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1254년, 도움염불(助念) 받고 불보살을 염하며 극락 간 흥왕도감
고종 41년(1254)
서울 국립중앙박물관(No 신2774)
양택춘 무덤돌 글(梁宅椿墓誌銘)
공은 성이 양梁이고 이름이 택춘宅椿으로, 대정 12년(명종 2년, 1172) 임진년에 태어났다. 그 선조는 계림 김씨인데 뒤에 대방군帶方郡으로 이주하여 양씨로 고쳤다.
나이 60세[耳順] 즈음에 온수군감무溫水郡監務가 되어 비로소 첫 벼슬에 나아갔다고 한다. 8, 9년이 지나자 옥을 물고, 19년이 지나자 허리에 붉은 띠를 둘렀다. 아주 늦은 나이에 영화를 보았으니, 사람 일에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운명을 알고 물러났고, 녹봉을 구하려는 뜻이 없었다.
광렬공匡烈公 최이崔怡 공이 선원사禪源社를 세우자, 온 나라 고승을 가려 뽑아서 모임을 맡도록 하였는데, 공의 맏아들 안기安其 공이 그 뽑는 일에 앞장섰으므로 작위를 주어 선사禪師로 삼고 멀리 단속사斷俗寺의 주지로 삼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아들 때문에 공을 불러서 좌우위녹사참군사左右衛綠事叅軍事로 삼았고, 경희궁부사慶禧宮副使 녹봉을 받게 하였다. 공의 나이가 이미 70살 남짓 되었는데, 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 벼슬을 내리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하였으며, 이로 따른 녹봉을 주었다. 지금의 상상上相인 최항崔沆 공이 부친을 이어 나랏일을 맡게 되자 옮겨서 수안궁부사壽安宮副使 벼슬을 주고, 또 더하여 흥왕도감興王都監 벼슬을 내리고, 다시 임금께 아뢰어 죽을 때까지 녹봉을 받게 하였다가 곧 조청대부 예빈경 朝請大夫 禮賓卿 벼슬을 내렸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공은 한평생 거짓말이나 망령된 말이나 속이는 짓을 하지 않고, 너그럽고 (남에게) 도탑게 대하는 웃어른이었다. 옛날과 현실을 아울러 모든 일을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가리키듯 잘 말하였고, 재계할 적에는 새벽부터 먹지 않았으며, 술을 마실 수 있으나 어지럽지 않았고 바둑을 둘 수 있으나 노름하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가끔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었으나, <손님이> 가면 불경의 교리를 읽으면서 일찍부터 세상의 일을 마음에 품지 않았다.
처음에 내시內侍 김수金脩의 딸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맏아들은 천영天英인데, 지금은 안기安其로 바꾸었다. 둘째 아들은 청유 淸裕로 바리때 하나를 가지고 구름처럼 돌아다닌다. 김씨가 죽은 뒤 다시 별장別將 배씨의 딸과 혼인하여 세 아들을 낳았는데, 행연行淵은 출가 후 삼중대사가 되어 우두사牛頭寺의 주지를 맡았고, 양정梁靖은 도량고판관道場庫判官이며, 양필梁弼은 대정隊正이니, 모두 나이가 어린 데도 지위와 이름이 높이 드러난 것은 실로 맏아들 안기 공의 음덕 때문이다.
갑인(고종 41년, 1254) 여름 4월 7일, 병이 위태롭게 되자 승려를 불러 염불하게 하였고, 목숨이 다할 때 그대로 붇다 말을 외고 보살 이름을 부르다가 잠드는 것처럼 얽매임 없이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서 돌아가셨으니, 이때의 나이는 83세였다. 기其 공이 슬피 울며 몸을 받들어 씻기로 화장하여 유골을 거두었다. 이해 6월 14일, 수양산 기슭에 장사지내면서 나에게 요청하여 간략히 기록을 남긴다. 명銘하여 이른다.
나이 80세에 명命이 비로소 통하여
집에는 녹祿이 내리고 허리에는 붉은 띠를 둘렀네.
주周 여상呂尙, 한漢 천추千秋와 시대는 멀지만, 자취는 서로 같구나.
법왕 태어나 믿는 가문을 맑히니,
누구를 받들어 보냈는가,
늙은 샤꺄(釋迦)로다.
공의 영화도 여기에 기댔으니,
기이하도다, 이런 아들 가짐이여.
갑인년(1254) 6월 ○일, 장사랑 시상서예부낭중 국학직강 지제고將仕郎 試尙書禮部郞中 國學直講 知制誥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김구金坵.
(뒷면)
· 상품상생진언
옴 암리따 다라나 쓰바하(oṃ amṛtā dharana svāha)
· 육자대명진언
옴 마니 빧메 훔(oṃ mani padme huṃ)
· 보루각報漏閣진언
옴 마니 다리 훔 팟(oṃ aāni dhali huṃ phaṭ)
·결정왕생정토주
옴 므리 달라 스바하(oṃ mṛ(gṛ) dhala svāhā)
卍 보정의 꼬리말
양택춘은 출가를 하지 않았는데도 단속사 주지 임명을 받은 적이 있고, 세 아들이 출가한 것을 보면 본인도 불제자로서 단정한 삶을 살았음이 틀림없다. 목숨이 다할 때 승려를 불러 염불을 하게 한 것은 현재 유행하고 있는 도움염불(助念) 습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붇다 말을 외고 보살 이름을 부르다가 잠드는 것처럼 얽매임 없이 갔다’라는 것은 붇다 말이란 ‘진언’이고 보살 이름은 ‘관세음보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고통 없이 잠드는 것처럼 간 것은 붇다가 맞이하여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나(支那) 선사들의 습속에서 앉거나 서서 죽는 것(坐脫立亡)을 높이 평가하였지만 사실 사꺄무니 붇다도 이 흥왕도감처럼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서 돌아가셨으니, 이것이 사자와獅子臥이고 와불의 참모습이다.
이 무덤돌은 뒷면에 산스크리트말 싣담 글자로 4개의 진언이 새겨져 있는 것도 특징이다. 조선시대 나온 『아미따경』 언해본에도 경 끝에 「불설보루각근본진언佛說報漏閣根本眞言」, 「보루각수심주報漏閣隨心呪」, 「무량수불설왕생정토주無量壽佛說往生淨土呪」, 「아미따심주阿彌陀心呪」, 「불설결정왕생진언佛說決定往生眞言」 (이상 용천사 판) 및 옴마니팟메훔 『육자대명』이 덧붙여져 있는 것을 보면 정토 행자들이 즐겨 외는 진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무덤돌 글은 선비가 썼으므로 정토 불교에 대한 깊은 “붇다 말을 외고 보살 이름을 부르다”라고 했지만, 뒷면 진언을 보면 전형적인 정토 행장의 임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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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무량공덕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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