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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강원문인협회(한국문인협회강원지회) 원문보기 글쓴이: 황토방 남진원
강호시조문학 1집 평설문
⧯주변 이야기를 곁들여 보는 나의 파적(波寂)
-「강호시조문학」을 중심으로 -
1.아름다운 소통
( 1집을 탄생 시키며 )
회지 발간은 회원들이 시조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매월 한번 씩 만나 탁마절차의 길을 걸어온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값진 성과라고 생각된다.
어제는 강릉에 첫눈이 내렸다. 나는 오늘의 강호시조문학회를 위해 화려한 눈의 축제가 미리 펼쳐진 것이라는 즐거운 착각에 빠졌다. 또한 우리 시조단의 큰 기둥이신 선정주 선생과 박영교 시백께서 원고를 주신 점에 대해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앞섰다.
강릉은 예부터 문향이라고 하였다. ‘고산구곡가’라는 시조를 쓰신 이율곡 선생은 강릉에서 태어나셨다. 또한 1984년 8월 11일 경포대 <별과 시>라는 까페에서 김완성, 남진원, 구영주, 이훈, 곽영기 시인들이 모여 강원시조문학회를 결성하였다. 그 문학회가 지금은 강원시조시인협회로 우뚝 섰다. 강호시조문학회는 이런 문학의 터에서 출발하였기에 앞으로 더욱 큰 족적을 남기리라 확신한다.
강호시조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정서의 회귀의식과 아름다운 소통이었다.
문향이라는 강릉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미의식을 가꾸며 다양한 자기 세계를 넓혀 가고 있다.
강호시조문학회는 강릉을 중심으로 하여 강호의 물결 위에 시조라는 배를 띄웠다. 아직은 서툴고 그 공간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강호문학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차갑고 냉정한 마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돌아보고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 사회와 문학동호인을 돌아보며 시를 소통시키고 인간을 소통시키리라는 아름다운 믿음이 있다.
2. 이름에 얽힌 얘기를 시작하며
( 2집이 태어나며 )
사람들의 생활은 강이나 호수 근처에서 시작되었다. 물이 없는 곳은 생존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과 호수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조건이다. 강과 호수를 강호라 한다. 강호는 강과 호수를 뜻하는 말이지만 인간의 활동무대, 또는 인간세상을 비유적으로 쓰게 되었다.
중국의 황하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은 중국 대륙의 젖줄과도 같은 생명수이다. 황하는 중국 문명을 찬란하게 꽃 피우게 하였다. 황하의 남쪽은 넓은 들판이 있어서 땅이 기름지고 사람들의 중심 활동무대가 되었다. 사람이 활동하는 넓은 무대를 중원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의 황하 이남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다. 사람이 활동하기에 좋은 곳은 이익이나 권력을 위한 쟁탈전이 있기 마련이다. 중원에서는 이익과 권력 쟁탈을 위한 사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중원의 뜻은 정권을 다투거나 경쟁하는 곳 모두를 뜻하였고, 인간이 활동하는 넓은 무대를 ‘중원’ 또는 ‘강호’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강호시조문학회가 태동 된지, 6년이 되었다. 강호시조문학회의 ‘강호’는 ‘강과 호수’를 가리키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넓게는 ‘인간세상’을 뜻하기도 하고 ‘강과 호수처럼 생명력이 있고 아름다운 활동무대’를 뜻하기도 한다.
강호시조문학회에서는 2006년 12월에 <강호에 시조를 띄우다>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 째 회지이다. 첫 회지에 실린 회원들의 다양한 작품 면면(面面)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회원들의 작품에 담긴 의미와 이미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의도는 먼저 튼실한 내실을 기하자는 데 있고 두 번 째는 극히 일부지만, 내재된 작품의 성향과 그에 깃든 미적 형상을 음미하고자 하는데 있다. 세 번 째는 강호시조문학회원들의 작품 경향을 통해 강호문학회의 정체성을 헤아리는데 일조하지 않나 하는 희망 때문이다.
3. 창간호에 담긴 작품의 양상
가. 정서의 환기 작용, 생명감
진혜숙 시인의 작품
건반 위에 잠든 손, 침도 흘렸네
살랑살랑 바람이 악보만 넘겨놓고
콧노래 부르면서 엄마한테 일렀어요.
