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蔣介石) 전 대만 총통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 여사가 23일 오후 5시쯤 106세를 일기로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대만 외교부가 24일 발표했다.
청나라시대와 민국시대, 대만 현대사 등 3세기에 걸쳐 세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그는 파란만장한 중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이었다. 그러나 쑹여사는 수년 전부터 암 등 각종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겪으며 투병생활을 하는 등 ‘인생의 황혼기’를 쓸쓸하게 보냈다.
1898년 청 말기 중국 3대 부자로 꼽혔던 재벌 쑹자수(宋嘉樹)의 6남매 중 셋째딸로 태어난 쑹여사는 현대식 교육을 강조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11세의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을 갔다. 이후 줄곧 미국에서 공부해 조지아주 웨슬리대학을 졸업했다. 1920년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기독교여자청년회 활동을 했으며 영화심사위원회 등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27년 서른살이 되었을 때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장이자 아이 셋 딸린 유부남인 장제스와 사랑에 빠졌다. 결국 그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제스와 결혼했다.
장제스의 동반자가 된 그는 장제스가 서구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왔으며, 10년간 장제스를 따라다니며 중국 전역을 누볐다. 영어가 유창했던 그는 장제스의 외교 고문을 맡아 구미 각국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쑹여사는 특히 30년대 일본 침공을 비난하는 중국의 입장을 세계에 알리는 외교관이자 대변인으로서 서방세계에 이름을 날렸다. 그는 장제스의 세력을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중국 정치에 깊이 개입했으며, 서방은 그를 ‘중국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불렀다.
36년 시안(西安)에서 장제스가 장쉐량(張學良) 등에게 감금되었을 때 그는 직접 시안으로 달려가 사태 해결에 나서 남편을 구출하는 과감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43년에는 장제스를 따라 카이로회담에 참석해 통역을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여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졌다. 49년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毛澤東)에 패해 대만으로 밀려났을 때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그는 대만으로 돌아오는 용기를 보였다. 그 당시 그는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치며 국민당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74년 국민당 10기 5중전회에서 ‘중산훈장(中山奬章)’을 받았으며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인물로 등장하기도 했다.
75년 장제스 사망 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그는 몇차례 대만을 방문한 적이 있을 뿐 계속 칩거해왔다. 그는 말년에 화필을 잡는 등 그림에 애착을 보이기도 했다. 2000년 1월 뉴욕에서 서화전을 열기도 했는데 당시 개막식에 등장한 것이 대중들에게 보인 마지막 모습이었다.
쑹여사는 평소 음식에 매우 주의하여 반찬을 많이 먹고 밥은 적게 먹었으며 독실한 종교생활을 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극복했다. 또 항상 무릎과 다리를 주무르면서 혈액순환을 시켜주었다. 주변에서는 이런 그의 일관된 생활습관이 장수비결이 아니었겠느냐고 추측했다. ‘서안사변’ ‘중국의 평화와 전쟁’ 등의 저서를 남긴 그는 ‘영원한 대만의 퍼스트레이디’였다.
쑹여사의 큰언니 아이링(靄齡)과 작은 언니 칭링(慶齡) 역시 각각 당대 최고 재벌 쿵샹시와 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孫文)과 결혼, 화제를 뿌린 여걸들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아이링은 돈을 사랑했고, 칭링은 조국을, 메이링은 권력을 사랑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첫댓글장개석의 대만은 손문의 삼민주의를 계승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민생주의 지권평균의 경우, 존스튜어트 밀방식. 미래 증가가치만을 회수하는 방식을 부분적으로 채택했습니다. 이점 손문이 적용했으나 그당시 중국현실(지가가 매우낮음)을 고려한 방식인데, 이후 조지이론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첫댓글 장개석의 대만은 손문의 삼민주의를 계승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민생주의 지권평균의 경우, 존스튜어트 밀방식. 미래 증가가치만을 회수하는 방식을 부분적으로 채택했습니다. 이점 손문이 적용했으나 그당시 중국현실(지가가 매우낮음)을 고려한 방식인데, 이후 조지이론으로 설명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