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 제국의 땅과 인구
오늘날 그리스와 튀르키에에 대당하는 몇몇 지역은 비잔티움 제국의 핵심 지역이었고, 이탈리아 남부 같은 몇몇 지역은 오랫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였으며,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북아프리카 등은 상당히 일찍이 제국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긴긴 역사에서 주변부로 남았다. 이 여러 지역의 자연환경은 방위, 농업체제와 생산, 교역과 왕래 네트워크 같은 비잔티움 제국의 다양한 측면을 결정지었다. 따라서 간략하게나마 이 특성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소아시아 서부와 남부 지역은 가장 비옥하여 인구가 밀집해 있고 농업용수를 제공하는 강이 여럿 있었다. 소아시아는 북쪽으로는 폰토스산맥(튀르키예어로는 슈말리아나돌루산맥 또는 쿠제이아나돌루산맥)으로, 남쪽으로는 토로스산맥과 안티토로스산맥으로 경계가 나뉘었다. 가장 거대한 중부 내륙 지역인 소아시아고원(튀르키예어로는 아나돌루고원)은 대부분 반건조 지대이지만, 카파도키아 같은 일부 지역은 농경과 정착 생활에 적합했다. 소아시아 북부와 남부는 산맥의 보호를 받았으나, 남동쪽에서 이란으로 이어지는 회랑 지대는 취약하여 침략자들은 대부분 이 지역으로 들어왔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맞은편에 있는 비티니아와 유럽 쪽에 있는 트라키아 수도의 배후 지역은 수도의 영향력으로 대도시권을 형성했다. 비티니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고원과 이어 주고, 트라키아와 로마 가도는 발칸반도와 이탈리아 내륙 지역을 이어 주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트라키아, 발칸반도를 연결한 것은 로마의 두 가도였다. 그중 하나인 에그나티아 가도는 마케도니아 지역을 가로질러 알바니아 연안까지 이어졌고, 여기에 해로를 통해 이탈리아와 연결되었다. 나머지 하나인 트라이아나 가도는 군대를 위한 도로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아드리아노플(지금의 튀르키예 에디르네), 세르디카(지금의 불가리아 소피아), 싱기두눔(지금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까지 이르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자체는 전략적으로 마르마라해를 통해 에게해와, 보스포루스해협을 통해 흑해와 연결되었다. 크름반도(지금의 크림반도)의 남부와 남동부도 대단히 비옥한 지역이었고, 흑해 서쪽 연안과 북쪽 연안은 다뉴브강, 드네스트르강, 드니프로강, 돈강을 통해 유럽 중부와 북부, 스칸디나비아가지 연결되었다.
그리스 연안과 소아시아 서부에 둘러사인 에게해는 비잔티움 제국의 내해였으며, 에개해의 많은 섬은 양안의 본토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리스 본토 대부분은 산악 지대이고 그렇지 않은 지역에는 평야가 산재해 있었다. 그 북쪽은 산맥들(서쪽으로는 핀도스산맥과 디나르알프스산맥, 북동쪽으로는 로도피산맥과 발칸산맥) 사이에 있는 거대한 회랑을 통해 헝가리평원과 이어졌다. 다뉴브강은 로마 제국 영토와 대초원의 다양한 유목민 사이에서 자연적 경계선 역할을 했다. 아드리아해 서부 해안은 남이탈리아와 연결되어 있다. 주로 칼라브리아와 폴리아가 차지하는 남이탈리아 지역은 11세기의 마지막 사반기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두 지역은 고대 도로망을 통해 로마와 이어졌다. 티레니아해와 접해 있는 시칠리아와 이웃한 칼라브리아의 위치는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시리아, 팔레스타인, 북아프리카 해안은 사막을 등지고 있는 해안지대(시리아의 경우 약 100~150킬로미터)에 정착지와 농업 생산이 집중되어 있는 등 몇 가지 물리적 공통점을 지녔다. 반면 경제적으로 볼 때 이집트는 사막에 둘러싸인 나일강과 삼각주가 중심이었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쌓인 풍부한 퇴적물 덕분에 이집트는 로마 제국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지방으로 꼽혔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증가하는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막대한 양의 곡물을 포함한 재정 수입의 3분의 1이상이 이 지역에서 나왔다. 또한 나일강은 남쪽으로는 지금의 아스완 지역과 지중해를 연결하고, 보조적인 가도를 통해 홍해로 나아가 다시 인도로 이어 주었다.
