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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9 - 흉노에 굴복한 한나라 유방과 흉노, 남월에 조선을 정복한 한무제!
한(漢 기원전 202년~ 220년) 나라는 진(秦) 이후 중국 통일왕조이며 220년 부터 280년
까지는 위, 오, 초 삼국으로 갈라지는데...... 그 전에 한나라는 섭정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에 의해 잠시 맥이 끊겼으므로 전한(서한, 기원전 202년 ~ 8년)
과 후한 (동한, 25년 ~ 220년) 으로 나뉘게 되니.... 바로 나관중의 삼국지의 시대 입니다.
한(漢) 나라는 시진핑의 중국몽에서 언급하는 당나라, 명나라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강대했던
시기 중에 하나이고... 오늘날 중국 55개 민족 중에 92% 를 차지하는 한족(漢族) 이름이
유래하며, 한나라의 글자는 한자(漢字)이고 한나라의 문학은 한문(漢文)인데 만일
진나라가 오래 계속되었으면 우리는 “한자라는 말 대신에 진자(秦字)” 라고 부를 것입니다?
한(漢) 나라는 중앙 정부가 직접 통치한 군(郡)과 몇개 제후국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제후국은
오초칠국의 난으로 자치권을 잃었으며.... 기원전 200년 한고조가 흉노족에게 백등산에서
패배한 후에 전쟁보상금을 지불하고 공주가 예물을 가지고 흉노 선우와 결혼하는 형태의
동맹조약을 맺었지만, 이후 조약을 맺었음에도 흉노족은 한나라의 국경을 계속 침입했습니다.
60년후 무제 ( 武帝, 재위 기원전 141년 ~ 87년) 는 흉노와 전쟁을 시작했으니 30년간의
전쟁으로 흉노는 크게 패하여 급속히 피폐해졌고.... 한무제가 대외원정을 위해 개정한
법안을 악용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기 시작한 호족들에 의해 한나라는 땅을 잃고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생겨났으며 이 전쟁으로 인해 흉노족은 외몽골 북쪽으로 밀려났습니다.
그후 흉노는 내부 분열이 일어나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졌고 흉노 지배를 받던 선비족과 오환족
이 독립하여 남흉노와 함께 한나라에 책봉을 받고 조공하는 위치가 되었는데... 89년에는
한나라가 남흉노와 선비족 병력을 이끌고 북흉노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후일 위나라의
관구검도 오환족과 선비족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해 환도성(국내성)을 함락하기도 했습니다.
92년 환관의 정치 개입으로 황태후등 외척 세력과 권력 다툼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황건
의 난과 오두미도의 난을 선동한 도교의 등장에 의해 위협받았으니 후한 영제가 죽은후
환관들은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위왕 조비가 후한 헌제의 황위를 빼앗음으로써 한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으며..... 유비가 221년 한중과 파촉에서 촉한을 세우나 이 또한 263년에 멸망합니다.
한(漢)나라는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했으며 주나라때 처음 만들어진 화폐제도가 발전해 조폐국의
화폐 제도는 당나라때 까지 유지되었으며 전쟁에 쓸 비용과 새로 얻은 영토에 사람들을 정착
시키기 위해 사용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는 기원전 117년 소금산업과 철기 산업을 국영화
했으니 정부 독점은 후한때 폐지되었으며 줄어든 수익은 개인 사업가들에게 높은 세금을 매깁니다.
황제는 정부의 회의를 주재했으나 권력을 귀족 및 대신들과 나누어 가졌으며 무제의
치세부터 유교(儒敎)를 교육과 정치에 도입했고 동중서와 같은 유학자들을
등용했으며 향거리선제를 실시해 청나라까지 이어졌으며 과학과 기술도 발전
하고 종이 제작과 선박의 키, 음수 등이 만들어졌으며 인구는 5천 5백만에 달했습니다.
향거리선제 (鄕擧里選製)는 지방관과 유력자가 관내 우수한 인물을 추천하니, 정권을 잡은건 고제
유방에 협력하여 초한전쟁 때 공적을 올린 원훈들과 후손들이었으니, 이 시기 관원 임용법
은 임자 라 하여 일정 이상의 관료의 자제를 새로운 관료로 임명하는 식인데 조조, 조비,
손권, 원술, 사마의, 순욱, 순유, 진군, 곽회, 왕기, 화타, 장소, 황개, 강유, 저수, 전풍, 곽도 등입니다.
중국의 첫번째 왕조는 진나라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6년) 였지만 반란이 일어났고
초의 항우와 한의 유방은 18개의 제후국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의 패권을 잡기 위해
전쟁을 했으니 안후이성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물리치고는 유방은 신하들의
권유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장안(長安)이 통일된 왕조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습니다.
전한 초기에는 서쪽 지방들은 수도를 포함하여 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13개의 군으로
되어 있었고, 동쪽 지역은 10개의 제후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초나라와의
전쟁을 도운 신하들을 달래기 위해 전한 고조는 그들을 왕으로 임명하고 봉토를
하사했지만 기원전 157년 까지 한나라는 모든 제후왕을 유씨 일족으로 바꿔 버립니다.
