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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
이지현
씨네21에 영화평을 쓴다. 프랑스에서 영화학을 공부했고, 예술 전반에 관심이 많다.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는 ‘웨스트 블루 펜션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총 세 가지의 에피소드로 연결 돼 있으며, 등장인물에 의해 [모란]이라고 발음되기도 하는, 전북 부안의 ‘모항’이 배경인 영화다. 프랑스의 유명 여배우 Isabelle Anne Huppert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위페르가 연기하는 극중 ‘안느’는 입을 벌려 [모항]의 지명을 여러 번 발음하는데, 불어 발음 체계로 모항을 적으면 ‘Moran’이기에 어쩌면 촬영 중 스크립트엔 Moran이라 적혔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세 에피소드를 엮는 화자도 나온다. 정유미가 맡은 ‘원주’인데, 영화과를 휴학한 학생이다. 사업이 망한 이모부 때문에 도피 차 이곳에 와 있는 그녀는 시간이 생겨서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이모부가 ‘자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 원주는 이모부가 자수가 아니라 ‘자살’이나 하지 않을까 하면서 빈정댄다. 돌이켜 생각하면 엄마와 딸이 등장하는 이 첫 번째 시퀀스는 상당히 의미심장해 보인다. 딸은 빚보증을 서지 말라고 몇 번이나 ‘반복’한 자기의 말을 기억이나 하냐고 엄마를 채근하는데, 어찌되었건 그렇다고 이미 벌어진 일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둘은 평가를 내리려 한다. 원주는 이모부가 ‘사람 이하’라고 결론짓고, 엄마는 이모가 ‘잘못된 사람’을 만났다고 믿는다. 그들은 ‘치사하게 도망이나 친’ 이모부를 함께 평한 후, 엄마는 케익을 먹고 딸은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쓰러 (책상이 아닌) 식탁으로 떠난다.
이렇게 내용을 나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이미 영화를 본 당신이라면 위의 글을 읽으며 무언가 정리되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이 영화에는 ‘비슷하게 생긴 다른 단어, 반복되는 단어, 그리고 같은 것을 칭하지만 다르게 발음되는 단어’의 무리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단어에서 멈추지 않는다. 사람이 연기하는 캐릭터도 마치 하나의 단어처럼 똑같이 생겼지만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기도 하고, 비슷한 생김새의 물건들도 마치 복제품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될 때가 있다. 예는 많다. 절에서 해를 가리기 썼던 양산이 비가 오자 우산으로 변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우산의 뚜껑이 텐트의 지붕을 생각나게 하는 것, 다시 텐트의 모양새가 펜션 복층 침실의 모양새와 비슷한 점, 그리고 텐트는 그 자체가 하나의 house가 된다는 식에 이르기까지. 이런 예를 찾으며 숨바꼭질하듯 영화를 보아도 충분히 재밌을 것 같다. 개인적으론 <강원도의 힘> 이후 홍상수의 작품 중 가장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이후 바뀐 홍상수의 화풍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기분이 들었다.
첫 번째 단편
먼저 시작되는 이 단편은 ‘빚 때문에 이곳에 온 어떤 여자’에서 주인공이 바뀐, ‘프랑스에서 온 진짜 멋진 감독’에 관한 이야기다. 등장하자마자 이 첫째 스토리의 주인공은 해변에서 깨진 소주병을 발견한다. 그 병을 한국인들은 ‘크레이지한 인물’이 버린 병이라 설명하는데, 이때의 크레이지는 ‘다른 이들을 배려치 않는’이란 의미다. 이후 화자인 원주가 직접 극에 등장한다. 그녀는 흰옷을 입고 있는데, 이때 안느는 푸른빛의 상하의를 착용했다. 이를 유심히 보아야 한다. 원주는 안느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캐릭터다. 안느를 보고 ‘멋있다’고 감탄하고, 이는 이내 ‘beautiful’이라 통역돼 전해진다. 화답하듯 안느도 원주를 향해서도 예쁘다고 한다. 이때의 뷰티풀은 ‘고맙다’다. 그들은 이후에도 서로 이를 주고 받는다. 문소리가 연기한 ‘감독의 아내’도 이 대화에 낀다. 남편에게 그녀는 나도 예쁘냐고 되묻는데, 이때의 “당연히 예쁘지.”는 누가 들어도 예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어쩜 ‘프랑스에서 온 진짜 멋진 감독’은 ‘빚 때문에 이곳에 온 어떤 여자’와 동일한 의미가 아닐까도 싶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한 장면에서도 영화적인 어떤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끝내 이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도망친 여자와 멋진 감독 간의 개념적 동일화는 이루어지지 않기에 일단 뒤로 미루어 둔다.