다른 지역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지만, 제국은 외교 활동과 종속국 군주를 통해 자주 영향력을 확장했다. 대표적인 예가 아르메니아와 캅카스이다. 두 지역은 비잔티움이 캅카스 너머 이베리아(지금의 조지아)[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한 유럽 남서부의 이베리아반도와 구분하기 위해 ‘캅카스 이베리아’라고도 부른다]와 같은 이웃 지역에 대한 관할권과 통제권을 둘러싸고 처음에는 페르시아와, 그다음에는 이슬람 제국과 마지막에는 튀르크계 집단과 충돌한 주요 무대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인구 통계와 취락 밀도는 모두 추정치일 뿐이다. 어떤 시기이건 정확한 수치를 산출해 낼 수는 없다. 인구 통계는 영토 변동에 따라 변하지만, 그 외에 역병(541~750년과 1347~1453년 이후까지) 및 전쟁 등의 영향도 받는다. 이 사건들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앗아 갈 뿐만 아니라 혼란과 불안ㅇ르 야기하여 출생율에 영향을 미치거나 대규모 이주를 촉발한다. 인구 추산에 대한 논의는 고대 후기 동지중해의 인구 증가세에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이 시기에는 도시와 농촌 모두 번성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페스트가 확산되기 전에 이미 인구가 40만 이상에 달해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또한 안티오키아(지금의 튀르키예 안타키아)는 15~20만 명, 알렉산드리아는 20~30만 명으로 그에 못지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로마시는 5세기에 심각한 인구 붕괴를 겪어 10만 명 수준으로 제국의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여전히 서구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페스트의 유행 그릭 ㅗ페르시아 및 아랍과의 전쟁은 인구 감소로 이어져 8세기 말에는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 6세기 후반부터는 다뉴브강 남쪽으로 슬라브인이 유입되었다. 불가리아를 제외하면 이 인구들은 점차 그리스도교인이 되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며 동화되었다. 이 시기 아르메니아인이나 슬라브인 같은 특정 인구 집단은 정치적, 군사적 이유로 여러 지역으로 다시 이동했다. 800년 무렵부터 느리기는 하지만 꾸준히 회복되었고 긍정적 추세는 14세기초까지 이어졌다.
제국은 영토를 상실했음에도 12세기 도시 확산을 통해 6세기 이전에 비견될 정도로 인구와 경제의 측면에서 번영을 누렸다. 아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다시 한번 대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1204년 충격적인 제4차 십자군 원정도 이 긍정적인 흐름을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14세기에 몰려온 페스트와 전쟁(내전과 광범위한 적의 침략)은 인구 붕괴를 초래했고 비잔티움 제국은 빠르게 쇠퇴햇다. 제국의 마지막 세기에는 다양한 집단이 유입되었는데, 1204년 이후 상당수의 서양인(대부분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이 그리스 각지에 정착했다. 그들은 알바니아인과 14세기 중반 이후 그리스로 이주한 튀르크인에 비하면 존재감이 희박했다.
이러한 인구 변화가 제국의 언어적 지형을 바꾼 것은 확실하다. 7세기 동쪽 영토를 잃기 전까지 비잔티움은 분명 다민족 제국이었고, 따라서 영토 내에서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제국이었다. 그리스어는 헬레니즘 시대 이후 지배적 위치에 있었지만 독점적은 아니어서 제국 각지에서는 여러 언어가 실생활과 문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는 시리아어가, 이집트에서는 콥트어가 쓰였다. 라틴어는 서방 제국에서 여전히 지배적 언어였고, 동방 제국에서도 최소한 7세기까지는 제국 정부, 특히 사법과 군대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에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중요한 공동체들이 있었으나, 라틴어는 전과 다름없이 주요 언어였다. 비잔티움 제국이 7세기 이후 동질적인 국가로 진화하면서 그리스어는 절대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적어도 11세기 이후 수많은 외국인이 대도시의 중심지, 그중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영구적으로 정착했다. 그들은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교회나 모스크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며 자신들이 사는 곳이 코즈모폴리턴적 특성을 갖는 데 기여했다.
전근대 사회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비잔티움 제국 사람 대부분은 자급자족하며 먹고살았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으며 식량을 생산해 냈고, 국가 재정 역시 여기에 의존했다. 농경은 기후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더욱이 가뭄 또는 호우가 장기간 지속되거나 두 가지가 잇따라 나타나면 농업 생산에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비잔티움 세계의 기후 상황은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안 지역은 덥고 건조한 여름과 눈이나 서리가 내리지 않는 온난한 겨울이 이어지는 온화한 기후로 특징지을 수 있다. 반면 산들이 바다를 가로막는 장벽 역할을 하는 본토에서는 눈이 많이 내리는 추운 겨울을 경험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농경에 유리한 해안 기후 지역에 모여 살았다. 그러나 인구 증가 시기에는 보다 많은 토지가 필요하므로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혹독한 환경 조건을 가진 한계 지역에 정착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는 비잔티움 세계 대부분의 풍광이 크게 달라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시기의 지형은 지금과 꽤 달랐다. 침식, 삼림 벌채, 항구의 실트화(모래보다는 가는 흙이 항구에 쌓이는 것), 현대의 대규모 수자원 프로젝트(호수와 습지의 준설이나 댐과 인공 호수 조성 등)가 주된 원인이다. 대표적으로 라벤타의 클라세항은 8세기에 말라 버렸다. 튀르키예 남부에 건설된 대규모 댐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여러 중요한 국경 도시들을 물에 잠기게 했다. 한편 조선, 광업, 제련, 난방을 위한 삼림 파괴는 달마티아 해안이나 키프로스, 현대 레바논 연안 지역을 크게 변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