기원전 154년의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난 이후 한나라는 기원전 145년 제후국의 크기와
군사력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고, 제후국들을 더 작게 나누거나 새로운 군으로
만들었으니 제후왕들은 신하를 임명할 수 없었고 오직 황제만이 임명할 수 있었으니
왕들은 영지의 이름뿐인 지배자였고 세금의 일부만을 개인 수익으로 가질수 있었습니다.
유목민족 흉노족의 지도자 묵돌 선우(재위 기원전 209년 - 기원전 174년)가 유라시아 초원
의 동쪽지역의 민족들을 정복하고 있었으니... 만주와 몽골 고원, 타림 분지등을 지배했고
사마르칸트 동쪽 20개 이상의 지방을 예속하에 두었으니, 고조는 북쪽 국경을 통해
흉노와 거래되던 막대한 양의 한나라산 철제 무기를 걱정했고.... 무역 금지조치를 내립니다.
기원전 121년 무제는 흉노족과 무기 밀매를 해온 상인 500여명을 처형하고는 국경에서 무역하던
흉노족을 공격하자... 보복으로 흉노족은 기원전 200년에 산시성을 침입했고 백등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니, 기원전 198년 흉노와 한은 화친조약을 맺었고 흉노의 지도자와 한의 황제는
결혼을 통해 동맹관계가 되었으나 실제로 비단옷이나 음식 등의 공물을 흉노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백등산 포위전은 기원전 200년 산시성 대동 부근 평성(平城)의 백등산에서 벌어진 전한
(漢)과 흉노(匈奴)의 대전투인데, 문헌상으로는 과장이 심하니 한군 32만에 흉노
40만이라는데 흉노의 완승으로 끝났고... 전투의 발단은 강성해진 흉노 견제 겸
흉노의 앞잡이가 되버린 한왕 신(韓王 信)을 정벌하려는 유방(劉邦)의 원정이었습니다.
백등산 포위전은 동북아시아에서 유목제국의 시대를 열어 유목사(遊牧史)의 흐름에서는 기념비
적인 대사건인 동시에, 초한대전(楚汉战争) 이후 전 중국의 통일 제국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 전한(西漢)으로서는 개국 초기부터 입게 된 최악의 시련이었으니... 이후 수백수천년간
이어진 한제국과 흉노, 중화제국과 북방 유목제국이 벌인 대사투의 서막을 열게 된 전투입니다.
중국 위키백과는 백등지위(白登之圍)라 하고 영어 위키백과는 Battle of Baideng 이라고
하며, 터키는 The Siege Of Baideng(백등산 포위전) 그리고 일본어 위키백과의
경우 白登山の戦い(백등산의 전투)로 표기하고 있으며... 그 외에 평성지치(平城之恥),
즉 '평성의 치욕' 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는데, 하지만 보통은 '백등산 포위전' 으로 봅니다.
흉노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중국이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접어들 무렵 중국의 기록에 서술이
된 것을 볼 때 이 즈음부터 영향력 있는 부족은 되었다고 볼수 있는데... 전국시대에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나라 및 연나라와의 충돌이 많았고 나름대로 승승장구 했으나, 조나라
의 명장 이목에 의해 처참하게 패하면서 전국시대가 끝날때 까지 변경에는 얼씬도 못했습니다.
전국 시대가 진나라에 의해 종결된 뒤로는 진나라 장수 몽염의 주도하에 하투(河套) 남쪽 까지
진군하고, 만리장성의 축조를 시작하는등 대놓고 시황제가 이민족을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자.... 그 당시 이민족 중에 영향력이 컸던 동호나 월지도 진나라의 견제를 피해 북쪽으로
도주할수 밖에 없었고 아직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한 흉노 또한 다를바 없는 처지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위세가 얼마 가지 못해 내부적으로 썩어가며 무너져 버리고 이후
초한쟁패기에 이르는 대혼란기가 벌어지며.... 종결 이후에도 한나라는
내부적으로 곪은 상처들을 처리하는데 바빠 북방의 국경을 수호할 여력이
없어진 반면에 흉노는 두만이 선우에 오르면서 세력이 급격히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이후 묵돌이 두만을 죽이고 권력을 탈취해서는 압도적인 지휘력과 카리스마 아래
흉노 세력은 두만 때 이상으로 급격히 팽창하여 주변의 이민족들을 죄다 흡수
하여 북방의 지존이나 다름없는 입장이 되었고, 패권을 잡은 흉노는 당연히 중국
내륙을 노리고 산서성 유림시(楡林市) 부근과 하남의 옛 요새 까지 침범해 옵니다.
묵돌은 연나라 지역과 대(代)의 영역을 공격하면서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했는데 병력만 30만명
에 이르러 이전의 흉노와는 다른 강력함을 보였으니... 이민족들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에
비해 중국 대륙은 진나라 말기 시황제가 추진했던 만리장성을 비롯한 무리한 부역과 토목
공사로 백성들은 지쳐있었고, 진승·오광의 난에 초한전쟁이 벌어지면서 대륙이 피폐해 졌습니다.