투덜투덜 화난 마음 엄마는 아셨나 봐
시원한 팥 빙수에 달콤한 엄마 사랑
음표들 건반 위에서 나비 되어 날아가요.
- ‘엄마 사랑’ -
엄마의 사랑이 넘치는 시조이다. 이 시조를 읽으니 문득 내가 어릴 때의 일이 떠오른다. 전깃불도 없던 그 시절, 정선의 시골 마을 어슴프레한 등잔불 아래에서 시험공부를 하다가 나도 몰래 엎드려 잠이 든 모습, 어머니가 꿀물을 타 주시던 모습과 아침이면 몸이 약하다고 방금, 닭이 낳은 따듯한 달걀을 먹이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한 편의 좋은 시는 정서를 환기 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걸 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첫 수 중장과 종장은 동시조의 맛을 느끼게 해 주는 대목이다. 둘째 수 초장의 화난 마음은 종장에 오면서 극적 반전으로 묘미가 잘 살아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단풍 구경>에서는 번뜩이는 시적 에스프리를 느낄 수 있다.
온 산이 며칠 전부터 빨간 불을 켜고 / 단풍 구경 오라고 아빠한테 전화했대요 / 달력은 커다란 숫자 세고 또 세어 봐요
- ‘단풍 구경’ 첫수 -
채정미 시인의 작품
시적 정서의 환기는 채정미 시인의 ‘닮았네’ 에서도 볼 수 있다. 내가 살던 고향에는 경찰관이 근무하는 ‘파견대’가 있었다. 파견대장은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어느 날 파견대장이 바뀌고 새로 온 파견대장은 어린 딸들이 둘이나 있었다. 그 딸들은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 같았다. 때가 묻어 새까만 손과 누런 이빨, 코에서는 가끔 누런 코가 흐르는 내 모습과는 달리 파견대장의 딸들은 예쁘고 아름다웠다. 항상 손은 뽀얀 아이스크림을 발라놓은 것 같고 지금 생각해보아도 눈동자는 이국의 소녀처럼 아름다웠다. 그 애들을 가까이 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었다. 참나무 뒤에서 약간은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는 다람쥐의 모습, 그 모습은 겁 많던 나를 닮았던 것 같다.
다람쥐 한 마리
빼곰히 나를 본다
참나무 뒤에서 까만 눈이 또르르
다람쥐 겁 많은 눈이 도토리를 닮았다.
- ‘닮았네’ -
한국 동시 100년을 맞았다.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많은 동시작가들이 어린이를 위한 좋은 동시와 동요를 발표해 왔다. 동시는 자유시와는 달리 ‘어린이’라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어린이가 읽고 느낄 수 있는 작품은 슬픔 보다는 즐거움을, 절망 보다는 희망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의 작품 <고추잠자리>는 희망을 그린 작품이어서 흥미와 꿈을 준다.
고추 잠자리 / 뱅글뱅글 도올다 / 빨랫줄에 앉았네 // 흔들흔들 바람 타고 / 누가 누가 높이 날까 // 잠자리 하나, 두울 셋 넷 / 하늘 나는 비행사 // 동글동글 원 그리며 / 하늘 높이 날아요 // 해님보다 별님보다 / 높이 높이 날아보자 // 잠자리 하나, 두울 셋 넷 // 하늘 그림 그리죠
- ‘고추잠자리’ -
조옥수 시인의 작품
두근거림과 환희로움은 인생에서 매우 귀중한 것들이지만 자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삶의 환희로움과 신비스러움을 발견한다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이다. 조옥수 시인은 자연을 통해 생명감으로 빛나는 언어를 분출시킨다.
봄 오는 길목에는 소리도 요란하다
목련꽃 뾰족뾰족 말문을 터뜨리고
시냇가 수양버들은 회전그네 두둥실
봄 오는 들판에는 빛깔도 화려하다
노랑나비 호랑나비 날개옷 자랑하고
병아리 풀밭 거닐다 제비꽃 악수하네
봄 오는 앞산 마루 산수유 노란 향기
땅 위로 새 잎처럼 쏙쏙 피는 흙내음
숨쉬기 쉬워진 봄날 솜쑥처럼 포근하다
- ‘봄의 마음은’ -
고려 시대의 문신 이색은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그의 시는 매우 정감있고 격이 높은데 ‘여강미회(驪江迷懷)’라는 시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는 여강의 아름다움에 빠져 시의 제목조차 ‘여강미회’라 하였다.
