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가 되고 가정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서 그런가? 아니면 원중이가 커져서 더 많은 손이 필요해서 그런지 부쩍 산에 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아니면 교회 때문이던가? 작년부터 온전한 신도의 자세로 교회에 다니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나는 산을 먹고 살아온 인간이 아닌가? 산이 아니었으면 어쩌면 병들어 죽었을런지도 모른다. 몇번에 걸친 재정 파탄, 삶에서의 큰 굴곡들이 있었던 나를 구해준 것은 늘 산이었다. 어렵고 힘들 때에는 나는 무조건 현실도피했다. 어디로? 산으로............사실은 그게 나를 살렸다. 실은 근본적인 생존본능이 남보다 못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어쨌든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연휴에 무심코 나선다. 옛 산친구 박광태와 함께.........그가 최근에 경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우리는 아침부터 차를 달려 충남 금산 진악산으로 온다.
진악산 들머리를 계진리 방면으로 잡는다.
진악산(732m)은 충청남도 금산군에 있는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대산은 북방을 진수하고 진악산은 남방을 가리었다."고 하고, 동일 문헌에 "진악산은 군의 남쪽 7리에 있다. 동쪽 봉우리 아래에 석혈(石穴)이 있는데 서너 걸음 들어가면 물소리가 요란하여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전하는 말로는 용이 사는 곳이라고 하는데 날이 가물 때 호랑이 머리를 집어넣으면 감응이 있다고 한다."고 하여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설에는 "진악이란 명칭이 즐거움이 크게 일어나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는데, 옛날 홍수가 났을 때 이 산만 지네만큼 남았다 하여 진악산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산에는 관음봉 · 문필봉 · 노적봉 · 물금봉 등 여러 봉우리가 있는데, 그중에서 관음봉은 강처사가 관음굴에서 어머니 병환을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여 산신령의 계시로 인삼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금산은 예로부터 인삼의 산지로서 널리 알려진 곳이고, 최근에는 인공위성 중계 탑이 있는 등 위치적으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최후의 1명까지 왜적에 항거하다가 순절한 우국 충정의 넋이 묻혀 있는 칠백의총이 있는 곳이다.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금산 전체가 인삼밭이다.
계진리에서 오르다보면 선공암이라는 암자가 나온다. 이 선공암에서 우측길로 오르면 주능선으로 가는 길이다.
진악은 금산읍 시내에서 남서쪽을 가로 막고 솟아 있다. 서대산, 계룡산, 오서산에 이어 충남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으로 주능선에 기암괴봉이 많고 숲이 무성하다. 산자락에는 고찰 영천암과 영천약수, 보석사, 선공암, 원효암, 봉화대, 관음암, 관음굴, 원효폭포 등 명소가 많고, 보석사 입구에는 전나무 숲과 수령 약 1000년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65)가 있다. 남이면에는 인삼시장이 서고, 금성면에는 칠백의총(사적 105)이 있다.
오늘 마침 부처님 오신 날, 사월 초파일인데 선공암 정원에 꽃이 잔뜩 피었다.
선공암에서 우측으로 산을 오르다보면 바로 나오는 약수터.
산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길도 어렴풋하다. 오랜만에 호젓한 산행이라 둘다 마냥 즐겁다.
수풀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올라가면서 내내 더덕을 캐 그 냄새가 한층 식욕을 돋구어 준다.
금산읍내가 보인다.
가파른 비탈길을 뒤 따르는 場巖 박광태.
이제 주능선이 보이고..............진악은 산이 암산인 관계로 계곡이 다소 미흡한 점이 없지 않으나, 전망 좋은 암봉과 아기자기한 능선길이며 보석사, 영천암 같은 유서 깊은 사찰과 함께 일대에는 울창한 수람이 있으므로 인근 주민들의 방문이 적지 않은 곳이기도 한데, 대둔산과 서대산의 명성에 눌려 더욱 빛을 못보고 있는 산이다.
금산읍내 쪽을 내려다 보니 시커멓게 보이는 곳이 인삼밭이다.
이제 정상부
금산읍 전체가 드러났다.
진악산, 또는 진락산.............
여기서 보석사까지는 4.4km, 가깝지 않은 거리이다. 원중이가 기다리고 있겠지.
정상에서 동쪽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서북쪽으로는 대둔산, 서대산, 남쪽으로는 운장산, 구봉산이 보인다.
보석사 방면으로 주능선을 타고 나아가니 저 아래 저수지도 보인다.
이제 보석사가 2.6km 남았다.
도구통바위에 닿는다.
도구통바위에서는 보석사가 2.1km 남았고..............
이제 도로를 만나고............영천암 지나 저 밑에 보석사가 있다.
이제 쭉 내려가면 보석사다.
보석사 직전 계곡 안 큰 바위에 서각이 새겨져 있고..............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보석사 입구에 서 있으며 높이 40m, 둘레 10.4m로 나무의 나이는 1,0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나무가 오래 되어 위로 뻗은 가지가 땅으로 뻗었고, 다시 그곳에서 가지가 자라 오르고 있으며 뿌리가 100여평에 걸쳐 땅속에 퍼져 있다. 장엄하고 위압적인 외형를 갖추고 있으며, 중심 가지는 부러지지 않고 남아 있어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
이 나무는 창건주 조구가 제자 5인과 더불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하는 뜻에서 둥글게 여섯 그루를 심은 것이 하나로 합해졌다고 하며, 나라에 이변이 있을 때는 24시간을 운다고 한다.
매년 음력 2월 15일(경칩)에 보석사 신도들이 은행나무 앞에서 대신제를 지낸다.
천연기념물 보석사 은행나무
보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885년(헌강왕 11)에 조구(祖丘)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 절 앞산에서 채굴한 금으로 불상을 주조하였기 때문에 절 이름을 보석사라고 하였다.
그 뒤에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고종 때 민비(閔妃)가 중창하였으며, 1912년부터는 31본산의 하나로서, 전라북도 일원의 33개 말사를 통괄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다포집 맞배지붕이며,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관세음보살·문수보살의 좌상을 모셨는데,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섬세하며, 상호가 원만하고 자비로워 조선시대 불상 중에서는 극치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진영각은 휴정(休靜)·유정(惟政)·영규(靈圭)의 영정을 모셨던 곳이나 최근에 영정을 도난당하였다. 또한 이 절의 의병승장비는 공주의 청련암과 보석사에서 무예를 익힌 뒤 임진왜란 때 왜병과 싸우다가 전사한 승병장 영규 의 순절비로서, 1839년 5월에 금산 군수가 절 입구에 세운 것이다. 영규가 순국한 내용을 적은 이 비는 민족 항일기에 일본인에 의해서 자획이 뭉개지고 땅에 묻혔던 것을 1945년 정요신(鄭堯臣)이 찾아서 다시 세웠으며, 높이는 약 4m이다.
경주에서 싸 가지고 온 도시락을 버리기 아까워 꺼내 먹는다. 캔 더덕도 같이 먹는다. 초라해도 맛은 꿀맛이다. 이제 전북 고창으로 들어갈 예정이다. 내일은 서울친구들과 고창에서 만나 선운산을 등반하려고 한다.
첫댓글 날씨 좋을 때 산행하신 것 같네요^^
엥? 영화가 이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