고조가 동원에서 돌아와 미앙궁(未央宮)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노하여 소하(蕭何)
에게 말했으니 "지금 천하는 흉노의 침략과 제후들의 모반으로 동요되어
몇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고 있음에도, 아직 성패를 알 수가 없소. 이렇게
긴박한 와중에 어찌하여 궁실을 과도하게 축조한 것이오?" (사기 고조본기 高祖本紀)
한(漢)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시점에는 흉노를 막을 힘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통일 이후
조금 여유가 생긴 유방은 흉노의 확장 소식을 듣고는 흉노의 침입에 대비할 수 밖에
없었으니... 유방은 초한대전 내내 자신을 보필했던 한왕 신을 태원군과 그 이북
으로 분봉하고, 수도를 진양으로 삼아 흉노와 맞닿은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문제는 신이 한(韓)왕으로 온 기원전 201년 바로 그 해 가을에 묵돌이 대군을 이끌고 마읍으로
친정을 했으니, 묵돌이 직접 온 만큼 이전까지의 소규모 교전이나 약탈과는 규모도 기세도
달랐고... 당연히 부임된지 얼마되지도 않은 제후왕 하나가 막아내는건 무리였던지라
한왕은 나라를 지킬겸, 자기 목숨도 보전하고자 강화협상을 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게 됩니다.
유방 또한 묵돌의 친정 소식을 듣고 한왕 신을 지원코자 친정을 결정하며
군대를 편성했으나, 한신이 묵돌에게 사신을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는
협상하려는게 아니라 배신하려는거 아닐까? 라는 의심을 품어버립니다.
의심증이 도진 유방이 사람을 보내 한신을 훈계했으니, 힐난을 받은 한신은 이미 유방은 날
배신자로 보고 있구나! 라고 판단해 흉노에 투신해 버리니 기원전 201년 9월 이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1570년 아네가와 전투 (姉川戰鬪)에서 이소노 가즈마사는 오다 노부나가 13단
진 중에 11단을 쳐부수니... 이후 오다씨는 사와산성의 성주 이소노가 내응하려 한다는
거짓정보를 흘리니, 그만 의심해 버린 주군인 오미국 오다니성의 아사이 나가마사의
의심을 도저히 풀수 없다고 여겨 어쩔수 없이 오다군에 귀순해 버린 경우를 연상 시킵니다.
결국 마읍은 한왕 한신의 배신으로 인해 대흉노전 수비기지에서 흉노의 전진기지로 역변해 버렸고,
묵돌은 이에 힘입어 구주산을 넘어 태원까지 진격하자 한신도 이 군대에 합류했는데... 한신은
전한 건국후 단 일곱명만이 봉해진 이성왕(異姓王)중에 한명으로 최측근이라고 볼수 있는 인물
이었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흉노를 맡을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 보낸 인물이니 타격이 큽니다.
한신의 변절을 들은 유방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군대를 이끌고 친정에 나섰으며 동제로 진격해
한신의 군대를 박살내고 측근중 하나인 왕희를 참수하자 한신은 유방의 분노를 피해 흉노로
도망쳤고, 수뇌부가 사라진 패잔병 무리는 흩어지다가 백토현 출신 장사꾼 만구신이 수습해 옛
조나라 왕족 후손 조리를 왕으로 추대하고는 한신을 통해 흉노와 손잡아 한나라 공격에 가담합니다.
흉노는 좌현왕(左賢王)과 우현왕(右賢王)에게 1만씩 기병을 준 뒤 진양까지 진격을 명했으나
유방의 한군은 이 2만명의 기병을 패퇴시켰고.... 흉노군이 패주하자 기세를 타고 쫓아
이석에서 뒤따라 잡은후 다시 전투를 벌여 승리하는데, 이후 패잔병을 수습한 두
현왕이 정신을 추스를 틈도 없이 한군은 누번에서 전차병과 기병을 앞세워 연승을 거둡니다.
다만 2만명 흉노 기병은 묵돌의 유인책이었으니 겨울이 다가오는 와중에 한나라에겐 익숙하지 않은
추운 북쪽 지방에서 눈과 비까지 겹치면서 한군은 열에 한, 둘이 심각한 동상에 걸렸는데...
유방은 묵돌이 대곡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게 유인책인지 아니면 진짜 회심의 수가 될 정보인지
고민 끝에 10명의 사자를 보내서 흉노의 의중을 떠보는 척 하면서 흉노 군영을 정탐하고자 했습니다.
묵돌은 이를 간파하여 정예병과 양질의 말들은 숨겨버리고 표면적으로는 비쩍마른 말과 늙은
병사만 부대애 잔류시킨채 한의 사신들을 맞이했고, 사신들은 이것만 보고 복귀한 뒤 유방
에게 "흉노의 상태가 심각하니, 한번의 대승으로 처치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는 식으로
보고를 올렸으니 유방은 의심하지 않고 진격하다가 포위망에 걸리는데, 이때 유경이
유일하게 반대했으나 유방은 '요망한 입으로 군의 사기만 떨어트리는구나!' 라며 화를 냅니다.
