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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만든 1988년 영화.
필립 카우프먼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1968년 소련의 프라하 침공 전후를 배경으로
상이한 삶의 태도를 보이는 세 남녀의 사랑을 그린다.
섹슈얼리티와 실존의 문제를
절제되고 우아한 리듬으로 풀어나간 작품으로
희극처럼 시작한 주인공들의 만남이
정치적 격변 속에서 비극의 무게를 입게 되는 과정을 담담히 좇아간다.
주연: 다니엘 데이 루이스, 줄리엣 비노쉬, 레나 올린, 데렉 드 린트, 얼랜드 조셉슨,
파벨 랜도프스키, 도널드 모팻, 스텔란 스카스가드
토마스는 체코 프라하에 사는 젊은 외과 전문의다. 그는 여러 여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으며 어느 한 사람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삶을 즐기고 있다. 토마스는 환자의 치료차 방문한 온천 마을에서 웨이트리스인 테레사와 우연히 만난다. 운명에 이끌리듯 토마스를 찾아 프라하로 상경한 테레사는 그의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테레사는 토마스의 애인이기도 한 화가 사비나를 통해 사진 일자리를 얻는 등 프라하 생활에 점점 적응해가지만 토마스의 여성 편력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프라하의 봄’을 저지하는 소련군의 탱크가 밀려들어오고 테레사는 소련군의 탄압과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던 중 경찰에 검거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참담한 현실에 환멸을 느낀 토마스와 테레사는 체코 국경을 넘어 중립국인 스위스로 거주지를 옮긴다. 한편 두 사람보다 먼저 제네바로 망명한 사비나는 프란츠라는 유부남 교수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가 막상 부인과 헤어지고 그녀 곁으로 다가오자 도망쳐버린다.
제네바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토마스의 가벼운 생활방식을 더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테레사는 혼자서 체코로 돌아온다. 그리고 얼마 뒤 토마스 역시 그녀를 뒤따라온다. 프라하의 정국은 더욱 경직되고, 두 사람의 삶은 정치적 격랑 속에 점점 잠식되어간다.
1. 감독 소개
학창 시절 법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미국 시카고 출신의 필립 카우프먼은
좀더 자유로운 학문과 사고의 가능성을 꿈꿨다.
1960년대 초반
유럽 여러 나라를 체류한 뒤 귀국한
카우프먼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들과 파졸리니의 작품을 접하면서
뒤늦게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친구 벤자민 매너스터와 공동 연출한 저예산 코미디 〈골드스타인〉(1964)으로
칸영화제에서 젊은 비평가상(Prix de la Nouvelle Critique)을 수상했다.
장 르누아르는
이 영화에 대해 지난 20년간 나온 미국영화 중 최고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보내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 카우프먼은
할리우드에서 작가와 감독으로 활동하게 된다.
웨스턴 〈그레이트 노스필드, 미네소타 레이드〉(1971),
북극 탐험영화 〈하얀 새벽〉(1973) 등을 통해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던 카우프먼은
원작인 돈 시겔의 〈신체강탈자의 침입〉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
리메이크작 〈외계의 침입자〉(1978)를 연출하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카우프먼은 조지 루카스와 함께 〈레이더스〉(1977)의 원안을 짠 것으로도 유명한데,
성궤를 좇는 이야기 틀 자체는 카우프먼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그는 이후 꾸준히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이처럼 카우프먼은 다양한 장르에 걸쳐서 관심과 재능을 표출해왔는데,
그 가운데 꾸준히 드러나는 경향은 그가 문학작품의 각색에 남다른 감각을 보였다는 것이다.
특히 톰 울프의 책을 토대로 한 우주 비행사들의 이야기 〈필사의 도전〉(1983)과
밀란 쿤데라의 유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프라하의 봄〉(1988)은
그에게 국내외 많은 상을 안기며
신뢰받는 감독으로서 입지를 다지게 하였다.
카우프먼은 유명 예술가들의 격정적 삶에 관해서도 독특한 해석을 시도해왔다.
작가 헨리 밀러와 그의 아내 준 밀러 그리고 이들을 사랑한 아나이스 닌의 관계를 다룬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1990),
사드 후작의 광기어린 글쓰기 과정을 묘사한 〈퀼스〉(2000),
그리고 최근작 〈헤밍웨이와 겔혼〉(2012) 등이 이에 해당한다.
〈프라하의 봄〉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퀼스〉 등
평자들에게 공통적으로 꼽히는 그의 대표작들에는 일관된 특징이 있다.