驪江一曲山如畵 여강에 비치는 산굽이는 그림과 같아
半似丹靑半似詩 반은 그림인듯 반은 시(詩)인 듯하다
강과 산의 환희로움에 빠진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반쪽은 그림이고 반쪽은 시라는 대목에서 빼어난 미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조옥수 시인의 시구에서도 이런 부분을 감지할 수 있다. 목련꽃이 뾰족 뾰족 말문을 터뜨리고 시냇가 수양버들이 회전그네를 탄다는 것은 얼마나 멋이 휘어지는 표현인가. 병아리가 풀밭을 거닐다 제비꽃과 악수한다는 표현도 감미롭다. 자연에 대한 경이와 환희로움을 표현 할 수 있다는 것은 시인의 권리이다. ‘권리 위에 눈뜨고 있는 자만이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말처럼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것은 시인이 독자에게 선물하는 최고의 권리이다.
이러한 미적 쾌감은 그의 또 다른 작품 <밤바다>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종일토록 품어 안은 햇발은 어디 두고
어둠이 느닷없이 사자머리 하고 와
밀림 속 숨찬 이야기 하얗게 퍼 나른다
- ‘밤바다’ 첫 수 -
중장과 종장에서 원시성에 기반을 둔 이미지의 대담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나. 향토적인 서정으로 소통하는 빛깔들
박종금 시인의 작품
방에서 조용히 하루를 보낸 후에도 청소를 할 때면 웬 머리카락이 그리 많은지, 떨어진 머리카락을 보면서 젊음이 가는 것과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알게 된다. 머리카락을 줍듯이 일상의 하루하루에서 크고 작은 아픔을 어쩌랴, 눈웃음으로 비춰볼 수밖에…
박종금 시인의 시조를 읽으면 나를 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아침 드라마를 잘 듣지 않는 편인데, 어쩌다 귀에 들리는 소리는 마음을 괜히 씁쓸하게 한다. 바람나서 이혼한 여자가 옛날의 남자를 찾아와 대드는 모습이 퍼뜩 밥을 먹다가 들려온다. 대뜸 말을 놓는다. “야, 이게 내 잘못만이냐? 네게는 책임이 없는 줄 알아?” 큰소리치는 여자는 얼마나 당당한지, 그 앞에 주눅이 든 남자의 목소리가 목 뒤로 들려왔다. ‘당연히 남자에게도 책임이 있겠지. 그런데 그 여자는 도대체 개선장군 보다 더 멋진 폼으로, 어째 그리 당당할까?’ 그 서슬에 나도 괜히 주눅이 들 정도다.
마루 위에
날고 있는
머리카락 숫자 만큼
빠지고
다시 나며
가꾸어 온 지난 날
물렁한
눈웃음들로
거울 삼아 비춰 본다.
- ‘청소를 하며’ -
‘물렁한 눈웃음’의 상징성이 눈에 들어온다. 거울삼아 비춰보는 삶의 되새김질이 요즘 들어 더 한층 필요한 때가 아니던가.
서투른 걸음으로
멋대로 지나온 길
머물던 자리들은
여운으로 마비되고
열심히
튀어올랐으나
제자리인 용수철
- ‘용수철’ -
어느 날 한 친구를 우연히 식당에서 만났다. 인생의 실패를 겪고 난 친구였다. 그 친구가 대뜸 나에게 하는 말이, “인생이 뭔지 아냐? 공수래공수거야(空手來空手去)” ‘공수래공수거?’ 그 친구의 입에서 그 말을 듣고 친구의 심정을 이해할 만 했다. 그러나 어디 그 친구 뿐이던가? 사는 게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이 어제 오늘의 말이 아닐진대. 그러나 그 말을 마음 깊이 새기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도 불과 한 자를 못 오르고 제자리가 되는 것이 용수철 아니던가. 삶도 늘상 앞을 향해 가지만 결국 제자리걸음이 아닐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제자리에서 맴도는 인간의 굴레를 생각해 본다. 근원적인 허무의식과는 또 다른, 이면을 그려볼 수 있다.
