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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1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교회 이야기’ - 3. 거룩한 부담 내려놓기!
본문 : 사도행전 5장 4절
그 땅은 팔리기 전에도 그대의 것이 아니었소? 또 팔린 뒤에도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소?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할 마음을 먹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오." <새번역>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앙적인’ 언어인 것처럼 쓰이는 말들에 대해서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믿으면 만사형통’, ‘고난도 축복’, ‘헌금 안하면 고통이 찾아온다.’, ‘예배 똑바로 안 드려서 그런 일이 생긴 거야!’, ‘예배는 안 드려도 축도는 받아야 한다.’, ‘무서울 땐 주기도문’, ‘무조건 순종’ 등등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마치 장로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과 아무 상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요되었던 것처럼 때론 그런 언어들이 우리를 옥죄어 올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마태복음 15장 3절, 새번역>
저는 이런 말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을 뽑으라고 한다면 바로, ‘거룩한 부담’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성경 어디에도 ‘거룩한 부담’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보여질만한 뜻은, 그렇게 해석될만한 구절은, 하나님의 명령이나 말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인하여 무엇인가 전달하거나, 무엇인가를 하게 만들거나, 무엇인가를 이끌어내야 하는 인간, 특별히 설교자의 해석이나 명령이라고 볼 수 있는 단어입니다. 부담은 부담일 뿐입니다. 아무리 ‘거룩한’이란 멋진 형용사로 꾸민다고 하더라도 결론적으로 부담은 부담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공동체 속에서, ‘부담감’ 이라는 녀석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담감은 우리를 뒷걸음질 치게 만듭니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막고, 소극적인 태도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하면 부담스러운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순리에 맞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인데, 부담스러운 일인데, 억지로 해야 할 교회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부담과 억지가 만나면 가장 안타까운 일이 바로 ‘감사’를 상실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담을 거룩한 부담으로 바꾸어 버리게 되면, 그 때부터 그리스도인 스스로가 느낄 혼란이 가중되기 시작합니다. 분명히 자원하여 하는 일이 아니기에 ‘전심’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다보면 뭔가 알게 되겠지’, ‘계속 하다 보면 느끼는 바가 있을거야’ 라고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자꾸만 지쳐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 지쳐 가는 줄 아십니까? 그건 하나님이 주신 부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의해 주어진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부담’이라는 명목 아래, 사람의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에 의해 ‘거룩한 부담’은 어느 순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것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생겨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특별히 ‘헌금’과 ‘예배’에 대해서 가장 강력하게 요구 되어 집니다. 과부가 드렸던 두 렙돈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그 가난한 과부도 드렸는데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드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그 가난한 과부도 드렸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너무도 큰 부담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그게 ‘거룩한’ 부담이라고 하니,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니, 내고 싶지 않은데 내야 하는 것일까 고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망설이는 이에게 하나님이 채워주신다고 합니다. ‘사르밧 과부’ 이야기를 가지고 옵니다.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드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채워주신다고, 그것이 얼마나 강요된 은혜인지 모른 채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은 채우시는 분입니다. 맞습니다. 100% 동의합니다. 그런데 드렸다고 해서 채우시고, 드리지 않았다고 해서 채우시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극적인 스토리가 있는 이들에게 극적으로 임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큐만 찍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느 장르에 상관하지 않으시고 동일하게 역사하시고,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공의의 하나님이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등장한 인물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특정 인물만, 특정 스토리가 있는 사람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눈물과 고통과 절망과 절절함이 있는 곳에만 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난과 부, 고통과 행복, 절망과 희망, 간절함과 충만함, 그 어느 곳에든 동일하시고 평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거룩한 부담을 가지는 이들에게는 더 큰 축복이 있는 것처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창세기 15장 6절, 새번역>
아직 아브라함도 되기 전이었던 아브람입니다. 매일 매일 실패하던 때였습니다. 자식을 주지 않자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냈던 때였습니다. 신뢰가 바닥을 치고, 부담감이 덮쳐 올 때였습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을 기다리셨습니다. 어떠한 거룩한 부담도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주겠다고 하는 약속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약속이든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주님을 믿으니’ 라는 구절이 등장하였고,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이신칭의’의 놀라운 현장이 된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수많은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부담이라고 생각하며 억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거룩한 부담을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때’를, 즉 하나님의 때(카이로스)와 인간의 때(크로노스)가 만나는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부담이 믿음이 되고, 부담이 고백이 되고, 부담이 감사로 변하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부담’이라는 단어는 감정에 호소하는 사라져야 하는 말일 뿐입니다. 스스로가 부담감이라고 느낀다면 그 것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강요하거나 권면하거나 명령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개인이 스스로 인내와 기도의 터널을 지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원하여 그 부담을 이겨내고 그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박수 쳐주며 응원하면 될 일입니다. 만약 그 부담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정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거룩한 부담이라는 단어로 속도를 내라고 하면, 상처만 가득하게 남을 따름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 거룩한 부담이라는 감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반감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도행전 5장에 등장하는 이 슬픈 이야기도, ‘거룩한 부담’이란 버려야 할 단어 때문에 이런 기록으로 끝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온 교회와 이 사건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크게 두려워하였다. <사도행전 5장 11절, 새번역>