바로 인물들의 에로틱한 욕망이
유려한 리듬 속에 전시된다는 것이다.
때로는 냉정하고 우아하게,
때로는 탐미적인 아우라를 풍기며,
혹은 노골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자극을 동반하면서
카우프먼의 영화는
섹슈얼리티와 실존의 문제에 대한 지적인 탐구를 지속해왔다.
2. 각색과 영화의 주제
〈프라하의 봄〉의 원작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이다.
영화 개봉 이전부터 해당 소설의 영화화 작업에 난색을 표하는 회의적인 시선이 존재했다.
과연 원작이 갖는 독특한 형식과 사색적인 깊이가 훼손되지 않고
영상으로 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쿤데라의 소설은
각 인물들의 상황과 생각을 1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담은 챕터들이 이야기를 반복, 재진술하며
의미를 중첩시켜나가는 실험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철학적 명상을 담은 에세이풍의 논평 또한 곳곳에 첨가되어 있다.
그러나 카우프먼과 장 클로드 카리에르의 시나리오는
소설이 표방하는 텍스트의 다의성을 유보하는 한편,
이야기의 곁가지들을 상당수 쳐냈다.
덕분에 사비나와 프란츠의 비중은 대폭 줄어들었고
이야기의 포커스가 테레사와 토마스에게 집중되어
영화의 주된 갈등이 두 남녀의 러브 스토리 차원으로 축소되었다.
니체와 파르메니데스, 키치 담론을 경유하며
인간의 실존 문제를 논하던 원작의 야심은
몇몇 대사에 흔적을 남겼지만 이 또한 겉핥기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원작을 토대로 영화의 성취 여부를 단정하는 것은 언제나 부당한 감이 있다.
몇몇 평자들은 〈프라하의 봄〉이
소설에 비해 거리두기에 실패한 탓에
캐릭터의 삶이 전형성을 입고 다소 심각해진 점을 영화의 한계로 지적했다.
그러나 이 점은 거꾸로 영화의 미덕이 될 수도 있다.
영화는 희극적인 터치로 시작된 주인공들의 삶이
정치적 격랑에 휘말리면서 비극적인 속성을 입게 되고
결국 소박한 전원생활 한가운데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과정을 차분히 좇아간다.
희비극을 아우르는 삶 자체의 고유한 리듬과 속성이 일관성 있게 그려지며
그것이 끝내 감동을 주는 것이다.
토마스나 사비나 같은 인물들은
자의적인 판단 과정을 거쳐서 스스로 삶의 방식을 결정한 사람들이다.
사실상 그들의 ‘가벼운’ 일상은 일정 부분 추상성을 갖고 있으며,
이는 자칫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카우프먼은 캐릭터의 이같은 속성을
화면 속에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구현해내면서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각자의 구체적 삶을 만나게 하였다.
3. 역사적 배경
카우프먼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영화화 작업을 처음 제의한 것은
체코 출신의 감독 밀로스 포먼이었다.
포먼은 프라하의 고등영화연구원에서 쿤데라의 강의를 듣던 학생이었고
그 스스로가 소련의 프라하 침공 이후 고국을 떠나온 장본인으로서
이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당시에도
그의 가족들과 친지들은 체코에 살고 있었기에
포먼은 영화로 인해 그들이 공산 정권하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해
결국 제작과정에서 빠지게 된다.
경직된 정치 상황과 이에 따른 불안은 실제 촬영에도 영향을 미쳤다.
카우프먼은 프라하에서 이 영화를 찍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대신 프랑스의 리옹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카우프먼은 〈프라하의 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밀로스 포먼과 함께
1960년대 체코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얀 네멕 감독의 도움을 받았는데,
네멕은 영화에서 소련 경찰에게 심문받는 사진작가로 직접 카메오 출연했다.
영화에 활용된 다큐멘터리 영상은
1968년 당시
프라하 영화학교 출신 학생들이 직접 촬영한 것들이며
그중에는 네멕의 촬영 클립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우프먼과 촬영감독 스벤 닉비스트는
이들이 찍은 실제 다큐멘터리 릴에 배우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혼합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시대의 리얼리티를 영상 속에 녹여낸다.
〈프라하의 봄〉에서
정치적 격변은 인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핵심적인 원인이다.
테레사는 소련군의 탱크가 출몰하는 현장에서 열정을 바칠 만한 관심사를 찾아내지만
그 열정 못지않은 환멸을 느끼게 되고,
토마스는 수뇌부의 압력으로 인해 결국 생업으로 삼고 있는 자리에서 물러나
유리창 닦이 일을 시작한다.
