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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호경의 수필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정호경
나의 삶과 문학 정 호 경/鄭 鎬 暻
나는 무슨 일이건 불쑥 잘 저질렀다. 평소에 남쪽 바다의 갈매기가 보고 싶다는 말을 가끔 친구들에게 말한 적은 있었지만 괜한 멋으로 한 말일 뿐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정년퇴직 후 먹고 자는 일 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었기에 종일 바다 위를 종이비행기처럼 떠돌고 있는 갈매기가 더욱 그리워졌다. 그래서 8년 전의 남행 결심은 괜한 멋이 아니라 절실한 삶의 욕망을 말하는 솔직한 나의 심경 표현이었다. 6∙25 동란을 전후하여 10년 남짓 여수에서 산 적이 있었는데, 그 무렵 나는 선창가를 자주 바장이고 있었다. 동란 직후였으니 학비 조달이 어려워 서울보다는 여수에서 죽치고 있다가 가끔씩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상경은 하지만 하숙비가 떨어지면 곧장 집으로 내려와 버리는, 지폐 분량만큼의 서울 체류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 태생은 경남 하동 진교라는 조그만 고장이었는데, 해방 직후 우리 식구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전남 순천으로 이사를 해서 중학 6년을 순천에서 마친 뒤 여수에서 살았다. 하동이 내 고향이라고 하지만, 초등학교 어린 시절의 12,3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동안이었는데도 지금 내가 보잘 것 없는 이런 글이나마 쓸 수 있게 된 것은 어렸을 적의 좁은 돌담 골목길과 시냇가의 붕어 새끼들, 그리고 해 저문 뒷산의 뻐꾸기 울음소리 덕택이 아닌가 싶다. 나를 낳은 사람은 어머니였지만, 고향산천의 포근한 정서가 오늘의 나를 키워 주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시골에서 자랐다. 개구쟁이 친구들과 어울려 남의 집 뽕나무에 자주 매달렸다. 까맣게 익은, 왕벌 같은 오디를 따 먹기 위해서다. 개구쟁이들 가운데는 예쁜 소녀들도 있었다. (중략) 어느 날이다. 가지에서 오디를 따 먹다가 우연히 쳐다본 광경은 너무나 황홀했다. 치마폭을 걷어서 모아 쥐고 있는 소박한 한 폭의 풍속화가 바로 내 머리 위에 펼쳐져 있지 않은가. <육교부근>에서 나는 초등학교 시절 뽕나무 가지 위에 펼쳐진 풍속화를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술적 감각이 발달한 조숙아(早熟兒)였다.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장사 규모를 넓히기 위해 부산에다 상점을 사 놓고 참고삼아 전남지방으로 한 바퀴 돌아보다가 순천의 시장바닥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쌀가마니를 보고는 ‘전쟁이 나도 살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다.’라는 판단으로 부산을 취소하고 순천으로 옮긴 것은 장사에 대한 두뇌회전이 빠른 아버지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살아가는 일들이 여의치 못해 마음이 괴롭거나 혹은 괜히 쓸쓸함을 느끼게 될 때 나는 흔히 어린 시절의 고향을 생각한다. 그 회억 속에는 아름다운 진달래가 있고, 뻐꾸기의 한적한 울음소리가 있고, 시냇가 붕어 새끼들의 흥겨운 장난이 있다. 그것들의 생생한 소생으로 하여 나는 다시 삶의 활기를 되찾게 되고 즐겁고 천진난만해진다. <잃어버린 고향>에서 말의 억양이 다르고 사투리가 다른 순천중학 1학년 시절 새 친구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지금 같은 왕따는 없었지만, 이곳 친구들과 어울리기 어려운 가운데 외로움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문학 독서에 빠져 들었다. 중학 2학년 때 벌써 정지용을 비롯하여 김기림, 김소월, 임화, 백석 등의 시집과 이태준, 홍명희, 한설야, 박태원, 김남천 등의 소설을 찾아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책장만 신나게 넘기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시집과 소설책은 길에다 전을 벌여 놓고 춘향전이나 심청전, 옥단춘전 등과 함께 헐값으로 팔고 있었기에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 무렵은 해방 직후여서 그럴만한 문예지도 없었고, 우리들이 볼 만한 학생지는 더더구나 없었던 때다. 그런 가운데 朴木月이 발행한 ≪中學生≫라는 잡지에 이어 ≪學生時代≫가 선을 보였다. 가뜩이나 목말라 있었던 나에게는 가뭄에 내린 소나기 격이었다. 얄팍한 잡지이긴 했지만 읽고 또 읽었다. 그 무렵 ≪中學生≫에 발표된 나의 시가 <孤獨>이었고, 그 뒤 ≪學生時代≫에 <冬雨>라는 시가 연달아 발표되었다. <閑談二題>에서 그 후 중학 4학년 때 여순사건(麗順事件)을 만나 많은 친구를 잃었다. 그 중 가까웠던 친구 손동신(孫東信)이 좌익학생들에게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여수 신풍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 둘째 아들이다. 