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예찬
편 영 미
“아! 가능할까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지난봄 어느 도서관에서 시각장애인 시 낭송 수업을 의뢰해 왔다. 문화 취약 계층인 장애인에게 양질의 독서 문화 경험을 제공해 정보 격차를 줄이고 문화 향유 기회 확산을 위해 추진하는 독서 문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사업에 선정된 시각장애인협회에서 시 낭송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했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 참고할 만한 자료는 없다고 한다. 막막하다.
4월 도서관 담당자와 함께 수업 일정과 방향 등을 논의하기 위해 시각장애인협회를 방문했다. 인사를 나누고 안내하는 자리에 앉았다. 몇몇 시선이 허공을 맴돌다 가뭇없이 사라진다.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밝고 활기차 보인다.
수업 일정은 5월 둘째 주 금요일부터 시작해 일주일에 한 번 12차시로 진행하기로 했다. 이어 수업 진행 방법에 대해 의논했다. 먼저 시 자료를 점자로 제작할 수 있는지, 녹음해 카톡으로 보내면 듣는 것이 가능한지 등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협회 회장님은 그것보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먼저라고 한다.
시각장애인이라고 해서 다 깜깜한 세상을 사는 전맹이 아니며, 점자 또한 다 읽을 줄 아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점자로 된 핸드폰 사용에도 자유로운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다고 했다.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수강생은 시 낭송에 관심이 있고 다른 배움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는 분들이라 한다. 살면서 사고로, 병으로 얻은 후천성 장애로 장애등급도 다 다르단다. 이런저런 수강생들의 처지를 들으며 꼭 수업을 이끌어 보고 싶은 소망이 생겼다.
수업안을 짜고 낭송할 시를 찾는 데 정성을 쏟았다. 처음엔 어떤 시로 다가가면 좋을까? 짧고 쉬우면서도 희망과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 읽고 외며 리듬감이 잘 느껴지는 시들을 고르기에 애썼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 1·2·3’, ‘선물’과 양광모 시인의 ‘무료’, ‘인생 예찬’. ‘참 좋은 인생’ 등을, 중반부터는 길이가 좀 있는 김용택 시인의 ‘참 좋은 당신’,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 김춘수 시인의 ‘꽃’을 선정했다.
첫 수업이 있는 날, 싱그러운 초록의 향연이 시작되는 길을 달려 도서관으로 갔다. 강당에는 수강생과 도서관 담당자와 협회 봉사자들을 포함해 20여 명이 모였다. 분위기는 들뜬 듯하면서도 화기애애하다. 자기소개 시간이다. 눈시울 붉어지게 하는 사연들을 풀어 놓기도 하고 이름으로 재미있는 삼행시를 지어 웃음꽃을 활짝 피우기도 했다. 그중 한 분이 “제 눈은 우주여행 중이에요. 처음엔 원망도 많이 했지만 이젠 괜찮아요. 제가 우주의 별이 되는 날 모두 만날 수 있겠지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흘렀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도서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흐릿함이 캄캄함의 눈이 되어 안내하는 모습은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막상 수업을 시작하고 보니 걱정은 쓸데없는 일이었다. 모두 시 외는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수업 자료 공유를 위해 만든 단체 카톡에 시를 녹음해 올려주면 서너 편의 시를 일주일 만에 뚝딱 외워온다. 놀라웠다. 자꾸 잊어버리는 기본 호흡과 잘못된 발음들은 그때그때 일러 준다.
수업을 진행하며 생기는 문제점들은 바로바로 수정 보완했다. 마이크 소리가 불편한 분을 위해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았다. 또 핸드폰 사용이 어려운 수강생은 휴식 시간을 이용해 개인 녹음기에 따로 녹음해 주었다. 큰 글씨로 시 종이와 영상 자료도 준비했다.
수업 날은 30분 일찍 도착해 넓은 강당을 동요 ‘꽃밭에서’로 가득 채운다. 동요 부르기는 발성과 발음 연습하기 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기에도 좋기 때문이다. 한 분씩 도착할 때마다 달려가 자리로 안내하며 손을 꼭 잡고 반갑게 맞이한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아채고 금세 친숙하게 대해 준다. ‘선생님’하고 불러 가까이 다가가면 비타민 음료며 사탕, 초콜릿, 푸성귀들을 손에 쥐여 주신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후반부로 접어들며 30분씩은 발표회 준비를 했다. 한 편씩은 아쉽다며 두 편씩 발표하고 싶다는 말에 마음이 뿌듯하다. 낭송할 시와 낭송하는 사람의 분위기에 맞는 배경영상을 만들고 배경음악도 찾았다.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분이 어떤 배경이 나오는지 조곤조곤 설명해 주는 모습이 아름답다. 멋진 무대를 만들어주고 싶다. 무대까지 동선도 맞춰보고 마이크를 잡고 실전처럼 연습했다. 장애를 이겨내며 꽃중년, 꽃노년을 보내는 분들이지만 여름 사과처럼 싱그러워 보인다.
도서관에서는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좀 더 나은 장소에서 발표회를 할 수 있도록 근처 아늑한 카페를 빌렸다고 한다. 시각장애인협회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색소폰, 플루트 연주자와 기타 노래는 회장님이 맡기로 했다. 덕분에 시와 노래 음악이 함께 하는 풍성한 무대가 준비되었다.
7월 말 폭염 속에서도 가족과 지인들로 카페 안이 가득 찼다.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라며 모두 근사하게 차려입었다. 장사하는 아들 내외가 오후 장사를 쉬고 온다며 멋지게 낭송하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다는 분, ‘선생님 제 모습이 괜찮은가요?’ ‘선생님, 시가 생각이 나지 않으면 어쩌지요?’ 얼마나 떨릴까? 긴장을 풀어주려 애를 썼다.
옷매무시를 매만져주고 음악이 흐르면 한 분 한 분의 손을 잡고 무대로 안내한다. 맞닿은 손에서 설렘과 떨림과 행복이 건너온다. 무대 중앙으로 가 자리를 잡고 마이크 위치를 맞춰준다. 손을 꼭 잡았다가 놓으며 시작하라는 신호를 준다. 시와 하나 된 낭송은 무대에서 더 빛을 발했다. 낭송이 끝날 때마다 아낌없는 갈채가 쏟아졌다. 작은 실수에는 더 큰 격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모두가 감탄한다.
삶에서 예기치 못한 장애를 만나 이겨내며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분들의 낭송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었다. 무엇보다 늘 그렇듯이 서로를 배려하고 의지하며 챙기는 애틋한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발표가 다 끝난 후에도 아쉬움이 남아 여러 편의 시를 합송했다. 입에서 쏟아지는 시어들은 반짝이는 별이 되어 빛나고 울렁출렁 은하수가 되어 흐른다. 그간의 시간도 함께 흐른다.
살아있어 좋구나 오늘도 가슴이 뛴다
가난이야 오랜 벗이요 슬픔이야 한때의 손님이라
푸르른 날엔 푸르게 살고 흐린 날엔 힘껏 산다
-양광모 「인생 예찬」
“선생님, 참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살아있어 좋구나! 오늘도 가슴이 뛴다.
첫댓글 가슴이 뭉클해지고 따뜻한 감동의 물결이 잔잔히 일렁입니다.