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20장에는 소발이 말싸움에 끼어듭니다.
그 시대의 신앙의 인물들이 총동원해서 욥을 공박합니다.
지금도 어떤 목사가 병과 싸우면서 이건 징계가 아니라고 항변을 하더군요.
세상에 그리스도인들 중에 징계를 안 받는 이가 누굽니까?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라면 최소한 하나님의 잔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법인데 나의
병은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고요? 그럼 가족력이라고 변명하고 싶은 건가요?
아버지가 그 병을 앓았으면 나도 꼭 같이 앓아야만 할까요? 그럴 가능성이 있을
뿐이지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간다면 그럴 리는 없습니다. 단언하건대
그리스도 안에서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가족력 따위는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1절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절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내 생각 곧 내 견해로 대답한다는 말인데 자문자답입니다. 스스로의 깨달음이죠.
자기 개념의 생각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소리와 같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롬8:6)이냐 나의 이성의 생각이냐입니다.
3절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 자화자찬의 말입니다.
20장 이후는 인간의 개념이 변하는 구원의 필요성을 말씀하십니다.
4절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5절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6절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앞에서 나온 욥의 소망을 소발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 봤자라는 겁니다.
7절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아무리 신앙이 좋다 할지라도 인생은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은 현재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만일 허무와 당황에 쌓여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욥과 세 친구와 같은 인문학적인 트랩에 갇혀 있는 겁니다.
지금 방송에서 떠드는 강사나 종교인들의 말들은 이와 같은 속임수들입니다.
12절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13절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14절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15절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허망함을 말해 놓고는 내세를 위해 헌신을 강요합니다.
이 땅에서 충성하면 죽어서 천국에 가서 면류관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실까? 그런 사람에게는 욥기가 위로가 될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을 찾고 내일을 사들여야 합니다. 세상의 장사꾼을 보세요.
그래서 성경은 내게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십니다. 포기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평강, 안식, 영광, 존귀를 바란다는 것은 실체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 천국에만 이와 같은 상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음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롬2:7) 주식도 옛날에는
300포인트 정도였으나 지금은 2,500포인트 이상으로 올라 8배 이상이나 불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지금 이 시간 시작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씨에서 싹,
그리고 이삭 그 다음엔 이삭에 충실한 곡식으로 나아가라(막4:26-29)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말장난만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욥과 세 친구와
같이 서로 변론만 합니다. 그러지 말고 마땅히 자신이 갈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을 포기하면 내일은 없으므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다(엡5:16)고 하십니다.
욥기는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일 로마서를 터득했다면 창1장의 하나님의 계획이 비전이 되도록 하세요.
말씀이 꿈이 됩니다. 특별히 창1:27-28절은 그리스도 안에 거듭난 자들의 비전입니다.
욥기를 통한 첫째 깨달음은 인간의 의식은 과거의 결산과 그 보상이라는 겁니다.
이는 인과응보라는 철학적인 사고이며 세상의 모든 종교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아직 결산 할 때가 아닙니다. 돈을 크게 버는
사람도 그 날 번 것을 낱장으로 세어 가면서 결산하지 않고 자루에 쓸어 담습니다.
욥기를 통한 깨달음의 두 번째는 이제 인과응보의 대한 논쟁을 끝내자는 겁니다.
해 아래의 것에 대한 원인과 동기로 낑낑대지 말로 하늘 위의 비전을 갖고 살아야죠.
욥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본 답니다. 이 말은 이럭저럭 살다가
죽으면 천국은 가겠지 하는 겁니다. 저는 이 세상이 살기 어려우니까 천국이나 가야지
한다거나 힘든 세상이니 주님이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어디 난지도(과거 쓰레기장이었음)냐 세상의 쓰레기들이나 가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산자는 ‘아차’하고 깨닫는 순간에 또 다시 시작합니다.
산자의 회개는 울고불고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로 시작합니다.
어둠과 죄의 자리를 떨쳐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입고 다시
빛 가운데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단 한 절로 표현한 미가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여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처리하고 그 인자하심을 사랑하여 주와
한 떡 한 몸 한 영이 되어 겸손히 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미6:8)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