유방의 군대 32만명은 대부분이 보병으로 동상 환자가 늘어나 숫자가 이전의 2배에 달하게 되니
계속 지체하기만도 힘들어진 유방은 진격과 후퇴중 망설이다가... 위의 기만책에 속아서
전군을 이끌고 묵돌이 있다고 파악된 곳으로 진군했는데,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묵돌은 유방이
직접 이끄는 선발대가 평성에 도달하자 그대로 그들의 뒤를 둘러싸 선발대와 본대를 고립시킵니다.
유방과 한군도 최대한 포위망을 풀고자 하였으나 작정하고 포위에 매진하는 흉노 기병을 뚫지 못했고
유방은 성 안에 갇힌채 목숨과 식량 걱정만 하게 되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는데, 이때 호군중위 직책
으로 유방을 수행하던 진평이 묵돌이 아내에게 약한편이니 연지에게 다량의 선물을 뇌물로 바쳐
묵돌을 설득시키자 제안하니 구차한 수이긴 했으나 별다른 계책도 없었기에 진평의 제안에 따랐습니다.
"양국의 군주가 서로를 곤궁한 지경에 몰아넣어도 되겠습니까?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고 해도
선우께서는 이곳에 살 수도 없습니다. 또 한나라의 왕에게는 하늘의 도움이 있는 것 같으니
선우께서는 심사숙고 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뇌물을 받은 연지는 묵돌을 설득했고 묵돌도
한왕 신의 태도에 불안함을 가지던 찰나에 부인의 설득까지 겹치자, 한신 세력의 2차
변절로 인한 피해를 두려워해 한 곳의 포위망을 약하게 해 그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줍니다.
이때 때마침 백등산에는 크게 안개가 끼었으니 포위망의 한 곳이 풀린 것을 본 유방이었지만
매복을 의심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노심초사하여 먼저 사람을 보내 그 길을
지나게 했는데.... 안개 탓인지 흉노군은 이를 깨닫지 못했으니 그때가 돼서야 한군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안개가 끼었다고 해도 대군이 모두 움직이면 들키는건 시간문제 였습니다.
이에 진평은 강노(强弩)에 두개의 화살을 메겨 밖으로 향하게 하며 전투 태세를 갖춘 상태에서 한(漢)군
이 움직이게 했는데...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 흉노군을 향해 강노를 들이밀고 걷는 숨막히는
시간이 지나고, 포위망에서 탈출한 것을 깨달은 유방은 곧바로 빠르게 도망치려고 했지만... 하후영
은 오히려 그런 유방을 제지하고 병사들에게는 계속 화살을 장전하게 하고 일부러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유방은 천신만고 끝에 흉노군을 피해 탈출할 수 있었으며 한군이 탈출한데다 마침 한나라
의 대군이 유방을 구원하기 위해 추가로 도착하자 묵돌도 불리함을 알고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떠났으니... 유방은 씁쓸한 기분으로 귀환하면서 수감된 유경을 풀어주고 그에게 진심으로 사죄
했는데, 훗날 원소는 똑같은 상황에서 유방과는 달리 전풍의 목을 날렸으니.... 그릇의 차이인가 합니다?
결과는 한나라 대참패인데 초나라 마저 꺾은 통일제국 한나라로 기세를 올리고 있었지만 얼마
되지도 않아 흉노에게 참패했으며, 심지어 같은 중국의 나라도 아닌 이민족에게 기만책을
당하기 까지 하면서 능욕당했으니..... 위의 회담 이후에도 묵돌은 종종 한나라 변두리
를 침공했으나....... 한고제를 포함해 몇대가 지날 때까지도 이를 제대로 막을 수 없었습니다.
유방은 유경에게 흉노에 대한 대책을 물었으나 '천하를 평정하는 동안 사람들이 너무 지쳐 우리
힘으로는 절대 그들을 이길수 없다. 다만 원대한 미래를 계획하여 실천해나가면 우리
후손이 저들을 신하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는데... 유방의 친딸 노원공주
를 묵돌의 아내로 정략결혼을 맺게하는 동시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보물을 보내주면서
심기를 맞춰야한다고 말했지만 문제는 이미 노원공주가 조왕 장오와 혼인을 맺은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방은 이를 알면서도 유경의 계책을 허락했던 것인데 여후가 밤낮으로 울고 불며
이를 결사반대하자.... 유방은 마음이 흔들려 결국 친딸이 아닌 비슷하게 생긴 서민의
딸을 데려와 공주로 꾸미고는 사신을 보내 흉노와 형제의 맹약이라는 ‘화친(和親)’
조약을 맺는데, 세계는 한나라 노원공주가 흉노에게 시집간 사실을 오랫동안 기억합니다!