이 사건은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4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바나바’를 중심으로 한 이 기록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에게서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 요셉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사도행전 4장 34~37절, 새번역>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자,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날마다 더해지는 큰 은혜로 말미암아 이런 생활은, 조금도 그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는 축복의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았고,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각 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사도들 중 누구도, 서로 중 누구도 그것을 강요하거나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팔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었고, 필요 그 이상으로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을 떠날 바나바의 결심이 담긴 이야기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바나바의 이름만 등장하는 이유는 바울과 함께 떠났던 인물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함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다른 이들처럼 바나바도 똑같이 행동했을 뿐입니다. 그 역시 초대교회의 한 성도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조금 다른 이야기로 흘러가려고 합니다. 저는 누가가 이 사도행전 5장을 쓰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4장 후반부까지만 쓴다면 얼마나 은혜입니까? 그런데 찬물을 확 끼얹는 이야기를 굳이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록해야만 했습니다. 바로, ‘거룩한 부담’이라는 말에 대해서 경계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잘 지내고 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공동체에 소속되어 매일 매일 은혜 받으며 행복한 신앙의 여정 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4장에 등장했던 나눔에 자신도 자연스럽게 동참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에게 부담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파는 것까지는 부담스럽지 않은데 다 내 놓기는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이 마음 이해 못하는 분이 없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팔지 않으면 됩니다. 그 누구도 팔라고 하지 않았기에 ‘거룩한 부담감’은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에이, 그래도 남들 다 하는데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면 팔아서 솔직하게 말하면 됩니다. 다 드리지는 못하고 일부만 드리겠다고 일부만 사도들에게 전해주면 됩니다.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얼마를 따로 떼어 놓은 나머지를 마치 전부인냥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사탄에게 홀려 ‘거룩한 부담’이란 계략에 넘어간 것은 아닐까요?
그 때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였다. "아나니아는 들으시오.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사탄에게 홀려서, 그대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의 얼마를 몰래 떼어놓았소? <사도행전 5장 3절, 새번역>
여기에서 사탄에게 홀린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바로 ‘성령을 속였다!’ 라는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어떤 마음으로 행동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부부는 ‘몰래’, 성령님도 모르도록, 숨기고, 숨긴 것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안타까운 말이 이어집니다. 이 말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땅은 팔리기 전에도 그대의 것이 아니었소? 또 팔린 뒤에도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소?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할 마음을 먹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오. <사도행전 5장 4절, 새번역>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소유였습니다. 팔든지 말든지 그들의 뜻대로 하면 될 일입니다. 그 누구도 손가락질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초대 교회 공동체에는 당시 가난한 이가 없었기에 굳이 팔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가지고 있더라도, 팔더라도,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가 부담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룩한 부담이라고 홀리는 사탄의 계략에 넘어간 것인지 그들 마음속에 모두를 속일 생각이 찾아들게 된 것입니다. 팔고 나서도 자신들의 마음대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떼어 놓고 전부라고 할 마음을 먹고, 하나님을 속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도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지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안타까운 이야기인지 아내인 삽비라에게서 한 번 더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와에게는 뱀이었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는 아직 완전히 버리지 못한 ‘세상의 소리’가 그 범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세상의 소리를 전했을 것입니다. 박수는 마주칠 때 소리가 납니다. 아나니아의 마음에 있던 세상의 소리 50과 삽비라의 마음에 있던 세상의 소리 50이 합쳐질 때 100이 되어 ‘시험’이란 박수 소리를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베드로는 정확히 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여자에게 물었다. "그대들이 판 땅값이 이것뿐이오? 어디 말해 보시오."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예, 그것뿐입니다." <사도행전 5장 8절, 새번역>
부부는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똑같이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말대로 서로 공모해서 주님의 영을 시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하나님은 모르시겠지’, ‘부담스러우니 다 내놓을 수는 없고 조금 숨겨 놓고 다 내놓은 척 해도 하나님은 모르실거야’, ‘그래도 이렇게 내놓는 게 어디야’ 라고 하는 마음의 소리가 모두에게 들려진 듯 한 현장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삽비라도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일의 결과로 이런 기록이 등장한 것입니다.