김광자 시인의 작품
멀리서도 가까운 듯
인적없는 산촌에
기다림 없어도
산 넘어 얘기 담아
채우고 비우는 법을
그림자로 두고 가네
- 달빛 -
김광자 시인은 얼마 전에 시조시집을 내었다. <봄이면 나비가 된다>는 시조집 말미에 내가 서평을 넣었는데 거기에서, 김광자 시인의 작품 세계를 말할 때에, 나는 쓸쓸함과 행복, 아픔의 언어들이 내면의 진실을 일깨워주며 영혼을 위로하는 목소리를 들려준다고 하였다. 강호시조문학회 1집에 발표된 그의 시조 중에서 ‘풍경소리’와 ‘달빛’은 그 색채가 쓸쓸함으로 물들어 있다. 쓸쓸함 속에서, 초연한 모습도 읽었다. 기다림이야 없어도 산 넘어 얘기를 담아오고, 비웠다가 채우는 법을 그림자로 알려주는 달의 모습에서는 어느 선사의 선지식을 보는 듯하다.
그의 또 다른 시조 ‘풍경소리’에서는 한 스님의 구도 모습이 나온다.
빛 바래진 산사에
속세 등진 스님 염불
참선에 가다듬는
소망은 무엇일까
추녀 끝
풍경소리는
낙엽처럼 날리네.
- 풍경소리 -
참선을 가다듬는 스님의 소망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서산대사는 임종 할 때에 말하길, 사람 마음속에 향기로운 꽃을 피우면 그게 바로 극락이라 하였다. 백양사에서 임종을 맞은 서옹 선사는 한 편의 시로 열반송을 남겼다. - 雲門日永無人至(운문일영무인지) / 白巖山頂雪紛紛(백암산정설분분)/ 一飛白鶴千年寂(일비백학천년적)/ 細細松風送紫霞(세세송풍송자하) -
하루 해는 길고 오는 사람은 없구나. 백암 산 마루엔 눈이 분분히 날리고, 백학이 나니 천년 적막에 잠기는데. 부드러운 솔바람은 노을을 마중하고 있다네.
시조 풍경소리를 음미하면, 이승의 끝자락에 서서 죽음을 맞던 노선사의 진솔함과 여유가 다시 떠오른다.
추녀 끝 풍경소리가 낙엽처럼 날린다는 공감각적인 이미지도 신선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시조 ‘풍경소리’ 에 이어 불교적 세계를 담고 있는 시인이, 권오선 시인이다.
권오선 시인의 작품
참나무 장작처럼 기 세워 밟고 온 길
황토빛 고드름처럼 여물기도 하였다지
한순간 걷어 들이니 바스러진 바람일세
너 자신을 알라던 선인의 그 말씀이
방울방울 녹아서 오래도 걸렸다지
지천명 담아둔 무게 비워내니 바람일세
- 바람이야 -
살아온 삶을 알아차리니 ‘모든 게 한 순간의 바람’이라는 깨우침이 주는 시구는 마음을 숙연하게까지 한다.
그래서 어떤 스님은 임종(臨終) 시(時)에 ‘가도 가도 제자리, 와도 와도 제자리’라는 게송을 남기지 않았던가. ‘바람이야’라는 시조에는 이런 ‘공(空)’의 철학이 담겨있다. 이 시조를 읽으면서 바람의 무정설법(無情說法)에 내 귀도 조심스럽게 열어 보고 싶다.
어린이 중에서 일부 어린이 마음이야말로 천국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요, 부처님 마음이, 그런 어린이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천진스럽고 귀엽고 때 묻지 않은 원시반본(原始返本:생명의 근본을 찾아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감)의 모습을 갖춘 마음이, 어린이 중에서도 일부 어린이 마음이다. 왜 일부라고 하느냐? 어린이가 모두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자리에 있다고는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마치 오염된 어른을 닮아 있다. 아니, 오히려 어른들 보다 영악스럽고 되바라지고 참으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욕망 충족의 욕구에서는 성인보다도 더욱 강하다. 이것도 일부 어린이라고 볼 수 있지만 매우 우려스러운 모습이다.
생판 모르는 집에 매일 들락거리다가
꽃 두 송이를 훔쳐 내 가슴에 심었다네
그 덕에 하얀 이빨이 시리도록 웃는다.