1562년 이슬람 베르베르인 해적 "울루치 알리" 는 갤리선 7척으로 북아프카에서 북상해 훗날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사보이공국 공작이 프랑스 공주인 부인과 함께 머물던 모나코 빌라프랑카성을 포위하니 해적
들의 숫자가 적은것을 본 사보이 공작은 보병 300명에 소총수 25명과 가신단 100명을 지휘하여 전투
에 임하나 영리한 해적 두목 울루치 알리는 일부 해적을 몰래 상륙시켜 후방에서 사보이군을 공격합니다.
사보이군은 포위 공격을 당해 참패하고 도망치는데..... 이때 병사 100명과 가신단 40명이 포로로
잡히니 울루치 알리는 140명의 몸값으로 제노바 금화 1만2천 두카토 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제시하면서 돈이 마련될때까지 항구에서 기다리겠다며 그 동안 오스만터키의 동맹국인
프랑스의 공주로 미인이라 소문난 사보이 대공의 부인을 한번 만나 인사를 드리겠다고 요구합니다.
사보이 공국 대공은 난감한 처지로 몰리는데... 만일 그랬다가는 이후 장인인 프랑스 왕으로 부터
무슨 책임추궁을 당해야 할른지 모르고 그렇다고 거절할 처지도 안되는지라 머리를 싸메고
전전긍긍 하니.... 이때 예쁘고 총명한 시녀 하나가 자기가 공비를 대신해 공비차림으로 만남
에 나서니 이에 속은 해적 울루치 알리는 공주(?) 의 미모에 반해 금 목걸이를 선물 했다던가요?
한나라와 흉노 사이에 화친 조약은 다음 네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 만리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삼는다.
(2) 상호 형제관계를 맺는다.
(3) 한나라 공주를 흉노 왕에게 시집보낸다.
(4) 매년 흉노에게 옷감과 음식을 보낸다.
3, 4번은 성의를 보이고 뇌물을 바치라는 뜻이었고 이후 추가된 관시 또한 물자를 보급하기 위함
이며... 1, 2번 또한 문제가 많았으니 경계로 삼는댔지 쳐들어가지 않는다곤 안해서인지, 이후
에도 흉노는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변방을 종종 약탈하기도 했고 또한 말이 형제이지
엄연히 흉노를 윗선으로 여기게 했으니 동생인 한나라는 계속된 흉노의 침공이 골칫거리였습니다.
화친 이후 유방은 유경의 제안에 따라 수도인 장안이 있는 관중 지역으로 인구 10만을
이주시켰는데, 화친에도 불구하고 한신, 왕황, 조리 등은 흉노의 장수가 되어 수시로
한나라를 공격하였으며... 황제가 포위되어 구걸하여 간신히 탈출하고 조공을 바치는
외에도 이후로 60여년 동안 한(漢) 이 흉노에 대하여 저자세로 대해야 했다는 점입니다.
유경의 제안으로 흉노와 협약을 맺어 화친을 맺게 된 한나라였지만 실제로는 협약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흉노는 수차례 군사를 보내 한의 변경을 유린했고 유방 사후에 “여후는
묵돌에게서 성희롱”에 가까운 조롱을 받았지만 참아야만 했으며, 한문제 시절에도 전한은 흉노에
저자세로 일관했는데 군사력 우열을 떠나서 군대를 흉노 본진으로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흉노의 유인 → 포위 전술에 말려들어 패배한 전투의 공포가 컸기 때문에 한문제, 한경제(漢景帝) 에
이르러서도 흉노를 상대로 한 전쟁은 쳐들어온 상대를 막고 격퇴하는 정도에 급급했지, 공격해
들어가는 것은 한나라 내부에서는 정신나간 행위로 치부되며 실현되지 못했으니... 한나라의
군대가 흉노의 영역으로 진군해 나간 것은 건국 60년후, 한무제 때 위청(衛靑)의 진군 부터 였습니다.
이후 한나라는 긴 세월을 조용히 참으며 문경지치의 시대를 거쳐 힘을 비축했고 한무제의 시대에
곽거병 등이 흉노 땅을 역으로 유린하는 복수를 하는데.... 후한 대에 이르면 흉노는 대단히
약화되어 남흉노(南匈奴)의 경우 한나라의 속국으로 떨어지게 되었으니 '수모를 참으며
힘을 모으면 자손들은 그들을 신하로 부릴 수 있을 것이다.' 는..... 유경의 말이 실현된 셈입니다.
흉노의 입장을 떠나 유목사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 백등산포위 전투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데, 이후
2000년간 지속되는 중국의 제국과 북방 유목민의 대결이라는 구도는 바로 여기서 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했으니.... 따라서 유목사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언급하는 경우에도 항상
언급되는 전투이며 자세한 전개 과정까진 아니더라도 전투 자체는 상당히 인지도가 있는편 입니다.