안느는 라이트하우스를 찾아서 떠난다. 처음 이 목표는 ’something’을 보여주겠단 원주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길을 헤매다 만난 ‘안전요원’에게 안느가 묻는 건 정확히 ‘스몰 라이트하우스’로 바뀌어 있다. 그리고 이 small one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외형이 비슷한 다른 모양으로 대신 등장한다. 등대와 모양이 같은 휴대용 라이트. 일단 처음의 신에서 안전요원은 모른다고 답한 채 화제를 돌려 자신을 소개하는 데 집중한다. 명찰처럼 ‘life guard’란 글자를 등에 붙이고서 그는 자신을 ‘라이프가드’라 말한다. “이프 유 스윔, 아 윌 프로텍트 유.”를 덧붙이면서. 이 문장을 기억해둬야 할 것 같다. 흔히 하는 해석과 전혀 다른 패턴이 되어서 후에 재등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를 떠올려 보라. 텐트 속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잠이 드는 순간, 기묘하게도 이를 보는 관객들의 귀에 이 외침이 들려온다. 텐트 속 요원은 수영할 때 숨을 뱉는 패턴처럼 코를 골며 잔다. 이때 그의 포즈는 안느를 팔에 끼고 보호하는 뉘앙스. 그가 그녀를 프로텍트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 곁엔 불이 켜진 ‘스몰 라이트하우스’가 서 있다. 만약 그렇다면, 만약이지만 우리는 이 텐트 속의 상황을 ‘수영하는 중’이라 표현할 수는 없는 걸까? 결과적으로 안느가 영화 속에서 (발을 물에 담그는 것을 제외하고) 직접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수영을 아주 잘 한다고 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텐트가 등장한다. 뜬금없이 텐트 앞에서 안전요원은 “유 캔 해브 잇.”한다. 안전요원과 동일한 패턴으로, 이는 곧 새로운 명칭을 가질 것이다. ‘Family WOW Quick setup’이라 문 앞에 적힌 별칭, 이 명찰은 반복되어 텐트를 잡을 때마다 요원과 함께 카메라에 잡힌다. 그런데 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대개의 관객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남자가 여자에게 내어줄 때, 우린 이를 ‘스몰하우스’로 이해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안전요원이 들어가 있을 때는 심지어 (그가 수영하는) 얕은 바닷물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다른 나라에서의 법칙에 따르면, 마치 마그리트의 그림이 ‘파이프’가 아니었던 것처럼 그 텐트는 그냥 텐트가 아니다.
코베아 텐트의 전신이 드러나는 것과 다르게, 웨스트 블루 펜션의 전체 모습이 끝까지 파악되지 않는 점도 눈여겨 봐야한다. 베이직한 공간 설정샷은 이 영화에는 없다. 펜션을 둘러싼 길의 형태라든가 모항해변과의 거리감까지도 의도적으로 숨겨져 있다. 펜션은 오직 ‘노을방’과 ‘하늘방 등 명찰이 붙어진 채 나열된다. 이러한 명칭, 이름표, 문자의 행렬…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름을 ‘안느’라고 소개하는 여자가 질문하는 “당신 이름은 무엇인가요?”에 안전요원이 끝끝내 대답하지 않는 것(그는 심지어 밤엔 ‘숯불 붙이는 사람’이 되지만, 이때마저도 그의 이름은 ‘안전요원’이다.)도 비슷한 패턴이다.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 유준상이 연기하는 남자는 정말이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인간이기보다 일종의 지표에 더 가까운 존재다. 감정이나 인간관계를 통해 캐릭터가 된 인물이 아니라, 영화 안의 법칙을 설정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 바꾸어 말해 그는 마그리트의 파이프다. 그가 말하는 ‘잇’은 텐트가 아니라 ‘카인드’의 변형이고, 후에 원주가 다시 변주하는 ‘디스 이즈 어 샌드위치 포 유’의 원류 또한 그다. 의미를 만들어내는 장치로써 그가 작곡한 ‘디스 이즈 송 포유’의 song은 말하자면 ‘한국인의 외국인에 대한 친절함의 대명사’라 칭할만하다. 이후 그의 new song은 ‘과도함’으로 해석돼 거절당하는데, 이는 관습을 오해, 이를테면 b를 p처럼 쓰는 상대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정리하자. 