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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마르 11,9.10)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며 동시에 교회의 전통에 따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된 왕이심을 고백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1125년 교황 비오 11세는 하느님이 아닌 재물만을 숭상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거부하는 무신론과 온갖 세속주의의 흐름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이라는 은총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들의 진정한 임금이시며, 그 분의 통치로 온 세상이 다스려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대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이 같은 오늘,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한 온 세상의 통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거듭나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우선, 오늘 제 1 독서의 말씀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양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전해줍니다. 예언자는 마치 목자가 자신의 양들을 정성으로 보살피듯 하느님 역시 우리를 그렇게 보살펴 주심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에제 34,15-16)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온 산을 헤매며 마침내 그 양을 찾았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며 그 양의 아픈 곳을 싸매주고 원기를 북돋아 주는 착한 목자, 모든 양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며 그들을 푸른 풀밭으로, 잔잔한 물가로 이끌어 그들에게 쉴 곳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는 이 착한 목자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양 떼인 우리를 바로 그렇게 돌보아 주십니다. 오늘 제 1 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는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며 오늘 화답송의 시편 말씀 역시 오늘 1 독서의 말씀과 한 목소리로 목자인 주님을 따라 사는 우리들의 아쉬울 것 없는 마음을 다음의 말로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네.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고,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네.”(시편 23(22),1-3)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마치 이와 같아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이 시편의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같은 하느님의 사랑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당신의 양떼들에게 베풀어질 하느님의 사랑을 약속해 주면서 동시에 양들 사이에 숨어 있는 염소들을 가려내며 기름지고 힘센 양은 모조리 없애버리겠다며, 하느님께서는 그들 개개인을 공정으로 대할 것임을 다음과 같이 엄하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너희 나의 양 떼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에제 34,16ㄴ-17)
양 떼 속에 숨어 있는 염소들을 가려내고 양들 가운데 기름지고 힘센 양을 찾아내 그들 모두를 없애버리겠다는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의 약속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닌, 하느님 뜻에 합당한 이들에게만 베풀어지는 것임을 드러내 줍니다. 이 같은 사실은 ‘캄캄한 구름의 날’이라는 표현을 통해 보다 분명해집니다. 구름과 어두움이 덮이는 그 날이라는 표현은 성경 안에서 주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세상이 모두 어두움에 덮이듯 주님의 심판의 날이 곧 다가올 것이며 그 날 심판자이신 주님께서는 목자가 자신의 양 떼를 염소들 사이에서 가려내듯, 우리 역시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 양과 염소로 가려질 것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오늘 독서 안에서 약속된 하느님 사랑의 약속은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 심판의 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온 이들, 곧 염소 무리 속에서 양들을 구해내듯이 그들을 가려내어 그들에게 그 약속을 이루어주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마음 안에서 생겨나는 다음과 같은 물음과 마주하게 됩니다. 아니 도대체 기름지고 힘센 양은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들을 없애버리시겠다고 하시며 그들을 벌하는 것이 어떻게 공정하다는 것인가? 기름지고 힘센 것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또 양과 염소를 가르는 심판의 날, 우리는 과연 염소인가 아니면 양인가? 내가 염소인지 양인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또 만일 내가 지금은 염소이지만 차후 염소가 아닌 양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의 구원을 얻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양이 되어 착한 목자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선 지금 나는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이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러주시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예언적 서술로서, 하느님의 사랑과 더불어 심판의 날을 이야기하는 오늘 제 1 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과 같은 흐름 안에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오는 그 날, 곧 심판의 날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묘사는 독서의 말씀에 비해 보다 극적이며 구체적입니다. 임금의 모습으로 세상에 와 당신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으실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한데 모아 그들을 마치 양과 염소를 가르듯 그들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갈라 세울 것이며 그 구별에 따라 한편에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상을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영원히 불붙는 지옥 벌을 내리실 것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임금이 이와 같은 판단의 근거를 이야기하는 데에 두 무리 모두가 다음과 같은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마태 25,37-39)