또한 이후에 벌어진 한신과 팽월의 숙청이며 영포의 반란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 전투
에서 친정한 한의 중앙군이 대패하면서 유방의 권위가 추락하고 중앙군이 약화되자, 군사적 재능
으로는 유방을 능가하는 이 세 사람에 대한 숙청 필요성도 더 높아지게 된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신이 전투에 참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데 당시 한신은 전해인 BC 201년 모반 혐의를 받고
진평의 계책을 참고한 유방에게 사로잡혀 초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떨어져버린 상태였으니,
두문불출하며 유방이 자기를 해치려 한다고 두려워 하고 있었으니 총대장은 맡길수 없고 참모
정도로 따라 갔더라면 승리를 거두진 못하더라도, 치욕적인 패전은 면했을 수도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황제가 처음 생긴게 진시황이고 이세황제를 거쳐 그 다음으로 한고제인데 진시황이 죽은지
10년밖에 안 지났으니 중화제국이라는 개념이 탄생한지 얼마 안돼 참사가 벌어졌으니
유방이 죽었거나 포로가 된 경우라면.... 한족(漢族) 왕조 3대 치욕인 영가의 난, 정강의 변,
정통의 변 모두 한족 왕조가 북방 유목민족을 상대로 당한 것인데, 저 3대 치욕보다
더한 최대의 치욕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며 한족의 정체성과 중국 역사마저 달라졌을 것입니다.
노상 선우와 전한 문제 화친조약으로 무역시장은 열렸으나 흉노족들은 조약을 무시하고 주기적으로
만리장성 남쪽 한족 영토에 침입하자... 기원전 133년 마읍에서의 매복 작전으로 선우를 암살하고
흉노족들을 물리치려고 했으나 실패했지만, 이후 한나라 군대는 흉노의 요새를 차례로 점령했고
마침내 기원전 119년 곽거병과 위청이 전투에서 승리해 흉노족들을 고비사막 북쪽으로 쫓아냅니다.
한무제(漢武帝 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 는 7대왕으로 유학을 바탕으로 국가를 다스렸으며,
해외 원정을 통해 흉노를 크게 무찌르고 기원전 111년 남월을, 기원전 108년에는 위만조선을 멸망
시켜 한사군을 설치했으며... 한족 역사상 두번째로 넓은 영토를 확보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으니
그는 진 시황제·당 태종·명 영락제·청 강희제와 더불어 중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가운데 한사람 입니다.
한무제는 16세때 황제에 올랐으며 유학자 동중서의 의견을 수렴하여 유학을 국가의 이념이자
학문으로 삼아 다스렸는데.... 이복형인 중산정왕 유승을 의심하자 유승은 일부러 주색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여 한무제의 칼날을 피해갔으며, 즉위후 전대의 권신들과 외척들을
숙청, 면직시키고 실력과 능력에 어질고 겸손한 인재를 채용하여 관료의 자질을 향상시켰습니다.
장건이 서역과 통하는 실크로드 건설을 시작했으며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흉노를 소탕하게
했는데... 서역 출신 노예와 흉노 출신 노예 중에도 인재를 등용했고 흉노를 소탕하면서
곽거병이 사로잡은 흉노족 왕자 김일제의 재능을 알아보고 발탁해 김씨 성을 하사했습니다.
흉노족이 金人(금인) 으로 하늘에 제사지내는지라 지구상에서 세계 최초로 김(金)씨가 탄생했고
오경박사(五經博士) 를 두어 유학에 중점을 두고 BC 127년부터 아들들을 제후왕으로 분봉해
중앙집권화를 하며 전국을 13주(州) 로 나누고 주마다 자사(刺史) 를 두어 군수를 감독케 합니다.
한무제는 운하를 굴착하여 농지의 관개와 운송을 도왔으며 장건을 대월지국(大月氏國)
으로 파견하고 장군 위청, 곽거병, 이광 등에게 흉노를 토벌시켜 흉노족
선우를 사살하고 다수 흉노족을 포로로 잡았으니 기원전 119년에는 위청을
시켜 흉노를 외(外)몽 골로 내쫓고눈.....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여 2군을 두었습니다.
하서(河西) 흉노 혼야왕(渾邪王)이 항복했으므로 무위·장액·주천·돈황 4군을 두어 중앙아시아
와의 교통로를 확보해 서역 제국의 입공(入貢)이 계속되었으며, 기원전 104년에는 이광리
(李廣利)에게 명해 파미르 고원 북서에 있는 대완국(大宛國:페르가나)을 정벌하게
했고..... 흉노 방위와 서역 유지를 위해 요지로 한인을 이주시키고 둔전(屯田)을 두었습니다.
남방으로는 푸젠성에 있던 민월과 동월(東越) 두 왕국을 병탄·흡수하고 기원전
111년에는 번우(番:廣東)에 도읍한 남월국을 멸망시켜 9군을 두었으며...
쓰촨성 변경에서 윈난· 구이저우 방면에 이르는 염(冉)· 방(駹)· 수(嶲)·
작(莋)· 야랑(夜郞)· 전(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켜서 그곳에 6군을 설치합니다.