- ‘보육교사의 일기’ 첫 수 -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을 보고 어쩔 줄 모를 정도로 좋아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다. 글을 쓴 본인이 그런 순수한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권오선 시인은2004년 9월에 「바위가 되어 앉는 날」이라는 시집을 낸 바 있다. 당시 작품을 통해 ‘자연에 대한 사랑과 구도의 세계를 지향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이번에 발표한 시조들은 그런 맥락과 닿아 있고 그 사랑이 인간적인 아름다움으로 한 차원 끌어올려진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신완묵 시인의 작품
색다른 시, 술과 관련된 작품이 있다. 신완묵 시인의 시조 ‘고주(孤酒)이다.
어느 날 교동 사거리의 어느 카페에서 여주인이 신완묵 시인의 시조 고주를 술술 암송하는 것이 아닌가. 그 암송하는 목소리가 시조의 내용을 너무도 잘 전달하고 있었다. 고독과 어둠을 서로 비유하여 배치한 시조의 율격이 얼마나 멋들어진 일인지 암송을 들으면서 감동의 기쁨을 느꼈다.
고독이 하 맑기에 쟁반을 받쳐 놓고
술 한 잔 비쳤더니 적막이 춤을 추네
해 넘은 서녘 들판엔 어둠 저도 뒹굴고
상념의 노를 젓다 술잔이 보채기에
따르고 돌아보니 세상이 절로절로
혼자서 즐기는 이 맛 진미인들 비길까
한두 잔 걸친 술이 마음을 넘쳐 흘러
높낮이 다 버리고 평정이 되는구나
친구여 이 멋진 그림 어디 걸어 둘거나
술이란 홀로 마시는 재미가 으뜸이라 한다. 술을 마시면서 조용히 취하는 즐거움을 어찌 신선에 비길 수 있으랴. 술을 아는 자는 술의 진정한 즐거움을 모르나니, 술을 마실 줄 아는 자야말로 술의 진미를 맛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한 잔 두 잔 걸치면 술은 마음을 넘쳐 흘러, 높고 낮음을 없애고 즐거움의 세상인 평정을 만들어낸다는 술의 지혜를 그리고 있다.
술을 좋아하던 시인으로는 중국의 이태백을 모른 척 할 수 없다. 이태백은 달빛 아래 혼자 마시는 술이란 제목으로 쓴 시가 있다.
하늘이 술을 즐기지 않았다면 주성이란 별이 있을 리 없고 땅이 술을 아끼지 않았다면 주천이 있었겠냐고 하며 석잔 술에는 도가 통하고, 한 말 술로는 자연과 합일되고 취하여 얻은 즐거움은 깨어있는 자에게는 전하지 말라 했으니 가히 술의 경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술의 진미 안에는 인생의 진미도 들어있다는 것을 느꼈다.
인연이란 무엇인가? 인연(因緣)은 묶는 연유나 까닭을 말한다. ‘어찌하여 이리 된 것인가?’ 에 대한 물음이 인연이다. 세상사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 그 인연의 법을 삼장의 시조로 담아 멋을 자아내는 시조가 아래의 시조 ‘인연’이다.
허공을 조율하는 무심한 전선줄에
바람이 겨울 내내 화음(和音)을 걸어놓고
오가다 심심해지면 손가락을 튕기네
- ‘인연’ 첫 수 -
바람이 심심하여 튕기는 손가락은 우주의 울림이다. 그 우주의 울림을 무심한 전선줄에서 듣고 있다. 전선줄과 허공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인연의 무늬가 아름답다.
임춘자 시인의 작품
가벼움 속에 무거움이 있고 무거움 속에, 또한 깃털 같은 가벼움을 느끼는 시조, 임춘자 시인의 작품 ‘울타리’이다. 한국의 서정이 녹녹하게 담겨 있다.
수숫대
얼기설기
비바람 막고 서서
드는 소식
열어주고
나는 허물 가려주네
거친 손
짓무른 가슴
맨발로 선 아버지
- ‘울타리’ -
한국의 어머니들이 겸손과 순종의 미덕을 보였다면 한국의 아버지는 바람을 막고 허물을 가려주는 따뜻한 흙벽 같은 모습이다. ‘울타리’에 나타난 정경은 한국의 아버지이다. 이 시를 읽으면 좋은 일은 자랑하고 허물은 감싸주며 마음을 푸근하게 데워주는 아버지의 따뜻함을 만난다.