순천에서 많은 시체를 보게 된 나의 아버지는 솔권(率眷)하여 여수로 옮겨 ‘天一고무’의 특약점을 맡아 성업 중이었는데 6∙25 동란을 만나 고무신 창고가 폭격을 당해 졸지에 빈손이 되어버렸다. 그때 나는 중학 6학년이었다. 아버지의 한숨 속에 6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잡지만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운명의 방향을 바꿔 놓은 해괴한 일이 우리 반 교실에서 발생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대학입학원서를 한 뭉치 들고 와서 각자 필요한 대로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2,30장이나 되는 원서는 순식간에 동이 나버렸다. 아직 한 장이 남았으니까 누구든지 가져가라면서 공중으로 냅다 날린 것이 마침 내 책상 위로 떨어져 내렸다. 펴 보니 서울대학교 원서였다. 나에게는 가당찮은 원서였지만, 공짜이니 얼른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원서 위에 겹쳐 나타나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로 낙착이 되어 교무과에 제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운명의 끈> 에서 그런 뒤 집에서 아버지 몰래 입시 준비를 계속하며 시험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데 입영통지서가 날아들었다. 계속 닥치는 액운에 숨을 쉴 수가 없었지만, 막다른 고비에 이르면 이상하게도 운명의 방향전환이 이루어지니 필시 나에게는 행운의 여신이 따르고 있다는 안도감과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어느 날 부산의 피난대학 천막교실에서 강의를 듣고 있는데 교무처에서 면회 전달이 와서 가보니 뜻밖에 아버지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놀란 눈으로 사유를 물었더니 피곤한 목소리로 입영 소집영장이 또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그 당시 우리에게는 매월 한 번씩 치르는 월례행사였다. 재학생 연기신청서를 만들어야 하는데 교무처의 담당직원이 지금 외출 중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내일까지 경찰서에 제출해야 한다고 절박한 사정을 말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담배에 불을 붙인 아버지의 굳은 표정은 서서히 누그러지면서 소집영장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젊었을 시절의 고생담과 사이사이에 한국적 이솝우화까지 곁들여서 분위기를 돋우고 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한 직원이 별안간 벌떡 일어서더니 서류상자의 자물쇠를 망치로 두들기고 있었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기는 했지만, 그 직원은 아버지의 전략적인 옛날이야기의 달변에 영락없이 속아 감동하고 만 것이다. 빨간 인주로 눌러 찍은, 직인 자국이 분명한 재학증명서를 받아 쥔 아버지와 나는 여수로 가는 밤배에 올랐다. 아버지는 3등 선실의 벽에 기댄 채 졸고 있었고, 검은 물살을 가르며 내닫고 있는 숨찬 뱃전에는 달빛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晩年의 눈물>에서 수복 후 서울에서의 대학생활도 부산 시절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회복되지 않는 가정 형편은 나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하숙방에 들어박혀 종일 소설책만 뒤적거렸다. 그 무렵 문예지에 발표된 김동리의 <흥남철수(興南撤收)>, <밀다원 시대(蜜茶苑時代)>, 안수길의 <第三人間型>, 손창섭의 <비오는 날> 그리고 <혈서(血書)>, <미해결(未解決)의 장(章)> 등 6∙25 직후에 발표한 이들 단편을 읽으면서 예측할 수 없는 졸업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시와 소설을 계속 습작하고 있었으며 4학년 때에는 그 중 10편을 골라 국어과 자체행사인 시 발표회를 가지기도 했다. 졸업 후 경남 진주농고를 거쳐 진주여고에 재직할 때 국어 시간에 대학입시 공부보다는 주로 시와 소설을 통한 정서교육에 치중하다가 교장에게 불려 호된 주의를 듣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입시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던 때여서 나는 젊음의 뱃장을 내세우며 소신을 굽히지 않고 계속 버틴 결과였던지 많은 시인, 소설가, 수필가로서의 제자 문인을 배출하게 된 것에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 후 서울 혜화동에 있는 東星高로 옮겨 함께 재직하면서 가까이 지냈던 몇몇 시인, 평론가 선생은 나의 창작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4년 뒤 나는 입시학원인 大成學院으로 자리를 옮겨 밤낮으로 계속되는 고된 수업과 국어 참고서 