기원전 112년부터는 한반도 남부 진국(辰國)과의 직접교역을 반대하고 한나라에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는 고조선을 침략하니 육로와 해로로 육군과 수군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했지만
고조선은 내부분열로 고조선 왕족과 대신이며 장군들이 한군에 투항하면서 멸망하게 되는데,
기원전 108년 왕검성을 함락시키고는 고조선 땅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한사군을 설치합니다.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 무제는 재정이 궁핍해지자 소금과 철, 황, 술의 전매제를 시행하여
경제적 재력 확충을 시도하였으며.... 토지 분배 정책에서는 둔전제를 강력히 시행하였고
둔전제 일부를 개정하여 정복한 북방지역에 주민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면서 북방으로
이주한 백성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으니 대전법(代田法) 이라고 합니다.
외적에 성공했으니 궁전과 이궁을 짓고 불로장생을 믿어 방사(方士) 를 모아 태산(泰山) 에서
봉선의식(封禪儀式)을 치르고 순행했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는데... 상홍양은
증세·신세(新稅) 에다가 소금·철을 전매하고 균수법(均輸法)·평준법(平準法)을 제정해 물가를
조절해 부유한 상인의 매점매석을 근절시켜 물가를 안정시켰으니 국민의 생활이 궁핍해집니다.
여태자가 역모를 고변한 강충을 살해하자 무제는 태자를 폐위시키자 거병하여 관군에 대항한 태자는
패하여 자결하였고... 위황후를 폐출해 자결하게 하고 여태자의 장인과 장모, 처족, 위황후 일족에게
연좌율을 적용하여 사형에 처하고는, 구익부인 조씨 소생 소제를 후계자로 결정하고 어린아들 뒤에
젊은 어미가 있으면 외척의 발호와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구익 부인을 역모로 몰아 살해합니다?
만년에는 외정을 중지하고 내치에 치중하였으며 세금을 감면하고 신장 윤대의 둔전(屯田)을 폐지해
백성을 다스리는 데 힘썼는데.... 중앙집권화에다가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교섭이 왕성하게
되는 기틀을 놓았으며, 권신과 외척을 배제하고 실력에 따른 인재등용을 했으니 임종이 가까워
오자 곽광(霍光) 과 흉노족 김일제 (경주 김씨의 시조?) 를 불러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을 유언합니다.
전한에서 명군으로 칭송받지만 이릉이 중과부적으로 흉노에 잡히는 바람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는
데, 이때 당대의 학자인 사마천이 "이릉은 힘이 다 떨어져서 항복했으니 선처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니 후궁의 오빠인 이광리의 부추김으로 사마천에게 극형을 내리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아지만 이토록 무제에게 후하게 대접을 받은 이광리는 훗날에 무제의 태자를 죽이고 자신
의 여동생이 낳은 창읍애왕 유박을 태자로 책봉시키려 시도했고.... 무제는 자신의 후궁
을 포함해서 이광리의 구족을 멸했는데 정작 반역의 당사자인 이광리는 흉노에 투항합니다.
이런 일을 당하고 나서야 무제는 사마천을 다시 불러들여 과오에 대한 사과를 했다고
하는데.... 한무제의 흉노 토벌 자체는 큰 공적이지만 전비(戰費)를 너무 많이
소모하는 바람에 당대의 선진국이었던 전한은 경제가 기울기 시작했고,
이는 후한이 경제적으로 탄탄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기원전 139년부터 기원전 125년까지 행해진 외교관 장건의 탐험으로 한나라는 많은
이웃 국가들과 접촉을 했는데... 장건은 대완, 강거, 대하(박트리아) 등과
접촉했으니 이것은 로마 제국까지 연결된 실크로드의 기초가 되었고, 로마에 비단
과 같은 한나라의 상품들을 수출하고 유리 제품과 같은 로마의 상품들을 수입했습니다.
기원전 121년 한나라 군대는 흉노족을 하서주랑을 건너 뤄부포호 지역까지 쫓아냈고 흉노족과 창족이
북서쪽에 침입하자 물리치고 4개 군(주천군, 장액군, 돈황군, 무위군)을 새로 만들었으며...
정부는 농부들을 국경지역의 정착지로 강제이주 시켰고 또한 국가소속 노비들과 죄수들을 노역을
시키기 위해 보냈으며 농민이나 상인, 지주, 고용된 노동자등이 자발적으로 이주하도록 권장합니다.
기원전 111년 남월국을 정복함으로써 한나라는 광둥, 광시, 베트남 북쪽지역 까지 세력을 확장
했으며 기원전 109년에는 뎬국을 정복했고, 기원전 108년에는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현도군
과 낙랑군을 설치했는데... 기원전 60년 서역으로 부터의 공격에서 로마와의 실크로드 무역을
지키기 위해 서역도호부를 설치했으며 한나라는 12,366,470 가구에 57,671,400 명 이었습니다.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위해 무제는 몇몇 사업을 국유화했으니 동전뿐만 아니라 소금, 철,
술 등이 있었는데... 술의 독점은 기원전 98년에서 기원전 81년까지 지속되고
끝났지만, 소금과 철의 독점은 후한 초기까지 이어졌고, 동전의 제조 독점은 한왕조
가 끝날 때 까지 지속되었으니 독점은 개혁적 정치를 펼치는 파벌에 의해 폐지됩니다.