온 교회와 이 사건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크게 두려워하였다. <사도행전 5장 11절, 새번역>
1차원적으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것에 대해서 두려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두려움은 3가지로 크게 확장시켜 보아야 합니다.
첫째, 결코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거룩한 부담이라는 말로 아무리 치장해도 부담은 부담이고, 부담은 부담스러운 행동과 결과를 만들 뿐입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사무엘상 16장 7절B, 새번역>
중심으로 원하지 않으면 전심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전심을 중심이라 생각하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다보면 초심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계속 행복한 공동체였을 수 있습니다. 팔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심에 사탄의 홀림은 어찌 보면 달콤한 유혹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소유를 전부 판 것처럼 다들 앞에서 칭찬도 받고, 사실은 조금 남겨 두어서 ‘보험’처럼 든든할 수 있고, 혹시라도 초대 교회를 여차저차해서 나가게 되면 어찌 될지 모르니, 제법 안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중심을 잃으니 전심도 사라지고, 초심마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둘째, 작은 구멍이 큰 댐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도행전 5장의 기록이 굳이 기록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마음을 가졌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하고 싶지는 않고, 팔기는 팔 수 있는데 다 내놓기는 아까우니 방법을 찾아보고 있고, 사람들의 칭찬도 듣고 싶고, 좀 남겨 두고 싶고, 이 양가감정에 사로잡혀 있던 이들이 꽤나 많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라는 녀석은 이런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통해 가장 먼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모두에게 경계가 되어야 했고, 순식간에 초대 교회가 붕괴될 수 있을만한 큰일이었습니다. 교회는 자원이 아닐 때, 억지와 강요와 부담일 때, 결코 든든히 서 갈 수가 없습니다. 헌금은 자원이 아닐 때 그저 돈일뿐입니다. 하나님은 돈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드리는 그 마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없으면, ‘거룩한 부담감’으로만 존재하는 헌금도, 교회도, 공동체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바치고 싶어 하는 모든 남녀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들려고, 기쁜 마음으로 물품을 가져다가 주님께 바쳤다. <출애굽기 35장 29절, 새번역>
거룩한 부담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비교하고, 서로 경쟁하고, 서로의 눈치를 보는 ‘경쟁심리’를 얼마든지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빌립보서 2장 3절, 새번역>
교회 안에 ‘경쟁’이라는 세상 논리가 들어오면 반드시 ‘계급’이 생겨나고 ‘승자와 패자’가 생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어 노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이 사자 앞에서 늘 벌벌 떨어야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가인과 아벨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가인은 자꾸만 경쟁하며 아벨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아벨은 그저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돌려 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가인은 ‘예배’를 자신의 경쟁에 이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지자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일까지 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과의 경쟁이 발생하자 먼저 양보합니다. 생각해보니 우물 경쟁에서 늘 양보했던 이삭이었습니다. 반대로 경쟁에서 밀려나 외삼촌에게 도망쳤던 야곱이었습니다.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이 외에도 성경은 ‘경쟁 심리’가 가져온 결과에 대해서 우리에게 충분히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이 구절에서 등장한 두려움은 ‘경외함’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무서워했다는 것입니다. 왜 무서워했을까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모습에서 본인들도 결코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도, 제 안에도, 우리 안에도, 체면이 중요하고, 자리가 자꾸 의식되고, 나름대로 생각해 놓은 위치가 있고, 사람의 눈을 의식한 ‘경쟁 심리’가 남아 있으며,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보험’을 들고 싶은 마음이 있고, ‘거짓말’은 입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세상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영을 시험하려고 하는 행동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 이제 ‘거룩한 부담’이란 단어를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부담이 부담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면 상대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에게 ‘거룩한’ 이라는 고귀한 언어를 ‘거룩한 부담’이라는 저렴한 언어로 바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부담이 오히려 성장의 밑거름이 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부담감이 아닌 이 말로 대체해 드리며 이 거룩한 부담에서 우리 모두 자유 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야고보서 1장 2~4절, 새번역>
거룩한 부담은 내려놓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소유하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을 기도로 선포하고, 한 주간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첫째, ‘거룩한 부담감’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사람의 생각을 내려놓고 감사를 먼저 회복하기 원합니다.
둘째, 날마다 초심을 가지고 전심을 드리고자 하는 중심이 흔들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셋째, 결코 하나님을 속이는 행동과 말은 하지 않고, 마음을 품지 않기를 원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동역자들과의 ‘경쟁심리’를 버리기 원합니다.
다섯째,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하시고, 진리 안에 자유함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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