만드는 일에 쫓겨 한 동안 문학에서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수필가 김승우, 김효자 부부가 창간(1972)한 ≪隨筆文學≫에 수필 쓰기를 권유해 다시 숨을 돌려 창간 이듬해인 1973년에 발표한 글이 <陸橋附近>이었으니 이것으로 시작한 내 수필 쓰기의 고단한 삶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돌이켜 보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문학 창작에 뜻을 둔 많은 사람들이 여러 장르를 내왕하면서 고심하다가 오랜 시일을 거친 다음에라야 비로소 자기 적성에 맞는 어느 한 장르에 정착하게 된다는 사실을 겪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역 문인 중에는 여러 장르에 걸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만, 모르기는 해도 내 옅은 소견으로는 분명한 자기 전공 작품에만 전념하는 것이 작품의 질적 향상뿐만 아니라 그 시인이나 작가에 대한 독자의 분명한 인상과 신뢰감을 가지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나는 고향을 버리고 바다가 좋아 여수를 택했다. 바닷고기를 낚아 생계나 이어갈까 했지만 마음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낚시터에 앉아 있노라면 눈앞에는 바다가, 바다 위에는 하얀 구름과 푸른 하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다. <운명의 끈> 중에서 그러나 언제나 마음이 편안하고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무료할 때는 가끔 선창가로 산책을 나간다. 이들 폐선의 구조나 시설을 보아 옛날에는 어로의 대망을 품고 대양의 험한 파도를 헤치고 젊음의 꿈을 한껏 펼쳤을 법도 한데 녹슨 선체의 갑판 위에는 때 묻은 이불 뭉치가 내팽개쳐져 있고, 낡은 밧줄이며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시커먼 기름통들의 황량한 풍경은 마치 지금의 늙어버린 내 몰골을 보는 듯하여 마음이 허전하다. 누구에게나 꿈 많고 화려했던 젊음은 있었겠지만, 나의 경우 과식으로 인한 설사 몇 번 하고 나니 내 인생 다 가고 말았다. <폐선>에서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해가 1998년 초가을이었으니 올해 8년째다. 다행히 나는 이곳 풍토에 곧 적응하여 여수수필문학회장이라는 벅찬 일까지 맡아 황막한 여수의 수필문학 저변확대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수필 지망생이 많이 모여들어 이들과 함께 열심히 공부하며 작품 활동도 하고 있다. 나는 불쑥 일을 잘 저지른다. 퇴직 후 서울에서의 여수행 결심은 잘한 일이었다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고, 이곳 친절하고 다정한, 새로 생긴 많은 친구들도 따뜻한 손으로 나를 이끌어 주고 있다.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은 언제나 즐겁고 편안하다. 마음이 허전할 때 선창가에 나가면 갈매기들은 언제나 종이비행기처럼 하얗게 날고 있으며, 뒷산 숲속에서는 새벽녘 소쩍새가 괜히 슬픈 척 목이 메고 있지만, 나에게는 포근하고 정겨운 한 편의 서정시로 가슴에 젖어든다. 나는 정치인이나 기업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하늘에 감사한다. 왜냐 하면 나는 지금도 도심을 벗어난 변두리 길을 걸으면서 꽃들과의 다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바다를 떠도는 갈매기들의 슬픈 낭만을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삶에 뿌리 내린 문학의 힘인지 모르겠다.
----------------------------------------- -약력- 경남 하동 진교 출생(1931. 12. 27)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수필과비평', '에세이스트' 편집고문 수필문우회 회원 여수문인협회 고문 여수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여수 '수필여백' 지도 카페 '정호경의 수필마을' 운영 저서. 까마귀야 까마귀야 (1994)(고려출판사) 오늘같이 즐거운 날 (2000)(수필선집)(수필문학사) 폐선 (2002)(2003년 '우수문학도서'로 선정(한국문예진흥원))(다빈치) 현대의 섬 (2004)(2005년 '우수문학도서'로 선정(한국문예진흥원)) (운디네) 좋은 글쓰기의 힘 (2006) (운디네) 낭패기(2007)(한국수필가100인선집)(좋은수필사) 춤추는 수필(현대해학수필선)(2009)(운디네) 오늘도 걷는다마는(2010)(2011년 '우수문학도서'로 선정(한국문예진흥원))(다룸과이룸) 육교 부근(2013)(수필선집)(선우미디어) 해 저문 날의 독백(2014)(다룸과이룸) 타향만리 그 친구(2018. 에세이스트) 수상. 현대수필문학상(에세이문학) (1995) 한려문학상 (2003) 한길문학상 (2003) 신곡문학상 대상 (2004) 제1회 김우종문학상 (2006) 제1회 정경문학상(2008) 올해의 수필인상(한국문인협회)(2012) 조경희수필문학상(2015)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