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읍성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골목길
한 두 사람 지나가기 어려울만큼 좁아도
아스팔트 곧은 길 보다 사람냄새 ‘물씬’
점포 88개나 있던 1960년대 성남시장엔
악극단 보며 즐거웠던 유년의 추억 서려
지난 12일 400여 년 전 무너진 울산읍성의 흔적을 따라걷는 행사가 마련됐다. 성벽이 있었던 바로 바깥쪽 길이 골목으로 형성된 것. ‘울산읍성 둘레길’로 명명된 골목길은 중구 원도심 내 성남동, 옥교동. 북정동, 교동에 걸쳐져 있었다.
울산읍성은 조선 성종8년 1477년에 축성됐다. 실록에 따르면, 높이가 15자, 둘레가 3639자였다. 당시 읍성 길이를 재는 자(尺)는 포백척(바느질자)을 썼다. 1자가 대략 46.73㎝이니, 이에 3639자를 곱하면 성벽 길이는 대략 1.7㎞ 정도로 유추된다.
이 읍성은 임진왜란 이후 남해안 각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군들이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수난을 겪었다. 왜군들이 지금의 중구 학성공원에 도산성이라는 왜성을 축조하면서, 울산읍성의 석재들을 자기들의 성을 쌓는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벽을 아무리 뜯어 갈 지언정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왜군들은 옮기기에 편한 윗쪽 작은 석재 위주로 활용을 했고, 아랫 부분의 큰 주춧돌은 대부분 그대로 남겨두었다. 무너진 읍성은 그렇게 무너진 채로 수 백년을 버텨내려왔고, 그 때의 흔적에 대한 부분은 후대인 영조 대에 편찬된 울산읍지 ‘학성지’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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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회 울산중구거리문화축제(18일~20일)의 일환으로 지난 12일 울산읍성 둘레길을 걷는 원도심 골목투어가 개최됐다. 울산연구회 서상용 회장(위 사진 왼쪽)과 울산대 한삼건 교수가 시민들과 함께 비좁은 골목을 걸어가고 있다. |
◇‘가학루’ ‘솟을삼문’ 기록으로만 존재
울산대학교 건축대학 한삼건 교수가 이끈 탐방길에는 50여 명의 일반시민들이 동참했다.
탐방의 출발점은 울산동헌 정문 앞이었다.
옛 동헌은 원래 두 개의 문을 통과해야 중심건물인 반학헌(伴鶴軒)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정문은 한 개만 세워진 상황.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에서 확인되는 가학루(옛 동헌 정문·2층구조 누문형식)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단층 3칸 문으로만 복원됐다.
한 교수는 “정문 안쪽으로 하나 더 세워져 있었다는 ‘솟을삼문’도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며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는 동헌의 복원과 정비작업이 차후 진행될 때는 보다 명확한 고증절차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반학헌, 가학루 이외에도 인근 객사에 해당하는 학성관과 하관루까지, 이 일대 옛 건물에는 유난히 학과 관련한 명칭들이 많았다”며 “고려조 박윤웅의 설화가 조선조까지 뿌리깊게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울산 박씨의 시조인 박윤웅은 경순왕 4년(930년)에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뒤,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설명을 뒤로 하고 참가자들은 우체국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교동 쪽으로 거슬러 올라간 뒤 읍성의 북문지(추정)에서 방점을 찍고, 양사골을 거쳐 내려와 서문지와 남문지를 차례로 거치면서 약 2시간여 가까이 탐방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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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읍성 북문지에서 서문지에 이르는 교동 일원 골목에는 인적이 드물고 차량 운행이 힘든 골목들이 많다. |
◇북문지 인근, 공터와 돌담길
경로를 따라 북문지에서 서문지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옹기종기 작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어느 귀퉁이(터울림길)를 돌자 파, 부추는 물론 늙은 호박까지 넝쿨째 드리워진 작은 텃밭이 나왔다. 이 구역에서 유일하게 공터로 남아있는 곳이었다.
오랜 기간 울산읍성을 연구해 온 한 교수는 “이 땅을 파게되면 분명히 읍성이나 집터 등 옛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지만, 발굴조사는 아무래도 무리여서 아쉽다”고 말했다. 뭔가가 나올 듯한 감이 있어 일전에 한 번 시도를 해 봤지만, 선대로부터 이 땅을 물려받은 자손들 숫자가 엄청난데다 그 마저도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바람에 동의서를 받는 일이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행은 직각삼각형 모양으로 생긴 노란집(한결5길)에서도 잠시 멈췄다. 한쪽 면이 심각할 정도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집 앞에서 한 교수는 “울산읍성 중 치성이 있던 부지에 집이 들어서게 되면서 이같은 모양새가 되었을 것”으로 유추했다. 치성은 성벽의 바깥쪽에 덧붙여서 쌓는 벽으로,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관측하는 용도로 활용됐고, 또한 적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는 기능을 담당했다.
◇대규모 연못을 메워 성남시장으로
으슥한 골목에 남은 흙담을 지나자 탐방로는 서문지로 추정되는 장춘로 빅세일마트로 이어졌다.
한 교수는 “이 일대는 ‘옹수골’로 불렸는데 아마도 ‘옹성골’이 와전된 것 같다”며 “옹성이란 성문을 방어하는 성으로, 반원형이나 디귿자 모양이 많았다”고 말했다.
서문지에서 시내방향으로 들어가는 초입은 지금은 복개된 우교천(강정도랑)이 흐르던 곳으로, 원래 그렇게 흐르던 물길은 더 아래쪽에서 큰 연지를 이뤘다고 한다. 울산읍성이 남아있던 조선조의 이야기다.
한 교수는 “현 국민은행과 성남시장도 원래는 대규모 연못이 있었던 자리를 일제강점기 때 매축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어린 시절을 이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지금처럼 성남프라자로 건축물이 세워지기 전, 장터시절의 성남시장을 기억했다.
그는 “1967년 울산울주향토사에는 1960년대 성남시장에는 모두 88개의 점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며 “칼국수나 부침개를 사먹던 기억이 새롭고, 우시장이 있던 시절이며, 악극단 공연을 보면서 즐거웠던 유년의 추억이 서려있다”고 말했다.
글·사진=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참조= 울산택리지(한삼건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