그가 선보이는 작품은 한국적인 냄새가 흠뻑 스몄다. 다음의 작품 ‘감자바위’에서는 토속적인 정취와 웃음이 물씬 물신 피어난다.
낟알은 떨어지고 보리는 안 여물고
두럭 밑 뒤져 찾던 춘궁기 알 감자
구박에 넣어 주무르면 저절로 알 감자
밥솥에 한두 개 앉혀 먹는 감자밥
고등어 된장찌개 곁들여 먹으면
무더위 삼복 지날 때도 입맛 하난 산다오
감자밭 먹고 사는 강원도 사람들
부아난 일에도 내색 없이 둥글둥글
여간한 호삿일에는 웃을 줄도 모르지
- ‘감자바위’ -
감자의 특성을 표현하면서 강원도 사람의 이미지를 잘 나타낸 작품이다. 문득 어릴 때 시골에서 감자서리를 하던 일이 떠오른다. 저항시인이라 불리어지는 윤동주가 ‘감자’에 관한 동시를 지은 내용에도 나오지만, 입술이 꺼멓게 된 아이들이 둘러앉아 감자를 구어 먹던 일이 떠오른다. 여름 냇가에서 멱을 감고나면 해는 중천인데도 배는 빨리도 고팠다. 이웃집 밭에 있는 감자를 캐어 돌무더기를 만들어 감자를 익히던 때가 그립다. 감자를 몰래 캐어 서리를 해 먹어도 어른들은 모른 체했다. 이것이 강원도 사람들의 인심이고 감자바위다. 강원도의 특색이 살아나는 향토성 짙은 작품이라서 더욱 눈에 들어왔다.
서옥섭 시인의 작품
사물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은 우아한 사물의 속성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 기쁨은 한 편의 시로 다시 태어난다. 이미지의 번뜩임은 환희의 기쁨으로 솟구쳐 오른다. 서옥섭 시인의 개화(開花)는 이런 이미에서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단시조의 호흡에 맞는 단아함과 절제미를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매화와 팝콘은 매우 이질적이지만 너무도 잘 어울려 새로움을 연출한다. 시인의 감성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얘기다.
대숲 흔드는
바람소리에
새벽 잠 설쳤는데
매화나무 가지 끝에
팝콘 몇 개 앉아 있네
엊그제
춘설 날리더니
저기 모두 모였구나
- ‘개화’ -
또 단시조 ‘삼천포 선착장에서’의 작품은 설렘과 즐거움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그려져 있다.
삼천포 해상 공원
유람선 선착장엔
八道에서 모인 바람
뱃고동은 설레이고
수묵화 이쁜 섬들은 사투리로 앉았더라
- ‘삼천포 선착장에서’ -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을 한 줄 ‘바람’으로 시원스럽게 처리하였다. 또한 뱃고동의 설렘으로 이어지게 함으로써 생동감 있는 작품이 되었다. 더 나아가 종장의 처리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펼친 것처럼 화려하다. 쉽고도 재미있으며 감흥을 주는 작품이다.
최종훈 시인의 작품
바람을 잡고 서서 용케도 뿌리 틀어
만 시름 몸에 감고 질긴 삶 살아온 너
벼랑에 우뚝 선 모습 천기(天機)마저 서렸다
풍상(風霜)의 모진 손길 할퀴고 씻기우며
물길에 설움 풀어 견뎌온 기암절벽(奇巖絶壁)
태고(太古)의 진한 숨결이 안개 속에 묻힌다
물줄기 연화담(蓮花潭)에 푸른 옷 잠겨 놓고
흰 알몸 한 걸음에 면경대(面鏡臺) 앞에 서니
구름에 열리는 하늘 햇살마저 정겹다
흩어진 함성 모아 속살에 담아가며
머무른 십자소(十字沼)에 지친 몸 뒤섞은 채
천년을 한결 같은 길 떠나가는 물과 소리
- ‘소금강 계곡’ -
풍류(風流)라는 말은, 자연을 벗 삼아 스스럼없이 머물고 흐르는 것을 말한다. 신라 시대의 화랑들은 이런 풍류를 자유롭게 실천하였다. 그래서 화랑도를 풍류도라고도 하였다. 풍류를 안다는 것은 주색잡기에 빠진 인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과 세상의 흐름을 배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금강 계곡’의 시조를 읽으면 소금강의 바람소리, 물소리를 듣는 듯 자못 싱그럽다.
