까?
2005-10-09, 전농동 1
모텔과 예식장-성지(性地)와 성지(聖地) 사이
그러나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고, 다시 작품의 제목을
보면, 곧 작가의 삐딱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하와이로 보이는 야자수 사진은 ‘양수리’, 유럽 어디쯤인 듯했던 사진은 ‘난곡’이란 제목을 달고
있기 때문. 이 풍경이 서울 도처에 있는 예식장과 모텔촌에서 흔히 보이는, 국적 불명의 키치적 건축물임을 그때서야 깨닫고 이마를 친다.
박홍순이 찍은 모텔 풍경은 사랑의 환상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소들이다. “오빠 믿지?” 따위 구닥다리 멘트를
날리며 어수룩한 여자를 낚는 난봉꾼에게든, ‘원나잇 스탠드’면 족한 인스턴트 커플에게든, 모텔은 조마조마한 욕망을 완성하는 성지(性地)다.
모텔은 ‘숏타임’이든 ‘롱타임’이든, 투숙객이 지불한 돈만큼의 쾌락과 환상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환상을 극대화하는 장치가 바로 고딕 양식, 바로크 양식, 이슬람 양식, 심지어 피라미드와 야자수와 자유의 여신상까지 총동원된 국적
불명의 키치적인 건축물이다. 수많은 모텔의 뾰족지붕 아래 나부끼는 ‘승리의 깃발’이야말로, 이 공간이 지닌 함의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전시 전경. 서양의 성채를 닮은 건물 첨탑에, 승리의 기념비 같은 깃발이
휘날린다.
보장할 수 없는 행복의 ‘증명사진’
모텔과 정반대 지점에 있는 예식장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부부가
된 이들은 영원한 사랑을 꿈꾸며 예식장을 나서지만, 결혼한 두 쌍의 부부 중 한 쌍이 이혼하는 통계 앞에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이란
서약은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 “…그래서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라는 동화 속 이야기는, 21세기에 이르러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현실이 그럴수록 예식장은 결혼의 환상을 심어주기에 더욱 골몰하게 된다. 예식장이라는 성지(聖地)는 경쟁적으로 우람한 성채의 모습을
갖추면서 고객 모두를 ‘행복한 왕자와 공주’로 만들고자 한다. 결혼 전 드레스와 턱시도를 갖춰 입고 의례적으로 하는 웨딩 촬영은 물론, 결혼식
당일 양가 부모, 일가 친척, 친구 등 촬영 멤버를 바꿔가며 지겹도록 찍는 사진 역시, 모두 ‘행복한 미래’의 증명사진을 꽝! 소리 나게
박아놓기 위한 것이다. 비록 그 행복이 얼마나 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해도, 궁전을 닮은 예식장 안에서만큼은, 그들의 행복은 견고하다.
박홍순은 모텔과 예식장이라는, 서로 다르되 닮은 두 공간 속에 숨은 은밀한 욕망을 엿보듯 촬영한다. 일반적인 카메라 대신 ‘바늘구멍
사진기’, 즉 핀홀카메라를 만들어 이 풍경을 촬영하면서 그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얻어낸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훔쳐보기’의 욕망을 촬영
형식을 통해 구현하면서, 바늘구멍 사진기 특유의 아련한 이미지로 인해, 마치 꿈속을 보는 것 같은 모호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이 사진들을 촘촘히 뜯어보면 이들 공간 속에 숨은 허술함을 금세 발견할 수 있다. 한 모텔 앞에는 눈 쌓인 공터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고, 비닐하우스와 나란히 서 있는 모텔이 있는가 하면, 이슬람 궁전 같은 동그란 지붕 뒤로 멀리 아파트가 빼꼼 머리를 내민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숨은그림찾기 하듯 사진 속에 숨은 풍경의 진실을 찾아내는 것도 박홍순의 작품을 감상하는 한 재미다.
전시된 사진들을 핀홀카메라로 들여다보듯 관람할 수 있는 장치도 마련되어, 사람들의
관음적 욕망을 풍자했다.
이번 전시는 7월 19일부터 8월 7일까지 갤러리 쌈지 제1전시실에서 열린다. 바로 옆 제2전시실에서는 세계 유명 관광지의 미니어처
건축물을 관광엽서처럼 보이게 촬영한 김동욱의 ‘그림엽서’전도 감상할 수 있다. 관람료는 무료다. 문의전화 02-736-0088.
