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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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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尊賢養士 스크랩 선비의 숨결 소수서원(紹修書院 )
이장희 추천 0 조회 110 14.04.01 18: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선비의 숨결 소수서원(紹修書院 )

 

람이 나이가 들수록 옛 것에 대한 향수가 그리워지나보다.

소백산 희방사를 내려와서 인근의 "풍기온천"에 가서 온천이나 하자고 직원이 졸라댄다.

 

이곳 영주땅까지 와서 남은 해짧은 시간을 어딜가도 흔히 있는 온천탕에서 보낼 것인가 말까를 고민하다가

" 소수서원으로 차 몰아라! 아직 나는 한 번도 안 가봤다 ! "

"지는 두번이나 가봤는데예..." 하며 입 한다발을 빼무는 것을 못본 체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사실, 소백산 송년 정상산행팀과는 풍기온천에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저녁에 식당에서 만나기로하고

레져용 승합차가 뒤집혀지지 않은게 다행일 정도의 난폭운전을 감수하면서 소수서원을 찾았다.(빌어 먹을 놈...)

 

백 육십년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소수서원 (紹修書院)

백두대간의 정기를 머금은 소백산자락 영귀봉(靈龜峰)아래 위치한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 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 ~1554)선생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데서 비롯되었다.

 

1548년(명종 3년)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백운동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이듬해인 1549년 정월에 관찰사 심통원(沈通源, 1499~?)에게 백운동서원에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를 허락한 명종(1534~1568)은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 1484~1555)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고

‘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 (旣廢之學 紹而修之 ) ' 는 뜻을 담은 ‘ 紹修 書院 ' 으로 1550년(명종5년)

친필편액을 하사하고 아울러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서적과 함께 노비를 하사했다


와 같이 백운동서원이 퇴계 이황에 의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되면서 서원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학문의 도장으로서뿐만 아니라 선현의 봉사(奉祀)와 교화(敎化)사업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이로써 퇴계는 서원이 관학인 향교에 대응하는 공인된 사립고등 교육기관으로 성리학의

실천도장이자 道學의 아카데미가 되게 하였다. (내용은 순흥문화유적권 홈피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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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입구, 서원 경내로 들어가는 길에 낙락장송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300년에서 길게는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소나무 수백 그루가 마치 서원을 향해 경배하듯 군락을 지어있다.

이곳 소나무는 겉과 속이 모두 붉은 적송으로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광륭사(廣隆寺)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도 이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예로부터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부르는 소나무는 일찍이 ‘세한(歲寒)후에야 송백(松柏)이 뒤에 시듦을 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고 한 공자의 말씀과 ‘송백(松柏)은 세한지목(歲寒之木)이요 천세지송(千歲之松)’이라는

사마천 사기(史記)의 구절처럼 인생의 어려움과 시절의 흐름 속에서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지조를 잃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는 참선비가 되라는 뜻에서다. 일찍이 노군자(老君子)라고도 불리는 소나무는 유교의 표상인

선비정신과도 결부된다.

한편 풍수지리학적으로 죽계수와 면하는 평지에 입지한 소수서원의 뒤가 허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서원 주변에

송림을 만들어 고즈넉하면서도 울창한 환경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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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

 

소수서원 입구의 소나무 숲을 지나 서원 쪽으로 가다보면 숙수사(宿水寺)지

당간지주가 길 오른쪽 숲 속에 서 있어 눈길을 끈다.
당간지주는 절이 있음을 알리는 이정표로 옛날 이곳에는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었다. 숙수사는 통일신라 초기에 창건된 대가람이다.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융성했던 것으로 보이나 조선시대의 억불숭유정책및 세조3년(1457)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풍기군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면서 없어졌다.

이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절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당간은 절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幢)’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깃대를 고정시켜

받쳐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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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렴정과 죽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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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렴정(景濂亭)은 서원으로 들어서기 바로 전에 있는 정자 건물로 유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던 공간이다.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건립하면서 이 정자를 지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정자 중의 하나이다. 말간 속살이 갓 목욕을 끝낸 여인의 피부같다.

‘경렴정’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이(濂溪 周敦頤)를 경모하는 뜻에서 그의 호에서 첫 글자‘濂’자

를 취했고 안향 선생을 높인다는 뜻에서‘景’자를 취해 붙인 것이다.

전면 3칸에 측면 1칸의 건물로 우물마루바닥에 4면으로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일필휘지의 호방함을 느낄 수 있는

경렴정의 초서 현판은 조선 중기 퇴계의 문인인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의 글씨다.

서원경내와 외부 자연풍경을 이어주는 사방이 시원하게 트인 경렴정은 원생이나 유림이 모여 시연(詩宴)을 열고

풍류를 즐기며 심신을  고양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정자 내부에는 주세붕 선생과 퇴계 선생 등 당대 여러

묵객(墨客)들의 자연을 노래한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유유히 흘러가는 죽계수를 끼고 수령 500년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드리워진 정자는 시공을 뛰어넘어 호연지기

(浩然之氣)를 기르던 유생들의 풍취가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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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렴정에서 죽계수를 격하여 바라보면 ‘경(敬)’과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씨가 음각된 돌출된 바위가 있다.