벼랑에 우뚝 선 소나무와 기암절벽의 안개, 연화담의 물소리와 바람 소리가 내는 음률은 신비롭기 만하다. 청정한 물소리에 10년만 귀를 기울여도 신선 세계에 사는 신인(神人)이 된다고 한다.
시조를 음미하고 있으면 자연의 풍경과 그들이 빚어내는 천연의 음색에 이끌려 절로 소금강의 어느 계곡에 이끌려온 기분이 들 정도로 상쾌한 맛이 난다.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에 더하여, 풍상을 견뎌내며 이루어낸 완숙미의 절정은 이 작품을 단연 돋보이게 한다. 오래 세월을 통해 이루어낸 아름다움! 갖은 역경과 아픔을 딛고 살아온 우리네 인생의 또 하나 자화상이 아니겠는가. 넷째 수 종장은 압권이다.
실타래 엉킨 인연 물레로 풀어가며
베틀에 걸어 두고 북으로 삼베 짜듯
한 세월 살아온 날이 눈물이요 꽃이다
꽃가마 타고 있던 연분은 깊이 묻고
매듭진 댕기 풀어 돌탑에 걸어 두고
맞잡은 따스한 손에 맺혀드는 땀방울
두레박 퍼 올리듯 가난을 벗겨 가며
한 그릇 물이라도 나누어 마셔 가며
구수한 장맛 드리는 백겁(百劫)의 나날들
궂은 일 괴로운 일 정(情)으로 삭히면서
양지 녘 꽃밭에는 초롱꽃 한 두 송이
밤마다 불 밝혀 들고 파랑새를 맞는다
- ‘부부의 연(緣)’ -
진솔한 부부의 정을 ‘한 세월 살아 온 날이 눈물이요, 꽃이다’ 라고 하였다. 정이 담긴 감동적인 작품이다. 전통적인 혼례와 그 속에 깃든 철학은 그 어떤 아름다움 보다 더 빛난다. 요즘 젊은 세태에서 많이 보이듯,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이혼으로 치닫고 있는 날렵한 가치관에 비추어 한 번 쯤 되새겨볼 만한 글이 아니고 무엇이랴.
4. 글을 맺으며
강호시조문학회 1집에는 다양한 목소리와 색깔로 그려진 언어의 색채가 조화를 이룬다.
몇 분이 쓴 아동문학 작품인 동시조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람과 자연에 대한 ‘따뜻함’이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친근함은 정서에 대한 새로운 눈 뜸으로 이어지고 그 눈 뜸은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하듯, 희망의 미의식에 닿아 있다.
시조에서 보이는 모습은 여유롭고 넉넉하다. 하나의 주의나 이념으로 모인 조직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유로운 시혼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공통분모를 이루는 것은 자연에 대한 친밀함과 정과 사랑, 생활 속에 넘치는 삶의 에너지였다. 야성적인 미의식을 보는가 하면 향토적인 서정성은 마치 잘 익은 과일을 보는 듯하다.
시는 어찌 보면 삶의 되새김질이다. 현재성에 머무르는 시선은 어느새 과거의 한 방향에다가 초점을 맞추고 눈물 같았던 의식을 들고 응시한다. 끝내 찾아내는 것이 무위(無爲)의 바람일지라도 후회하지 않고 조용히 앞을 향해 딛는 진실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진리의 길을 향해 무소의 뿔처럼 가라고 한 말처럼, 아름다운 꽃은 자신의 모습을 보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 하지 않는다. 흐르는 강물이 먼저 알아 물속에 담아두고, 바람이 절로 스치며 가는 것을….
꽃이 가지마다 각각의 사랑을 수놓듯이 작가가 수놓은 영혼의 색감을 소통시키는 곳, 순수와 따뜻함이 만나는 곳, 여기가 강호시조문학인들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세상에 이럴수가?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