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야담집 〈어우야담〉의 지은이로 유명하다.
본관은 고흥.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
사간(司諫) 충관(忠寬)의 손자이며 진사 당(檔)의 아들이다.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했으며,
1592년
수찬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평양까지 선조를 모시고 따라갔다.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명나라 관원을 상대하는 외교적인 임무를 맡아 일했다.
광해군 시절에는
북인(北人)에 가담했으나
인목대비 유폐(幽閉)에 찬성하지 않는다 하여 배척되었다.
그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은거하던 중
대제학에 추천되었으나, 거절했다.
이로 인해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그해 7월 현령 유응경이
광해군의 복위를 꾀한다고 무고하여
아들 약(瀹)과 함께 사형되었다.
그의 깨끗한 이름을 기려
전라도 유생들이
문청(文淸)이라는 사시(私諡)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에 봉양했다.
신원(伸寃)된 뒤
나라에서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운곡사를 공인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했다.
저서로는 야담집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이 있다.
고려공사 삼일(高麗公事三日)
이 속담이 처음 쓰인 예는
<세종실록(世宗實錄)> 권 73 정해조(丁亥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세종대왕께서 평안도 도절제사(都節制使)에게 전지(傳旨)하는 대목에 나온다.
인용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전지하기를
연대(烟臺)를 설비하는 것은
높은 데에 올라 멀리 관망하며 변경을 시찰하여,
유사시에 각(角)을 불고 포(砲)를 놓아 이를 사방 인근에 알리고는,
혹은 싸우기도 하고 혹은 수비하는 등,
만전을 기하는 이기(利器)인 까닭에,
여연(閭延),자성(慈城),강계(江界),이산(理山) 등 각 고을에
일찍이 화통교습관(火통敎習官)을 보내어
연대를 설치할 만한 곳을 심정(審定)한 바 있다.
그러나 신진의 이 무리들의 본 것이 혹시 대사를 그르치지나 않을까 염려되었으므로
즉시 시행하지 못했던 것이니,
경은 친히 가서 두루 관찰하고
그 가부를 생각한 연후에
기지(基地)를 정하여 축조하도록 하라.
대저 처음에는 근면하다가도 종말에 태만해지는 것이 사람이 상정(常情)이며,
더욱이 우리나라 사람의 고질이다.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라고 하지만,이 말이 정녕 헛된 말은 아니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이 속담은
'우리나라 사람의 성격이
처음에는 잘 하다가 조금 지난 후에는 흐지부지해진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용두사미격(龍頭蛇尾格)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말이다.
어떤 일을 거창하게 벌려만 놓았지
끝마무리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중단한다는 뜻이다.
그러나,오늘날 이 속담은
조변석개(朝變夕改)로 정령(政令)이 자주 바뀐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런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인조조(仁祖條) 유몽인(柳夢寅)의 <어유야담(於于野談)>에서 비롯된
'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명상(名相) 서애 유성룡(西涯 柳成龍)이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있을 때,
각 고을에 발송할 공문이 있어서
역리(驛吏)에게 주었다.
보낸 후 사흘 뒤에 그 공문을 다시 고칠 필요가 있어서 회수시켰더니
그 역리가 돌리지도 않고 있다가
고스란히 그대로 갖고 오더라는 것이다.
서애는
"사흘이 지나도록 왜 공문을 발송하지 않았느냐"고 꾸짖자,
역리 대답하기를
"속담에 조선공사삼일이란 말이 있어
소인의 소견으로 사흘 후에 다시 고칠 것을 예견(豫見)하였기에
사흘을 기다리느라고 보내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서애는
"가히 세상을 깨우칠 말이다.내가 잘못이다."
라고 역리에게 말하면서
고쳐서 반포했다.」
라고 되어 있다.
지금은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나
「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이나
다같이
우리나라 사람은 인내심이 부족하고
정령(政令)을 자주 변경한다는 뜻으로 똑 같이 쓰인다.
그러나 위의 두 인용문에서 쓰인 뜻은 각기 달랐던 것이다.
於于集(어우집)
조선 중기의 문신 유몽인(柳夢寅 : 1559~1623)의 시문집.
12권 6책(본집 6권 3책, 후집 6권 3책). 목활자본. 총 622면이다.
유점사(楡岾寺)에서 40여 책으로 간행된 초간본이 없어진 후
후손 금(琹)·영무(榮戊) 등이
원고를 수집·편차(編次)하여 1832년(순조 32)에 중간했다.
본집 시작 전에
정조가 내린 저자의 신원(伸寃)에 대한 하교인 〈어제판부 御製判付〉를 실었다.
본집의 권1·2는
시 500여 수를 총 25항목으로 나누어 실었다.
거처에 따라 시기별로 분류되어 있다.
권3은
서(序) 37편을,
권4는
서 29편, 기 13편을,
권5는
응제문 5편, 소차(疏箚) 5편, 서(書) 15편, 문 6편을,
권6은
묘도문(墓道文) 2편, 행장 1편, 애사 4편, 열전 1편, 제발(題跋) 8편, 잡저 6편,
유금이 쓴 발문(跋文), 제현비평문(諸賢批評文)을 실었다.
후집의 권1·2는
시 380여 수를 지역별·시기별의 총 18항목으로 나누어 실었다.
권3은
서 35편을,
권4는
기 19편, 응제문 8편, 문 4편, 서 6편, 제발 6편을,
권5는
묘도문 16편, 열전 6편, 애사 4편, 잡저 2편을,
권6은
잡지(雜識) 11편, 부록으로 기타 글 3편, 유영무가 쓴 후서를 실었다.
유몽인은
유학을 기본사상으로 지니는 사장파(詞章派)로서
시문이 우아하고 여유가 있다는 평을 받았으며
고시(古詩)와 고문(古文)을 숭상했다.
이 시문집에는
시가 총 589수 실려 있는데
그 중 칠언율시가 200여 수로 가장 많으며
오언절구는 9수밖에 안 된다.
30세 이전의 작품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암행어사로 이곳저곳을 순행하거나,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니면서 체험한 것을 그린 시가 많다.
문은
서(序) 101편,
기 32편,
서(書) 21편 순으로 많으며
기타가 73편이다.
이 가운데 〈유희경전 劉希慶傳〉은
미천한 출신인 유희경의 행적을 서술했고,
〈공졸변 工拙辨〉은
하층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호정문 虎穽文〉은
인간의 잔인성과 포악성을 호랑이를 통해 우화적으로 풍자했으며,
〈풍악기우기 楓嶽奇遇記〉는
금강산의 풍경을 의인화해 쓴 가전체 글이다.
1979년 경문사에서
〈어우야담〉과 함께 영인·간행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장서각,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