주세붕 선생은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후 이 바위에 ‘경(敬)’자를 새기고 “오, 회헌 선생을 선사(先師)로 경모하여

서원을 세우고 후학들에게 선사의 학리를 수계(受繼)하고자 하나 세월이 흐르게 되면 건물이 허물어져

없어지더라도 ‘경(敬)’자만은 후세에 길이 전하여 회헌 선생을 선사로 경모하였음을 전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한다.

‘경(敬)’은 성리학에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다(主一無適)’는 의미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이 되는 선비들의 지침이며 성인이 되어 가는 지름길과 같아 효경(孝經)과 맹자(孟子)에서는

공경의 뜻으로, 논어(論語)에서는 삼가 근신하는 의미로 풀이했다.

한편 '경(敬)자' 위에 씌어진 ‘백운동(白雲洞)’이란 글씨는 퇴계 이황선생이 새긴 것으로 전해온다.

덧붙여 이 敬자바위는 순흥땅의 아픈 역사와 얽힌 전설이 있다. 세조3년(1457)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는데 그때 희생 당한 순흥도호부민들의 시신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는데 그때 희생 당한 순흥도호부민들의 시신은 이곳 죽계천에 
수장되고 만다.

그 후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므로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원혼을 달래기 위해 ‘경(敬)’자에

붉은 칠을 하고, 위령제를 지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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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경내로 들어서기 전 죽계천의 건너편에는 운치 있는 자태의 소나무에 둘러싸인 아담한 정자가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이 경자바위 윗부분에 터를 닦아 대를 쌓고 손수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 ‘취한대(翠寒臺)’라

이름 한 것을 본 받아 1986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취한대’란 이름은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천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의 비취 ‘翠’와 차가울 ‘寒’자에서 따온 것이다.

취한대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둥과 기둥사이는 출입하는 전면 중앙 칸을 제외하고 모두 난간으로 막았다.
죽계수를 굽어보며 홀로 앉은 취한대는 산뜻하고 깨끗한 풍취를 자아낸다.

소백산 남쪽 옛날 순흥 고을                  
죽계 찬 냇물 위에 흰 구름 드리웠네          
인재 기르고 도를 밝힌 공 한없이 우뚝하고    
사당 세워 현자를 높임은 우리 나라 효시였네.
우러르고 사모하며 모여드는 저 인재들        
학문 닦는 것이 출세를 위함이 아니라네.      
옛분 볼 수 없어도 그 마음 느껴지니          
차고 맑은 저 냇물에 휘영청 밝은 달빛      
  

         - 백운동서원 생도들에게 [白雲洞書院示諸生〕
                        기유년 풍기군에 부임하여  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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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혼대(消魂臺)는 죽계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서원의 정문 밖 영귀봉의 중턱에 있으며 이곳에는 숙수사의

별대(別臺)로 쓰였던 건물 주초자리가 남아있다.
원래 통일신라때 세워진 숙수사의 별대였으나 서원이 들어선 후 이 자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머리를 식히던

곳으로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손님을 배웅하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소혼이란 근심으로 넋을 잃는다는 뜻인데, 대개 방문객들이 여기서 작별을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혼대’란 이름은 중국 남송(南宋)시대 강엄의 ‘암연소혼자 유별이이의(黯然消魂者 惟別而已矣)’이라는 이별을

노래한 옛 시 「별부(別賦)」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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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에 저것이 뭔가했다....

성생단(省牲壇)은 강학당으로 들어가기 위한 정문 앞에 위치한다.
성생단은 향사 전날 선택한 제물을 성생단 위에 올려두고 원내 제관들이 그 생김새와 흠집을 살피며 제물로서의

합당여부를 검토하는 품평단이다.
제물로는 임금이나 하늘에 드리는 제사에는 반드시 소나 양이 쓰였고, 그 외에는 보통 돼지가 쓰였다.
성생단은 정사각형 평면에 정방형으로 흙을 북돋아 잔디를 심었으며 기단외부로 울타리를 둘러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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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당은 서원 입구 수백 년 세월을 자랑하는 노송군락을 지나 정문 홍전문을 들어서면 마주하는 건물로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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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향으로 배치한 강학당은 서원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다.

보물 제1403호로 지정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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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당의 북쪽에서 강학당을 바라보고 있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는 원장, 교수 및 유사(有司)들의

집무실 겸 숙소로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닌 연속된 한 채로 이루어졌으며 편액으로 구분하고 있다.


직방재와 일신재는 소수서원 창건 이후 263년이 지난 1805년(순조5년)에 건축되었으며 전형적인 다른 서원의

동서재(東西齋)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먼저 서재(西齋)에 해당하는 직방재는 건물이 자리한 방향의 우측에 있는 2칸을 말하며「주역(周易)」의 ‘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써 행동을 가지런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말에서

각각 ‘직(直)’과 ‘방(方)’자를 취했다.