이 첫 번째의 에피소드를 통해 관객들은 ‘다른 나라에의 관습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후 이어지는 두 편의 단편은 여기서 설정한 의미를 알 때에만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단편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감독 ‘종(수)’은 안느에게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후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감독 ‘수’는 그녀의 숨겨진 애인 격의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안느보다 일을 더 중시 여기는 것 같다. 처음의 인물과 다르게, 두 번째의 안느는 ‘욕망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한국남자와의 사랑을 위해 용기있게 모항까지 온 여인이라 원주는 그를 소개하지만, 정작 그녀는 ‘용감한’보다는 ‘망상에 빠진’이란 수식에 더 어울린다. 그래서 그녀는 솔직하다. 모든 일이 그녀의 망상이기 때문이다. 보면, 앞선 에피소드의 감독 ‘종’에게 이번 차례의 안느는 화답하는 듯도 보인다. 그렇더라도 막상 연애를 시작하니 쉽지가 않지만. 각자의 부인과 남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이들은 필사적으로 피하는데 그 꼴이 매우 우습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게 애인을 기다리던 안느가 갑자기 염소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는 장면이다. “에헤헤헤-”하고. 또한 그녀는 등대 앞에 도착해선 “beau(beautiful)!”라고 모국어로 감탄한다. 그런데 그녀의 앞에 갑자기 수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소리를 흉내 낸다. “음매에에-” 두 사람 사이이 ‘메헤헤헤’한 사랑의 대화가 오가는 사이, 갑자기 지나가던 아저씨가 여자를 깨운다. 모든 게 그녀의 상상이었던 것. 첫 번째의 환상은 이렇게 끝이 난다.
이어서 시작된 두 번째 환상. 환상에서 깬 안느가 펜션으로 향하고 있다. 안전요원의 뒤를 졸졸 따라서 간다. 방에 도착한 다음 안느는 잠이 드는데, 그 사이 감독이 펜션에 당도한다. 힘들게 만난 둘은 해변으로 간다. 바다를 본 감독, 그는 이곳이 매우 dangerous하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이때의 위험 요소는 바닷물이 아니라 이곳에서 갑자기 만날지 모를 ‘누군가의 시선’ 이다. 그들만의 위험요소. 프로이트가 해석한 꿈의 언어처럼, 이곳의 인물들은 꿈에 대한 독립적 코드를 다들 지녔다. 심리학자가 환자의 내면을 파악하기 위해 언어를 살핀 것처럼, 그러니 우리도 노력해야 한다.
‘수’가 안전요원과 안느의 관계를 의심하는 이유는 단지 바닷가에서 둘이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안느의 꿈이기 때문에 가능한 의심. 즉, 안느가 앞선 에피소드의 친절한 요원에게 마음이 동요되었단 것의 증거가 수의 주정을 통해 드러난 셈이다. 동시에 그녀는 아내가 있는 감독에게도 동요되었다고 우린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고.
그러고 보니 단절된 이야기들을 잇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바로 화자인 원주의 옷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흰 옷을 입었던 그녀는 이번에는 푸른 계통의 상하의를 입고 나타났다. 앞서 안느가 입었던 바로 그 색이다. 원주는 3인칭 목소리의 주인이고, 이 모든 것을 쓰는 존재이다. 한편 이번 단편에서 안느는 붉은 색으로 바뀌었으니 이어지는 다음의 에피소드에서 원주가 붉은 옷을 입을 거란 걸 우린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두 번째의 챕터에서 안느는 자신이 원하는 바 내면을 명확히 드러내는 캐릭터로 변신한다. 가고 싶었던 등대가 보이는 바닷가에 정말 당도하고, 감독이랑 연인이 되며, 또한 젊은 남자를 선호하는 여인으로서의 모습도 솔직하게 나타낸다. 게다가 두 번이나 헛꿈을 꾸게 한 벌로 상대의 뺨을 내치기도 한다. 감독이 보낸 사무적 메시지의 마지막에 덧붙은 무미건조한 단어 ‘러브’처럼, 그녀는 두 번 상대의 뺨을 친 후 “사랑한다.”고 속삭이다. 아, 솔직한 내면을 보는 불편함! 이 사건을 망원경으로 지켜본 안전요원이 못 볼 걸 본 것 같다 한 말을 이해하겠다.