개혁주의자들은 무제의 치세 기간과 그 뒤를 이은 곽광의 섭정기간동안 정권을 잡기 위해
보수주의자들과 싸웠는데.... 보수주의자들은 민간사업에 개입해서 얻는 많은 수익을
바탕으로 외국에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길 주장했지만, 개혁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후
외국을 상대로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예산을 줄였으며 사업가에 부과한 세금을 낮췄습니다!
무제의 통치기 이후에도 한나라 군대는 흉노를 상대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으니 결국
기원전 51년, 호한야 선우(기원전 58년 - 기원전 31년)가 한나라에 항복하고 속국
이 되었으며... 그와 왕권을 놓고 다퉜던 질지 선우(기원전 56년 - 기원전 36년)
는 현재 카자흐스탄의 타라즈 지역에서 벌어진 질지 공성전에서 살해를 당하게 됩니다.
왕망은 유학에 어른을 섬겨 효원황후 친정오빠 대사마 큰아버지 왕봉의 인정을 받아 BC 33년 황문랑
(黃門郞)이 되고, BC 16년 봉읍(封邑) 1,500호를 영유하는 신야후(新野侯)가 되었으며 BC 8년
38세로 재상인 대사마(大司馬)가 되었지만, 애제(哀帝) 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하여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애제가 1년만에 아들 없이 죽자 태황태후 왕씨와 쿠데타에 성공하여 대사마에 복귀합니다.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하여 자기 딸을 왕후로 삼았으며 안한공(安漢公) 이 되고 평제의 어머니를
비롯 외척세력을 모두 숙청하였고 자신의 아들 왕우(王宇)도 독살했으며... AD 5년에는 평제를
독살한뒤 2세의 유영(劉嬰:宣帝의 현손)을 세워 유행하던 오행참위설(五行讖緯說)을 교묘히 이용
하며 인심을 모았으니 스스로 가황제(假皇帝)라 하고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합니다.
“안한공 왕망은 황제가 되라”는 붉은 글씨가 씌어진 흰 돌이 나타나게 하고, “왕망이 황제가 되라” 는
하늘의 의사표시로 간주되는 새 우물 연극을 벌였으니... 신비적인 형태를 수반하여 인간에게 표시
되는 천명(天命)을 부명(符命)이라 하는데, 왕망은 이 부명을 교묘히 이용하여 AD 8년 유영을
몰아내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신(新)’이라 하여 황제가 됨으로써 선양혁명에 성공합니다.
황제 왕망은 유교를 중시하였고 주(周)나라 주례(周禮)와 정전법(井田法)을 모방하여 토지개혁을
단행하였으니 지방호족의 대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자영농민의 빈민화를 막으려는 것이었으며
가난한 농민에게 싼 이자의 자금을 융자하여 주는 사대제도(賖貸制度)를 만들고노비 매매
를 금지시켰으며 화폐제도 개혁과 평준(平準) ·균수(均輸) 등 여러 상공업통제책을 실시합니다.
그러나 주례(周禮)를 본받으려는 개혁정책은 실패하였으며 중앙집권적 전제지배를 꾀한 정책은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호족들과의 이해(利害)가 상반된게 실패의 원인인데... 3년과
11년에 있었던 대홍수로 타격을 받은데다가 흉노(匈奴)와 서역 여러나라가 이반(離反)하였고,
동쪽에서는 고구려와 충돌하는등 내외정세가 악화되는 가운데 18년 ‘적미(赤眉) 난’ 이 일어납니다.
각지의 농민 ·호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으니 22년에는 한나라 황족의 한 사람인 난양의 호족
유수(劉秀: 後漢 光武帝)가 군대를 일으켜 이듬해 곤양(昆陽:河南省 葉縣)에서 왕망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으니... 그 결과 왕망은 장안(長安)의 미앙궁(未央宮)에서 부하에게 찔려 죽음
으로써 건국한지 15년에 멸망하고 한왕조의 혈통을 이은 유수(광무제)에 의해 후한이 건국됩니다.
왕망의 재위기간에 국내에서 많은 반란이 일어나 고구려가 한사군을 침략하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고.... 30년에야 후한은 한사군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확립할수
있었으며, 40년에는 베트남의 쯩 자매가 한나라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니 42년
부터 43년 까지의 전쟁에서 쯩 자매의 반란은 한나라의 장군 마원에 의해 진압됩니다.
왕망은 흉노족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으니 이후 50년에 남흉노가 한나라에 협력할 때 까지
관계가 좋지 않았으니... 이로 인해 흉노족은 한나라와 동맹을 맺은 남흉노와 한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는 북흉노로 갈라졌으며, 왕망의 재위기간 동안 한나라는 타림분지에 대한 지배권을
잃었고, 타림분지는 63년 북흉노에 의해 정복당해 하서주랑을 침입할때 사용된 기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