이어 동재(東齋)에 해당하는 일신재는 직방재 좌측에 있는 2칸을 말하며 ‘일신(日新)’은 ‘(인격도야가) 나날이

새로워져라(日日新又日新)’라는 뜻으로 대학(大學)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편 직방재와 일신재는 강학당의 뒤편으로 2칸 정도 물러 있으면서 마루와 방의 높이도 강학당보다 한단 낮게

하였는데 이는 사람이 거처하는 숙소를 선현들의 학문을 숭상하는 강학당보다 낮추고자 해서이다.


선인들은 단순히 배움에 앞서 삶 속에서 선현의 학문을 얼마나 공경했는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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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스승의 처소인 직방재, 일신재(直方齋,

日新齋)의 동북쪽에 ㄱ자로 배치되었다.

학구재란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일명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하며 지락재는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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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학구재와 지락재는 스승의 거처인 직방재, 일신재보다 한자(一尺) 낮게 뒷물림하여 지어졌는데 이는‘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윤리의식이 건축구도로 형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건물 배치에서부터 예(禮)를 염두에

둔 선인의 인간적인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이 구도를 마주하게 되면 ‘글선생은 만나기 쉬워도 사람 만드는 스승은

드물다(經師易遇 人師難逢)’는 말이무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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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각은 서원내 중요한 영정을 모시기 위해 1975년 신축한 목조건축물이다.
건물의 위치는 장서각과 직방재의 후면에 있으며 규모는 전면 3칸 측면2칸의 팔작집이며 모로단청을 했다.

영정각은 회헌 안향의 영정(국보 111호)과 신재 주세붕의 영정(보물717호), 회암 주희, 문충공 오리 이원익,

문익공 한음 이덕형, 문정공 미수 허목, 영정 5점을 봉안 하던 장소이다.

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 수장고로 옮겨 보관하고 대신 복사본을 전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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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좌)와 안향(우)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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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영정

처음 이름은 유(裕)요, 후일 향(珦)으로 고쳤으며 회암 주희(晦庵 朱熹)를 흠모하여

스스로 호를 회헌(晦軒)이라 했고 본관은 순흥이며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안향선생은 소백산 정기를 받고 태어나 순흥이 배출한 위대한 인물이며 우리나라에

중국의 주자학(朱 子學)을 최초로 유입 보급해 이 땅에 유풍(儒風)을 진작한 장본인이다.


1289년(충렬왕 15년) 11월에는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어 왕과 공주를 호위하며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와 공자, 주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이듬해

3월에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성인의 학문을 모아 집대성한 분은 공자이시고
현인의 학문을 모아 집대성한 분은 주자이시고
공자와 주자를 조종으로 삼아 동방성리학을 집대성한 분은
고려의 안자(安子: 안향 선생을 높여 칭한 말)이시다.


( 集群聖之大成者孔子也 )
( 集群賢之大成者朱子也 )
( 祖孔宗朱以啓東方之聖學者安子也)

 

- 공자의 77대손인 중국 공덕성씨가 안향선생을 찬양한 찬문 全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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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각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다. 저 분이 왜 여기 계시나....

최근에 나는 허목선생의 자취를 자주 본 편이다.

대구의 "육신사",학봉종택의 편액.유교문화 박물관,그리고 이곳 소수서원....

 

문정공(文正公) 미수 허목(眉叟 許穆) : 조선시대 문신이요 대학자이며, 전서체의

대가로서 필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부인 이씨는 이원익의 친손녀였다.

영정머리에는 영의정 채제공이 쓴 발문이 있으며, 영정을 그릴 당시 미수선생은 82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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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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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당의 뒤쪽으로 일신재, 직방재와 나란히 배치된 장서각(藏書閣)은 서원의 서적과 서원에서 출판한 판각들을

보관했던 곳으로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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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공묘

회헌 안향(晦軒 安珦)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후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 주세붕(周世鵬)을 함께 모시고

매년 음력 3.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한다.

현판 글씨는 성균관 명륜당(明倫堂)현판을 쓴 중국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보물 제1402호로 지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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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관에는 서원의 양대 기능인 「강학(講學)」과「제향(祭享)」을 주제로 하여 유물을 전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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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교육관(충효교육관, 사료전시실, 사무실)은 소수서원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홍보, 전시, 관리를 목적으로

1992년에 건립하였다. 2004년 9월 23일 소수 박물관이 개관되면서 사료 전시실은 박물관으로 이관 되었고 
현재는 충효교육관과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충효교육관은 160석의 좌석에 시청각 기기 등이 갖추어져 있어 학술 세미나 및 연수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현관에는 서예와 탁본체험을 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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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건너 언덕에 있는 "광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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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풍정에서 바라본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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