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8월 22일 〈화씨 451〉을 쓴 미국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태어났다. 소설 제목의 화씨 451도는 섭씨 233도로, 종이가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이다. 여기서 종이는 책이다. 즉 〈화씨 451〉는 디스토피아dystopia를 가리킨다.
디스토피아는 안티 유토피아anti-utopia의 다른 말이다. 책을 만들고 읽는 일이 금지되는 사회는 어째서 디스토피아인가? 책이 없는 사회는 사상의 자유가 박탈된 전체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몬태그는 책 불태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fireman이다. 그는 자신의 일에 어떤 사회적 문제가 있는지 아무 개념이 없다. 그렇게 살던 중 세상만사에 호기심을 반짝이는 소녀 클라리세를 알게 되면서 생각과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은 인간의 본능이다. 호기심이 있었기에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진화를 거듭해서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하지만 권력은 민중의 호기심을 억누르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라틴어로 기록된 성경만 허용한 중세 기독교 권력자들, 성리학 이외 학문을 탐구하면 철저히 처단한 조선 시대 권력자들 등등 동서고금의 역사에는 그런 속성을 과시(?)한 권력자들이 무수히 등재되어 있다.
민중이 호기심을 발동하면 세상의 기득권이 무너진다. 기득권자들이 민중에 바라는 것은 아주 간명하다. 굶어죽지 않을 만큼 먹고 생명을 부지해 최저임금 이하 노동으로 기득권층의 이익에 복무하라는 것뿐이다.
이장손은 시한폭탄에 해당하는 비격진천뢰를 발명해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집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써놓은 기록은 없다. 이장손보다 훨씬 그 이름이 유명한 장영실도 노비 출신 어머니를 둔 탓에 출생과 사망 연도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므로 이제는 과학자가 이장손과 장영실처럼 기득권 위주의 역사로부터 매장될 일은 없다. 그럼에도 기이한 것은 21세기 대한민국 민중은 그렇게 되기를 자원한다는 사실이다.
현대는 화씨 451도 사회가 아니라 창의성을 기반으로 큰 명성과 재물을 얻을 수 있는 지식기반사회이다. 어째서 ‘책을 쓰는’ 과학자가 아니라 의사 또는 법률가 등 ‘책을 읽지도 않는’ 기술자가 되려고 하는가? 그런 누추한 생각 앞에 클라리세가 출현해 변화를 일으켜주어야 나라의 앞날이 밝아질 터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