[작가
인터뷰]
고경원(이하 고): 이전 작업과 달리 핀홀카메라를 사용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박홍순(이하 박): 핀홀카메라를 쓴 건, 형식과 내용 두 가지 측면에서 이유가 있어요. 눈은 주관적이어서
보고 싶은 것만 보지만, 렌즈는 극명하게 사물을 포착하죠. 하지만 핀홀카메라는 상을 흐리면서 이미지에 환상을 덧씌워요. 디지털카메라가
보편화되면서 필름이 없어지는 시대에, 아날로그적인 핀홀카메라의 특성을 접목해보자는 면에서 시도했습니다. 일종의 ‘디지로그’적인 시도라고나
할까요. 핀홀카메라의 원리는 간단해요. 렌즈 교환식 디지털 카메라에, 렌즈 대신 구멍 뚫은 바디캡을 씌워 사진을 찍는 거죠.
가만히 보면 모텔, 예식장, 카페 세 군데가 모두 이성을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하는 곳이에요. 이성에게 환상을 심어주려는 심리가 거기에
투영된 것이 아닌가 싶었죠. 외국 건축 양식을 제대로 본뜬 게 아니라, 대강 본뜬 이런 건축물들이 유독 우리나라에 많아요.
고: 어떻게 보면 '전 국토의 놀이공원화'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박: 그래요, 어찌 보면 온 나라가 세트장을 지향하는 거죠. 촬영 다니다 보면 진짜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도
많고요. 그것뿐 아니라 잘못된 유적지 복원 문제도 심각해요. 무너진 성곽을 일부만 쌓아 복원하는 게 아니라, 다 허물어버리고 새 돌로 다시
쌓기도 하고….
고: ‘꿈의 궁전’이란 전시 제목도, 사랑에 대한 환상이나 어설픈 무국적 건축 양식을
풍자하기 위해 지은 건가요?
박: 그렇죠. 사실 액자도 원목이 아니라 가짜에요, 플라스틱이야. 원목으로 이만한
액자를 맞추려면 백만 원 가까이 줘야 해요. 근데 내 작품은 이런 가짜가 더 어울리는 거야. 사진을 보면, 사진 테두리에도 가짜 액자 이미지를
연장시켜 놨어요. 액자까지도 작품의 일부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작품 디스플레이도 좀 다르게 해봤어요. 외국 성에 유화 같은 걸 붙여놓는 방식을 보면, 일렬로 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걸어놓잖아요.
‘꿈 시리즈’는 백두대간이나 한강을 찍은 사진들보다 컬러풀하고 장식적이지만, 그 속에서 사회적인 이야기를 할 거예요. 그런
이야깃거리가 없으면 작업을 못해요.
자유분방하게 걸린 액자들. 이집트, 그리스, 이슬람 건축 양식부터 네덜란드 풍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키치적 건축물이 한 자리에 모였다.
고급 원목 액자를 흉내냈지만, 실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금박 액자다. 사진
프레임 바깥에도 액자 이미지를 합성해 넣었다. '가짜 이국 풍경'과 '가짜 원목 액자'의 유쾌한 만남.
고: 그럼 백두대간이나 한강 같은 기존의 다큐멘터리 작업은 어떻게
되나요?
박: 지금은 서해안 찍고 있거든요. 그런 다큐멘터리 작업과 더불어
이런 꿈 시리즈를 세 가지 정도 더 생각하고 있어요. 목표는 1년이나 1년 반에 한 번씩 꾸준히 개인전을 하는 거예요. 강과 바다 시리즈 찍을
것도 아직 일곱 가지나 남았는데 뭐. 서해안, 금강, 낙동강, 영산강, 남해, 동해. 이렇게 하면 3년에 한 번씩 전시회를 해도 21년이
걸려요. 그게 쌓이면 아마 굉장히 의미 있는 결과물이 되겠죠.
고: 홍익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한 후에 동 대학원 산업미술대학원 사진디자인과를
졸업하셨는데, 다소 늦게 사진을 시작한 계기가 있나요?
박: 사진을 늦게 시작했지만, 그만큼 장점도 있어요. 무엇보다 고민을 덜 해요. 사진을 시작하기 전에,
젊었을 때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사진은 문학과 미술 사이쯤에 있다고 생각해요. 비주얼 아트이니까 미술 쪽에 속하지만, 그
배경의 어법은 문학적 어법이예요. 웬만한 사진가들은 학부 때 사진 전공을 안 했으면 최종 학력만 이력서에 쓰지만, 난 자랑스럽게 독문학과
졸업했다고 써요. 왜냐면, 거기서 내 사진이 출발했거든. 나는 그렇게 써야 돼. 사진을 하고 있지만, 그게 맞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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