나라 밖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비나는
근원 모를 우수에 젖어 있다.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소련의 침공은
원작 소설보다 영화 속에서 한층 더 중요한 사건으로 개입하고 있다.
토마스(다니엘 데이 루이스) : 프라하의 젊은 외과의사로
여러 여성과 육체적 관계를 즐기면서도 구속받길 원치 않는다.
우연히 만난 테레사와 결혼까지 하지만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지속하며 아내와 갈등한다.
제네바에서 다시 체코로 돌아온 뒤,
한때 그가 썼던 정치풍자 글 때문에 협박을 받지만 이에 타협하지 않는다.
테레사(줄리엣 비노쉬) : 작은 온천 마을의 웨이트리스로
토마스에게 첫눈에 반해 무작정 그를 찾아온다.
사진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열정을 쏟지만
여러 현실 조건으로 인해 작업을 지속하지 못한다.
토마스의 여성 편력에 상처를 입고
스스로 일탈을 시도하지만 오히려 불안만 떠안게 된다.
사비나(레나 올린) : 프라하에 사는 화가이자 토마스의 연인.
토마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공유한다.
토마스가 결혼한 뒤에도 그와의 관계를 지속하며
그의 부탁으로 테레사를 돕기도 한다.
소련군이 프라하를 침공하자
제네바로 망명하고
일련의 사건을 경험한 뒤에 미국으로 건너간다.
프란츠(데렉 드 린트) : 제네바에서 사비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진지한 성격의 대학교수.
사비나와 함께하기 위해 아내와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지만
그 일로 사비나에게 부담을 주게 된다.
"내가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 알아요.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나는 짐이 되고 있어요.
삶은 내게 너무 무거워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너무도 가볍군요.
나는 이 가벼움을, 자유를 참을 수 없어요.
난 그렇게 강하지 못해요.
프라하에서는 단지 당신의 사랑만이 필요했는데,
스위스에서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했어요.
당신이 날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난 약한 사람이에요.
난 약자들의 나라로 돌아가요. 안녕!"
- 테레사 .테레사는 위의 내용을 담은 한편의 편지를 남겨놓고
제네바를 떠나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제네바에서 원하는 일거리를 찾지 못했고
여전히 성적 방종을 보이는 토마스에게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토마스와 테레사의 상이한 삶의 방식과
둘 사이의 간극은
이 짤막한 편지로 정리된다.
그러나 편지를 읽은 토마스는
다시 테레사의 곁으로,
한층 무거워진 삶의 조건 속으로 돌아오게 된다.
• 1989년 영국 아카데미 영화제(BAFTA) 각색상(장 클로드 카리에르, 필립 카우프먼)
• 1989년 전미영화평론가협회상 작품상, 감독상
• 1989년 보스턴비평가협회상 촬영상(스벤 닉비스트), 남우주연상(다니엘 데이 루이스)
• 1989년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촬영상(스벤 닉비스트)
〈프라하의 봄〉의 음악은
대부분 체코의 작곡가 레오시 야나첵(Leoš Janáček)의 곡으로 구성됐다.
원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음악이 베토벤의 곡인데 반해
야나첵의 음악을 사용하게 된 것은
원작자인 쿤데라의 권유 때문이기도 하다.
피아니스트였던 쿤데라의 아버지는
야나첵과 함께 공부를 했던 탓에 쿤데라는 그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고 한다.
카우프만은 이 영화가 음악적으로 안단테에서 아다지오,
즉 느린 리듬에서 매우 느린 리듬으로 가길 원했고,
야나첵의 음악은 여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야나첵의 〈현악4중주 2번〉과 피아노곡 〈The Holy Virgin of Frydek〉,
첼로와 피아노 2중주인 〈The Story of Tsar Berendyey〉 등이 인상적인 곡이다.
또한 ‘프라하의 봄’을 맞아 자유를 외치는 청년들을
테레사가 사진기로 촬영하는 장면에 흐르는 노래는
체코의 여가수 마르타 쿠비소바(Marta Kubišová)가 체코어로 부른 〈Hey Jude〉다.
쿠비소바는 실제로 프라하의 봄 당시 청년 세대를 대표하는 가수였고,
소련에 의해 진압당한 뒤 한동안 활동을 정지당했다.
소련군의 진압 장면과 함께 들리는 〈Joj, Joj, Joj〉는
체코의 민속음악 악단인 야센카(Jasénka)가 부른 곡이다.
- 김효선, 세계영화작품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