세 번째 단편
‘한국 여자 때문에 남편에게 이혼당한 아름다운 프랑스 여자’ 안느가 마지막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다. 이 여자가 지금까지의 안느들을 담고 있단 것은 우산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난다. 모두가 기억하는 것처럼, 세 번째의 안느는 2편에서 숨긴 우산을 찾아낸다. 이 완결판 격의 3편엔 안느의 마음을 달래려는 인물로 ‘민속학 교수’가 처음 나온다. 그런데 이 교수, 좀 이상하다. 달래려는 시늉을 하긴 하는데 마음이 없어 뵌다. 안느와 방을 같이 쓰는 걸 불편해 하고, 앞서의 ‘수’ 감독을 dangerous하게 했던 가상의 누군가처럼 ‘갑자기 감독을 알아보기’까지 한다.
몽블랑 펜을 선물하고 비싼 백을 들고 다니는 이 여성은, 게다가 안느를 절에 데려가서 절하는 모습을 따라하라고도 시킨다. 그곳에서 그녀가 말하는 수천마리 원숭이 운운은 마치 어딘가에서 들은 걸 그대로 외는 것 같다. 지금껏 언급됐던 모든 ‘비슷한 형체’의 집합인 양, 그녀는 오직 외형만을 지향하는 캐릭터다. ‘도올 김용욱’이 등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교수의 monkey 이야기를 전해들은 안느가 문득 monk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이때 교수가 소개한 인물이 그다. 짐작컨대 이 배우는 스님과 비슷한 외형 때문에 캐스팅되었지 싶다. 더구나 그의 진짜 직업이 스님이 아니란 건 전국민이 다 안다. 외형만 스님. 이 맥락에서 가장 적합한 캐스팅의 조건이다.
새벽이 되어 그녀는 감독이 이끄는 대로 something special을 만나러 나간다. 하지만 불발된다. 감독과 이야기 나누던 과거의 키스(첫째 이야기)와 환상 속에서의 딥키스(둘째 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하다가 마는 키스’로 마무리된다. 그녀는 좀 더 강해져야(strong) 할 것 같다. 다른 이들에게 안느는 ‘치사하게 잘못이나 하는, (원주의 이모부 같은) 도망친 사람’이 되어 있지만, 그녀가 과연 그렇게 단정지어질 인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껏 원주가 언급한 something을 등대로 알고 달려온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를 흉내 내 해석해 보면 이는 결국 ‘사랑하는 누군가’에 더 가까운 것인 걸 그녀는 이제 안다. ‘이혼 하고 온 여인’은 그렇게 ‘빚을 피해 이곳에 온 여인’의 다른 표현이 됐다.
원주는 ‘다른’ 이야기를 하려 글을 적기 시작했지만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을 뿐이다. 외형이 비슷하다고 해서 의미가 같진 않다. 세 번째의 안느는 이제 친절한 외형에 담긴 ‘진짜의 의도’를 꿰뚫는다. 소주를 벌컥 마시지만 그 안에 든 것은 소주가 아닐 것만 같고, 게다가 그 병을 해변에 던지는 외국인이 이제 완전한 크레이지 코리안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런 그에게 이곳은 다른 나라가 아니다. 그러니 마지막 시퀀스, 안전요원이 외국여자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걸 우린 정말로 믿어야 할 것 같다.
“개념미술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이디어와 콘셉트다. (중략) 모든 계획과 결정은 사전에 이루어지며, 작품 제작은 무심히 하는 것이다. 아이디어가 미술을 제작하는 장치가 된다.” - 솔 르윗
어쩐지 현재 홍상수의 작품 창작 방식과 맞아떨어진단 느낌이다. 뒤샹 이후 미술의 본성이 형태가 아니라 개념적 성격을 지닌 것이 됐단 전제는 너무나 유명해졌다. 그런데 이 반미학적인 움직임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가장 현대적이기도 하다. 게다가 영화라니, 영화는 시간을 전제로 하는 예술이기에 여기엔 덧붙일 것들이 있다. 단순한 개념미술의 아래에 두어서는 곤란하다.
누군가 내게 깐느가 홍상수를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깐느, 디스 이즈 송 포 유.”라 외치니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물론 우스갯소리다. 칸영화제는 영화를 제7의 예술로 끌어올린 나라에서 열리는 최고의 영화축제이다. 그들은 예술의 유행을 선도하는 감독들을 뽑아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물론 사회적 발언을 중시하지만 이보다 더, 영화의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자들을 전시하는 데 크게 치중한다. 일종의 오뜨꾸뛰르 패션쇼장이랄까. 홍상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것, 평론가로서 관객으로서 대단한 축복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