임금이신 주님께서 그들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뉘어 세우고 그들이 그렇게 나누어진 이유, 곧 그들이 주님이신 그 분이 굶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병 들었을 때 그리고 감옥에 있을 때 그 분을 따뜻이 맞아들여 사랑의 베풀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렇게 나뉘었음을 설명해 주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들이 왜 그렇게 나뉘어졌는지 그리고 자신들에게 언제 주님이 다가오셔서 도움을 청했는지 전혀 알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의 말들로 주님께 반문하며, 특별히 영원히 불붙는 벌을 받게 된 왼편의 사람들은 더욱 흥분하여 도대체 주님의 말씀처럼 내가 언제 그렇게 행동했냐며, 그리고 대체 언제 주님께서 나를 찾아왔냐며 따져 물으며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주님이신 임금은 바로 다음의 말로 그들의 의문과 반문에 종지부를 찍고 그들에 대한 심판을 마무리 짓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며,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복음의 예수님이 분명히 이야기하시듯 캄캄한 구름이 온 천하를 덮는 심판의 날, 양과 염소를 가려내는 판단의 기준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주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헐벗고 가난한 이들, 소외받은 채 고독과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는 내 이웃들에게 내가 과연 사랑의 실천을 행동으로 옮겼는가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천의 여부는 내가 지금 내 주위의 가난한 이웃들을 외면한 채 나만의 이기심으로 나만의 욕구를 채워나간다면 그 모습은 바로 기름지고 힘센 양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판가름이 나게 될 것이라는 것, 바로 그런 이유로 오늘 제 1 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는 기름지고 힘센 양을 모조리 없애버리겠다는 하느님의 뜻을 전한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제 1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지금 이 순간, 교회의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며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지금의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지금 우리들은 어디에 있는지, 임금의 오른편에 서 있는지 아니면 왼편에 서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선택하라고 요청합니다. 지금 서 있는 곳에 계속 서 있을 것인지, 아니면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지금의 내 삶의 방식과 태도를 변화시킬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은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 주위의 헐벗고 가난한 이들, 소외받은 채 고독과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절망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행동의 실천이라는 것을 일러줍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오늘 제 1 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가 약속한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 곧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받고 마르지 않는 샘과 푸른 풀밭에서 착한 목자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음을 약속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선택이라는 결단을 요청받는 이 순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고독하고 외로운 선택의 순간에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선택에 결정적 도움을 줄 무언가를 준비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 선택으로 결단을 내리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바로 그 무언가가 오늘 제 2 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오늘 제 2 독서의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이 부활은 바로 하느님에 의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되었으며 그 분의 부활을 시작으로 모든 이들이 죽음을 통해 다시 부활할 것임을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곧 맏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시작으로 모든 이들이 각각의 차례에 따라 하느님이 마련하신 가장 큰 선물,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부활을 통해 얻게 될 것임을 바오로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같은 말씀은 선택의 결단을 요청받는 우리들의 눈앞에 바로 그 선택의 상황을 몸소 겪으시며 두려움과 외로움에도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선택의 결단을 내린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 곧 예수님 그 분께서 몸소 우리보다 먼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순간들을 겪으셨으며 그 선택의 결과 우리보다 앞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몸소 걸으시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려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분이 바로 연중의 마지막 시기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맞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 기억하고 기념하는 왕이며 임금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송동 교우 여러분,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당신이 마련해 놓으신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준비해 두시고 우리 각자를 부르십니다. 그 사랑의 길을 따르라고, 그 길을 걸어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선택이 낳게 될 결과가 두려워 결단을 내리기 힘들고 어렵다면, 우리 눈앞에 보이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일러주십니다. 그 분이 가신 길, 십자가의 길이었지만 그 길 이후의 하느님의 사랑의 힘으로 부활의 기적을 보여주시고 그 이후의 모든 결실을 몸소 보여주신 그 분을 바라보며 힘을 내 결단을 내리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십자가의 그 분, 우리들의 유일한 임금이며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용기를 내십시오. 그 분이 우리의 선택에 힘을 실어주시고 두려워 떠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그 분과 함께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내 주위의 이웃들에게 시선을 돌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눈에 여러분의 곁에 와계신 헐벗고 굶주린 가난한 예수님, 외로움과 고독함에 절망의 나락에서 허덕이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예수님에게 여러분의 사랑을 나누어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오른편에서 그 분이 마련하신 영원한 상급을 얻으며 행복과 기쁨의 삶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삶의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귓가에 들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참 행복과 기쁨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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